양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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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석일은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작가로, 2024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택시 운전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광조곡』으로 작가 데뷔했으며, 이후 『피와 뼈』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 역사 인식, 사회 비판을 다루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일 관계와 북한 문제를 비판하며, 일본 정부의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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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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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본어 이름 | 야나가와 마사오 (梁川正雄) |
본명 | 양석일 |
출생일 | 1936년 8월 13일 |
출생지 | 일본 오사카시 |
사망일 | 2024년 6월 29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국적 | 조선적 |
직업 | 소설가 |
언어 | 일본어 |
작품 활동 | |
장르 | 소설 |
주요 작품 | 『택시광상곡』 『피와 뼈』 『어둠의 아이들』 |
수상 | 야마모토 슈고로 상 |
가족 | |
영향 | |
웹사이트 | |
기타 | |
코토뱅크 정보 | 梁石日(야마 소기루)란? 의미와 사용법 |
동아일보 정보 | 『피와 뼈』 |
2. 생애
오사카시 이가이노(猪飼野)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제주도에서 오사카시로 이주해왔다. 전후, 집안은 어묵 제조로 성공했지만, 아버지는 곧 애인을 만들고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가출했다.[5]
오사카부립 고쓰고등학교 정시과정 재학 중에 우치나다 투쟁에 참가했다. 1954년에 이가이노에서 시인 김시종을 만나[5] 그가 주재하는 동인지 『진달래』에 시를 투고하며 지도를 받았다. '양석일'이라는 필명은 "돌 위에도 3년, 해가 비칠 때까지 끈기 있게 쓴다"는 의미로 김시종이 지어준 것이다.[5] 작가로 성공한 후에도 김시종과의 교류는 계속되었다.[5]
이후 구두가게, 고철 가게, 양복점 직원 등을 거쳐, 친부에게서 300만엔을 빌려 인쇄회사를 경영했지만 실패했다. 센다이로 도망쳐 커피숍의 고용 매니저가 되었지만 빚이 더 늘어나 결국 상경했다. 신주쿠에 기숙사가 있는 택시 운전사로 일하던 중, 병상에 있던 친부로부터 가업을 이을 것을 요구받았지만 거절했고, 친부는 곧 전 재산을 기부하고 북한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병사했다.
신주쿠의 스낵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택시 손님과의 대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듣고 있던 출판 편집자에게 집필을 권유받아 『광조곡』(단행본 출판 시 제목은 『택시 광조곡』)을 써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1993년 최양일 감독에 의해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로 영화화되어 크게 성공했다. 택시 운전사 시절 두 번의 사고로 크게 다쳐 은퇴한 후에는 물품 판매업을 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1994년 오사카 포병공장 터를 무대로 재일 한국·조선인 고철 절도단 '아파치족'의 활동을 그린 『밤을 걸고』가 직목상 후보(1995년 상반기)가 되었다.[6] 1998년 친부를 모델로 전쟁 중 전후의 탐욕, 호색, 망집에 사로잡힌 남자의 영광과 몰락을 그린 『피와 뼈』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하고,[7] 같은 해(상반기) 직목상 후보가 되었다.[6]
2002년 태국을 무대로 한 유아 매춘, 인신매매, 장기 매매를 그린 『어둠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사카모토 준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2008년에 공개되었지만, 방콕 국제 영화제에서의 상영 중지 등 태국에서 강한 반발을 불렀다. 일본에서도 인터넷 등에서 논픽션 영화로 홍보된 것에 대해 반발이 있었다.[8]
2008년 12월 NHK 교육 텔레비전 「즐기며 배우기 인생의 걷는 법」(전 4회[9])에서 자신의 생애와 문학적 배경, 현대가 안고 있는 어둠을 이야기했다. 그중에서 자작 『여름의 불꽃』에서 모티브로 삼은 박정희 암살 사건을 모의하고 영부인을 사살한 재일 동포 문세광에게 강한 공감을 느꼈다고 발언했다.
2024년 6월 29일 오전, 도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였다.[10]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온 김시종은 부고를 접하고 "진정한 재일(在日)이 만들어낸 시인 작가의 자유인이었다"라고 애도했다.[5]
2. 1. 유년 시절과 성장 과정
오사카시 이가이노(猪飼野)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제주도에서 오사카시로 이주해왔다. 전후, 집안은 어묵 제조로 성공했지만, 아버지는 곧 애인을 만들고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가출했다.[5]오사카부립 고쓰고등학교 정시과정 재학 중에 우치나다 투쟁에 참가했다. 1954년에 이가이노에서 시인 김시종을 만났으며[5], 그가 주재하는 동인지 『진달래』에 시를 투고하여 지도를 받았다. '양석일'이라는 필명은 "돌 위에도 3년, 해가 비칠 때까지 끈기 있게 쓴다"는 의미로 김시종이 지어준 것이다.[5]
이후 구두가게와 고철 가게, 양복점 직원 등을 거쳐, 친부로부터 300만엔을 빌려 인쇄회사를 경영했지만 사업에 실패했다. 센다이로 도망쳐 커피숍의 고용 매니저가 되었지만 빚이 더 늘어나 결국 상경했다. 신주쿠에 기숙사가 있는 택시 운전사 직업에 종사하던 중, 병상에 있던 친부로부터 가업을 이을 것을 요구받았지만 거절했고, 친부는 곧 전 재산을 기부하고 북한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병사했다.
2. 2. 문학과의 만남
1954년, 오사카시 이가이노에서 시인 김시종을 만났다.[5] 이후 김시종이 주재하는 동인지 『진달래』에 시를 투고하여 지도를 받았다. '양석일(梁石日)'이라는 필명은 김시종이 "돌 위에도 3년, 해가 비칠 때까지 끈기 있게 쓴다"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5] 작가로 성공한 후에도 김시종과의 교류는 계속되었다.[5]2. 3. 다양한 직업 경험
오사카부립 고쓰고등학교 정시과정 재학 중 우치나다 투쟁에 참가했다. 1954년에 시인 김시종을 만났고,[5] 김시종이 주재하는 동인지 『진달래』에 시를 투고하며 지도를 받았다. '양석일'이라는 필명은 "돌 위에도 3년, 해가 비칠 때까지 끈기 있게 쓴다"는 의미로 김시종이 지어준 것이다.[5]이후 구두가게, 고철 가게, 양복점 직원 등을 거쳤다. 친부에게서 300만엔을 빌려 인쇄회사를 경영했지만 실패하고 센다이로 도망쳤다. 커피숍의 고용 매니저가 되었지만 빚이 늘어 상경하여 신주쿠에 기숙사가 있는 택시 운전사로 일했다.
2. 4. 작가 데뷔와 작품 활동
오사카시 이가이노(猪飼野)에서 태어난 양석일은 오사카부립 고쓰 고등학교 정시과정에 재학 중 우치나다 투쟁에 참가했다. 1954년 이가이노에서 시인 김시종을 만나[5] 그가 주재하는 동인지 『진달래』에 시를 투고하며 지도를 받았다. '양석일(梁石日)'이라는 필명은 "돌 위에도 3년, 해가 비칠 때까지 끈기 있게 쓴다"는 의미로 김시종이 지어준 것이다.[5]이후 구두가게, 고철 가게, 양복점 직원 등을 거쳐 인쇄 회사를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센다이로 도망쳤다. 커피숍 매니저로 일했지만 빚이 늘어 상경, 신주쿠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출판 편집자의 권유로 『광조곡』(단행본 출판 시 제목은 『택시 광조곡』)을 써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1993년 최양일 감독에 의해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로 영화화되어 크게 성공했다. 택시 운전사 시절 사고로 은퇴한 후에는 물품 판매업을 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1994년 재일 한국·조선인 고철 절도단 '아파치족'의 활동을 그린 『밤을 걸고』가 직목상 후보[6]가 되었고, 2002년 김수진 연출, 야마모토 다로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1998년 아버지의 삶을 그린 『피와 뼈』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하고[7] 직목상 후보[6]에 올랐으며, 2004년 최양일 감독, 비트 타케시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2002년 태국을 배경으로 유아 매춘, 인신매매, 장기 매매를 다룬 『어둠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사카모토 준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2008년에 공개되었으나, 태국에서 강한 반발을 샀고, 일본에서도 논픽션 영화로 홍보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8]
2008년 12월, NHK 교육 텔레비전 「즐기며 배우기 인생의 걷는 법」에서 자신의 생애와 문학적 배경, 현대 사회의 어둠에 대해 이야기하며, 문세광에게 강한 공감을 느꼈다고 발언했다.[9]
2. 5. 사회 참여와 비판적 목소리
양석일은 한일기본조약을 비판하는 등 일본 정부의 북한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납치 문제에 대해 햇볕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협상은 더디게 진전되었다."[11]
- "본래라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고, 배상 책임의 이행을 추구해야 했던 것을, 압박받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유상 3억달러, 무상 2억달러의 지원을 받아들였다."[11]
-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 책임을 애매하게 만들고, 역사를 묻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11]
- "한일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를 조선에서 유일한 국가로 인정하고, 북한의 존재를 외면했다."[12]
-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희생자였으며, 당연히 북한 사람들도 일본 정부에 대해 배상 청구권을 주장할 수 있다."[12]
- "한국 정부에만 경제협력이라는 이름의 배상을 한 것은 편향적이다."[12]
- "(북한의 UN 가입으로) 북한 정부의 존재가 국제적으로 인정되면서 일본의 외교는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과거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고, 그 부담을 끌고 간다."[12]
-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강간했다’는 아무런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퍼져 군, 경찰, 일반 시민으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일본 정부는 사과는커녕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12]
- "납치 문제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정치적 의도와 민족주의의 고양이 겹쳐, 힘의 논리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려 하고 있다."[13]
- "납치 가족들 중에서 ‘북한에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납치 가족들의 심정은 헤아릴 수 있지만, 이러한 발언은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으로 귀국한 5명의 납치 피해자들에게는 북한에 남겨둔 가족이 있으며, 5명 외에도 납치 피해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극적인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13]
- "과거 식민지,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관동대지진 때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한 과거는 그늘에 가려져 버렸다. ‘역사를 거울 삼아 과거로부터 배우고’,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통한 외교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13]
2008년 12월 NHK 교육 텔레비전 「즐기며 배우기 인생의 걷는 법」(전 4회[9])에서 자신의 생애와 문학적 배경, 현대가 안고 있는 어둠을 이야기했다. 그중에서 자작 『여름의 불꽃』에서 모티브로 삼은 박정희 암살 사건을 모의하고 영부인을 사살한 재일 동포 문세광에게 강한 공감을 느꼈다고 발언했다.
2. 6. 사망
2024년 6월 29일 오전, 도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였다.[10] 오랫동안 교류해온 김시종은 부고를 접하고 "진정한 재일(在日)이 만들어낸 시인 작가의 자유인이었다"라고 애도했다.[5]3. 작품 세계
양석일은 재일 한국인으로서 겪은 차별과 폭력, 그리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제목 | 출판 연도 | 출판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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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集 夢魔の彼方へ일본어 | 1980년 | 梨花서방(梨花書房) | 1996년, 1998년 빌리지센터 출판국에서 재출간 |
狂躁曲일본어 | 1981년 | 筑摩서방(筑摩書房) | 『택시 광조곡』으로 제목 변경 후 치쿠마문고(1987), 카도카와문고(1993)에서 재출간 |
タクシードライバー日誌일본어 | 1984년 | 筑摩서방(筑摩書房) | 치쿠마문고(1986)에서 재출간, 저자의 택시 기사 경험을 바탕으로 함 |
ドライバー・最後の叛逆일본어 | 1987년 | 정보센터출판국(情報センター出版局) | 『택시 드라이버: 마지막 반역』으로 제목 변경 후 겐토샤 아웃로 문고(1998)에서 재출간 |
族譜の果て일본어 | 1989년 | 립풍서방(立風書房) | 도쿠마문고(1996), 겐토샤문고(1999)에서 재출간 |
アジア的身体일본어 | 1990년 | 청봉사(青峰社) | 평범사 라이브러리(1999)에서 재출간 |
夜の河を渡れ일본어 | 1990년 | 筑摩서방(筑摩書房) | 도쿠마문고(1995), 신초문고(1999), 코분샤문고(2006)에서 재출간 |
子宮の中の子守歌일본어 | 1992년 | 청봉사(青峰社) | 도쿠마문고(1996), 겐토샤문고(1999)에서 재출간 |
断層海流일본어 | 1993년 | 청봉사(青峰社) | 겐토샤문고(1998)에서 재출간 |
タクシードライバーほろにが日記일본어 | 1993년 | 서사르네상스(書肆ルネッサンス) | 『택시 드라이버: 외로운 늑대의 노래』로 제목 변경 후 겐토샤문고(1997)에서 재출간 |
男の性解放일본어 | 1993년 | 정보센터출판국(情報センター出版局) | 『남자의 성』으로 제목 변경 후 겐토샤 아웃로 문고(1999)에서 재출간 |
밤을 걸고 | 1994년 | 일본방송출판협회(日本放送出版協会) | 겐토샤문고(1997)에서 재출간 |
修羅を生きる일본어 | 1995년 | 고단샤 겐다이 신쇼(講談社現代新書) | 『수라를 살다』(자서전)로 제목 변경 후 겐토샤 아웃로 문고(1999)에서 재출간 |
雷鳴일본어 | 1995년 | 도쿠마쇼텐(徳間書店) | 도쿠마문고(1998), 겐토샤문고(2007)에서 재출간 |
闇の想像力일본어 | 1995년 | 해방출판사(解放出版社) | |
Z | 1996년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겐토샤문고(1998)에서 재출간 |
피와 뼈 | 1998년 | 겐토샤(幻冬舎) | 겐토샤문고(2001, 2024)에서 재출간 |
さかしま일본어 | 1999년 | 아톤(アートン) | 『꿈의 회랑』으로 제목 변경 후 겐토샤문고(2006)에서 재출간 |
異端は未来の扉を開く일본어 | 1999년 | 아톤(アートン) | |
魂の流れゆく果て일본어 | 2001년 | 코분샤(光文社) | 코분샤문고(2004)에서 재출간 |
死は炎のごとく일본어 | 2001년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여름의 불꽃』으로 제목 변경 후 겐토샤문고(2003)에서 재출간 |
睡魔일본어 | 2001년 | 겐토샤(幻冬舎) | 겐토샤문고(2002)에서 재출간 |
終りなき始まり일본어 | 2002년 |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 아사히문고(2004)에서 재출간 |
裏と表일본어 | 2002년 | 겐토샤(幻冬舎) | 겐토샤문고(2004)에서 재출간 |
어둠의 아이들 | 2002년 | 해방출판사(解放出版社) | 겐토샤문고(2004)에서 재출간 |
異邦人の夜일본어 | 2004년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겐토샤문고(2006)에서 재출간 |
一回性の人生일본어 | 2004년 | 고단샤(講談社) | |
海に沈む太陽일본어 | 2005년 | 筑摩서방(筑摩書房) | 겐토샤문고(2008)에서 재출간 |
カオス일본어 | 2005년 | 겐토샤(幻冬舎) | 겐토샤문고(2008)에서 재출간 |
シネマ・シネマ・シネマ일본어 | 2006년 | 코분샤(光文社) | 『시네마 광조곡』으로 제목 변경 후 코분샤문고(2009)에서 재출간 |
未来への記憶일본어 | 2006년 | 아톤(アートン) | |
ニューヨーク地下共和国일본어 | 2006년 | 고단샤(講談社) | 겐토샤문고(2010)에서 재출간 |
超「暴力」的な父親일본어 | 2007년 | 베스트셀러즈(ベストセラーズ) | |
夜に目醒めよ일본어 | 2008년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겐토샤문고(2011)에서 재출간 |
冬の陽炎일본어 | 2008년 | 겐토샤(幻冬舎) | 겐토샤문고(2011)에서 재출간 |
めぐりくる春일본어 | 2010년 | 금요일(金曜日) | 겐토샤문고(2013)에서 재출간 |
明日の風일본어 | 2010년 | 코분샤(光文社) | 코분샤문고(2013)에서 재출간 |
Y氏の妄想録일본어 | 2010년 | 겐토샤(幻冬舎) | 겐토샤문고(2015)에서 재출간 |
大いなる時を求めて일본어 | 2012년 | 겐토샤(幻冬舎) | 겐토샤문고(2014)에서 재출간 |
魂の痕일본어 | 2020년 | 가와데쇼보 신샤(河出書房新社) |
3. 1.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과 차별
오사카시 이가이노에서 태어난 양석일은 제주도 출신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어린 시절 집안은 어묵 제조로 성공했지만, 아버지의 가출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우치나다 투쟁에 참여했고, 김시종 시인을 만나 문학적 지도를 받았다. '양석일'이라는 필명은 김시종이 지어준 것으로, "돌 위에도 3년, 해가 비칠 때까지 끈기 있게 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5]양석일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힘든 삶을 이어갔다. 인쇄회사를 경영했지만 실패했고, 빚 때문에 도망치기도 했다. 택시 운전사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 『택시 광조곡』의 바탕이 되었다. 이 작품은 최양일 감독에 의해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로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1994년에는 재일 한국·조선인 고철 절도단 '아파치족'의 이야기를 다룬 『밤을 걸고』가 직목상 후보에 올랐다.[6] 1998년에는 아버지의 삶을 모델로 한 소설 『피와 뼈』로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했다.[7] 이 작품은 최양일 감독, 비트 타케시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2004년에 공개되었다.
2002년에는 태국을 배경으로 유아 매춘, 인신매매, 장기 매매를 다룬 『어둠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사카모토 준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지만, 태국에서 상영 중지되는 등 논란을 빚었다. 일본에서도 논픽션 영화로 홍보된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8]
양석일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과 차별, 그리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문세광에게 강한 공감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3. 2. 역사 인식과 사회 비판
양석일은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사회의 차별과 폭력, 그리고 역사 인식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들을 발표해왔다.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소설 『피와 뼈』를 통해, 전쟁 전후 일본 사회에서 재일 한국인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폭력,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7] 이 작품은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7]
또한, 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어둠의 아이들』에서는 유아 매춘, 인신매매, 장기 매매 등 충격적인 소재를 다루며,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폭로했다.[8] 이 작품은 영화화 과정에서 태국 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양석일은 픽션임을 명확히 하며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비극적인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8]
양석일은 작품 활동 외에도, NHK 교육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삶과 문학적 배경, 그리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문세광에게 강한 공감을 느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9]
그는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고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11] 또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햇볕정책을 통한 대화와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며, 일본 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했다.[13]
특히,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사과는 커녕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과거사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12]
3. 3. 택시 운전사 경험과 작품의 연관성
양석일은 신주쿠에 있는 기숙사가 딸린 택시 운전사로 일했다. 택시 운전사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택시 손님과의 대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이를 듣고 있던 출판 편집자에게 집필을 권유받아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의 데뷔작은 『택시 광조곡』으로, 택시 운전사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3년에 최양일 감독에 의해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4] 택시 운전사 시절 두 번의 사고로 크게 다쳐 은퇴한 후에는 물품 판매업을 하면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4. 주요 작품 목록
제목 | 출판사 | 출판 연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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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集 夢魔の彼方へ|시슈 유메마노카나타에일본어 | 빌리지센터 출판국 | 1980년 | 梨花서방(梨花書房) 초판, 1996년, 1998년 재출간 |
狂躁曲|교소쿄쿠일본어 | 筑摩서방(筑摩書房) | 1981년 | 치쿠마문고(ちくま文庫) (1987년), 각카와문고(角川文庫) (1993년)판은 タクシー狂躁曲|다쿠시 교소쿄쿠일본어로 제목 변경 |
タクシードライバー日誌|다쿠시 도라이바 닛시일본어 | 筑摩서방(筑摩書房) | 1984년 | 치쿠마문고(ちくま文庫) (1986년) |
ドライバー・最後の叛逆:タクシードライバーならではの知恵袋|도라이바 사이고노 한갸쿠 다쿠시 도라이바나라데와노 지에부쿠로일본어 | 정보센터출판국(情報センター出版局) | 1987년 | 겐토샤 아웃로 문고(幻冬舎アウトロー文庫) (1998년)판은 タクシードライバー:最後の叛逆|다쿠시 도라이바 사이고노 한갸쿠일본어로 제목 변경 |
族譜の果て|조쿠후노 하테일본어 | 립풍서방(立風書房) | 1989년 | 도쿠마문고(徳間文庫) (1996년),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1999년) |
アジア的身体|아지아테키 신타이일본어 | 청봉사(青峰社) | 1990년 | 평범사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1999년) |
夜の河を渡れ|요루노 가와오 와타레일본어 | 筑摩서방(筑摩書房) | 1990년 | 도쿠마문고(徳間文庫) (1995년), 신초문고(新潮文庫) (1999년), 코분샤문고(光文社文庫) (2006년) |
子宮の中の子守歌|시큐노 나카노 고모리우타일본어 | 청봉사(青峰社) | 1992년 | 도쿠마문고(徳間文庫) (1996년),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1999년) |
断層海流|단소카이류일본어 | 청봉사(青峰社) (발매: 성운사(星雲社)) | 1993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1998년) |
タクシードライバーほろにが日記|다쿠시 도라이바 호로니가 닛키일본어 | 서사르네상스(書肆ルネッサンス) | 1993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1997년)판은 タクシードライバー:一匹狼の歌|다쿠시 도라이바 잇피키오카미노 우타일본어로 제목 변경 |
男の性解放:なぜ男は女を愛せないのか|오토코노 세이 가이호 나제 오토코와 온나오 아이세나이노카일본어 | 정보센터출판국(情報センター出版局) | 1993년 | 겐토샤 아웃로 문고(幻冬舎アウトロー文庫) (1999년)판은 男の性|오토코노 세이일본어로 제목 변경 |
밤을 걸고(夜を賭けて) | 일본방송출판협회(日本放送出版協会) | 1994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1997년) |
修羅を生きる:「恨」をのりこえて|슈라오 이키루 한오 노리코에테일본어 | 고단샤 겐다이 신쇼(講談社現代新書) | 1995년 | 겐토샤 아웃로 문고(幻冬舎アウトロー文庫) (1999년)판은 修羅を生きる|슈라오 이키루일본어로 제목 변경, 자서전 |
雷鳴|라이메일본어 | 도쿠마쇼텐(徳間書店) | 1995년 | 도쿠마문고(徳間文庫) (1998년),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7년) |
闇の想像力|야미노 소조료쿠일본어 | 해방출판사(解放出版社) | 1995년 | |
Z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1996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1998년) |
피와 뼈 | 겐토샤(幻冬舎) | 1998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1년, 상하권), 2024년 신장판(상하권) |
さかしま|사카시마일본어 | 아톤(アートン) | 1999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6년)판은 夢の回廊|유메노 카이로일본어로 제목 변경 |
異端は未来の扉を開く|이탄와 미라이노 토비라오 히라쿠일본어 | 아톤(アートン) | 1999년 | |
魂の流れゆく果て|타마시노 나가레유쿠 하테일본어 | 코분샤(光文社) | 2001년 | 코분샤문고(光文社文庫) (2004년) |
死は炎のごとく|시와 호노오노 고토쿠일본어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2001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3년)판은 夏の炎|나쓰노 호노일본어로 제목 변경 |
睡魔|스이마일본어 | 겐토샤(幻冬舎) | 2001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2년) |
終りなき始まり|오와리나키 하지마리일본어 |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 2002년 | 아사히문고(朝日文庫) (2004년, 상하권) |
裏と表|우라토 오모테일본어 | 겐토샤(幻冬舎) | 2002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4년) |
어둠의 아이들(闇の子供たち) | 해방출판사(解放出版社) | 2002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4년) |
異邦人の夜|이호진노 요루일본어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2004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6년, 상하권) |
一回性の人生|잇카이세노 진세일본어 | 고단샤(講談社) | 2004년 | |
海に沈む太陽|우미니 시즈무 타이요일본어 | 筑摩서방(筑摩書房) | 2005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8년, 상하권) |
カオス|카오스일본어 | 겐토샤(幻冬舎) | 2005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08년) |
シネマ・シネマ・シネマ|시네마 시네마 시네마일본어 | 코분샤(光文社) | 2006년 | 코분샤문고(光文社文庫) (2009년)판은 シネマ狂躁曲|시네마 교소쿄쿠일본어로 제목 변경 |
未来への記憶|미라이에노 기오쿠일본어 | 아톤(アートン) | 2006년 | |
ニューヨーク地下共和国|뉴요쿠 지카쿄와코쿠일본어 | 고단샤(講談社) | 2006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10년, 상하권) |
超「暴力」的な父親|조 보료쿠테키나 지치오야일본어 | 베스트셀러즈(ベストセラーズ) | 2007년 | |
夜に目醒めよ|요루니 메자메요일본어 | 마이니치신문사(毎日新聞社) | 2008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11년) |
冬の陽炎|후유노 가게로일본어 | 겐토샤(幻冬舎) | 2008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11년) |
다시 오는 봄(めぐりくる春) | 금요일(金曜日) | 2010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13년) |
明日の風|아시타노카제일본어 | 코분샤(光文社) | 2010년 | 코분샤문고(光文社文庫) (2013년) |
Y氏の妄想録|Y시오 보소로쿠일본어 | 겐토샤(幻冬舎) | 2010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15년) |
大いなる時を求めて|오이나루 도키오 모토메테일본어 | 겐토샤(幻冬舎) | 2012년 | 겐토샤문고(幻冬舎文庫) (2014년) |
魂の痕|다마시노 기즈아토일본어 | 가와데쇼보 신샤(河出書房新社) | 2020년 |
5. 양석일을 연기한 배우
작품명 | 배역 | 배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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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 다다오 | 기시타니 고로 | 영화판, 택시 운전수 시절[1] |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 다다오 | 이시바시 료 | TV판, 택시 운전수 시절[1] |
피와 뼈 | 마사오 | 아라이 히로후미 | 원작에서는 정한[1] |
피와 뼈 | 박무 | 오다기리 조 | 마사오의 이복형[1] |
6. 사회적 입장과 주장
양석일은 한일기본조약을 비판하는 등 일본 정부의 북한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납치문제에 대해 햇볕정책을 요구했다.
-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협상은 더디게 진전되었다.[11]”
- “본래라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고, 배상 책임의 이행을 추구해야 했던 것을, 압박받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유상 3억달러, 무상 2억달러의 지원을 받아들였다.[11]”
-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 책임을 애매하게 만들고, 역사를 묻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11]”
- “한일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를 조선에서 유일한 국가로 인정하고, 북한의 존재를 외면했다.[12]”
-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희생자였으며, 당연히 북한 사람들도 일본 정부에 대해 배상 청구권을 주장할 수 있다.[12]”
- “한국 정부에만 경제협력이라는 이름의 배상을 한 것은 편향적이다.[12]”
- “(북한의 UN 가입으로) 북한 정부의 존재가 국제적으로 인정되면서 일본의 외교는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과거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고, 그 부담을 끌고 간다.[12]”
-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강간했다’는 아무런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퍼져 군, 경찰, 일반 시민으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일본 정부는 사과는커녕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12]”
- “납치 문제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정치적 의도와 민족주의의 고양이 겹쳐, 힘의 논리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려 하고 있다.[13]”
- “납치 가족들 중에서 ‘북한에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납치 가족들의 심정은 헤아릴 수 있지만, 이러한 발언은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으로 귀국한 5명의 납치 피해자들에게는 북한에 남겨둔 가족이 있으며, 5명 외에도 납치 피해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극적인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13]”
- “과거 식민지,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관동대지진 때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한 과거는 그늘에 가려져 버렸다. ‘역사를 거울 삼아 과거로부터 배우고’,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통한 외교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13]”
참조
[1]
웹사이트
Publisher's web page for this issue
http://www.seidosha.[...]
[2]
뉴스
作家の梁石日さん死去、87歳 「血と骨」がベストセラーに
https://www.tokyo-np[...]
[3]
웹사이트
梁石日(ヤンソギル)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2-04
[4]
웹사이트
『血と骨』
https://www.donga.co[...]
2005-02-16
[5]
뉴스
在日の肉親的兄弟 梁石日へ:筆名の名付け親 金時鐘さんが悼む
朝日新聞(大阪本社版)
2024-07-03
[6]
웹사이트
直木賞受賞作候補作一覧
https://prizesworld.[...]
2024-07-30
[7]
웹사이트
付録:山本周五郎賞受賞作候補作一覧
https://prizesworld.[...]
2024-07-30
[8]
뉴스
「少女から生きたまま心臓移植」 映画「闇の子供たち」の問題PR
https://www.j-cast.c[...]
[9]
웹사이트
知るを楽しむ人生の歩き方梁石日“血”の咆哮<新><全4回>第1回「父と在日」
https://www.nhk.or.j[...]
NHKアーカイブス
2024-06-29
[10]
웹사이트
作家の梁石日さん死去、87歳 「血と骨」がベストセラーに:東京新聞 TOKYO Web
https://www.tokyo-np[...]
2024-06-29
[11]
서적
日本の論点
2003
[12]
서적
日本の論点
2003
[13]
서적
日本の論点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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