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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령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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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령신앙은 일본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인 원령(怨霊)이 저주를 내린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신앙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정쟁에서 패배하거나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이 역병과 자연재해를 일으킨다고 여겨졌으며, 이들을 달래기 위해 신사(神社)에 모셔 숭배하는 고령 신앙(御霊信仰)이 나타났다. 고령 신앙은 원령을 진정시키고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것으로, 863년에 신센엔(神泉苑)에서 처음으로 고령회가 열렸다. 대표적인 예시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텐진(天神)으로 신격화되었으며, 고령 신앙은 이후 일본 역사와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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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령신앙
개요
유형원령
모시는 대상재앙을 일으키는 혼령, 억울하게 죽은 자
설명강력한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재앙을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존재
신앙 형태어령 신앙
특징
유래일본
출현 배경정치적 암투, 억울한 죽음
주된 활동재앙을 내려 복수
진정 방법신사를 세워 위로하고 달램
어령이 된 주요 인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후지와라 씨와의 정치적 암투로 사망 후, 덴진으로 모셔짐
다이라노 마사카도반란 실패 후 사망, 간다묘진에 모셔짐
이요친왕후지와라 씨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음
관련 신앙
어령 신앙재앙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는 신앙
어령회어령을 위로하는 제사
기타
참고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는 것은 한국의 굿과 유사한 면이 있음

2. 역사

나라 시대(710–794) 이전부터 억울함이나 분노를 품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저주를 일으킨다는 믿음은 존재했다. 그러나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794–1185)에 이르러,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의 영혼이 역병과 자연 재해를 일으킨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신사에 모셔 가미(神)로 숭배했다.

고료일본어(goryō)의 예로 텐진이라고 알려진 신토 가미가 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후지와라 씨족의 경쟁자에 의해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의 사후 몇 년 동안, 수도는 폭우와 번개에 시달렸고, 그의 주요 후지와라 적대자와 다이고 천황의 황태자가 죽었으며, 번개로 인한 화재와 홍수로 많은 가옥이 파괴되었다. 조정은 이러한 혼란이 미치자네의 온료일본어(onryō)에 의해 발생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를 달래기 위해, 천황은 그의 모든 관직을 복원하고, 유배 명령서를 불태웠으며, 그를 정이위로 승진시켰다. 심지어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70년 후 그는 다이죠다이진으로 승진했으며, "천상의 신"을 의미하는 텐진 사마로 신격화되었다. 그는 서예, 시, 그리고 불의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호신이 되었다. 키타노에 신사가 세워졌다. 정부의 지원으로, 그곳은 즉시 공식 신사의 첫 번째 등급으로 격상되었다.[4]

2. 1. 어원

이 명칭은 두 개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御(go)는 존경할 만한 것을, 霊(ryō)는 영혼 또는 정신을 의미한다.[2]

2. 2. 기원

이 명칭은 두 개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御(go)는 존경할 만한, 霊(ryō)는 영혼 또는 정신을 의미한다.

억울함이나 분노를 품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저주를 일으킨다는 믿음은 나라 시대(710–794) 이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794–1185)에 이르러,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의 영혼이 역병과 자연 재해를 일으킨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신사에 모셔 가미(神)로 숭배했다. 첫 번째 예는 785년에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아와지 섬으로 유배되어 죽은 사와라 친왕이다. 그의 사후, 교토에서 역병이 발생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영혼이 그 원인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794년에 교토에 가미고료 신사(ja)를 세웠고, 그는 가미|신일본어로 모셔졌다.[2]

고료일본어(goryō)의 예로는 텐진이라고 알려진 신토 가미가 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후지와라 씨족의 경쟁자에 의해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의 사후 몇 년 동안, 수도는 폭우와 번개에 시달렸고, 그의 주요 후지와라 적대자와 다이고 천황의 황태자가 죽었으며, 번개로 인한 화재와 홍수로 많은 가옥이 파괴되었다. 조정은 이러한 혼란이 미치자네의 온료일본어(onryō)에 의해 발생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를 달래기 위해, 천황은 그의 모든 관직을 복원하고, 유배 명령서를 불태웠으며, 그를 정이위로 승진시켰다. 심지어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70년 후 그는 다이죠-다이진으로 승진했으며, "천상의 신"을 의미하는 텐진 사마로 신격화되었다. 그는 서예, 시, 그리고 불의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호신이 되었다. 키타노에 신사가 세워졌다. 정부의 지원으로, 그곳은 즉시 공식 신사의 첫 번째 등급으로 격상되었다.[4]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으로서 육체를 떠난다는 생각은, 예를 들어 조몬 시대에 보이는 굴장의 생각처럼, 원시 시대부터 존재했다. 이러한 점에서, "미타마"나 "혼"과 같은 령이 사람들에게 여러 재앙을 일으킨다는 것도, 그 무렵부터 생각되었다. 고대에는, 정치적으로 실각한 자나, 전란에서의 패배자 등의 령이, 그 상대나 적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헤이안 시대에 고령 신앙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다.

2. 3. 헤이안 시대 (794-1185)

억울함이나 분노를 품고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저주를 일으킨다는 믿음은 나라 시대(710–794) 이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794–1185)에 이르러,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의 영혼이 역병과 자연 재해를 일으킨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 신사에 모셔 가미(神)로 숭배했다. 첫 번째 예는 785년에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아와지 섬으로 유배되어 죽은 사와라 친왕이다. 그의 사후, 교토에서 역병이 발생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영혼이 그 원인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794년에 교토에 가미고료 신사를 세웠고, 그는 神|가미일본어로 모셔졌다.[2]

御霊|고료일본어의 예로 텐진이라고 알려진 신토 가미가 있다. 정부 관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후지와라 씨족의 경쟁자에 의해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의 사후 몇 년 동안, 수도는 폭우와 번개에 시달렸고, 그의 주요 후지와라 적대자와 다이고 천황의 황태자가 죽었으며, 번개로 인한 화재와 홍수로 많은 가옥이 파괴되었다. 조정은 이러한 혼란이 미치자네의 怨霊|온료일본어에 의해 발생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를 달래기 위해, 천황은 그의 모든 관직을 복원하고, 유배 명령서를 불태웠으며, 그를 정이위에 승진시켰다. 심지어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70년 후 그는 다이죠다이진으로 승진했으며, "천상의 신"을 의미하는 텐진 사마로 신격화되었다. 그는 서예, 시, 그리고 불의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호신이 되었다. 키타노에 신사가 세워졌다. 정부의 지원으로, 그곳은 즉시 공식 신사의 첫 번째 등급으로 격상되었다.[4]

정쟁과 전란이 빈번했던 고대 시대를 통해 원령의 존재는 더욱 강력한 것으로 여겨졌다. 원령이란, 정쟁에서 실각한 자나 전란에서 패배한 자의 영혼, 즉 원한을 품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자의 영혼이다. 원령은 그 상대나 적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외에도 사회 전체에 대한 재앙(주로 역병의 유행)을 가져온다. 이러한 망령을 복위시키거나, 시호관위를 내려 그 영혼을 진정시키고 신으로 모시면, 오히려 "고령(御霊)"으로서 영혼은 수호신으로서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헤이안 시대를 통해 일어났다. 이것이 '''고령 신앙'''이다. 또한, 그 진혼을 위한 의식으로 고령회(ごりょうえ)가 궁중 행사로 행해졌다. 기록상,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령회는, 863년(조간 5년) 5월 20일에 신센엔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 첫 번째 고령회에서는 소도 천황(사와라 친왕. 고닌 천황의 황자), 이요 친왕, 후지와라노 오보진(후지와라노 요시코, 이요 친왕의 어머니), 탓치바나노 오부(타치바나노 잇세이), 몬노 오부(후야노 미야타마로), 관찰사(후지와라노 나카나리 또는 후지와라노 히로츠구) 6명이 제사 지내졌다. 후에, 이노우에 황후(이노우에 내친왕. 고닌 천황의 황후), 오토베 친왕(고닌 천황의 황자), 카라이 텐진(火雷天神), 키비 세이레이(吉備聖霊)를 더하여, 관찰사와 이요 친왕이 빠진 "팔소 고령(八所御霊)"으로서 고령 신사(가미고령 신사, 시모고령 신사)에 모셔지고 있다.

고령 신앙이 명확해지는 것은 헤이안 시대 이후이지만, 그 상한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이해가 일정하지 않다.

3. 주요 특징

御霊|고료일본어 신앙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재앙을 일으킨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나라 시대(710-794)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헤이안 시대(794-1185)에 이르러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영혼이 역병과 자연 재해를 일으킨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이러한 영혼을 달래기 위해 신사에 가미(神)로 모시는 풍습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로 사와라 친왕이 있다. 그는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되어 사망했는데, 이후 교토에서 역병이 발생하자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가미고료 신사를 세우고 가미|가미일본어로 모셨다.[2]

또 다른 예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있다. 그는 후지와라 씨족의 모함으로 살해된 후, 수도에 폭우와 번개, 화재 등의 재앙을 일으켰다고 여겨졌다. 조정은 그를 달래기 위해 관직을 복원하고 다이죠-다이진으로 추증했으며, 텐진이라는 신으로 모셨다.[4]

3. 1. 원령과 고료

御霊|고료일본어 신앙에서 원령(怨霊)은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한다. 이들은 억울하게 죽거나 정치적 분쟁에서 패배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경우가 많다. 원령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역병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재앙을 일으킨다고 믿어졌다.[2]

나라 시대 이전부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주를 내린다는 믿음은 존재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영혼이 역병과 자연 재해를 일으킨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이러한 원령을 달래기 위해 신사에 가미로 모시는 풍습이 생겨났다.[2]

대표적인 원령의 예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있다. 그는 후지와라 씨족의 모함으로 살해된 후, 수도에 폭우와 번개, 화재 등의 재앙을 일으켰다고 여겨졌다. 조정은 그를 달래기 위해 관직을 복원하고 다이죠-다이진으로 추증했으며, 텐진이라는 신으로 모셨다.[4]

863년에는 신센엔에서 최초의 고령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소도 천황(사와라 친왕), 이요 친왕, 후지와라노 요시코, 타치바나노 잇세이, 후야노 미야타마로, 후지와라노 나카나리 또는 후지와라노 히로츠구 등 6명이 제사 지내졌다. 이후 이노우에 황후, 오토베 친왕 등이 추가되어 "팔소고령(八所御霊)"으로 카미고령 신사와 시모고령 신사에 모셔졌다.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스토쿠 천황,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안토쿠 천황, 고토바 천황, 준토쿠 천황, 고다이고 천황 등도 원령으로 여겨져 조정과 막부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찰을 건립하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 이후에도 야마가 기요베에나 사쿠라 소고로와 같은 인물들이 고료 신앙의 형태로 숭배되는 등, 원령 신앙은 계속 이어졌다.

3. 2. 진혼 의례

나라 시대(710-794) 이전부터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저주를 내린다는 믿음은 있었다.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794-1185)에 걸쳐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영혼이 역병이나 자연재해를 일으킨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신사에 모셔 가미로 숭배했다. 785년에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아와지 섬으로 유배되어 사망한 사와라 친왕이 그 첫 번째 사례이다. 교토에서 역병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사와라 친왕의 영혼을 두려워했고, 794년에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교토에 가미고료 신사(ja)를 세우고 가미|가미일본어로 모셨다.[2]

정쟁과 전란이 잦았던 고대 시대에는 원령의 존재가 더욱 강력하게 여겨졌다. 원령은 정쟁에서 실각하거나 전란에서 패배하여 원한을 품고 비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한다. 원령은 상대방이나 적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재앙, 주로 역병을 가져온다고 여겨졌다. 후지와라노 히로츠구, 이노우에 내친왕, 오토베 친왕, 사와라 친왕 등이 망령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망령을 복위시키거나 시호관위를 내려 그 영혼을 진정시키고 신으로 모시면, 오히려 "고령(御霊)"으로서 영혼은 수호신이 되어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나타났다. 이것이 '''고령 신앙'''이며, '''진혼'''을 위한 의례로 고령회(ごりょうえ)가 궁중 행사로 행해졌다. 기록상 처음 확인되는 고령회는 863년(조간 5년) 5월 20일에 신센엔(神泉苑)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 첫 번째 고령회에서는 소도 천황(사와라 친왕, 고닌 천황의 황자), 이요 친왕, 후지와라노 오보진(藤原大夫人) (후지와라노 요시코, 이요 친왕의 어머니), 탓치바나노 오부(橘大夫) (타치바나노 잇세이), 몬노 오부(文大夫) (후야노 미야타마로), 관찰사 (후지와라노 나카나리 또는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6명이 제사 지내졌다. 이후 이노우에 황후(이노우에 내친왕, 고닌 천황의 황후), 오토베 친왕(고닌 천황의 황자), 카라이 텐진(火雷天神) (시모고령 신사(下御霊神社)에서는 6개의 영의 아라미타마라고 해석[5], 일반적으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라고도 하지만, 미치자네가 모셔지게 된 것은 고령 신사 창설 이후), 키비 세이레이(吉備聖霊) (시모고령 신사에서는 6개의 영의 니기미타마라고 해석[5], 키비 대신, 혹은 키비노 나이친왕)을 더하여, 관찰사와 이요 친왕이 빠진 "팔소 고령(八所御霊)"으로서 고령 신사(카미고령 신사, 시모고령 신사)에 모셔지고 있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원령 진혼은 불교적 요소가 강해졌지만, 야마가 기요베에(와레이 신사)나 사쿠라 소고(소고 레이도) 등의 제신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령 신앙은 쇠퇴하지 않았다.

3. 3. 팔소 고령 (八所御霊)

863년(조간 5년) 5월 20일에 신센엔(神泉苑)에서 처음으로 고령회(御霊会)가 열렸을 때, 소도 천황(사와라 친왕. 고닌 천황의 황자), 이요 친왕, 후지와라노 오보진(후지와라노 요시코, 이요 친왕의 어머니), 타치바나노 오부(타치바나노 하야나리), 몬노 오부(후야노 미야타마로), 관찰사(후지와라노 나카나리 또는 후지와라노 히로츠구) 6명이 제사 지내졌다.[5] 후에, 이노우에 황후(이노우에 내친왕. 고닌 천황의 황후), 오토베 친왕(고닌 천황의 황자), 카라이 텐진(火雷天神), 키비 세이레이(吉備聖霊)를 더하고, 관찰사와 이요 친왕이 빠진 "팔소고령(八所御霊)"으로서 카미고령 신사, 시모고령 신사에 모셔지고 있다. 八所御霊일본어는 다음을 의미한다.

이름비고
소도 천황(崇道天皇, 사와라 친왕)
이노우에 황후(井上皇后, 이노우에 내친왕)
오토베 친왕(他戸親王)
후지와라노 오보진(藤原大夫人, 후지와라노 요시코)
타치바나노 오부(橘大夫, 타치바나노 하야나리)
몬노 오부(文大夫, 후야노 미야타마로)
카라이 텐진(火雷天神)
키비 세이레이(吉備聖霊)키비노 마키비 혹은 키비노 나이친왕


4. 기온 신앙 (祇園信仰)

고령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역신 신앙이 있다. 이는 역병신의 파종신이나 감기 신을 모심으로써 이를 막는 것으로, 고령 신앙과 유사한 점이 있다. 유명하고 전국적인 것으로는 우두천왕을 모시는 기온 신앙이 있다. 우두천왕은 역병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로, 교토 야사카 신사에 모셔져 기온 신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야사카 신사, 기원 신사, 야쿠모 신사라고 칭하는 신사에는 과거 우두천왕이 모셔진 예가 많다(대개 "○○천왕"이라는 별칭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메이지 시대의 종교 정책에 따라 현재는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현재의 기온 마츠리 또한 이 우두천왕에 대한 신앙에서 시작된 것이다.

5. 기타

오령의 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고로(五郎)"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많이 보이며, 가마쿠라 곤고로 신사나 가고시마현오스미 반도에서 미야자키현 남부에 보이는 야고로 돈 축제 등의 예가 있다.

전국에 있는 고로즈카 등으로 불리는 묘(오륜탑이나 돌 등으로 묘가 축조되어 있는 경우)는 오령즈카가 변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것도 오령 신앙의 하나이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소가 형제의 묘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점에 대해 "오령의 묘가 소가 이야기의 전파에 의해 소가 고로의 묘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설을 내놓았다.

천황은 중세에는 기온의 가마고쇼 근처를 지날 때 그 원령을 두려워하여 호이가에를 행하는 관례가 있었다[6]。 이것은 "기온회 호이가에", "오령회 어방위 행차", "호이가에 행차" 등으로 불렸으며, 특정 명칭은 없었다[7]。 다만, 이 호이가에는 단순히 심한 혼잡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다른 설도 있다[8]

타니가와 겐이치의 저서 『축제로서의 안보』[9]에 따르면, 60년 데모는 축제였고 가바 미치코의 죽음은 축제 때의 산 제물이며 (단, 의식으로서의 장례식은 데모 주최자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 후의 기시 내각의 총사직은 당시의 위정자가 오령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御霊 https://kotobank.jp/[...] Kotobank 2023-02-24
[2] 웹사이트 御霊信仰 https://kotobank.jp/[...] Kotobank 2023-02-24
[3] 웹사이트 怨霊 https://kotobank.jp/[...] Kotobank 2023-02-24
[4] 서적 Morris, 54.
[5] 웹사이트 御祭神の物語 http://shimogoryo.ma[...]
[6] 서적 馬長と馬上 山川出版
[7] 간행물 祇園御霊会と行幸―なぜ天皇は神輿を避けるのかー 2002-03
[8] 서적 八坂神社の敬神 臨川書店
[9] 서적 谷川健一著作集 七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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