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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소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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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쿠라 소고로는 에도 시대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가혹한 세금에 저항하여 쇼군에게 직접 호소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역사적 기록에서는 소고로라는 이름의 농민이 존재했으나, 직소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전승에 따르면, 소고로는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쇼군에게 직소했으나 처형당했다. 그의 이야기는 가부키, 강담, 소설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의로운 민중의 영웅으로 숭상받았다. 사후에는 원령으로 숭배되기도 하고, 일본 각지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신사가 건립되었다.

사쿠라 소고로 이야기는 막말과 메이지 시대의 사회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재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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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소고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본명기우치 소고로
출생일1605년
출생지시모사국
사망일1653년 9월
사망지고즈 마을
국적일본
배우자쓰타
자녀소헤이
겐노스케
기하치
산노스케
직업농업
범죄 정보
범죄 혐의도쿠가와 이에쓰나에 대한 시민 불복종
유이 쇼세쓰와 공모
과도한 세금에 대한 청원
형벌부모 십자가형
자녀 참수
시대 및 정부
시대에도 시대
정치 체제도쿠가와 막부
기념
기념물조쿄 기민 기념관

2. 역사적 사실과 전승

1912년경 소고로의 집


사쿠라 소고로의 이야기는 에도 시대 사쿠라 번에서 가혹한 통치에 맞서 싸운 농민 영웅의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역사적 실체와 전승된 이야기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한때 소고로의 실존 자체를 의심하는 시각도 있었으나[4], 당시 기록을 통해 '소고로'라는 이름의 부유한 농민이 실제로 공진촌에 살았으며 조오 2년(1653년)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3][6][7]. 또한 1715년에 편찬된 『총엽개록』에는 '소고'라는 인물이 처형된 후 그의 저주로 영주 가문이 개역 당했다는 소문이 돌아 사당('소고궁')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4]. 이는 소고로 전승의 초기 형태나 배경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소고로가 영주나 쇼군에게 직접 직소했거나 농민 봉기를 이끌었다는 전승의 핵심 내용은 당시 사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6]. 현재 전해지는 '직소장' 역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4]. 사건의 원인 또한 가혹한 세금, 토지 조사, 도네가와 물길 변경 공사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고로의 이야기는 에도 시대 실록본, 강담, 가부키(『사쿠라 의민전』[2]) 등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9][10][11][12]. 이러한 전승은 비록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희생된 민중 영웅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주었으며, 정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4].

2. 1. 역사적 기록



한때는 사쿠라 소고로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설도 제기되었으나[4], 호리타씨 시대의 공진촌 명부를 통해 "소고로"라는 부유한 농민이 실제로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3][6]. 고다마 유키타의 연구에 따르면, 공진촌에 소고로라는 농민이 있었고, 촌내에서 1~2개의 논밭과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오 2년(1653년) 8월에 처형당했고, 그의 아이 4명도 동시에 살해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저주에 대한 소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돌로 사당을 세웠다는 것 등이 밝혀졌다[7].

1715년에 성립된 『총엽개록』(사쿠라 번주 이나바 마사미치의 명에 따라 번의 유학자 이소베 쇼겐이 편찬)에는, 호리타씨 시대에 공진촌의 "소고"라는 자가 어떤 죄로 처형된 사실, 소고가 억울함을 주장하며 성주를 저주하며 죽었다는 것, 호리타씨의 개역(1660년)이 소고의 저주로 여겨졌다는 것, 이 때문에 "소고궁"이라는 사당이 세워졌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4].

그러나 소고로가 막부나 번주에게 직접 호소(직소)했거나 농민 봉기를 주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없다[6]. 사쿠라 소고로가 관여한 것은 치바 씨 재흥 운동이었다는 설도 있다[4][8]. 또한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가혹한 연공(세금), 은폐된 밭의 발각을 위한 검지(토지 조사), 도네가와 물길 변경 공사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8]. 가부라키 유키히로는 조오 2년(1653년)에 행해진 고즈 촌의 분촌(다이카타 촌 등 5개 촌으로 분할)과 이듬해 검지에 의한 연공 부담 증가를 사료로 확인하고, 소고로가 어떤 행동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8].

하야시 모토이는 현재 전해지는 "소고로의 직소장"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작품일 것이라고 하면서도, 주요 요구 내용이 에도 시대 초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4], "소고로를 중심으로 한 반 영주 투쟁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4].

2. 2. 전승되는 이야기



에도 시대에 성립된 실록본, 강담, 가부키 등을 통해 사쿠라 소고로의 이야기가 널리 전승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실록본 『지장당 통야 이야기』[9][10], 『호리타 소동기』[11], 『사쿠라 화실 이야기』[12]와 강담 및 가부키의 『사쿠라 의민전』[2] 등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사쿠라 번의 가혹한 통치에 맞서 소고로가 쇼군에게 직소하여 백성을 구원하려 했으나, 결국 자신과 가족이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에는 1711년 아와국 호조번에서 발생한 만석 소동의 기록 『만석 소동 일록』(18세기 중엽 이후 성립)과의 유사점도 지적된다[13]. 만석 소동 역시 중세(重税)가 원인이었으며, 번청과 에도 저택에 대한 문소(門訴), 로주(老中)에 대한 두 차례의 가고소(駕籠訴)로 전개되었다. 만석 소동을 참고하여 『사쿠라 의민전』이 만들어졌다는 해석[14]과 반대로 『사쿠라 의민전』이 『만석 소동 일록』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도 있다[13].

그러나 실제로 소고로가 직소나 봉기를 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6]. 현재 전해지는 "소고로의 직소장" 역시 후대의 창작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4]. 또한, 각종 이야기에는 상호 모순되거나 사실과 다른 점들도 있다[4].

다만, 하야시 모토이는 직소장의 주요 요구 내용이 에도 시대 초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소고로를 중심으로 한 반 영주 투쟁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4]. 또한, 1715년에 편찬된 『총엽개록』에는 호리타씨 시절 공진촌의 "소고"라는 인물이 죄를 짓고 처형당했으며, 그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성주를 저주하고 죽자 이후 호리타씨의 개역(1660년)이 소고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아 "소고궁"이라는 사당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4]. 이는 소고로 전승의 초기 형태나 배경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사쿠라 소고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혼재되어 있지만, 가혹한 지배에 대한 민중의 저항 의식과 정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담아 오랜 시간 동안 전승되어 왔다.

3. 사쿠라 소고로의 행적 (전승 기반)



사쿠라 소고로에 관한 전승은 에도 시대 사쿠라 번에서 구전된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번주 호리타 마사노부의 가혹한 세금 징수로 고통받던 농민들을 위해 소고로가 대표로 나서 여러 차례 세금 감면을 호소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쇼군에게 직소(直訴, 직접 호소)하는 마지막 수단을 선택했고, 이로 인해 농민들의 세금 부담은 해결되었지만, 소고로 자신과 가족들은 처형당했다고 한다.[4] 이 이야기는 후대에 의로운 농민 지도자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오랫동안 전승 속 인물로만 여겨졌고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었으나[4], 연구를 통해 호리타 가문 통치 시기 공진촌(公津村)의 명부에 '소고로'라는 부유한 농민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1653년(쇼오 2년) 8월에 그와 그의 자녀 4명이 함께 사망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3][6][7] 또한 1715년 편찬된 『총엽개록』(総葉概録)에는 공진촌의 '소고(宗吾)'라는 자가 처형된 후 성주를 저주했고, 이후 호리타 가문의 개역(改易, 영지 몰수)이 그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아 '소고궁(宗吾宮)'이라는 사당이 세워졌다는 기록도 있다.[4]

그러나 소고로가 전승처럼 쇼군에게 직소했거나 농민 봉기를 주도했다는 직접적인 역사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6]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도 가혹한 세금 외에 치바 씨 재흥 운동과의 연관성[4][8], 토지 조사(검지, 検地) 반대, 도네가와 강 공사 부담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8] 하야시 모토이와 같은 연구자는 현재 전해지는 "소고로 직소장"이 후대의 창작물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도, 그 내용이 에도 시대 초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소고로를 중심으로 한 어떤 형태의 저항 운동이 있었을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평가하기도 한다.[4]

3. 1. 출생과 배경

시모사국 인바군(印旛郡)의 호리타령(堀田領) 내 사쿠라성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기우치 소고로(木内惣五郎)라고 한다.

소고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존재한다. 『사쿠라 화실 이야기(佐倉花実物語)』에서는 그의 선조가 하나이 곤타유(花井権太夫)라는 북면 무사였으며, 스자쿠 천황의 공주인 마츠무시히메(松虫姫)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전한다.[12]

다른 전승으로는 히고국 고카쇼(五家荘)의 이야기가 있다. 이 지역에서는 소고로가 고카쇼 하바키(五家荘葉木)의 지두(地頭)였던 오가타자에몬(緒方左衛門)의 아들이었으며, 후에 시모사국의 기우치(木内)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15]

3. 2. 직소와 처형

사쿠라 번주 호리타 마사노부는 새로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영지 백성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4]。 이에 영지 내 명주(名主, 마을 대표)들은 번의 군봉행(郡奉行)이나 가로(家老)에게 과도한 세금을 폐지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4]。 그들은 에도로 가서 번의 에도 저택에 직접 호소(문소, 門訴)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4], 대표 6명이 로주(老中)에게 가마소(駕籠訴, 행차 중인 가마에 직접 호소)를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당했다[4]

여러 차례의 호소가 모두 실패하자, 소고로는 혼자서 쇼군에게 직접 가마소를 하기로 결심했다[4]。 『지장당 통야 이야기』(地蔵堂通夜物語)에 따르면 이 사건은 조오 2년(1653년)에 일어났으며[4], 소고로는 우에노간에이지에 참배하러 가던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직소했다고 한다. 반면, 『호리타 소동기』(堀田騒動記)에서는 쇼호 원년(1644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어[4], 이 경우 직소 대상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된다.

직소의 결과, 소고로의 호소는 받아들여져 사쿠라 번 영민들의 과중한 세금 부담은 해결되었다[4]。 그러나 막부의 법을 어기고 쇼군에게 직접 호소한 죄로 소고로 부부는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네 아들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4]

나리타시에 위치한 도쇼 사(소고 영당)의 기록에 따르면, 처형된 소고로와 가족의 유해는 초유(澄祐) 화상이 거두어 고즈가하라(公津ヶ原) 형장에 매장했다고 전해지며, 현재 절 경내에 있는 '소고 님 어묘(御廟)'가 바로 그 자리라고 한다[16]

도쇼지 대본당(소고 레이도)

4. 사후 추앙과 영향

사쿠라 소고로는 사후 그의 넋을 기리고 원한을 달래려는 움직임 속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다양한 문학과 예술 작품으로 재창작되어 의민(義民)으로서의 이미지가 널리 퍼졌으며, 후대의 사회 운동과 정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4. 1. 원령 전설과 신앙



1715년에 편찬된 『총엽개록』에는 소고로가 호리타 가문에 재앙을 내렸다는 설과, 사쿠라 번주 호리타 마사노부의 영지 몰수(개역)가 소고로의 원령 때문이라는 설이 기록되어 있다.[4][6] 이는 소고로가 처형될 때 억울함을 호소하며 성주를 저주하고 죽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4] 특히 공진촌을 중심으로, 번과의 소송에서 패하여 처형된 소고로가 호리타 가문을 멸망시켰고,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장문산(長門山)에 그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6] 이 때문에 '소고궁'(宗吾宮)이라는 사당이 세워졌다고 『총엽개록』은 기록하고 있다.[4]

엔쿄 3년(1746년), 호리타 마사노부의 동생인 호리타 마사토시의 후손인 호리타 마사아키가 사쿠라 번주로 부임했다.[3] 마사아키는 소고로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장문산(현재 지바현 사쿠라시 오사쿠라)에 소고로를 모시고 '입의 명신'(口ノ宮明神)이라 칭했다.[3][6] 또한, 호레키 2년(1752년)을 소고로 부자의 백주기(조오 2년(1653년) 8월 4일 처형설 기준[3])로 삼아 입의 명신 사당을 세우고, '료후 도칸 거사'(涼風道閑居士)라는 법호를 추증했으며(도쇼지에 따르면 '소고 도칸 거사'(宗吾道閑居士)라고도 한다[16]), 이후 매년 봄가을로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3] 간세이 3년(1791년)에는 호리타 마사요리가 소고로에게 '도쿠만인'(徳満院)이라는 원호를 보내고 석탑 한 기를 기증했으며,[16] 분카 3년(1804년)에는 호리타 마사토키가 소고로의 자손에게 공양전을 하사했다.[16] 이처럼 사쿠라 번 호리타 가문이 소고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18세기 후반 소고로 이야기의 형성이 더욱 촉진되었다.[6]

에도 시대 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의민(義民)으로 추앙받는 사쿠라 소고로를 모시는 사당과 신사가 일본 각지에 건립되었다. 가부라기 유키히로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약 30곳이 확인된다.[8] 나리타시의 도쇼지는 메이지 시대에 사쿠라 소고로의 영혼을 모시는 소고 레이도(宗吾霊堂)를 세웠으며, 현재는 절 자체가 '소고 레이도'라는 통칭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소고 님'(宗吾様)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17][8] 오사쿠라의 '입의 명신'(구치노미야 신사)은 다이쇼 시대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인접한 장문 신사(長門神社)와 합쳐져 장문구치노미야 신사(長門口ノ宮神社)가 되었으며,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함께 제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나가노현 이다시 가미이다(上飯田) 字 실산(實山)의 마쓰카와이리 사쿠라 신사(松川入佐倉神社)는 간분 12년(1671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져, 소고로를 모시는 신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18] 이는 호리타 마사노부가 이이다 번주이자 처남인 와키자카 야스마사에게 맡겨졌을 당시, 소고로 사건 등으로 심란해하던 마사노부를 위로하기 위해 야스마사의 부인이 어전 의사와 상담하여 작은 사당을 세운 것이 기원이라고 전해진다.[18] 이다시 지역에는 소고로를 모시는 사당과 신사가 최소 11곳 존재한다.[18] 나가노현 이다시 북쪽의 사쿠라 신사(佐倉神社)는 쇼와 불황으로 농촌 사회 불안이 확산되던 1932년(쇼와 7년), 소고 레이도의 신령을 분령(分霊)받아 창건되었다.[19][20]

도쿄도 다이토구 고토부키(寿) 3정목에 있던 소고덴(宗吾殿)은 오미국 미야카와 번 호리타 가문(호리타 마사노부의 자손 가계)이 저택 내에 모셨던 것으로, 교와 3년(1803년) 법요 무렵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으로 소실된 후 쇼와 28년(1953년)에 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으나,[21] 2017년에 해체되었다.[22]

니가타시 주오구의 고후루마치 아타고 신사(古町愛宕神社) 경내에 있는 구치노 신사(口ノ神社)는 구치노미야 신사에서 분령을 받아 1884년(메이지 17년)에 창건되었으며, 지역에서 발생한 니가타 메이와 소동의 의민들도 함께 모시고 있다.[23]

4. 2. 문학과 예술 작품

사쿠라 소고로의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 성립된 『지장당 통야 이야기』[9][10], 『호리타 소동기』[11], 『사쿠라 화실 이야기』[12]와 같은 실록본, 그리고 강담과 가부키의 『사쿠라 의민전』[2]을 통해 그려졌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서로 내용이 다르거나 사실과 다른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4]

소고 영당(소고 부자 묘)의 옥원. 강담사 3대 칸다 하쿠잔 기증.


소고 영당(소고 부자 묘)의 옥원. 낭곡사 하루히테이 세이키치 기증.


호레키 연간(1751년 - 1764년) 이후에 성립된 실록본 『지장당 통야 이야기』[24]와 강담사 이시카와 이치무, 초대 이치리츠사이 분샤 등이 엮은 『사쿠라 의민전』[24]이 편찬되었다. 사쿠라 소고로를 주인공으로 한 실록본은 크게 지장당 계열(『지장당 통야 이야기』 등), 소동기 계열(『홋타 소동기』, 『사쿠라 소동기』 등), 그리고 소동기 계열에서 발전한 『사쿠라 화실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25] 『사쿠라 화실 이야기』는 소고로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새롭게 창작하여 덧붙였으며[12], 쇼테이 킨스이의 독본 『충용 아사쿠라 일기』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25]

사쿠라 소고로 이야기가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1851년 에도의 나카무라자에서 초연된 3대 세가와 뇨코 작의 가부키 『도자마 사쿠라 소시』이다.[26][27][28] 이 작품은 시대 배경을 무로마치 시대로 설정하고, 야나기테이 타네히코의 합권 『가짜 무라사키 시골 겐지』의 세계관을 빌려왔으며, 주인공 이름도 '아사쿠라 토고'로 바꾸었다.[27][28] 특히 이 작품은 가부키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 봉기'를 다룬 것으로[28] 큰 인기를 끌었고[29][6], 이후 '의민물'이라는 장르의 효시가 되었다.[29] 메이지 시대 후기 이후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실제 이름으로 바꾸어 상연하게 되었고, 제목도 『사쿠라 의민전』으로 정착했다.[27][6]

이러한 이야기와 연극을 통해 사쿠라 소고로는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민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쿠라 의민전'[27]이라는 제목으로 가부키, 강담, 낭곡, 젠신자 등 다양한 공연 예술 분야에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상연되는 인기 있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소고로의 일화를 모델로 한 현대 작품도 있다. 사이토 류스케의 아동 문학 단편 『혀 내밀기 촌마』(1967년, 제17회 쇼가쿠칸 문학상 수상)는 작가 스스로 소고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했다고 밝혔다.[33] 또한 키타 야스아키의 만화 『헤이세이 의민 전설 대표인』(2002년)에는 소고로의 후손으로 설정된 인물이 등장한다.

4. 3. 현실 정치와 사상에 미친 영향

하야시 모토이는 『도잔 사쿠라소』에 등장하는 번주, 수탈파 가로, 선정을 베푸는 가로 등의 대사를 통해 막말기 민중의 사회 의식과 정치 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28]

막말에서 메이지 초년에 걸쳐 일어난 민중 봉기에서는 사쿠라 소고로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6] 예를 들어, 안세이 6년(1859년) 시나노 국 이나 계곡의 시라카와 번 영지가 아닌 곳에서 일어난 난잔 일규의 지도자 오기소 이노헤이[30]는 사쿠라 소고로 이야기를 강담 형식으로 만들어 봉기를 조직했다고 전해진다.[31]

다양한 사회 운동가나 사상가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사쿠라 소고로를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선구적인 인물로 내세웠다.[6]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도 그중 한 명으로[6], 그의 저서 『학문의 권장』에서 소고로를 "예로부터 유일한 충신 의사"라고 언급했다.[32] 자유민권 운동가들은 소고로에게서 민권 운동의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았으며[6], 그의 이야기는 쇼와 공황이나 전후 개혁 시기에도 새로운 해석과 함께 다시 주목받았다.[6] 언론인 이시카와 한잔은 사회 운동가 다나카 쇼조에게 "그대는 그저 사쿠라 소고로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메이지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촉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영향은 전후에도 이어져, 1950년대 구주쿠리 해변 투쟁에서 체포된 사람들이 주변 어민들로부터 "9명의 소고"라고 불리며 칭송받기도 했다.

5. 미디어

페르소나 5에 등장하는 캐릭터 사쿠라 소지로의 이름은 사쿠라 소고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사쿠라 소고로의 일화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는 사이토 류스케의 아동 문학 단편 『혀 내밀기 촌마』(1967년)가 있다. 이 작품은 제17회 쇼가쿠칸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작가 사이토 본인이 소고로의 일화를 바탕으로 창작했다고 해설했다.[33]

또한, 키타 야스아키의 만화 『헤이세이 의민 전설 대표인』(2002년)에는 사쿠라 소고로의 후손으로 설정된 인물이 등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義民の世界 佐倉惣五郎伝説 https://www.rekihaku[...] National Museum of Japanese History 2020-10-05
[2] 웹사이트 佐倉惣五郎 https://kotobank.jp/[...] 2016-02-26
[3] 웹사이트 佐倉惣五郎 https://kotobank.jp/[...] 2016-02-26
[4] 웹사이트 佐倉惣五郎 https://kotobank.jp/[...] 2016-02-26
[5] 웹사이트 佐倉惣五郎 https://kotobank.jp/[...] 2016-02-26
[6] 웹사이트 義民の世界 佐倉惣五郎伝説 https://www.rekihaku[...]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16-02-26
[7] 서적 佐倉惣五郎 吉川弘文館 1958-11
[8] 간행물 市史講座「佐倉惣五郎と宗吾信仰」 http://www.library.c[...] 成田市立図書館 20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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