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먼 막 길라모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이먼 막 길라모르는 아일랜드의 정치인으로, 1989년부터 2016년까지 하원 의원(다일 에이렌)으로 재직했다. 그는 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며,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길모어는 북아일랜드 평화 운동과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동성 결혼 합법화에 힘썼다. 그는 2016년 정계 은퇴 후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유럽 연합 특별 대표를 역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일랜드의 불가지론자 - 다니엘 데이 루이스
영국 배우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시인 아버지와 배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메소드 연기로 명성을 얻었으며, 세 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은퇴했으나 최근 복귀했다. - 노동당 (아일랜드)의 정치인 - 제임스 코널리
제임스 코널리는 아일랜드의 사회주의자, 혁명가, 노동운동가로서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 노동 운동에 참여하고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당을 창당하고 아일랜드 운수 및 일반 노동자 연합을 조직하는 데 기여했으며,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더블린 지역 사령관으로 활동하다 처형되었고 그의 사상은 아일랜드 독립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아일랜드의 노동 운동가 - 제임스 코널리
제임스 코널리는 아일랜드의 사회주의자, 혁명가, 노동운동가로서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 노동 운동에 참여하고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당을 창당하고 아일랜드 운수 및 일반 노동자 연합을 조직하는 데 기여했으며,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더블린 지역 사령관으로 활동하다 처형되었고 그의 사상은 아일랜드 독립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아일랜드의 노동 운동가 - 제임스 라킨
제임스 라킨은 아일랜드의 노동 운동 지도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리버풀 부두 파업을 주도하고 아일랜드 운송 및 일반 노동자 연맹을 설립, 더블린 록아웃을 이끌었으며 아일랜드 시민군 창설에 기여했고,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 후 아일랜드로 귀국하여 아일랜드 노동자 연맹을 결성하는 등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에이먼 막 길라모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955년 4월 24일 |
출생지 | 골웨이주 칼트라 |
국적 | 아일랜드 |
배우자 | 캐럴 해니(1981년 결혼) |
자녀 | 3명 |
웹사이트 | gilmore.ie |
공직 | |
직책 | 유럽 연합 인권 특별 대표 |
임기 시작 | 2019년 3월 1일 |
임기 종료 | 2024년 2월 29일 |
전임 | 스타브로스 람브리니디스 |
후임 | 올로프 스코오그 |
대통령 | 장클로드 융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
공직 (콜롬비아 평화 프로세스) | |
직책 | 유럽 연합 특별 대표 (콜롬비아 평화 프로세스) |
임기 시작 | 2015년 10월 1일 |
임기 종료 | 2019년 2월 19일 |
전임 | 직책 신설 |
후임 | 직책 폐지 |
대통령 | 장클로드 융커 |
공직 (부총리) | |
직책 | 부총리 |
임기 시작 | 2011년 3월 9일 |
임기 종료 | 2014년 7월 4일 |
전임 | 메리 코글런 |
후임 | 조앤 버튼 |
총리 | 엔다 케니 |
공직 (외교통상부 장관) | |
직책 | 외교통상부 장관 |
임기 시작 | 2011년 3월 9일 |
임기 종료 | 2014년 7월 11일 |
전임 | 브라이언 코언 (외교) 메리 해너핀 (통상) |
후임 | 찰스 플래너건 |
총리 | 엔다 케니 |
정당 대표 | |
직책 | 노동당 대표 |
임기 시작 | 2007년 9월 6일 |
임기 종료 | 2014년 7월 4일 |
전임 | 팻 래비티 |
후임 | 조앤 버튼 |
부대표 | 조앤 버튼 |
OSCE 의장 | |
직책 | 유럽안보협력기구 의장 |
임기 시작 | 2012년 1월 1일 |
임기 종료 | 2013년 12월 18일 |
전임 | 아우드로니우스 아주발리스 |
후임 | 레오니트 코자라 |
1blankname5 | 사무총장 |
1namedata5 | 람베르토 자니에르 |
국무 장관 | |
직책 | 국무 장관 |
소속 부서 | 해양 |
임기 | 1994년–1997년 |
타흐터 달러 | |
직책 | 타흐터 달러 |
선거구 | 던 레어리 |
임기 시작 | 1989년 6월 |
임기 종료 | 2016년 2월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노동당 (1999년–현재) |
기타 정당 | 민주좌파 (1992–1999) 노동자당 (1975–1992) |
학력 | |
교육 기관 | 갈밸리 칼리지 |
모교 | 골웨이 대학교 |
2. 초기 생애 및 경력
길모어는 UCG 학생회장 및 아일랜드 학생 연합 (USI)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7][8] 이후 노동조합 조직자로 일하며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1978년 아일랜드 운송 및 일반 노동자 연합(현재 SIPTU)에 가입했고, 더블린 4지부(호텔 및 케이터링)와 더블린 14지부(엔지니어링)에서 잠시 근무한 후 골웨이 지부 임시 서기(1978-79), 트랄리 지부 서기(1979-81), 전문 및 관리 직원 지부 서기(1981-89)로 빠르게 승진했다.[9] 그는 골웨이에서 세금 시위를 조직하고 케리 주의 정리 해고와 폐쇄에 저항하는 데 크게 관여했다.[9]
2. 1. 출생 및 가정 환경
에이먼 길모어는 1955년 골웨이 주 칼트라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14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는 잡종 농장을 운영하며 길모어와 그의 남동생 존을 키웠다.[4]길모어는 칼트라의 작은 2교사 국립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아일랜드어로 교육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유창하게 아일랜드어를 구사한다. 6학년 국가 초등 시험을 치른 후 골웨이 군 의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중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1967년 기숙생으로 가르발리 칼리지 발리나슬로에 입학했다.[5]
학위 취득을 위한 3단계 보조금을 활용하여 UCG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대학교 드라마 학회의 적극적인 회원이었다. 여기에는 극장 감독 게리 하이네스, 배우 마리 멀렌 등이 있었고, 이들은 나중에 드루이드 극단을 창단했다. 문학 및 토론 협회를 통해 대학 토론에도 참여했다.[6]
반 대표로 선출되었고, 18세의 나이로 1974년 7월부터 1975년 6월까지 UCG 학생회 회장을 역임했다. 1975년, 임기 말에 공식 신페인에 가입한 UCG 공화 클럽에 가입했다. 그 정당은 나중에 신페인 – 노동자당으로 개명되었고, 이후 노동자당이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회피하고 공식 공화 운동에 가입한 것을 축소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그 정당이 "그 당시 노동자당이 되는 과정에 있었고,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수 없다"고 말했다.[7]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아일랜드 학생 연합 (USI) 회장을 역임했다.[8]
2. 2. 교육
에이먼 길모어는 칼트라의 작은 2교사 국립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는 아일랜드어로 교육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유창하게 아일랜드어를 구사한다.[5] 그는 6학년 국가 초등 시험을 치른 후 골웨이 군 의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중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1967년 그는 기숙생으로 가르발리 칼리지 발리나슬로에 입학했다.[5]그는 학위 취득을 위한 3단계 보조금을 활용하여 UCG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교 드라마 학회의 적극적인 회원이었다. 여기에는 극장 감독 게리 하이네스, 배우 마리 멀렌 등이 있었고, 이들은 나중에 드루이드 극단을 창단했다. 그는 또한 문학 및 토론 협회를 통해 대학 토론에 참여했다.[6]
그는 반 대표로 선출되었고, 나중에 18세의 나이로 1974년 7월부터 1975년 6월까지 UCG 학생회 회장을 역임했다.[7] 1976년부터 1978년까지 길모어는 아일랜드 학생 연합 (USI) 회장을 역임했다.[8]
2. 3. 학생 운동 및 노동 운동
에이먼 길모어는 대학교 시절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반 대표를 거쳐 1974년 7월부터 1975년 6월까지 UCG 학생회 회장을 역임했으며,[7] 1976년부터 1978년까지는 아일랜드 학생 연합 (USI) 회장을 지냈다.[8] 대학교에서는 드라마 학회와 문학 및 토론 협회에서도 활동했다.[6]정치 경력을 시작하기 전, 길모어는 노동조합 조직자로 일했다. 1978년 아일랜드 운송 및 일반 노동자 연합(현재 SIPTU)에 가입하여 여러 지부에서 활동하며,[9] 골웨이에서 세금 시위를 조직하고 케리 주의 정리 해고와 폐쇄에 저항하는 데 앞장섰다.[9] 길모어는 노동조합 간부로서 "옹호하는 것을 좋아"하며, "개선을 위해 일하고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큰 만족감을 얻는다"고 말했다.[10]
3. 정치 경력
길모어는 1989년 총선에서 던 레어 선거구의 노동자당 소속으로 다일 에이렌에 처음 선출되었으며, 2016년 총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모든 총선에서 재선되었다.[11]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와 함께 노동자당의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버리고 자유 시장 경제를 수용하려 했다.[12]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1992년 길모어는 데 로사를 포함한 6명의 의원들과 함께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민주 좌파를 창당했다.
북아일랜드 평화를 위해 노력한 길모어는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 에이먼 던피 등과 함께 프로비저널 IRA의 더블린-벨파스트 철도 폭탄 테러에 대응하여 1989년 평화 열차 캠페인을 조직했다. 외무부 및 무역부 장관으로서도 북아일랜드는 그의 우선순위였으며, 특히 노조 공동체와의 소통 노력이 인정받았다.[14][15]
레인보우 연합 (1994년~1997년)에서 해양부 차관으로 활동하며 항만 소유권 개혁, 항만 개발 투자, 아일랜드 해역 내 핵 선박 금지, 해상 투기 제한 등을 감독했다.[16]
1999년 브렌던 하울린과 함께 루아이리 퀸 지도 아래 민주 좌파와 노동당의 합병 협상을 이끌었으며,[17] 1999년부터 2007년까지 노동당 환경, 주택 및 지방 정부 대변인을 역임했다.
2002년 퀸 사임 후, 패트 래비트를 상대로 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길모어는 국제 연합 의회 설립 운동을 지지하며, 국제 연합의 민주적 개혁과 책임성 강화를 옹호했다.[18]
3. 1. 초기 정치 활동
길모어는 1985년 던 레어-래스다운 선거에서 당선되어 던 레어 자치 의회와 더블린 카운티 의회에서 활동했다. 1991년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1994년 1월 두 의회가 모두 폐지된 이후에는 던 레어–래스다운 카운티 의회에서 활동했다.1989년 총선에서 던 레어 선거구의 노동자당 소속으로 처음 다일 에이렌에 선출되었으며, 2016년 총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모든 총선에서 재선되었다.[11]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와 함께 노동자당의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버리고 자유 시장 경제를 수용하도록 당을 이끌었다.[12] 1992년 2월 15일 던 레어에서 열린 특별 Ardfheis|아르드헤이스ga에서 데 로사와 데스 게라티 사무총장이 제안한 결의안은 부결되었다.[13] 이 결의안은 기존 당원 사임, 11명의 잠정 집행 위원회 선출, 당 구조 변경 등을 요구했다. 다음 날 ''Ard Chomhairle'' 회의에서 데 로사와 길모어를 포함한 7명의 국회의원 중 6명이 노동자당을 탈당, 민주 좌파(뉴 아젠다)를 창당했다.
길모어는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북아일랜드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 에이먼 던피 등과 함께 프로비저널 IRA의 더블린-벨파스트 철도 폭탄 테러에 대응하여 1989년 시작된 평화 열차 캠페인의 최초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 북아일랜드는 외무부 및 무역부 장관으로서 길모어의 우선순위였으며, 특히 노조 공동체와의 소통 노력이 인정받았다.[14][15]
레인보우 연합 (1994년~1997년)에서 해양부 차관으로 활동하며 항만 소유권 개혁, 항만 개발 투자, 아일랜드 해역 내 핵 선박 금지, 해상 투기 제한 등을 감독했다.[16]
브렌던 하울린과 함께 1999년 루아이리 퀸 지도 아래 민주 좌파와 노동당의 합병 협상을 이끌었다.[17] 1999년부터 2007년까지 노동당 환경, 주택 및 지방 정부 대변인을 역임했다.
2002년 퀸 사임 후, 길모어는 패트 래비트를 상대로 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이 무렵 길모어는 국제 연합 의회 설립 운동을 지지했는데, 이 단체는 국제 연합의 민주적 개혁과 책임성 강화를 옹호한다.[18]
3. 2. 민주 좌파 창당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길모어는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와 함께 노동자당의 일부 마르크스주의적 측면을 버리고 자유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도록 당을 이끌려고 시도했다.[12]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길모어와 데 로사는 지지자들과 함께 1992년 2월 15일 던 레어에서 열린 특별 Ardfheis|아르드피아스ga에서 준군사 활동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데 로사와 사무총장 데스 게라티가 제안한 결의안은 기존 당원들의 사임을 요구하고, 11명의 잠정 집행 위원회를 선출하며, 당 구조에 몇 가지 중요한 변경을 가하는 것이었지만 부결되었다.[13] 다음 날 'Ard Chomhairle' 회의에서 데 로사와 길모어를 포함한 당의 7명의 국회의원 중 6명이 노동자당에서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인 민주 좌파(원래는 뉴 아젠다로 알려짐)를 창당했다.
3. 3. 북아일랜드 평화 운동
길모어는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 에이먼 던피 등 다른 주요 인물들과 함께 길모어는 1989년에 프로비저널 IRA의 더블린-벨파스트 철도에 대한 반복적인 폭탄 테러에 대응하여 시작된 평화 열차 캠페인의 최초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14] 북아일랜드는 길모어에게 외무부 및 무역부 장관으로서도 우선순위였으며, 특히 그는 노조 공동체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인정받았다.[14][15]2012년 11월 11일, 길모어는 벨파스트에서 열린 연례 현충일 행사에 참여한 최초의 아일랜드 정부 장관이 되었는데, 이때 벨파스트 시청의 전몰자 위령탑에 월계관을 헌화하여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렸다. 그는 이듬해에도 이 행사에 다시 참석했다.[37][38]
2013년 9월, 아이리시 타임스는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영국-아일랜드 협회 연설에서 "여러 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연합주의자들의 인식을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며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열었다"고 보도했다.[14][39] 같은 연설에서 그는 또한 "아일랜드 정부가 3년 안에 부활절 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영국 왕실과 영국 정부 대표, 연합주의 지도자들을 더블린에 초청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40] 그는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미국 외교관 리처드 하스가 의장을 맡아 열린 퍼레이드, 깃발, 문장, 그리고 과거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의 일원이었다.[41][42] 그는 2014년 7월 내각 개편에서 외무부 장관에서 교체될 때까지 관련 당사자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했다.[43][44][45]
3. 4. 레인보우 연합 참여
레인보우 연합 (1994년~1997년)에서 길모어는 해양부 차관으로 활동했다.[16] 그는 항만 소유권의 주요 개혁, 항만 개발 투자, 아일랜드 해역에서 핵 선박 금지, 해상 투기 제한 등을 감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16]3. 5. 노동당 복귀 및 대표 선출
1989년 총선에서 던 레어 선거구의 노동자당 소속 의원으로 처음 다일 에이렌에 선출되었으며, 2016년 총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후 모든 총선에서 재선되었다.[11]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그는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와 함께 노동자당의 일부 마르크스주의적 측면을 버리고 자유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도록 당을 이끌려고 시도했다.[12]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1992년 길모어는 데 로사를 포함한 6명의 의원들과 함께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민주 좌파를 창당했다.

1999년, 길모어는 브렌던 하울린과 함께 민주 좌파와 노동당의 합병 협상을 주도했고,[17] 합당 이후 2007년까지 노동당에서 환경, 주택 및 지방 정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2002년 루아이리 퀸 대표 사임 후, 길모어는 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으나 패트 래비트에게 패배했다.
팻 래비트가 2007년 8월 당 대표직에서 사임한 후, 길모어는 대표직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이클 D. 히긴스, 루어리 퀸, 윌리 펜로즈, 리즈 맥마너스, 에메트 스태그 등 고위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고, 유일한 후보로 9월 6일에 공식적으로 대표로 확정되면서 경선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19] 그는 노동당의 열 번째 대표가 되었다.
길모어는 대표직을 맡은 초기부터 노동당이 다음 정부를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권자들에게 노동당을 세 번째 선택지로 제시하기 시작했다.[60] 2009년 아일랜드 지방 선거에서 노동당은 132석(43석 증가)을 획득했으며, 2010년 7월까지 선거 이후 당에 합류한 시의원들로부터 6석을 추가로 얻었다. 더블린 시의회에서 당은 다시 최대 정당이 되었고, 다른 두 주요 정당의 의석 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같은 날 열린 200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은 더블린 (유럽 의회 선거구)에서 프로인시어스 데 로사의 의석을 유지하고, 동부 (유럽 의회 선거구)에서 네사 칠더스, 남부 (유럽 의회 선거구)에서 앨런 켈리 (정치인)를 얻어 의석 수를 1석에서 3석으로 늘렸다.[20]
2009년 9월, 워터포드에서 열린 노동당 의원 회의에서 길모어는 다음 총선 이후 피아나 페일과의 연정을 단호하게 배제했으며, 이전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을 반복했다.[22] 2010년 노동당 전당대회(2010년 4월 17일)에서 길모어는 노동당이 '하나의 아일랜드'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노동당의 정책 우선순위를 일자리, 개혁, 공정성으로 꼽았다. 그는 또한 노동당이 다음 총선에서 아일랜드 국민들이 노동당을 다일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만들고 다음 정부를 이끌 수 있도록 충분한 후보를 내세울 것이라고 말했다.[23]
2010년 7월, 길모어는 총선에서 자신의 정당이 타오이섹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더라도 피아나 페일과의 연정을 다시 배제했다. 그는 자신의 정당이 아일랜드의 43개 선거구 각각에서 최소 한 석을, 더블린, 코크, 다른 도시 지역 및 통근 벨트 카운티에서 두 석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총 50석 이상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24]
2014년 5월, 지방 및 유럽 선거에서 노동당의 저조한 성적을 보인 후, 길모어는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2014년 7월 대표 선거 이후, 그는 조앤 버튼에게 당 대표직과 타나이스트직을 넘겨주었다.[30][31]
3. 6. 노동당 대표 시절 (2007-2014)
팻 래비트가 2007년 8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자, 길모어는 대표직 출마를 선언했다. 마이클 D. 히긴스, 루아이리 퀸, 윌리 펜로즈, 리즈 맥마너스, 에메트 스태그 등 당 고위 인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단독 후보로 나서 9월 6일 경선 없이 공식 대표로 확정되었다.[19] 그는 노동당의 열 번째 대표가 되었다.
길모어는 대표직 초기부터 노동당이 차기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권자들에게 노동당을 제3의 선택지로 제시했다.[60] 2009년 아일랜드 지방 선거에서 노동당은 132석(43석 증가)을 얻었고, 2010년 7월까지 당에 합류한 시의원들로부터 6석을 추가 확보했다. 더블린 시의회에서는 다시 최대 정당이 되었으며, 다른 두 주요 정당의 의석 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같은 날 치러진 200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은 더블린 (유럽 의회 선거구)에서 프로인시어스 데 로사의 의석을 유지하고, 동부 (유럽 의회 선거구)에서 네사 칠더스, 남부 (유럽 의회 선거구)에서 앨런 켈리 (정치인)를 당선시키며 의석 수를 1석에서 3석으로 늘렸다.[20]
길모어는 2008년 헌법 제28차 개정 법안 2008 찬성 투표를 독려했다. 부결되자 "리스본 조약은 죽었다"고 선언했으나, 2011년 공개된 2008년 7월 23일자 미국 외교 전보 유출에 따르면, 미국 대사에게는 두 번째 국민투표를 지지한다고 비공개적으로 밝혔다. 대사는 "그의 공개적인 반대 입장은 당분간 '정치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고 보고했다.[21] 2009년 두 번째 국민투표에서 리스본 조약안이 통과되어 아일랜드 헌법 제28차 개정으로 이어졌다.
2009년 9월, 워터포드에서 열린 노동당 의원 회의에서 길모어는 다음 총선 이후 피아나 페일과의 연정을 배제한다고 단호히 밝혔고, 이전 인터뷰 내용을 재확인했다.[22]
2010년 4월 17일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길모어는 '하나의 아일랜드' 건설을 이끌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일자리, 개혁, 공정성을 당 정책 우선순위로 꼽았다. 또한,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이 다일 내 최대 정당이 되어 정부를 이끌 수 있도록 충분한 후보를 내세울 것이라고 말했다.[23]
2010년 7월, 길모어는 총선에서 자신의 정당이 타오이섹이 될 수 있더라도 피아나 페일과의 연정을 다시 한번 배제했다. 그는 아일랜드 43개 선거구 각각에서 최소 1석, 더블린, 코크 등 도시 지역과 통근 벨트 카운티에서 2석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하며, 총 50석 이상 획득을 예상했다.[24]
2011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길모어는 노동당을 이끌며 당 역사상 최고의 성적인 37석을 획득했다. 특히 더블린에서 18석을 얻어 수도권 최대 정당으로 부상했다. 길모어 자신도 던레어리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선거 후 노동당은 피네 게일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고, 길모어는 타나이스타 겸 외무 및 통상부 장관에 임명되었다.[1] 그는 5명의 장관을 내각에, 6명의 국무 장관을 임명하고, 메어 윌란을 법무 장관으로 지명했다. 또한, 정부 정책 통제력 강화를 위해 1992년 딕 스프링 타나이스타 시절 만들어졌다가 메리 하니에 의해 폐지된 총리실 내 타나이스타 직책을 부활시켰다.[32][33]
2014년 5월, 지방 선거 및 유럽 선거에서 노동당의 저조한 성적에 책임을 지고 길모어는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2014년 7월 대표 선거 이후, 조앤 버튼에게 당 대표직과 타나이스트직을 넘겨주었다.[30][31]
3. 6. 1. 사회 개혁 주도
1985년 던 레어–래스다운 선거에서 당선되어 던 레어 자치 의회와 더블린 카운티 의회에서 활동했다. 1991년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두 의회는 1994년 1월에 폐지되었고, 이후 길모어는 던 레어–래스다운 카운티 의회에서 활동했다.[11]1989년 총선에서 던 레어 선거구의 노동자당 소속 의원으로 처음 다일 에이렌에 선출되었으며, 2016년 총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모든 총선에서 재선되었다.[11]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와 함께 노동자당의 일부 마르크스주의적 측면을 버리고 자유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도록 당을 이끌었다.[12] 1992년 2월 15일 던 레어에서 열린 특별 Ardfheisga에서 데 로사와 길모어 지지자들은 준군사 활동과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데 로사와 사무총장 데스 게라티가 제안한 결의안은 부결되었다.[13] 다음 날 ''Ard Chomhairle'' 회의에서 데 로사와 길모어를 포함한 당의 7명의 국회의원 중 6명이 노동자당에서 탈당하여 민주 좌파를 창당했다.
길모어는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 에이먼 던피 등과 함께 프로비저널 IRA의 더블린-벨파스트 철도 폭탄 테러에 대응하여 1989년에 시작된 평화 열차 캠페인의 최초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 북아일랜드는 외무부 및 무역부 장관으로서도 우선순위였으며, 노조 공동체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인정받았다.[14][15]
레인보우 연합 (1994년~1997년)에서 해양부 차관으로 활동하며 항만 소유권 개혁, 항만 개발 투자, 아일랜드 해역에서 핵 선박 금지, 해상 투기 제한 등을 감독했다.[16]
노동당의 브렌던 하울린과 함께 1999년 루아이리 퀸의 지도 아래 민주 좌파와 노동당의 합병을 이끈 협상의 핵심 인물이었다.[17] 1999년부터 2007년까지 환경, 주택 및 지방 정부 대변인으로 노동당 전선에서 활동했다.
2002년 퀸이 사임한 후, 길모어는 패트 래비트를 상대로 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이 무렵 길모어는 국제 연합 의회 설립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는데, 이 단체는 국제 연합의 민주적 개혁과 보다 책임감 있는 국제 정치 시스템 구축을 옹호한다.[18]
3. 6. 2. 경제 위기 대응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에이먼 길모어는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와 함께 노동자당이 마르크스주의적 측면을 버리고 자유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12]2013년 12월 15일, 아일랜드는 675억유로 규모의 유럽연합(EU)/유럽 중앙 은행(ECB)/국제 통화 기금(IMF) 구제 금융 프로그램에서 탈출한 최초의 유로존 국가가 되었다. 트로이카 구제 금융은 피아나 페일/녹색당 연립 정부가 설정한 아일랜드 은행 부채에 대한 포괄적인 보증으로 인해 국가가 파산 위기에 처하고, 정부가 유럽 연합/IMF에 의존하게 된 아일랜드 부동산 시장 붕괴로 2010년 11월 시작되었다.[35]
2014년 11월, 아일랜드 정부는 예방적 신용 한도를 요청하지 않고, '깨끗한 구제 금융 탈출' 방식으로 EU/IMF 구제 금융 프로그램에서 탈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RTÉ의 모닝 아일랜드 라디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길모어는 정부가 구제 금융에서 깨끗하게 탈출하기로 결정하기 전 국제 기관 및 다른 EU 회원국과 오랜 협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2015년 초까지 아일랜드 정부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국립 재무 관리청의 200억유로 규모 "백스톱" 준비 자금이 있다고 밝혔다.[36]
3. 6. 3. 외교 정책
1989년 총선에서 던 레어 선거구의 노동자당 소속으로 다일 에이렌에 처음 선출된 에이먼 길모어는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에 힘썼다.[11] 프로인시아스 데 로사, 에이먼 던피 등과 함께 프로비저널 IRA의 더블린-벨파스트 철도 반복 폭파에 대응하여 1989년 평화 열차 캠페인을 조직했다. 북아일랜드는 길모어에게 외무부 및 무역부 장관으로서도 우선순위였으며, 특히 노조 공동체와의 관계 개선 노력이 주목받았다.[14][15]피네 게일과의 연립 정부 구성 후, 길모어는 타나이스타 겸 외무부 및 통상부 장관에 임명되었다.[1] 2012년 11월 11일, 벨파스트에서 열린 연례 현충일 행사에 참여하여 벨파스트 시청 전몰자 위령탑에 월계관을 헌화한 최초의 아일랜드 정부 장관이 되었다. 이듬해에도 같은 행사에 참석했다.[37][38]
2013년 9월, 아이리시 타임스는 케임브리지 영국-아일랜드 협회 연설에서 "여러 아일랜드 정부가 IRA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연합주의자들의 인식을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며 "새로운 정치적 지평을 열었다"고 보도했다.[14][39] 같은 연설에서 "3년 안에 부활절 봉기 기념식에 영국 왕실, 영국 정부 대표, 연합주의 지도자들을 더블린에 초청하길 바란다"고 밝혔다.[40]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관 주재로 열린 퍼레이드, 깃발, 문장, 과거사 관련 문제 해결 과정에 참여했다.[41][42] 2014년 7월 내각 개편으로 외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관련 당사자들과 계속 소통했다.[43][44][45]
2012년 1월 1일, 아일랜드는 처음으로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2012년 의장직을 맡았다. 길모어는 외교 통상부 장관으로서 OSCE 현직 의장을 역임했다.[46]
2013년 상반기, 아일랜드의 7번째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국 수임 기간 동안 유럽 연합 일반 사무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EU의 7개년 예산안(다년도 재정 프레임워크, MFF) 협상에서 유럽 의회를 상대로 이사회를 대표했다.[47][48]
2011년 11월, 길모어는 경제적 이유로 이란, 바티칸 주재 아일랜드 대사관과 동티모르 대표 사무소 폐쇄를 발표했다. 단, 바티칸 주재 대사는 로마가 아닌 아일랜드에 상주하도록 했다.[49] 2014년 1월, 무역 및 투자 확대를 목표로 전 세계에 8개의 새로운 외교 공관을 개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0]
외교 통상부 장관 재임 시절, 길모어는 약 1,100만 명의 불법 이민자(그 중 5만 명 이상은 아일랜드인으로 추정)를 돕기 위한 미국 이민법 전면 개정 법안 통과를 위해 노력했다.[51][52][53] 2014년 6월 17일,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공화당 소속 하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이민법 개정 관련 회담을 가졌다.[53][54][55]
3. 7. 노동당 대표 사임 및 정계 은퇴
길모어는 1989년 총선에서 던 레어 선거구의 노동자당 소속 의원으로 처음 다일 에이렌에 선출되었으며, 2016년 총선까지 재선되었다.[11] 그는 2015년 6월 2일, 2016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57]4. 정계 은퇴 이후
2015년 6월 2일, 길모어는 2016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57] 2016년 2월, 그는 더블린 시티 대학교 법정부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2017년, 그는 부다페스트에 있는 중부 유럽 대학교 공공 정책 학교에서 객원 실무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또한 유럽, 영국, 미국, 라틴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 전역의 대학, 싱크탱크 및 공공 정책 컨퍼런스에서 강연했다.
그는 또한 골웨이 국립 아일랜드 대학교 외부 자문 위원회 위원이며 오스트리아 알프바흐 포럼 국제 자문 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4. 1. 유럽 연합 특사 활동
2015년 10월 1일, 길모어는 유럽 연합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 페데리카 모게리니에 의해 콜롬비아 평화 프로세스를 지원하는 유럽 연합 특별 특사로 임명되었다.[58]2019년 2월 19일, 유럽 연합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 페데리카 모게리니는 에이먼 길모어를 유럽 연합 인권 특별 대표로 지명했으며, 이는 2019년 2월 20일 외무 이사회에서 승인되었다.[58] 그의 임기는 2024년 2월 29일에 종료되었다.
5. 수상 및 영예
2015년, 길모어는 아일랜드의 동성 결혼 국민투표에서 그가 한 역할로 인해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포린 폴리시''에서 선정한 100명의 선도적인 글로벌 사상가 중 한 명으로 뽑혔다.[1]
2016년, 아일랜드 국립 대학교 골웨이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프랑스 정부는 그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로 임명했다.[3]
콜롬비아는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산 카를로스 훈장(그란 크루스)을 수여했다.[4]
6. 개인적인 삶
길모어는 대학교에서 아내 캐롤을 만났다. 그들은 1979년부터 더블린 섐킬에서 살고 있으며,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두고 있다.[4] 그의 형제 존은 워싱턴 D.C.에서 텔레비전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59]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저는 불가지론자입니다. 믿기보다는 의심하는 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같은 인터뷰에서 낙태 합법화에 대한 질문을 받자 "저는 낙태 찬성입니다"라고 답했다.[60]
그는 2010년 11월에 《빛나는 사람들: 나에게 영감을 준 사람들》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2016년에는 금융 위기와 회복 기간 동안 노동당 대표로 활동한 경험을 담은 《내부: 아일랜드 위기 정부의 숨겨진 이야기》를 출판했다.[61][62][63]
참조
[1]
뉴스
Eamon Gilmore set for Foreign Affairs
http://www.rte.ie/ne[...]
2011-03-08
[2]
웹사이트
Eamon Gilmore
https://www.oireacht[...]
2009-06-19
[3]
웹사이트
Address by OSCE Chairperson-in-Office Eamon Gilmore, Vienna, 12 January 2012
https://www.osce.org[...]
2022-09-05
[4]
간행물
Time and Place Eamon Gilmore
Sunday Times Home Ireland Magazine
2008-03-16
[5]
간행물
Gilmore back on familiar turf for Garbally return
Connacht Tribune
2010-06-04
[6]
서적
Memory Lane
Cois Coirbe Alumni Office NUI Galway
2008
[7]
기타
Eamon Gilmore interviewed on the 'Marian Finucane Show' on RTÉ Radio One
2010-10
[8]
뉴스
How power couple rose to pole position in public life
http://www.independe[...]
2010-11-01
[9]
서적
Organising History, A Centenary in Siptu
Gill and McMillan
2009
[10]
뉴스
Interview Eamon Gilmore – Equality for the Majority
http://www.villagema[...]
2010-07-09
[11]
웹사이트
Eamon Gilmore
http://electionsirel[...]
2009-06-19
[12]
간행물
The case for a new departure Making Sense
1992-03
[13]
간행물
Beware of hidden agendas
1992-03
[14]
뉴스
Unionist politicians sit up in Cambridge as Gilmore majors with timely offer and powerful delivery
http://www.irishtime[...]
2014-06-26
[15]
뉴스
Gilmore 'appalled and saddened' by Smithwick findings
https://www.irishtim[...]
2020-02-20
[16]
웹사이트
Appointment of Members of Government and Ministers of State – Dáil Éireann (27th Dáil) – Vol. 447 No. 11
https://www.oireacht[...]
1995-01-25
[17]
뉴스
Brian Dowling looks back Eamon Gilmore's path to political Leadership
http://www.rte.ie/ne[...]
2007-09-06
[18]
뉴스
Supporters
http://en.unpacampai[...]
2017-09-21
[19]
뉴스
Gilmore declared new Labour leader
http://www.rte.ie/ne[...]
2007-09-06
[20]
뉴스
How Ireland Voted special supplement
http://irishtimes.ne[...]
2010-07-09
[21]
뉴스
Gilmore 'took opposing views in public and in private'
http://www.independe[...]
2011-06-01
[22]
뉴스
Gilmore rules out coalition with FF after election
https://www.irishtim[...]
2009-09-10
[23]
뉴스
One Ireland: Gilmore addresses Labour Conference
https://web.archive.[...]
2010-04-17
[24]
뉴스
Gilmore rules out FF coalition
https://www.irishtim[...]
2010-07-21
[25]
뉴스
Referendum on same-sex marriage to be held in 2015
https://www.irishtim[...]
2020-02-20
[26]
웹사이트
Gilmore: Gay marriage 'the civil rights issue of this generation' - BreakingNews.ie
http://www.breakingn[...]
breakingnews.ie
2012-07
[27]
뉴스
Asia Briefing: Expansion of Irish missions recognises importance of Asia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3-04
[28]
뉴스
Gilmore announces 'complete review' of State's foreign policy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3-11-13
[29]
뉴스
Success or failure in meeting bailout targets will be crucial test of economic body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2-08-17
[30]
뉴스
Need to govern with more heart, says Joan Burton
http://www.rte.ie/ne[...]
RTÉ News
2014-07-04
[31]
뉴스
Eamon Gilmore resigns as Tanaiste
http://www.independe[...]
Irish Independent
2014-07-04
[32]
뉴스
Kenny appoints second secretary general
https://www.irishtim[...]
2011-07-13
[33]
뉴스
Gilmore gains more say over policy as he expands his role
http://www.independe[...]
2011-07-18
[34]
웹사이트
Chapter 10: Ireland and the Troika Programme {{!}} Report of the Joint Committee of Inquiry into the Banking Crisis
https://inquiries.oi[...]
2019-03-21
[35]
웹사이트
30 Days in September: An Oral History of the Bank Guarantee
http://www.thejourna[...]
thejournal.ie
2014-12-17
[36]
웹사이트
RTÉ – Morning Ireland – CastRoller
http://castroller.co[...]
castroller.com
2015-08-09
[37]
웹사이트
Eamon Gilmore to lay wreath at Belfast Remembrance event
http://www.rte.ie/ne[...]
RTÉ News
2012-11-09
[38]
웹사이트
Taoiseach, Tánaiste mark Remembrance Sunday
http://www.rte.ie/ne[...]
RTÉ News
2013-11-10
[39]
뉴스
State willing to act on unionist claims over IRA - Gilmore
https://www.irishtim[...]
2020-02-20
[40]
웹사이트
British royal family invited to Easter Rising 100th anniversary - BreakingNews.ie
http://www.breakingn[...]
breakingnews.ie
2015-08-09
[41]
뉴스
North's talks face challenge to address survivor concerns
https://www.irishtim[...]
2020-02-20
[42]
뉴스
Draft peace plan for Northern Ireland published online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1-01
[43]
뉴스
Intensive talks on Haass proposals to take place later this month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6-09
[44]
뉴스
Dublin and London want NI parties back in talks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5-06
[45]
뉴스
Gilmore and Haass to speak about 'window' for NI talks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5-05
[46]
뉴스
Ireland takes over chair of OSCE
https://www.irishtim[...]
2020-02-20
[47]
뉴스
Gilmore will present EU budget amid MEP resistance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3-06-25
[48]
뉴스
Gilmore: Irish prominent in breaking deadlock on €960bn euro budget
http://www.independe[...]
Irish Independent
2013-05-06
[49]
뉴스
Irish embassy to the Vatican to be closed
http://www.rte.ie/ne[...]
2011-11-03
[50]
뉴스
Embassy shake-up targets emerging export markets
http://www.independe[...]
Irish Independent
2014-01-22
[51]
뉴스
Gilmore pushes for US immigration reform at 'critical' time
https://www.irishtim[...]
2020-02-20
[52]
웹사이트
Gilmore holds out hope to expats - Irish Examiner
http://www.irishexam[...]
irishexaminer.com
2015-08-09
[53]
뉴스
Eamon Gilmore in US today for talks on immigration reform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6-17
[54]
뉴스
Gilmore 'optimistic' US Congress will pass immigration reform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6-18
[55]
뉴스
US perceives need for immigration reform, says Tánaiste
https://www.irishtim[...]
Irish Times
2014-07-03
[56]
뉴스
Coalition not trying to 'unpick' deal
https://www.irishtim[...]
2020-02-20
[57]
뉴스
Eamon Gilmore to retire from politics at next election
https://www.irishtim[...]
2015-06-02
[58]
웹사이트
COUNCIL DECISION (CFSP) 2019/346 of 28 February 2019 appointing the European Union Special Representative for Human Rights
https://eur-lex.euro[...]
2019-03-01
[59]
뉴스
Larry King
http://dynamic.rte.i[...]
2010-07-10
[60]
웹사이트
Take me to your leader
http://www.hotpress.[...]
2012-04-15
[61]
뉴스
Loose Leaves – Eamon Gilmore's book of inspiration in the pipeline
https://www.irishtim[...]
2020-02-20
[62]
뉴스
Thatcher influenced Gilmore
https://www.irishtim[...]
2011-03-19
[63]
웹사이트
Inside the Room: The Untold Story of Ireland's Crisis Government
https://www.irishaca[...]
2024-05-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