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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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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륭은 오호십육국 시대 후량의 마지막 군주로, 401년 동생 여초에 의해 옹립되어 천왕이 되었다. 그러나 실권을 쥐지 못하고 남량, 북량, 후진의 공격에 시달리다 403년 후진에 항복, 후량은 멸망했다. 이후 후진의 관리가 되었으나 416년 요비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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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륭
기본 정보
칭호천왕
왕조후량
여 (Lǚ, 呂)
이름륭 (Lóng, 隆)
즉위 정보
직위후량의 천왕
통치 기간401년–403년
이전 통치자여찬
후임 통치자없음
생애
사망 년도416년
가족 관계
아버지여보
어머니위부인
배우자양황후
통치 기간 정보
연호신정
연호 기간401년–403년

2. 생애

여륭은 여광의 동생 여보(呂寶)의 아들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숙부 여광의 통치 시기에는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승마궁술에 능숙했다.

401년 동생 여초가 여찬을 살해하고 천왕(天王)으로 추대했으나, 실권은 여초가 가졌다.[1] 여륭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형벌을 남용하고 신하들을 많이 처형하여 민심을 잃었다.

당시 후량은 남량과 북량의 공격을 받았고, 후진의 침공으로 수도 고장이 포위되자 항복하여 건강공(建康公)에 책봉되었다.[1] 403년 남량과 북량의 계속된 공격에 후진에 완전히 항복하여 후량은 멸망하였다.[1]

416년 장안에서 요필의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되었다.[1]

2. 1. 초기 생애

여륭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며, 출생 연도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여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잘생기고 승마궁술에 능숙하다고 묘사되었다. 숙부 여광(이무 황제)의 통치 말기에 장군으로 복무했지만, 그의 동생 여초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2. 2. 즉위 과정

401년, 여륭의 동생 여초는 여찬을 암살하고 여륭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여륭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여초의 설득으로 '천왕' 칭호를 사용하며 즉위했다. 여륭은 어머니 위씨를 황태후로, 아내 양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여초를 안정공으로 임명하여 대부분의 국정을 위임했다.[1]

2. 3. 재위 기간

401년, 여륭은 동생 여초가 군주 여찬을 살해하는 것을 돕고, 여초에 의해 천왕(天王)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여륭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고, 국정은 동생 안정공(安定公) 여초가 전담하였다.[1]

여륭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많은 강한 씨족들을 학살하는 등 폭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다. 당시 후량은 남량, 북량에게 번갈아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1]

후진의 황제 요흥이 침공해오자 수도 고장(姑臧)이 포위되었고, 여륭은 오랜 농성 끝에 후진에 명목상 항복하고 조카와 약 50개 씨족을 인질로 보냈다. 요흥은 여륭을 건강공(建康公)으로 봉했지만, 여륭은 내부적으로 천왕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

이후에도 남량과 북량의 끊임없는 공격과 심각한 기근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커졌다. 여륭은 남량, 북량과 평화를 맺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403년 후진에 완전히 항복하여 후량은 멸망했다.[1]

2. 4. 후진 통치하의 삶과 최후

403년 후량에서 항복한 후, 여륭은 후진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가 관리가 되었고, 건강공(建康公) 작위를 받았다. 416년, 요흥(姚興)의 아들 광평공(廣平公) 요비(姚弼)가 그의 형 요홍(姚泓)으로부터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1] 요비의 측근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요비는 자결을 강요받았다. 여륭은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요흥이 죽은 다음 날, 그의 동생 여초와 함께 요홍에 의해 처형되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여보시호는 문제(文帝), 여광의 동생[1]
어머니위씨
부인양황후
형제여초[1]


4. 평가

여륭은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즉위하여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하고, 폭정과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암군으로 평가된다. 그는 여광의 동생 여보(呂寶)의 아들로, 401년 동생 여초가 군주 여찬을 살해하는 것을 돕고 천왕(天王)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안정공(安定公) 여초가 장악했다.[1]

여륭이 즉위했을 때 후량은 남량, 북량에게 번갈아 공격받는 상황이었다. 여륭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형벌을 엄하게 하고 신하들을 많이 처형하여 민심을 잃었다.[1]

후량의 국력이 약해지자 후진이 침공해 수도 고장(姑臧)이 포위되었고, 여륭은 항복하여 건강공(建康公)에 봉해졌다. 후진군이 물러간 후 여륭과 여초는 후진의 수재(守宰)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남량과 북량의 재침략으로 403년 후진에 완전히 항복하여 후량은 멸망했다.[1]

여륭은 장안으로 끌려가 산기상서에 임명되었으나, 416년 요필의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되었다.[1]

5. 기타

여륭은 여광의 동생 여보의 아들이다. 401년 동생 여초가 군주 여찬을 살해하는 것을 돕고 천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실권은 여초가 장악했다.[1] 이후 장안으로 끌려가 산기상서에 임명되었으나, 416년 요필의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되었다.

5. 1. 요비의 난 연루

요비(姚弼)는 요흥(姚興)의 차남으로, 형 요홍(姚泓)에게서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 모반을 일으켰다. 416년, 요비의 측근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으려다 실패하자 요비는 자결해야 했다. 여륭은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요흥이 죽은 다음 날, 그의 형제 여초와 함께 요홍에게 처형되었다. 이는 당시 후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보여준다.

5. 2. 여륭 암살 사건의 진실

요비(姚弼)는 요홍(姚泓)으로부터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고, 여륭은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 416년, 요비의 측근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요비는 자결을 강요받았다. 여륭은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요흥이 죽은 다음 날, 그의 형제 여초와 함께 요홍에 의해 처형되었다.[1] 일각에서는 여륭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5. 3. 후량 멸망의 원인

여륭이 즉위했을 무렵 후량은 남량, 북량에게 번갈아 공격을 당했다. 또한 여륭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형벌을 엄하게 하고 신하들을 많이 처형하여 민심을 잃었다.

후진이 침공해와 수도 고장(姑臧)이 포위되자, 여륭은 오랜 농성 끝에 후진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남량과 북량이 다시 공격해와 후진의 국력은 더욱 쇠퇴하였다. 남량과 북량의 침략에 시달리던 여륭은 결국 403년에 후진에 나라를 완전히 넘기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량은 멸망하였다.

여륭은 폭정을 바로잡는 대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많은 유력 가문을 학살했고, 백성들은 더욱 소외되었다.[1]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여 1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매일 수백 명의 고장 주민들이 노예로 잡힐 것을 알면서도 도시를 나가겠다고 간청했다. 여륭은 이러한 행동에 분노하여 이것이 자신의 정권 이미지를 손상시킨다고 믿고 이들을 처형했다.[1]

5. 4. 현대적 관점에서의 재조명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여륭과 후량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륭의 폭정과 무능함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주변 국가들의 침략이라는 외부적인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여륭은 여광의 동생 여보의 아들로, 401년 동생 여초가 군주 여찬을 살해하는 것을 돕고 천왕으로 추대되었다.[1] 그러나 실권은 여초가 장악했다.[1]

여륭 즉위 당시 후량은 남량, 북량에게 번갈아 공격받는 상황이었다. 여륭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형벌을 엄하게 하고 신하들을 많이 처형하여 민심을 잃었다.

후량의 국력이 약화되자 후진이 침공해 수도 고장이 포위되었고, 여륭은 항복하여 건강공에 책봉되었다. 후진군이 물러간 후 여륭과 여초는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의 공격으로 403년 후진에 완전히 항복하였다.

여륭은 장안으로 끌려가 산기상서에 임명되었으나, 416년 요필의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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