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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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미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08년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인성학교와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고, 1927년 엄항섭과 결혼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지원하고, 임시정부 요인을 수행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남편의 내조에 힘썼다. 남편의 납북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1981년 중풍으로 사망했다.

연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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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년기 (1908년 ~ 1926년)

延薇堂중국어은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룽장 용정해관에서 태어났다. 1919년 아버지 연병환룽장에서 3월 13일 만세 운동을 지원하다 일제 경찰에 2개월 동안 체포되었다. 당시 일본 영사관은 항일 운동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을 압박했고, 중국 경찰은 시위대를 공격했다. 이날 중국군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했고, 중국 세관은 연병환이 일하던 용정 해관을 톈진 세관으로 전근시켰다. 1919년 6월 18일 송별회 참석차 집을 비운 사이 일본 영사관 경찰이 급습, 연병환에게 아편이 발견되었다고 조작해 체포했으나, 귀화 중국인 신분이었던 그는 2개월 구금 후 풀려났다. 10월 상하이 세관으로 전근되면서 연미당과 가족들은 상하이로 이사했다.

이후 상하이 인성학교와 진강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으며, 1926년 아버지가 진강에서 사망한 후 상하이에 정착했다.

3.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27년 ~ 1945년)

1927년 엄항섭과 결혼 후,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과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등에서 여성 독립운동 참여와 역량 강화를 위해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훙커우 공원 사건에서 윤봉길 의사의 자결용 도시락 폭탄 보자기를 제작했다. 1936년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며 장사로 이동했고, 김구를 간호하기도 했다. 1938년 안창호 추도식에 참석했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했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구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7월 광복군 7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귀국하였다.

3.1. 훙커우 공원 의거 지원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사건에서 윤봉길이 사용할 도시락 폭탄 보자기를 제작하여 의거를 지원하였다.

3.2.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 활동

1927년 3월 20일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이자 독립운동가인 엄항섭과 결혼했고, 이듬해인 1928년 1월 21일 딸 엄기선을 낳았다.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과 1930년 8월 결성된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에서 임시위원을 맡아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역량 확보를 위해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사건에서 윤봉길의 자결용 도시락 폭탄의 보자기를 만들었으며, 일제의 추적을 피해 1936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사로 이동할 때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였다. 장사에서 열린 3당 통일회의에서 이운한의 저격을 받은 김구를 간호하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장사로 이동한 뒤부터는 아명인 연미당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본명보다 연미당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1938년 4월 15일 안창호 추도식에 참석하여 이복영, 김정숙과 애도가를 불렀고, 같은 해 10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선전과 홍보에 참여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한 뒤에는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구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4. 광복 이후의 삶과 죽음 (1946년 ~ 1981년)

1946년 7월, 연미당은 광복군 7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대외활동을 중단하고 남편 엄항섭의 내조에 힘썼다. 그러나 남편이 납북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남편이 월북했다는 오해까지 받았다. 중풍으로 고생하던 중 1981년 1월 1일 사망하였다.

5. 평가 및 유산

연미당은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을 지원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사건에서 윤봉길의 자결용 도시락 폭탄의 보자기를 만들었으며, 1938년 10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선전과 홍보에 참여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한 뒤에는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구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1927년 3월 20일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이자 독립운동가인 엄항섭과 결혼했고, 이듬해인 1928년 1월 21일 딸 엄기선을 낳았다. 후에 엄기선은 임시정부에 참여해 이후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연미당은 1930년 8월 결성된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에서의 임시위원을 통해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역량 확보를 위해 활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7월 광복군 7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후에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남편의 내조에 힘을 쏟았으나 남편이 납북된 이후 경제적 어려움, 남편이 월북했다는 오해와 중풍으로 인해 고생하던 중 1981년 1월 1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