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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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봉길은 1908년 충청남도 덕산군(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후,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폭탄 투척 의거를 감행했다. 이 의거는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장제스 중화민국 주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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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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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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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윤봉길 |
한자 이름 | 尹奉吉 |
아호 | 매헌 (梅軒) |
출생일 | 1908년 6월 21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현내면 조량리 |
사망일 | 1932년 12월 19일 |
사망지 |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
사망 원인 | 총살형 |
묘지 | 효창공원 (1946년–) 노다야마 묘지 (1932년–1946년) |
종교 | 무종교 |
배우자 | 배용순 |
자녀 | 3남 1녀 (장남 윤종, 차남 윤경, 삼남 윤담, 딸 윤안순) |
부모 | 윤황(부), 김원상(모) |
형제 | 윤성의(친동생) 윤영의(친동생) 윤영석(친동생) |
친인척 | 윤용(조카) 윤주(조카) 윤홍(조카) 윤규상(조카) 윤도암(조카) 윤주경(친손녀) 윤주웅(친손) 윤주빈(종손) 윤명의(6촌 남동생) 윤주원(종손) 윤주빈 |
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명예 졸업장 | 1919년 충청남도 예산 덕산초등학교 (1991년 추서) |
한국어 이름 | |
한글 표기 | 윤봉길 |
한자 표기 | 尹奉吉 |
개정 로마자 표기 | Yun Bonggil |
매큔-라이샤워 표기 | Yun Pongkil |
예일 표기 | Yun Pongkil |
활동 정보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소속 | 한인애국단 |
주요 활동 | 훙커우 공원 사건 |
경력 |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한인애국단 단원 |
범죄 정보 | |
죄목 | 살인죄, 살인미수, 상해죄, 폭발물취체벌칙 위반의 병합죄 |
유죄 판결일 | 1932년 5월 25일 |
형벌 | 사형 (총살형) |
기타 정보 | |
별칭 |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
2. 생애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윤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37]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에 반발하며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37] 1922년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고, 1926년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37] 1928년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으며,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하였다.
윤봉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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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莘達) | 선지(先之) | 금강(金剛) | 집형(執衡) | 관(瓘) | 언이(彦頤) | 돈신(敦信) | 상계(商季) | 복원(復元) | 순(純) | 보(珤) | 안숙(安淑) | 척(陟) | 승례(承禮) | 규(珪) | 형(炯) | 찬(贊) | 질(垤) | 사화(思和) | 령(耹) | 성남(誠男) | 곤(棍) | 방형(邦衡) | 세후(世厚) | 휘한(휘翰) | 사수(仕守) | 진(鎭) | 영태(永泰) | 재(梓) | 진영(振榮) | 황(堭) | 봉길(奉吉) |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참여하여 의거를 준비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연(천장절) 및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가와바타 사다지를 사망케 하고,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등을 중상 입혔다.[8]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4]
2. 1. 초기 생애 및 농촌 계몽 운동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현 예산군 덕산면)에서 아버지 윤황(尹墴)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윤관의 후손이다.[37] 1911년 가족과 함께 저한당으로 이주하여 23세까지 생활하였다.[37]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2] 이후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37] 1922년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1926년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37] 1928년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농촌 계몽 활동을 시작하였다.[37]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37]

수암체육회를 통해 농민의 건강 증진을 도모하고,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통해 농촌 발전과 민족 독립 정신을 함양할 수 있다고 믿어 농촌 체육부를 만들었다.[5]
2. 2. 중국 망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37] 중국에서 한국 독립 운동 동지 김태식과 한일진을 만났다.[5]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직접 가야만 성공적인 독립 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상하이로 향했다.[5]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를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2. 3.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 및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의 단원 윤봉길은 이 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하였다.당시 사용된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급조폭발물은 폭탄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장절 및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 참석자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게 했는데, 윤봉길은 이 허점을 노렸다.[38]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했다. 오전 11시 5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묵념이 진행되는 틈을 타 수통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켜 단상에 정확히 명중시켰다.[40]
이 폭탄 투척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38]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이 사망하였다.[7]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을 입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으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다리 한쪽을 절단하여 지체장애인이 되는 등 일본군 고위 간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8]
폭탄 명중을 확인한 윤봉길은 자폭을 위해 도시락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불발되었다. 일본 헌병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윤봉길을 덮쳐 제압했다. 윤봉길은 제압당하면서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41]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4]
당시 중국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40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했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42]
3. 의거의 영향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는 침체되어 있던 한국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윤봉길에게 폭탄 투척을 지시한 김구 일파 및 이유필[30] 일파는 상하이 재중국 강서로 각 동북 의용군 후원회 간부 주경란(중국 국민당 위원)으로부터 28000JPY의 보수를 받았다.
이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과 한국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를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47] 이 의거를 계기로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47] 장제스 일기에서는 "옛 사람이 말하길 국가의 원수(怨讐)와는 한 하늘 아래서는 같이 살 수 없다 하였다. 공적을 쌓고자 무력을 앞세워 침략을 일삼는 자들이 깨달은 바가 있지 않겠는가?"고 의거를 굉장히 높게 칭송한 내용이 확인되었다.[48]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49]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은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제스가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47]
3. 2.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 대해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던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다.[47] 이는 그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47] 하지만 장제스의 이러한 감탄은 이 말이 가장 많이 나올 수 있는 백범 김구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와 장제스 일기에서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48] 장제스 일기에서는 "옛 사람이 말하길 국가의 원수(怨讐)와는 한 하늘 아래서는 같이 살 수 없다 하였다. 공적을 쌓고자 무력을 앞세워 침략을 일삼는 자들이 깨달은 바가 있지 않겠는가?"고 의거를 굉장히 높게 칭송한 내용이 확인되었다.[48]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49]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 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제스가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47]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50][51]
김구 선생은 만주사변 발발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더욱더 위축된 상황으로 정무적, 정세적 판단하에 과감한 결단이 윤봉길의 거사였으나,[48] 이승만은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52]
4. 사후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오사카 위수감옥,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2월 19일 가나자와시 삼소우산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29] 그의 유해는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에 암매장되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감탄했다.[31]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 전쟁에서도 한국을 지원하는 등 한중 우호 관계의 초석을 다졌다.[32]
김석원은 회고록에서 윤봉길이 일본 천황 생일 축하식에 폭탄을 투척하여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에 알렸다고 평가했다.[34]
2020년 10월 JTBC 뉴스룸은 SAT와 AP 교재에 조선이 오랜 기간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기술된 것을 보도했다.[35] 또한 바이두 백과에서 윤봉길, 안중근, 김구,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표기하고, 윤동주는 국적도 중국으로 표기한 점을 지적하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35]
4. 1. 유해 송환 및 안장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11][12][13]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33]4. 2. 추서 및 기념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11][12][13][38][42]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1987년 윤봉길 의사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성금을 모아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매헌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15] 현재 양재시민의숲역의 부역명도 그의 호를 딴 '매헌'이다.
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윤봉길이 4세 때부터 망명 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다. 생가 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46]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의 장소였던 중국 상하이 루쉰 공원(훙커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16]
일본 가나자와에는 윤봉길 의사가 처형된 후 매장되었던 묘역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6]
5. 논란
(이전 출력에서 원본 소스에 '논란'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다고 판단했으나, 하위 섹션의 내용을 통해 '논란' 섹션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작성할 수 있습니다. 하위 섹션의 제목과 내용을 참고하여 '논란' 섹션의 내용을 추가합니다.)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당시 체포 사진에 대해서는 조작 논란이 있다.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교수는 널리 알려진 사진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이후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맞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53] 2011년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진 조작 사실이 밝혀졌다.[56]
5. 1. 의거 당시 사진 조작 논란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사진(
이에 관해 대한민국 정부는 오랫동안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확실하다고 답변하였으며,[54] 강효백 교수는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한편, SBS스페셜에서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54]
윤봉길의 유족들 중 6촌 동생인 윤명의는 "윤 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봉길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과 동생 윤남의는 1976년에 위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증언한 바 있다.[55]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두 장 또한 컴퓨터 그래픽 판독 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56]
6. 평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의거는 단순한 테러 행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한 희생적인 투쟁으로 평가받는다.
1932년 거사 이틀 전 작성한 유언에는 조국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될 것을 당부하는 내용과 두 아들에게 남기는 비장한 심경이 담겨 있다.[43] 장개석 중화민국 정부 주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 하는 것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며 감격했다.[31]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 전쟁에서도 한국을 지원했다. 1966년 박정희가 대만을 방문했을 때에도 윤봉길의 친족에 대해 언급하며, 이 사건이 중국을 위해 행해진 것이라고 평가하여 우호의 초석으로 생각했다.[32]
1946년 유골은 재일 한국·조선인에 의해 발굴되어 한국으로 돌아왔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33]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수여하고, 독립운동의 의사로서 숭모하며, 독립기념관에 안치했다. 안중근, 김좌진, 유관순과 함께 한국 해군의 잠수함 함명으로도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의사로 추앙받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유해가 묻혔던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다.
김석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천장절) 축하식 단상에 폭탄을 던져 육군대장 백천의칙을 쓰러뜨리고,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에 보였다"라고 적고 있다.[34]
7. 가족 관계
- 증조부: 윤재(尹梓)
- 증조모: 이씨(李氏)
- 조부: 윤진영(尹振榮)
- 조모: 원씨(元氏)
- 아버지: 윤황(尹堭, ? ~ 1950년)
-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1889년 ~ 1952년)
- 부인: 배용순(裵用順, 1907년 8월 15일 ~ 1988년 7월 10일)
- 장남: 윤종(尹淙, 1927년 ~ 1984년 4월 22일)
- 자부: 김옥남(金玉南, 1936년 ~ )
- 손녀: 윤주경(尹柱敬, 1959년 5월 3일 ~ )
- 손녀: 윤주민(尹柱民)
- 손녀: 윤주영(尹柱瑛)
- 손녀: 윤주원(尹柱媛)
- 손녀: 윤주선(尹柱善)
- 손녀: 윤인선(尹仁善)
- 손자: 윤주웅(尹柱雄, 1971년 1월 26일 ~ )
- 증손자: 윤행복
- 차남: 윤경(尹涇, 1928년 ~ 1929년) - 2살 때 홍역으로 사망
- 장녀: 윤안순(尹安順, 1929년 ~ 1929년) - 만 한 살이 되기 전에 홍역으로 사망
- 삼남: 윤담(尹淡, 1930년 ~ 1938년) - 덕산보통학교 1학년 중퇴 후 9살 때 복막염으로 사망
8. 저서
- 《오추》
- 《옥수》
- 《농민독본》 3권
- 《기사년 일기》(己巳年日記)
9. 대중 문화
구분 | 배우 | 작품명 | 방영/개봉/공연 년도 | 방송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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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드라마 | 이한승 |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 | 1985년 | KBS1 |
텔레비전 드라마 | 박영규 | 그의 아내 | 1986년 | MBC |
텔레비전 드라마 | 박영태 | 백범일지 | 1989년 | MBC |
텔레비전 드라마 | 김상중 | 님이여 | 1992년 | MBC |
텔레비전 드라마 | 차광수 | 김구 | 1995년 | KBS1 |
텔레비전 드라마 | 이강민 | 이몽 | 2019년 | MBC |
영화 | 이경선 | 윤봉길 의사 | 1947년 | |
영화 | 윤일봉 | 아아 백범 김구선생 | 1960년 | |
영화 | 박노식 | 일본제국과 폭탄의사 | 1967년 | |
영화 | 박노식 | 상해 임시정부 | 1969년 | |
연극 | 은희진 | 윤봉길 의사 | 1986년 | |
오페라 | 양승호 | 매헌 윤봉길-1932 상하이의 아침 | 2023년 | 김포시오페라단 |
尹奉吉중국어을 연기한 배우는 위와 같다. 2019년 드라마 이몽에서 윤봉길 역은 이강민이 연기했다.[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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