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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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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는 당나라 영가대사 현각의 『증도가』에 북송 남명천 화상이 계송한 주해본을 저본으로, 조선 성종 13년(1482)에 학조 등이 언해하고 교서관에서 을해자로 간행한 2권 2책의 언해본이다. 세종 때 언해를 시도했으나 완성되지 못했고, 이후 세조비의 명으로 학조가 완성하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영가대사의 원문, 남명천의 송문, 그리고 언해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계희와 강희맹의 발문이 수록되어 편찬 및 간행 과정을 보여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완질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권하 1권만 남은 결본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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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
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
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
국가대한민국
위치서울특별시
유형유형문화재
지정 번호447
지정일2019년 6월 7일
주소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로 56
시대조선 (1482년)
소유자세종대왕기념사업회
수량1책

2. 간행 배경 및 의의

영가대사증도가』는 당나라 영가대사 현각이 지은 『증도가』에 북송 남명천화상이 계송(繼頌)한 주해본을 바탕으로 한다. 조선 성종 13년(1482)에 학조 등이 한글로 번역하여 교서관에서 금속활자(을해자)로 간행한 을해자본 2권 2책이다.[1] 이 책은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라고도 불린다.[1]

영가대사는 중국 절강성 온주(溫州) 영가현(永嘉縣) 출신으로, 8세에 출가하여 천태 지관(止觀)을 공부하고, 『유마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어 혜능의 인가를 받았다.[1] 『증도가』는 선종의 중요한 어록으로 여겨져, 찬술 직후 그의 누이 정거(靜居)가 주해한 이후 여러 선승들이 주석을 달았다.[1] 조선에서는 남명천화상의 주해본이 널리 유행하였다.[1] 남명천화상은 북송대 선승으로 희령(熙寧) 연간에 『증도가』에 320편의 계송을 붙였다.[1]

고려 최이의 발원으로 1230년대에 금속활자본과 목판본으로 간행된 적이 있다.[1] 조선에서도 『증도가』는 선종에서 중요하게 여겨져 고려본을 다시 새긴 목판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세종과 세조 때는 여러 주석이 더해진 주해본이 금속활자(갑인자, 을해자)로 간행되기도 했다.[1]

세종은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 언해를 명했으나 완성되지 못했고, 세조비의 명으로 1482년(성종 13)에 학조가 언해를 완성하여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1]

2. 1. 조선 초기 불교 정책과 언해 사업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억불숭유 정책을 펼쳤지만, 불교 경전의 언해 사업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세종은 백성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1] 세종은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 『영가대사증도가』의 언해를 명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하였다.[1]

이후 세조 대에 이르러 불교 정책에 변화가 생기면서 언해 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세조는 불교를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세조비의 명으로 1482년(성종 13)에 학조가 『영가대사증도가』의 언해를 완성하여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1] 이는 억불숭유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불교 경전의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2. 2. 을해자와 한글 활자 사용

이 책은 성종 13년(1482년)에 교서관에서 금속활자인 을해자로 간행되었다.[1] 이 책은 세종이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 언해를 명했으나 완성되지 못하다가, 세조비의 명으로 1482년에 학조가 언해를 완성하여 상하 2권으로 간행한 것이다.[1]

판의 형식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판면에는 계선(界線)이 있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 24.6cm × 17.5cm이다.[1] 한 면을 기준으로 9행 19자가 배열되어 있는데, 을해 중자와 소자로 인쇄하여 조밀한 느낌을 준다.[1] 판심(板心) 위아래에는 흑어미(黑魚尾)가 서로 안쪽을 향하고 있으며, 어미 사이에 '南明'이라는 판심제(板心題)가 있고, 그 아래에 권차와 장차가 적혀 있다.[1]

권말에는 1482년에 세조 때 총신인 한계희강희맹이 쓴 발문이 을해소자(乙亥小字)로 인쇄되어 첨부되어 있어, 편찬 및 간행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1]

2. 3. 학조의 역할과 언해의 특징

세종이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 언해를 명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세조의 비(妃)의 명으로 1482년(성종 13)에 학조가 언해를 완성하여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1] 학조는 조선 초기의 승려로, 이 언해 작업에 참여하여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 기여했다.[1]

상권의 권수제(책의 첫머리에 적힌 제목)는 ‘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이며, 판심제(책장을 접었을 때 가운데 접힌 부분에 적힌 제목)는 ‘南明’이다.[1] 1077년 (희령(熙寧)10)에 오용이 쓴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1] 본문에는 영가대사의 원문이 첫 행에 있고, 그 아래에 남명선사의 송문(頌文)이 있으며, 다시 그 아래에 작은 글자(소자, 小字)로 언해문이 있다.[1] 그리고 행을 달리하고 한 글자를 낮추어 국문 주석을 작은 글자로 달았다.[1]

하권의 본문이 끝난 다음에는 1076년(희령9) 축황이 지은 후서(後序)가 수록되어 있다.[1] 권말(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1482년에 세조 때 총신(寵臣)인 한계희강희맹이 쓴 발문(跋文)이 을해자 소자로 간인되어 첨부되어 있어 편찬 및 간행 과정을 살필 수 있다.[1]

이 언해본은 조선 성종 때 을해자로 간행되었다.[1]

3. 구성 및 내용



『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는 당나라 영가대사 현각(永嘉大師玄覺, 665-713)이 지은 『증도가』에 북송 때 남명천화상이 계송(繼頌)한 주해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 성종 13년(1482)에 학조 등이 언해하여 교서관에서 금속활자(을해자)로 간행한 책이다. 2권 2책으로 구성된 을해자본이며,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라고도 불린다.[1]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영가대사의 『증도가』 원문과 남명천의 계송, 그리고 이에 대한 언해문이다. 영가대사의 원문은 첫 행에 올려 쓰고, 그 아래에 남명천의 송문(頌文)을 배치하였으며, 다시 그 아래에 작은 글자(小字)로 언해문을 달았다. 또한, 행을 바꾸어 한 글자 낮추어 국문 주석을 작은 글자로 달아 놓았다.[1]

두 번째 부분은 1076년(희녕 9) 축황(祝況)이 지은 후서(後序)이다.[1]

마지막 부분은 1482년 세조 때 총신인 한계희강희맹이 쓴 발문으로, 을해소자(乙亥小字)로 간인되어 첨부되어 있다. 이를 통해 책의 편찬 및 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1]

3. 1. 증도가와 남명천의 계송

당나라 영가대사 현각(永嘉大師玄覺, 665-713)이 남긴 『증도가』에 북송 때 남명천 화상이 계송(繼頌)한 주해본을 바탕으로, 조선 성종 13년(1482)에 학조 등이 언해하여 교서관에서 금속활자(을해자)로 간행한 을해자본 2권 2책이다. 이 책을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라고도 부른다.[1]

영가대사는 8세에 출가하여 천태 지관(止觀)을 숭상하였고, 유마경을 읽다가 견성하여 혜능의 인가를 받고 고향 용흥사(龍興寺)에 있었다.[1]

증도가는 가의 주요 어록으로 중시되어 찬술 직후 그의 누이 정거(靜居)가 주해한 이후 여러 선승들의 주석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남명선사의 주해본이 널리 유행하였다. 남명천은 북송대 선승으로 천경사(千頃寺)에 주석하였던 희령(熙寧) 연간에 증도가에 320편의 계송을 달았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수장인 최이의 발원으로 1230년대에 금속활자본과 목판본으로 간행한 사실이 있다. 조선시대에서도 증도가는 선가에서 중시되어 고려본을 복각한 목판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세종과 세조 때는 제가의 주석이 가미된 주해본이 금속활자(갑인자, 을해자)로 간인된 바 있다.[1]

조사 대상본은 성종 때 을해자로 간행한 언해본이다. 이 언해본은 일찍이 세종이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 언해를 맡겼으나, 완성되지 못하였고, 세조비의 하명으로 1482년(성종 13)에 학조가 언해를 완성하여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1]

상권의 권수제는 ‘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 판심서명은 ‘南明’이다. 권수에 1077년 (熙寧10)에 오용(吳用)이 쓴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 영가대사의 원문은 첫 행에 올려쓰고 그 아래에 남명선사의 송문(頌文)을 달았으며, 다시 아래에 소자(小字)의 언해문을 달아 놓았다. 그리고 행을 달리하고 한 글자를 낮추어 국문 주석을 소자로 달아 놓았다.[1]

하권의 본문이 끝난 다음에 1076년(熙寧9) 축황(祝況)이 지은 후서(後序)가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1482년에 세조 때 총신인 한계희강희맹이 쓴 발문이 을해소자(乙亥小字)로 간인되어 첨부되어 있어 편찬 및 간행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1]

3. 2. 언해문의 구성과 내용

성종 때 을해자로 간행한 언해본이다. 이 언해본은 세종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 언해를 맡겼으나, 완성되지 못하고 세조의 비(妃)의 명으로 1482년(성종 13)에 학조가 언해를 완성하여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

상권의 권수제는 ‘永嘉大師證道歌南明泉禪師繼頌’이고, 판심서명은 ‘南明’이다. 권수에는 1077년 (희녕(熙寧)10)에 오용(吳用)이 쓴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는 영가대사의 원문은 첫 행에 올려쓰고 그 아래에 남명선사의 송문(頌文)을 달았으며, 다시 그 아래에 작은 글씨(小字)의 언해문을 달아 놓았다. 그리고 행을 달리하고 한 글자를 낮추어 국문 주석을 작은 글씨로 달아 놓았다.

하권의 본문이 끝난 다음에는 1076년(희녕(熙寧)9) 축황(祝況)이 지은 후서(後序)가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1482년에 세조 때 총신인 한계희강희맹이 쓴 발문이 을해소자(乙亥小字)로 간인되어 첨부되어 있어 편찬 및 간행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 3. 서문, 발문, 후서

1077년(희녕 10) 오용(吳用)이 쓴 서문,[1] 1076년(희녕 9) 축황(祝況)이 지은 후서(後序),[1] 1482년 세조 때 총신인 한계희강희맹이 쓴 발문이 을해자 소자(乙亥小字)로 간인되어 첨부되어 있어[1] 편찬 및 간행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4. 소장 현황 및 문화재적 가치

영가대사증도가 남명천선사계송(언해)는 당나라 영가대사 현각(永嘉大師玄覺, 665-713)의 『증도가(證道歌)』에 북송 남명천화상이 계송(繼頌)한 주해본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 성종 13년(1482)에 학조(學祖) 등이 언해하고 교서관에서 금속활자(을해자)로 간행한 책이다. 2권 2책으로 구성된 을해자본이며,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라고도 불린다.

동일 판본의 소장 현황은 다음과 같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2권 완질본 소장
  • 관문사: 2권 완질본 소장
  • 고려대학교: 권하 1책 소장
  • 성암문고: 권하 1책 소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은 상권이 없는 권하 1책의 결본 상태이나, 하권은 결장 없이 온전한 상태이다. 표지에는 ‘永歌泉頌下’라고 묵서되어 있으나, 원표제는 ‘證道歌南明繼頌’이다. 표지는 후대에 새로 개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아직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사례가 없지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은 하권이 온전하게 남아있으므로 시유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4. 1. 판본 특징

조사 대상본은 성종 때 을해자로 간행한 언해본이다. 판식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이며 판면에는 계선(界線)이 보이고, 반곽의 크기는 세로 24.6cm, 가로 17.5cm이다. 책 크기는 33.3×21.5cm이다. 행자수는 반엽을 기준으로 9행 19자씩 배자되어 있는데, 을해 중자와 소자로 인출하여 조밀한 느낌을 준다. 판심의 상하에 흑어미(黑魚尾)가 서로 내향하고 있으며, 어미 사이에 ‘南明’이라는 판심제가 보이고, 그 아래에 권차와 장차가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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