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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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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형은 후한 말의 인물로, 뛰어난 재능과 언변을 가졌으나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 173년 현재의 산둥성 상허현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부터 재능을 뽐내며 타인에게 혹평을 가했다. 형주 지역 지사 유표의 관료로 활동했으며, 조조에게 불려가 북을 치는 솜씨를 선보였으나, 무례한 언행으로 조조의 미움을 샀다. 결국 유표에게 보내졌지만, 유표 휘하의 황조에게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독설가로서의 면모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더욱 과장되어 묘사되었으며, 중국 민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경극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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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형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미형
한자 표기禰衡
로마자 표기Mi Heng
자 (字)정평 (正平)
출생173년
사망198년 (25세)
출생지청주 평원군 반현
직업학자
상세 정보
활동 시기후한 말기
주요 활동문필 활동, 음악
성씨미 (禰)
사망 장소
장소앵무주 (현재의 후베이성우한시한양구)

2. 생애

미형(禰衡|예형중국어)은 재능 있는 시인이자 뛰어난 작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변덕스러운 행동, 불쾌한 농담, 그리고 오만한 태도로 인해 사교에 어려움을 겪었고, 심지어 그의 정신 상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0년대 초, 한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화북(華北)을 떠난 미형은 형주(荊州)(현재의 후베이성후난성을 포함)에 정착하여 그 지역의 지사 유표의 관료가 되었다.[1] 196년경, 미형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군벌 조조가 허(許; 현재의 허창시(許昌市), 허난성(河南省))에 설립한 황실 조정에 합류했다. 미형은 저명한 학자 공융과 친분이 있었는데, 공융은 헌제에게 미형을 황실에 등용할 것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다.[1]

조조는 미형의 거절에 분노했지만, 그의 재능 때문에 처벌을 삼갔다. 미형은 재능 있는 드러머였고, 조조는 연회에서 공연하도록 초대했다. 조조는 특별한 의복을 제공했지만, 미형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옷을 입었다. 시종이 복장을 꾸짖자, 그는 천천히 옷을 벗고 알몸으로 서 있다가 천천히 드러머의 의복을 입고 공연을 계속했다.[1] 공융은 미형과 조조의 두 번째 만남을 주선했지만, 미형은 첫 번째 만남만큼이나 무례하게 행동했고, 조조는 그를 다시 유표에게 보냈다.[1]

미형은 유표의 부하들 사이에서 문학적 재능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표가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했고 오만한 태도로 다른 부하들을 불쾌하게 했다. 유표는 1년 동안 참다가 그를 강하군(江夏郡; 현재의 우한시(武漢市) 신저우구(新洲區) 근처, 후베이성(湖北省))으로 보내 황조(黃祖)를 섬기게 했다. 황조의 아들 황사(黃射)는 미형을 매우 존경했다. 황조 자신도 처음에는 미형의 지성과 재능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미형은 연회에서 황조를 모욕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황조는 미형의 처형을 명령했고, 미형을 증오하던 선임 서기가 즉시 실행했다.[1]

2. 1. 초기 생애와 배경

禰衡|예형중국어은 173년 평원군 반현(般縣)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은 현재의 산둥성 상허현에 위치해 있다.[1] 젊은 시절부터 비범하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를 취하고 기이한 언행을 일삼았다.[1]후한서』 예형전에는 "어릴 적부터 재주와 언변이 있었지만, 오히려 성질이 강하고 오만하며 기이한 것을 좋아했다"고[1]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지』 주석 『평원예형전』에는 "재주를 믿고 오만하고 방자했다"고 적혀 있다.[2]

190년대 초, 예형은 한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화북(華北)을 떠나 형주(荊州)(현재의 후베이성후난성을 포함)에 정착하여 그 지역의 지사 유표의 관료가 되었다.[1]

2. 2. 공융과의 관계

공융은 예형과 절친한 사이로, 예형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공융은 예형을 "공자가 죽지 않고 안회가 다시 살아왔다"는 뜻의 "중니불사 안회부생(中尼不死 顔回復生)"이라고 칭송하며 조조에게 추천했다. 공융은 196년에 헌제에게 예형을 황실에 등용할 것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다.[1]

2. 3. 조조와의 만남과 갈등

공융의 추천으로 예형은 조조를 만났으나, 면담 자리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여 조조와 그의 부하들을 능멸했다.[1] 조조는 예형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오만함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조조는 예형이 북을 잘 친다는 것을 알고 연회에서 북을 치게 했다. 예형은 훌륭하게 연주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나, 옷을 벗고 알몸으로 연주하는 기행을 벌였다.[3] 조조는 예형에게 망신을 주려다 도리어 자신이 망신을 당했다고 말했다.

결국 조조는 예형을 유표에게 사자로 보냈다.[1]

2. 4. 유표와 황조와의 관계, 그리고 죽음

유표에게 사자로 간 후에도 예형은 거침없는 독설을 퍼부어 유표를 분노하게 만들었다.[1] 유표는 예형이 자신을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는 것에 분노하여, 1년 동안 참다가 그를 강하군(江夏郡; 현재의 우한시(武漢市) 신저우구(新洲區) 근처,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조(黃祖)에게 보냈다.[1]

황조의 아들 황사(黃射)는 예형과 친분이 있었다.[1] 황조 또한 처음에는 예형의 재능을 인정했으나, 예형은 연회에서 황조를 모욕하는 등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1] 결국 황조는 예형의 처형을 명령했고, 평소 예형을 싫어하던 서기가 즉시 실행했다.[1] 예형은 죽기 직전까지 황조를 욕했으며, 황조는 이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고 한다.[1]

황사는 예형의 유해를 앵무주(鸚鵡洲, 현재의 후베이성 우한시 한양구)에 매장했다.[1]

3. 평가

위나라 사람 隱蕃|은번중국어이 오나라에 위장 투항을 했을 때, 손권호종에게 그의 말이 어떠한지 물었다. 호종은 “과장된 언어는 동방삭과 같고, 교묘한 언어와 궤변은 예형과 흡사하지만, 재능은 두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이를 통해 예형은 그 시대에 이미 재능이 탁월하고 언변에 능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1. 당대 평가

위(魏)나라 사람 은번(隱蕃)이 오(吳)나라에 위장 투항했을 때, 오 대제호종에게 그의 말이 어떠한지 물었다. 호종은 "과장된 언어는 동방삭과 같고, 교묘한 언어와 궤변은 예형과 흡사하지만, 재능은 두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이를 통해 예형은 그 시대에 이미 재능이 탁월하고 언변에 능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작품

양나라의 도서 목록에는 예형의 문집이 두 권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당나라 초기에 유실되었다.[1] 현재 남아있는 예형의 유일한 작품은 《문선》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앵무부"이다.[1]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예형의 독설과 기행이 더욱 과장되어 묘사된다. 조조의 부하들을 모두 폄하하고, 조조 앞에서 알몸으로 북을 치는 등 더욱 극적인 장면들이 추가되었다.[2] 경극 "격고매조(擊鼓罵曹)"는 예형이 조조를 비판하는 장면을 다룬 인기 있는 작품이다.

조조에게 불려간 자리에서 조조의 부하들을 직접 비판하는데, 순욱에 대한 평에 이어(조융에 대한 평은 삭제되었다) "순유는 무덤지기, 정욱은 문지기, 곽가는 문장 읽는 사람, 장료는 북치는 사람, 허저는 소나 말 지키는 사람, 악진조서 읽는 사람, 이전은 서류 전달자, 여건은 칼 대장장이, 만총은 술지게미나 먹는 자가 적임이다. 우금은 미장이, 서황은 도살업자(고깃집), 하후돈은 완전무결한 장군(그는 애꾸눈이었지만, 완전무결은 오체가 만족한다는 뜻으로, 근, 맥, 육, 골, 모를 가리키므로 눈은 치지 않는다), 조자효(조인)는 돈 버는 태수(이것은 조홍의 오해이다), 그 외의 자들은 그저 옷을 입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놈들이다"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조조는 물론, 부하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2]

지위가 있는 자에게는 천하다고 여겨지는 북치는 일을 명령받아, 훌륭한 솜씨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받자 "내 몸은 깨끗하다, 당신처럼 더럽지 않다"라며 그 자리에서 알몸이 되어 유유히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인다.[2]

그 후, 조조에게 골칫거리로 여겨져 유표에게 쫓겨나고, 더 나아가 황조에게 좌천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료와 같다. 황조는 예형에게 "당신은 사당의 신이다. 제물과 헌금만 받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격분하여 참살한다. 조조는 예형의 죽음을 알고 "별난 녀석다운 최후다"라고 웃었다고 한다.[2]

참조

[1] 웹사이트 後漢書/卷八十下·文苑列傳第七十下/禰衡 https://zh.wikisourc[...]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2023-07-18
[2] 웹사이트 三國志/卷10 魏書·荀彧荀攸賈詡傳/平原禰衡傳 https://zh.wikisourc[...]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2023-07-18
[3] 웹사이트 三國志/卷10 魏書·荀彧荀攸賈詡傳/典略 https://zh.wikisourc[...]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2024-03-17
[4] 서적 『呉書』張昭伝注『典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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