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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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오명항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44년(영조 20)에 건립된 비석이다. 비문은 조현명이 짓고 박문수가 썼으며, 이광덕이 두전을 썼다. 비석은 안성시 동본동에 세워졌다가 1969년 안성공원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 화강암으로 제작되었고, 비의 형태와 크기에 대한 정보가 전해진다.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한자 표기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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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국가 대한민국
위치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번지
문화재 정보
유형시도유형문화재
지정 번호79
지정일1978년 11월 10일
시대조선시대
소유자국유
참고 자료
문화재청https://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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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728년(영조 4년), 정미환국 이후 소론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은 토벌군의 총사령관(도순무사)을 맡아 안성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영조는 난을 평정한 오명항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숭례문까지 직접 마중을 나갔으며, 그를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으로 책록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으로 봉했다. 이러한 오명항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에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가 세워지게 된다.

2.1. 이인좌의 난

정미환국의 여파로 소론이 분열되면서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였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은 토벌군의 도순무사(총사령관)를 맡았다. 3월 23일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은 이인좌의 부대와 안성 부근 청룡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 해 4월 19일 오명항이 개선하자 영조는 숭례문까지 직접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 오명항은 창덕궁 돈화문 누각에서 임금에게 적의 수급을 바치는 헌괵례(獻馘禮)를 올렸고, 영조는 오명항에게 그의 공덕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다고 치하하였다.

오명항은 소론계의 중진으로, 영조 즉위 후 호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된 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였다. 난이 평정된 이후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어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영조가 우찬성 직을 제수하였으나, 오명항은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임을 이유로 들어 사임하였다.

2.2. 오명항의 정치적 입장

오명항소론계의 중진이었다. 영조 즉위 후 호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은 토벌군의 도순무사(총사령관)를 맡아 난을 진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월 23일,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은 안성 부근 청룡산에서 이인좌의 반란군과 벌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4월 19일 오명항이 개선하자 영조는 직접 숭례문까지 나아가 그를 맞이했으며, 오명항은 창덕궁 돈화문 누각에서 영조에게 적의 수급을 바치는 헌괵례(獻馘禮)를 올렸다. 영조는 오명항의 공덕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다고 치하하며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이인좌의 난 평정 이후 오명항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영조가 그에게 우찬성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오명항은 자신이 난을 일으킨 이인좌와 같은 소론임을 이유로 들어 이를 사양하였다. 이는 당시 붕당정치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의 신중한 정치적 처신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3. 비석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오명항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비문에는 이인좌의 난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오명항이 보여준 충절과 용기를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석은 원래 안성읍 동본동에 세워졌으나 1969년 현재 위치인 안성공원으로 옮겨졌다.

3.1. 건립 및 비문

비석은 오명항이 사망한 후 16년이 지난 1744년(영조 20)에 세워졌다. 비문의 앞면은 이인좌의 난 토벌 당시 그의 종사관이었던 우의정 조현명이 글을 짓고, 병조판서 박문수가 글씨를 썼다. 비석 머리 부분의 전서체 글씨인 두전(頭篆)은 대제학 이광덕이 썼으며, 그 내용은 '조선국 사로 도순무사 오공 안성토적 송덕공비(朝鮮國四路都巡撫使吳公安城討賊頌德功碑)'이다. 이는 조선국의 4로 도순무사로서 안성의 적을 토벌한 오명항의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문무 대신들이 모두 나서기를 주저했지만, 오직 오명항만이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니, 신이 나아가 막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청하여 난을 평정하였기에 그의 공덕을 높이 기린다는 것이다.

3.2. 형태 및 특징

비는 비개가 없이 위가 둥근 모양으로 높이 309cm, 높이 214cm, 너비 93cm, 두께 29cm으로 된 화강암이다.

3.3. 이전 역사

오명항 사후 16년이 지난 1744년(영조 20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앞면 글은 이인좌의 난 토벌 당시 오명항의 종사관이었던 우의정 조현명이 짓고, 글씨는 병조판서 박문수가 썼다. 비석 머리 부분의 전서체 글씨(두전, 頭篆)는 대제학 이광덕이 썼으며, '조선국사로도순무사오공안성토적송덕공비'(朝鮮國四路都巡撫使吳公安城討賊頌德功碑)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조선국의 4로 도순무사로서 안성의 적을 토벌한 오명항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라는 의미이다.

비문에는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을 때 문무 대신들이 주저하는 상황에서 오직 오명항만이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며 자청하여 난을 평정했기에 그 공덕을 높이 기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석은 비개(지붕돌) 없이 위가 둥근 형태로, 높이 309cm, 비신 높이 214cm, 너비 93cm, 두께 29cm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안성읍 동본동에 세워졌으나, 1969년 현재 위치인 안성공원으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