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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겐타로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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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이 겐타로(大井 憲太郎, 1843년 ~ 1922년)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정치인, 변호사, 사회 운동가이다. 자유민권 운동에 참여하여 급진파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오사카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 입헌자유당을 결성하고 동양자유당을 창당하여 보통 선거를 주장하며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만년에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와 관계를 맺고 대외 강경론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시사요론》, 《자유략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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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겐타로 (정치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명오오이 겐타로
원어명}}
오오이 겐타로
출생일1843년 9월 3일
사망일1922년 10월 15일
출생지부젠국우사군다카나미촌
사망지불명
학력대학남교
종교일본 정교회
정치 경력
정당자유당 → 입헌자유당 → 동양자유당 → 대일본협회 → 헌정당
직책중의원의원
선거구오사카 3구
당선 횟수1
임기 시작1894년 3월
임기 종료1894년 8월
이전 직책불명
현 직책불명
소속 위원회불명
의원 회관불명
가족 관계
배우자불명
친족 (정치가)불명
기타 정보
서명불명
웹사이트불명
웹사이트 제목불명
군 복무불명
복무 기간불명
소속 군대불명
계급불명
지휘불명
근무불명
참전불명

2. 경력

오이 겐타로는 1863년 나가사키에서 란가쿠와 영어를 배우고, 오이 보쿠신과 의형제를 맺어 오이 성을 사용했다.[1] 에도에서 불학과 화학을 배우고, 에도 막부 개성소에 출사했다. 보신 전쟁 때 막군 포병대에 소속되어 관군과 싸웠으며,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2]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부터 미쓰쿠리 린쇼에게 배우고 대학남교에 입학했다. 1874년 민선 의원 설립 논쟁을 벌이고, 1875년 원로원 소서기관이 되었지만 이듬해 면관되었다.[3] 그 후 애국사 창립에 참여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며[4] 자유민권 운동 급진파 지도자로 활약했다. 1877년 오이 보쿠신의 양자가 되었다.[1]

1881년 불교 단체의 무고로 시체가 발굴된 정교도를 위해 변호 활동을 벌여 대심원에서 승소했다.[5] 1882년 자유당에 참가하고, 1884년 지치부 곤민당을 지도했다. 1885년 오사카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어 금고 9년형을 선고받았다.[6]

1889년 대사[7]로 출옥하여 나카에 조민 등과 입헌자유당을 결성했다. 1892년 동양자유당을 결성하고, 보통 선거를 주장하며 일본노동협회·소작조례조사회를 설립했다. 1893년 동양자유당을 해산하고 제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었다.[8] 1894년 우메야 쇼키치의 남양 무역과 이민 계획 제안에 찬동하여 싱가포르를 시찰하고, 1898년 남양무역상회를 운영했다.[9] 헌정당 결성에 진력하여 총무를 맡았다. 1899년 보통선거기성동맹회를 결성하고, 만년에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와 관계를 맺고 대외 강경론자로 활동했다. 1922년 사망했으며, 매장식은 니콜라이당에서 거행되었다.

2. 1. 초기 생애

덴포 14년 8월 10일 (1843년9월 3일) 부젠 국우사 군다카나미 촌 (현재의 오이타현우사시)에서 농민 다카나미 히코로와 사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히코로쿠였다.[1]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분큐 3년 (1863년) 나가사키에서 란가쿠와 영어를 배우다 오이 보쿠신과 알게 되어 의형제가 되었으며, 오이의 성을 사용했다.[1] 에도로 가 불학과 화학을 배웠고, 에도 막부 개성소 셔미국에 출사했다. 보신 전쟁에서는 막군 포병대에 소속되어 관군과 싸웠으며, 이 무렵 정교회 세례를 받고 정교도가 되었다.[2]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2년 (1869년)부터 미쓰쿠리 린쇼에게 배웠고, 대학남교에 입학했다. 메이지 7년 (1874년) 민선 의원 설립을 둘러싸고 가토 히로유키와 논쟁을 벌였다. 메이지 8년 (1875년) 원로원 소서기관이 되었지만,[3] 이듬해 면관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애국사 창립에 참여하고, 변호사 (당시는 대언인)로 활동하는[4] 한편, 자유민권 운동 급진파 지도자로 활약했다. 메이지 10년 (1877년) 오이 보쿠신의 양자가 되었다.[1]

2. 2.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부터 미쓰쿠리 린쇼에게 배웠다. 그 후 대학남교에 입학했다. 1874년, 민선 의원 설립을 둘러싸고 가토 히로유키와 논쟁을 벌였다. 1875년, 원로원 소서기관이 되었지만[3], 이듬해에 면관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애국사 창립에 참여하고, 변호사 (당시는 대언인)로서 활동[4]하는 한편, 자유민권 운동 급진파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1877년에 오이 보쿠신의 양자가 되었다[1].

1881년 6월, 불교 단체의 무고로 시체가 발굴된 정교도를 위해 변호 활동을 벌여 대심원에서 승소했다[5]. 1882년, 자유당에 참가했다. 1884년, 지치부 곤민당을 지도했다. 1885년, 조선의 내정 개혁을 기도하여 오사카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었다[6]. 오이는 재판소에서 금고 9년의 판결을 받았다.

1889년, 대사[7]로 출옥을 허가받았다. 나카에 조민 등과 다시 구 자유당 세력의 규합을 목표로, 1890년에 입헌자유당을 결성했다. 이때 시미즈 시코, 후쿠다 에이코와 교제하여 각각 아들을 낳았다.

1892년 11월에 당을 탈당하고 동양자유당을 결성했다. 오이는 보통 선거를 주장하는 동시에 일본노동협회·소작조례조사회를 설립하여 사회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1893년, 동양자유당을 해산하고, 이듬해 제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오사카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8]. 병략과 상략을 병행하여 부국을 이루고 일본인이야말로 아시아 혁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오이의 주장에 감명받은 우메야 쇼키치로부터 1894년에 남양 무역과 이민 계획이 제안되었고, 이에 찬동한 오이는 싱가포르를 시찰하고, 1898년에 도쿄에서 남양무역상회를 운영했다[9]. 같은 해 자유·진보 양당 합동에 의한 헌정당 결성에 진력. 헌정당 총무를 맡았다.

1899년, 가타야마 센 등과 보통선거기성동맹회 (후의 보통선거동맹)를 결성, 보통선거 운동에 헌신하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만년에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와 관계를 맺고, 대외 강경론자로 활동했다. 1922년 10월 15일 사망. 매장식은 니콜라이당에서 거행되었다. 묘소는 조시가야 영원.

2. 3. 자유민권 운동과 오사카 사건

1875년 원로원 소서기관이 되었지만[3], 이듬해에 면관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애국사 창립에 참여하고, 그 후 변호사 (당시는 대언인)로서 활동[4]하는 한편, 자유민권 운동 급진파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1877년에 오이 보쿠신의 양자가 되었다[1].

1881년 6월, 불교 단체의 무고로 시체가 발굴된 정교도를 위해 변호 활동을 벌여 대심원에서 승소했다[5]. 1882년, 자유당에 참가. 1884년, 지치부 곤민당을 지도. 1885년, 조선의 내정 개혁을 기도하여 오사카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었다[6]. 오이는 재판소에서 금고 9년의 판결을 받았다.

2. 4. 석방 이후

메이지 22년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에 따른 대사[7]로 출옥했다. 나카에 조민 등과 함께 구 자유당 세력을 다시 모으기 위해 메이지 23년 (1890년) 입헌자유당을 결성했다. 이 시기에 시미즈 시코, 후쿠다 에이코와 교제하여 각각 아들을 낳았다.

메이지 25년 (1892년) 11월, 입헌자유당을 탈당하고 동양자유당을 결성했다. 오이는 보통 선거를 주장하는 동시에 일본노동협회·소작조례조사회를 설립하여 사회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메이지 26년 (1893년) 동양자유당을 해산하고, 이듬해 제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오사카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8]. 병략과 상략을 병행하여 부국을 이루고 일본인이야말로 아시아 혁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오이의 주장에 감명받은 우메야 쇼키치는 메이지 27년 (1894년) 남양 무역과 이민 계획을 제안했고, 오이는 이에 찬동하여 싱가포르를 시찰하고 메이지 31년 (1898년) 도쿄에서 남양무역상회를 운영했다[9]. 같은 해 자유·진보 양당 합동에 의한 헌정당 결성에 힘썼으며, 헌정당 총무를 맡았다.

메이지 32년 (1899년), 가타야마 센 등과 보통선거기성동맹회(후의 보통선거동맹)를 결성하여 보통선거 운동에 헌신했다. 만년에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와 관계를 맺고 대외 강경론자로 활동했다. 다이쇼 11년(1922년) 10월 15일 사망했으며, 매장식은 니콜라이당에서 거행되었다. 묘소는 조시가야 영원에 있다.

2. 5. 남양 무역과 헌정당

1894년 우메야 쇼키치로부터 남양 무역과 이민 계획을 제안받았다. 이에 찬동한 오이 겐타로는 싱가포르를 시찰하고, 1898년에 도쿄에서 남양무역상회를 운영했다[9]. 같은 해 자유·진보 양당 합동에 의한 헌정당 결성에 진력하여 헌정당 총무를 맡았다.

2. 6. 만년

1899년, 가타야마 센 등과 보통선거기성동맹회(후의 보통선거동맹)를 결성, 보통선거 운동에 헌신하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만년에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와 관계를 맺고, 대외 강경론자로 활동했다. 1922년 10월 15일 사망. 매장식은 니콜라이당에서 거행되었다. 묘소는 조시가야 영원에 있다.

3. 저서


  • 자유략론
  • 시사요론

참조

[1] 서적
[2] 서적
[3] 간행물 官員録 明治8年12月改正 https://dl.ndl.go.jp[...] 西村組出版局 1875
[4] 간행물 日本全国代言人姓名録 https://dl.ndl.go.jp[...] 局外舎 1884
[5] 서적
[6] 간행물 新聞集成明治編年史 第6卷 https://dl.ndl.go.jp[...]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7] 뉴스 官報 第1703号 https://dl.ndl.go.jp[...] 1889-03-07
[8] 간행물 衆議院議員総選挙一覧 https://dl.ndl.go.jp[...] 衆議院事務局 1912-02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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