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타 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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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나기타 쿠니오는 일본의 민속학자이자 작가로,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1875년 효고현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농촌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본의 전통 문화를 연구하고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도노 이야기》, 《달팽이 고찰》, 《모모타로의 탄생》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일본 민속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방언 주변론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야나기타는 현지 조사와 자료 수집을 중시하며, 일본 역사 서술에 서민의 삶을 포함시키려 노력했다. 1962년 사망했으며,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의 연구는 일본 민속학뿐만 아니라 한국 민속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특정 집단을 배제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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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타 쿠니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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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학력 | |
최종 학력 | 법학사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과 |
가족 | |
배우자 | 야나기타 타카 (1904년 결혼) |
아버지 | 마쓰오카 야쿠사이 |
장인 | 야나기타 나오헤이 |
작품 활동 | |
주요 작품 | 도노 이야기 가타쓰무리고 모모타로의 탄생 해상의 길 |
데뷔 작품 | 정보 없음 |
수상 | |
문화훈장 | 수훈 (1951년) |
훈장 | 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
영향 및 관계 | |
영향 받은 인물 | 사사키 기젠 등 |
영향을 준 인물 | 정보 없음 |
기타 | |
서명 | 정보 없음 |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2. 생애
야나기타 구니오는 1875년(메이지 8년) 7월 31일 효고현 후쿠사키정에서 유학자 마쓰오카 미사오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마쓰오카 구니오(松岡昆雄)였으나, 대심원 판사를 지낸 야나기타 나오헤이의 양자가 되었다. 1901년(메이지 34년) 야나기타 가문의 양자로 입적하였고, 1904년(메이지 37년) 양부 나오히라의 넷째 딸 타카와 결혼하여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로 이름이 바뀌었다.[1]
어릴 적부터 문학과 시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서양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와 같은 서양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읽으며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
연도 | 사건 |
---|---|
1875년 | 효고현에서 출생 (본명: 마쓰오카 구니오) |
1884년 | 가족과 함께 효고현 가사이군 호조정(현재의 가사이시)으로 이주 |
1885년 | 고등소학교 졸업 후, 미키가 저택에서 와칸 서적 탐독 |
1887년 | 형이 병원을 개업한 이바라키현 키타소마군 누노카와무라(현재의 토네정)로 이주 |
1893년 | 형의 이주로 지바현 미나미소마군 후사정(현재의 아비코시)으로 이주 |
1897년 | 제일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입학 |
1900년 |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 졸업(법학사), 농상무성 근무, 와세다대학 "농정학" 강의 |
1901년 | 야나기타 가문에 양자로 입적 |
1902년 | 법제국 참사관 임관[13] |
1904년 | 야나기타 나오히라의 넷째 딸 타카와 결혼 |
1907년 | 시마자키 도손 등과 앱센회 시작 |
1908년 | 겸임궁내서기관, "향토연구회" 시작, 규슈 여행, 시이바무라 순회 탐방[14] |
1909년 | "후카리코토바노키" 자비 출판,[17] 도호쿠 여행 중 토노 방문 |
1910년 | 겸임 내각서기관 기록과장, "향토회" 시작 |
1911년 | 미나미카타 구마쿠스와 서신 교환 시작[18] |
1913년 | 다카기 도시로와 잡지 『향토연구』 창간[19] |
1914년 | 귀족원 서기관장 |
1915년 | 오리구치 시노부 만남, 다이쇼 천황 즉위례 및 대전제 봉사 |
1919년 | 귀족원 서기관장 사임 |
1920년 | 도쿄 아사히 신문사 고문, 전국 각지 조사 여행 |
1921년 | 유럽 방문, 국제연맹 위임통치 위원 취임 |
1922년 | 니토베 이나조와 에스페란토 교육 결의 요구, 에드몽 프리바와 교류 |
1923년 | 국제연맹 위임통치 위원 사임, 구스타프 람스테드와 교류 |
1924년 |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강사 |
1926년 | 일본 에스페란토 학회 이사 취임 |
1927년 | 세이죠로 이주, "킷단쇼쿠야" 명명 |
1930년 | 미야모토 쓰네이치와 서신 교환 시작 |
1934년 | 미야모토와 직접 만남, 목요회 제1회 회합, "산촌생활의 연구" 시작[21] |
1939년 | 국민학술협회 설립 회원 |
1940년 | 아사히 문화상 수상 |
1942년 | 일본문학보국회 이사 |
1946년 | 추밀고문관 취임, 신헌법 제정 심의 참석 |
1947년 | 민속학연구소 설립, 추밀원 폐지로 추밀고문관 상실, 일본예술원 회원 |
1949년 | 일본학사원 회원, 일본민속학회 초대 회장 |
1951년 | 고쿠가쿠인 대학 교수, 문화훈장 수훈 |
1955년 | 고궁 가회시 소인 |
1962년 | 세이죠 자택에서 심장쇠약으로 사망 (향년 88세), 정삼위 훈일등 서훈, 욱일대수장 추서 |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야나기타 구니오는 1875년(메이지 8년) 7월 31일 효고현 후쿠사키정에서 유학자이자 의사인 아버지 마쓰오카 미사오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출생 당시 이름은 마쓰오카 구니오(松岡昆雄)였다. 효고현의 거의 중앙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이치카와가 산간부에서 반슈 평야로 빠져나온 직후 이나바 가도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에치가와가 흐르는 곳으로 예부터 농촌으로 번창했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11세 때 고향 후쿠사키정의 구가 미키가에 맡겨져 그 방대한 서적을 독파했다. 12세 때에는 의사를 개업하고 있던 장남에게 맡겨져 이바라키현과 지바현의 경계인 시모우사의 토네가와 강가의 후카와(현재의 이바라키현 키타소마군 토네마치)에서 살았다. 고향과는 다른 토네가와의 풍물과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
16세 때 도쿄에 살고 있던 셋째 형 이노우에 미치야스(제국대학 의학부에 재학 중)와 동거하며 도서관에 다니며 독서를 계속했다. 셋째 형의 소개로 모리 오가이의 문하에 들어갔다. 17세 때, 카이세이 고등학교에 편입했고, 이 해에 타야마 카부쿠를 알게 되었다. 이듬해, 이쿠분칸 중학교로 전학하여 진급했다.[8] 19세에 제일 고등중학교에 진학하여 청년기를 맞이했다.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과(현재의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2. 2. 관료 생활과 민속학 연구
1900년 7월,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농상무성 농무국 농정과에 근무했다. 이후 전국의 농산촌을 돌아다니며 도호쿠 지방의 농촌 실태를 조사하고 연구했으며, 와세다대학에서 "농정학"을 강의했다.[1]1901년 5월, 야나기타 가(家)의 양자로 입적했다. 양부 나오히라(1849-1932)(구 시나노 이이다번 무사)는 대심원 판사를 지냈다.[12] 1904년 4월, 야나기타 나오히라의 넷째 딸 타카(17세)와 결혼했다.[1]
1902년 2월 12일, 법제국 참사관에 임관했다.[13] 1908년 1월, 겸임궁내서기관을 지냈다. 이 무렵, 자택에서 "향토연구회"를 시작했다.[14]
1914년 4월, 귀족원 서기관장이 되었다. 1919년 12월, 도쿠가와 이에사토 귀족원 의장과의 불화로 서기관장을 사임했다.
1921년, 유럽을 방문하여 제네바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위원에 취임했다.[10] 1923년, 국제연맹 위임통치 위원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1939년, 민간 학술 단체 국민학술협회 설립 회원이 되었다. 1942년, 일본문학보국회 이사가 되었다.
1946년 7월, 추밀고문관에 취임하여 신헌법 제정 심의에 참석했다.
2. 3. 민속학 연구와 저술 활동
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후, 야나기타는 농상무성 농무국에서 공무원으로 약 20년간 근무했다. 관료 생활 동안 일본 본토인 혼슈의 시골 지역을 여행했다.[1]시간이 지나면서 야나기타는 동료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정책으로 인해 지역 자치에 대한 우려가 부족하다는 점을 점점 더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점차 이러한 집단을 지지하며 농업의 초점을 부유한 지주가 아닌 소규모 농민의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치관과 사상에 대한 반발이 그의 직업 변화와 민속학으로의 전환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2]
농상무성을 떠나면서 야나기타는 시골 일본을 더 자세히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현지 관습, 관행 및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여행하며 심층 분석을 시작했다.[2] 이때 작가 시마자키 도시손을 비롯한 그의 문학적 친구들은 그에게 시골 마을의 구전 전통과 관습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출판하도록 격려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도노 이야기"(1912)라는 책이다. 이것은 이와테의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시골 마을인 도노의 짧은 이야기, 관행, 신앙 및 일화를 모아 놓은 것이다.[5]
여기서부터 야나기타의 연구는 그가 오늘날까지도 알려진 민속학의 인류학적 연구로 발전했다. 그는 민속학자 사사키 기젠과 광범위하게 협력하여 여러 작품을 출판했다.
야나기타가 지역 전통에 집중한 것은 일본 역사의 서술에 서민의 삶을 삽입하려는 더 큰 노력의 일환이었다.[3] 그는 역사적 서술이 일반적으로 통치자와 고위 관리와 관련된 사건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야나기타는 이러한 서술이 엘리트 중심의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역사를 통틀어 평범한 일본인의 삶을 특징짓는 상대적으로 단조롭고 반복적인 측면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카(山家) 또는 산골 주민과 섬 주민과 같이 서민들의 다양한 집단의 독특한 관행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민속학 연구의 세 가지 영역, 즉 물질적 대상, 구전 전승 및 정신적 또는 감정적 현상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유사한 경험을 통해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접근할 수 있는 이 세 번째 범주는 민속학 연구의 주요 초점으로 간주된다.[4]
전반적으로 야나기타의 연구는 매우 기억에 남고 장르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는 일본 최고의 민속학자 중 한 명이며, "근대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으며 '민속학'(minzokugaku) 분야 자체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6]

'''주요 저서'''
- ''도노 이야기''(遠野物語) - 야나기타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일본 이와테현 도노시(遠野市)에서 수집한 민속 전설, 이야기 및 전통(민담과는 다름)을 기록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가파와 자시키와라시와 같은 유명한 요괴가 등장한다.[5]
- ''달팽이 고찰''(蝸牛考) - 야나기타는 '달팽이'라는 단어의 방언 분포가 일본 열도에 동심원을 형성한다는 것을 밝혀냈다(시간에 따른 방언 확산의 중심 대 주변부 이론).
- ''모모타로의 탄생''(桃太郎の誕生) - 이 작품에서 야나기타는 일본 민속과 사회의 주제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작품의 제목은 유명한 일본 이야기인 모모타로에서 따온 것으로, 그는 일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서 민담에 대한 논평에서 사용하는 예시 중 하나로 모모타로를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모모타로를 분석하여 일본 사회 전체의 여러 측면을 논한다. 그의 방법론은 그 이후로 많은 민족학자와 인류학자들이 따랐다.
- ''해상의 길''(海上の道) - 야나기타의 사망 1년 전에 출판된 이 작품은 일본 오키나와현(沖縄県) 제도의 역사, 문화 및 민속 전통을 기록한 것이다. 야나기타는 오키나와 연구에서 일본 문화의 기원을 그 지역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그의 많은 추측은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또한 그의 연구에 대한 영감은 그가 아이치현 이라고 미사키 해변을 방황하던 중 야자 열매를 쿠로시오 해류에 실려 온 것을 주운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야나기타 구니오의 일본 민담 안내'' - 야나기타 구니오의 ''일본 옛이야기 명휘''(日本昔話名彙)에서 발췌한 일본 민담과 자료를 패니 해긴 마이어가 번역한 것이다.[6]
- ''후카리코토바노키''(後狩詞記) - 규슈를 여행하면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미야자키현 산간 지역 공동체의 전통과 생활 방식, 특히 사냥 관습과 관련 용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개인적으로 출판했다. 이 작품은 일본 민속 연구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도쿄제국대학에서 농정학을 배우고, 농상무성 고등관료가 된 후, 1908년 5월 하순부터 약 3개월에 걸쳐 규슈와 시코쿠를 여행했다. 7월 미야자키현 시이바촌을 방문하여 오가와의 시이바 토쿠조 저택에서 문서 『狩之巻』을 보았다. 귀경 후, 시이바촌장 나카세 스나오(中瀬淳)에게 문서를 알기 쉽게 다시 써달라고 부탁하고, 다른 사냥 관련 구전도 문서로 만들어 편지로 보내도록 했다. 그것들을 정리하여 1909년 3월 15일에 간행한 것이 『후카리코토바노키(後狩詞記)』이다. 이 책에 대해 야나기타는 “오늘날 이것이 일본 민속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10]
그 후, 강연 여행 등을 통해 지방의 실정에 접하면서 점차 민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깊게 해 나갔다. 또한,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스피리추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던 “괴담 붐” 속에서 당시 신진 작가였던 사사키 기젠과 알게 되어, 이와테현토오노의 사사키를 방문하여 『도노 이야기』를 집필한다.[11] 그 외 미야자키현시이바 등으로의 여행 후, 향토회를 시작으로, 잡지 『향토연구』를 창간했다. 민속학이 독자적인 영역으로서 주장을 갖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향토생활연구법』에서 "중복입증법" 등을 통해 일본민속학의 이론과 방법론이 제시되는 등, 쇼와 초기에는 일본 민속학이 확립되는 시대였다. 한편 산촌조사, 해촌조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민속 채집의 중요성과 방법이 제시되었다. 이후,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를 가려내고 미래에 전달한다는 큰 문제의식을 근저에 두고 "내성의 학"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2. 4. 말년과 사망
1951년 문화훈장을 수훈했다.[23] 1962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 세이죠의 자택에서 심장쇠약으로 사망했다. 향년 88세. 사망일에 정삼위 훈일등에 서훈되었고,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 당시 수상이었던 이케다 하야토는 "민간인이지만, 이 정도의 인물에게는 훈장(서보장)은 가볍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12일에 도쿄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일본민속학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각계에서 300명이 참석했다. 법명은 영륭원전현예상정명국대거사(永隆院殿顕誉常正明国大居士)이다. 묘소는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다마구의 춘추원(春秋苑)이다.3. 주요 연구 업적 및 방법론
야나기타 쿠니오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농상무성에서 관료로 근무하면서, 일본 각지의 농촌 현실을 접하고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1] 그는 농업 정책의 초점을 소규모 농민의 협동조합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이러한 그의 관점은 훗날 민속학 연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나기타는 일본 역사 기록이 통치자 중심의 사건에만 집중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3] 그는 서민들의 다양한 집단의 독특한 관행을 강조했다.[4]
그는 민속학 연구의 세 가지 주요 영역으로 물질적 대상, 구전 전승, 정신적 또는 감정적 현상을 제시했다. 특히,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세 번째 영역을 민속학 연구의 주요 초점으로 간주했다.[4]
야나기타는 일본 민속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민속학'(minzokugaku)이라는 학문 분야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6] 그는 1902년 5월 1일 종칠위를 시작으로[24] 1962년 8월 8일 훈일등 욱일대수장까지 다양한 훈장을 받았다.
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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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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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훈장 수여 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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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몬 켄 촬영
야나기타는 쇼와 초기 나가노현 히가시치쿠마군 교육회 강연에서 "우리 일행이 지금 열중하고 있는 학문은 목적에 있어서는 많은 역사가들과 같다. 다만 방법만이 조금 새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며, 민속학이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유럽과 달리 일본에는 민속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어, 이를 역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도호쿠 지방과 오키나와를 옛 일본의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지역으로 주목했다.
3. 1. 현지 조사와 민속 자료 수집
야나기타 구니오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농상무성에서 약 20년간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는 일본 본토(혼슈)의 시골을 여행하면서 중앙 정부가 지역 자치를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며, 소규모 농민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 정책을 주장했다.[2] 농상무성에서 나온 후, 야나기타는 일본 시골을 조사하며 지역의 풍습, 관행, 신앙을 기록했다.[2]시마자키 도시손 등 문학계 친구들의 권유로 도노의 이야기, 관행, 신앙 등을 모은 《도노 이야기》(1912)를 펴냈다.[5] 이후 민속학자 사사키 기젠과 함께 민속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야나기타는 일본 역사 기록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포함시키고자 했다.[3] 그는 통치자 중심의 역사 서술이 일반 일본인의 삶을 무시한다고 비판하며, 여러 서민 집단의 독특한 관행을 강조했다.[4] 그는 민속학 연구의 세 가지 영역으로 물질적 대상, 구전 전승, 정신적/감정적 현상을 제시하고, 특히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세 번째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4]
야나기타는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민속학'(minzokugaku)이라는 학문 분야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6] 그는 1908년 5월부터 약 3개월간 규슈와 시코쿠를 여행하며 미야자키현 椎葉村에서 『후카리코토바노키(後狩詞記)』(1909년 3월 15일 간행)를 썼는데, 이는 일본 민속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10]
이후 강연 여행 등을 통해 민속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스피리추얼리즘 유행과 괴담 붐 속에서 佐々木喜善과 교류하며 『토오노 이야기』를 집필했다.[11] 미야자키현 시이바 등 여행 후 향토회를 시작하고 잡지 『향토연구』를 창간하며 민속학의 영역을 넓혀갔다.
『향토생활연구법』에서 "중복입증법" 등 일본 민속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했고, 쇼와 초기에 산촌 및 해촌 조사를 통해 민속 채집의 중요성과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민속학을 "스스로를 돌아보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했다.
3. 2. 방언 연구와 방언주변론
야나기타 쿠니오는 1930년에 출간한 《달팽이 고찰》에서 각 지역의 달팽이 명칭에 대한 방언 분포를 비교 검토하여, 언어가 문화의 중심지에서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간다는 "방언주변론"을 제시했다. 그는 방언과 구어를 중시했으며, 이러한 연구는 국어사 연구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3. 3. 역사학과 민속학의 관계
야나기타 구니오는 민속학이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적 서술이 주로 통치자나 고위 관리와 관련된 사건에 집중되어 있어, 평범한 일본인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보았다.[3] 그는 이러한 엘리트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서민들의 삶을 역사 서술에 포함시키고자 했다.[3]야나기타는 특히 '산카(山家)'나 섬 주민과 같이 서민들의 다양한 집단의 독특한 관행을 강조했다. 그는 민속학 연구의 세 가지 영역으로 물질적 대상, 구전 전승, 정신적 또는 감정적 현상을 제시하고, 이 중에서도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정신적, 감정적 현상을 민속학 연구의 주요 초점으로 삼았다.[4]
야나기타는 일본 각지에 남아있는 민간 전승을 역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1935년에 출간된 『향토생활의 연구법』에서 "기존의 사학 방침에 따라 현재 남아있는 문서만으로 고장의 과거를 알고자 한다면,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마을만이 역사가 없는 곳이 되고, 우리나라 농민의 역사는 봉기와 재해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서술하며, 문헌 자료에만 의존하는 역사 연구의 한계를 지적했다.[32] 그는 공문서 등에 나타난 봉기나 재해와 관련된 민중의 모습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들의 생활 문화 전체상은 알 수 없다고 보았다.
야나기타는 평민의 생활 문화사 해명을 위해서는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현지조사를 통한 민속자료 수집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32] 그는 1933년부터 1935년에 걸쳐 민속자료 분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고, 1942년에는 『일본민속학』에서 "민속학은 미세한 사실의 고증으로부터 출발한다"라고 강조하며, 계획적인 조사를 중시했다.
4. 주요 저작
- 遠野物語일본어 (1910년): 이와테현 도노 지방의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일본 민속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5] 가파, 자시키와라시와 같은 요괴 이야기가 등장한다.[5]
- 蝸牛考일본어 (1930년): '달팽이'라는 단어의 방언 분포를 연구하여 언어가 긴키에서 지방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나갔다는 방언 주변론을 제시했다.[33]
- 桃太郎の誕生일본어 (1933년): 모모타로와 같은 옛이야기 분석을 통해 일본 사회의 단면을 그리려 한 작품이다. 민속학, 민족학, 문화인류학에 영향을 주었다.
- 海上の道일본어 (1961년): 오키나와 제도의 역사, 문화, 민속 전통을 기록한 저서이다. 야나기타는 아이치현 이라고 미사키에서 야자 열매를 주운 것을 계기로 오키나와를 연구하여 일본 문화의 기원을 찾으려 했다.
- 後狩詞記일본어 (1909년): 미야자키현 산간 지역 공동체의 전통과 생활 방식, 특히 사냥 관습과 관련 용어를 다룬 작품이다. 일본 민속 연구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0]
5. 비판과 한계
야나기타 구니오의 일본 민속학은 선구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비판과 한계를 지닌다.
우선, 야나기타는 유랑민, 비농업민, 부락민, 성소수자 등 특정 집단에 대한 연구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연구 방법론이 모든 민속 현상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성향으로 인해 특정 민속과 풍습을 간과하거나 배제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0][11]
미야모토 츠네이치는 야나기타의 영향을 받아 민속학자가 되었지만, 야나기타와 달리 현지 조사를 통해 다양한 민속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미야모토의 연구는 아미노 요시히코에 의해 역사학 분야에서도 주목받았다.
한국의 관점에서는, 그의 오키나와 연구가 일본 문화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오키나와의 독자성을 간과했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6. 영향과 평가
야나기타 구니오는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며, '민속학'(民俗学, minzokugaku일본어)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근대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로 불린다.[6] 그의 연구는 민속학뿐만 아니라 역사학, 국어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야나기타는 역사 서술이 주로 통치자나 고위 관리와 관련된 사건에 집중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역사에 포함시키고자 노력했다.[3] 그는 엘리트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산골 주민이나 섬 주민과 같이 다양한 서민 집단의 독특한 관습을 강조했다.[4]
야나기타는 민속학 연구의 세 가지 주요 영역으로 물질적 대상, 구전 전승, 정신적 또는 감정적 현상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비슷한 경험을 통해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세 번째 범주를 민속학 연구의 핵심으로 간주했다.[4]
야나기타의 현지 조사와 민속 자료 수집 방법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방법론은 미야모토 쓰네이치와 같은 후배 민속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아미노 요시히코에 의해 역사학 분야에서도 주목받았다.
야나기타 구니오의 연구는 한국 민속학 연구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연구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그의 저작들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읽히면서 일본 민속학 연구의 필독서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는 유랑민, 비농업민, 부락민, 동성애를 포함한 성애, 초국가적인 민속 등에 대해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했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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