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레코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케레코드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이철에 의해 설립되어 1945년까지 운영된 음반 회사이다. 일본 제국축음기상회 경성지부장으로 있던 이철이 'Okay'를 일본식으로 읽은 '오케'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음반 회사로 평가받으며,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등 인기 가수를 배출하고, 〈목포의 눈물〉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이철의 사망과 일본 본사의 철수로 인해 문을 닫았다. 1948년에는 같은 이름으로 재설립되었으나, 이전 오케레코드와는 다른 회사였으며,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 등이 인기를 얻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음반을 발매했으나, 정확한 해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철이 일본 제국축음기상회 경성지부장으로 임명되면서 1933년부터 오케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달고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1] 오케는 영어 'Okay'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으로, 알파벳으로는 'Okeh'로 표기한다.
1948년 오케레코드는 한국 음반산업의 전설적인 존재였기에 같은 이름으로 재설립되었다. 새로 설립된 오케레코드는 이전에 이철이 운영하던 오케레코드와 이름과 음반 상표는 유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회사였다. 이전 오케레코드에서 핵심 가수, 작곡가, 작사가로 활동했던 이난영, 장세정, 조명암, 김해송 등이 참여했다.
2. 일제 강점기 (1933년 ~ 1945년)
제국축음기주식회사와 제휴하였으나 이철이 독자적으로 경영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음반회사로 평가된다.[2] 이철은 경영을, 매부인 김성흠은 나라현에서 배운 기술을 담당했다.[3]
일제 강점기 대형 음반 회사로는 오케레코드와 콜럼비아레코드, 빅타레코드, 포리돌레코드, 태평레코드 등 다섯 군데가 있어 1943년까지 음반을 제작했다. 이 가운데 오케레코드는 가장 늦게 음반을 내기 시작했으나, 음반 발매 종수에서 콜럼비아레코드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대중가요 부문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인기 가수와 노래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이철은 오케레코드 소속 가수들로 구성된 공연단의 순회 공연에 주력하였고, 전쟁 지원을 위한 군국주의 음악이 오케를 통해 발매되기도 하였다. 1944년 이철이 사망하고 이듬해 태평양 전쟁 종전과 함께 일본 본사가 철수하여 오케레코드는 문을 닫았다.
2. 1. 대표 가수 및 노래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조명암, 박향림 등이 오케레코드에서 활동하였다.[1]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크게 흥행하는 등 인기곡도 쏟아져 나왔다.
3. 대한민국 (1948년 ~ ?)
한국 전쟁 이후에도 오케레코드라는 이름을 단 음반들이 발매되었다. 그러나 《서울부기》를 낸 오케레코드가 1948년에 《울어라 은방울》을 발매한 오케레코드와 같은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해체된 시기도 알 수 없다.
3. 1. 해방 이후 주요 노래
1948년 5월,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과 〈세월은 간다〉가 발매되었다. 송민도의 〈고향초〉, 박재홍과 옥두옥의 듀엣곡 〈눈물의 오리정〉, 남인수의 〈몽고의 밤〉 등이 인기를 얻었다. 특히 조명암과 김해송 콤비가 만들고 장세정이 노래한 〈울어라 은방울〉은 오랫동안 사랑받는 명곡이 되었다.[4]
한국 전쟁 이후에도 오케레코드에서는 《서울부기》, 《서울의 거리》, 《청춘 하이킹》, 《자유부인》 등의 음반이 발매되었다.
4. 평가 및 의의
오케레코드는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음반 회사로 평가받는다.[2] 1933년 이철이 일본 제국축음기상회 경성지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오케'라는 독자적인 이름으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1] '오케'는 영어 'Okay'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으로, 알파벳으로는 'Okeh'로 표기한다.
일제 강점기에 오케레코드는 콜럼비아레코드에 이어 음반 발매 종수 2위를 기록했으며, 대중가요 부문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인기 가수와 노래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등이 오케레코드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1935년 발표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크게 흥행했다.
1948년에는 같은 이름의 음반회사가 재설립되었는데, 이전의 오케레코드와 이름과 음반 상표는 유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회사이다. 이난영, 장세정, 조명암, 김해송 등이 참여했으며, 송민도의 〈고향초〉,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4] 등이 인기를 얻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오케레코드라는 이름으로 음반이 발매되었으나, 회사의 정확한 해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4. 1. 일제 강점기
이철이 일본 제국축음기상회 경성지부장으로 임명되면서 1933년부터 오케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달고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1] 오케는 영어 'Okay'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 알파벳으로는 'Okeh'로 표기한다.제국축음기주식회사와 제휴하였으나 이철이 독자적으로 경영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음반회사로 평가된다.[2] 이철은 경영을, 매부인 김성흠은 나라현에서 배운 기술을 담당했다.[3]
일제 강점기 대형 음반 회사로는 오케레코드와 콜럼비아레코드, 빅타레코드, 포리돌레코드, 태평레코드 등 다섯 군데가 있어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3년까지 음반을 제작했다. 이 가운데 오케레코드는 가장 늦게 음반을 내기 시작했으나, 음반 발매 종수에서 콜럼비아레코드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대중가요 부문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인기 가수와 노래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조명암, 박향림 등이 오케레코드에서 활동하였다. 1935년 발표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크게 흥행하는 등 인기곡도 쏟아져 나왔다.
일제 강점기 말기 이철은 오케레코드 소속 가수들로 구성된 공연단의 순회 공연에 주력하였고, 전쟁 지원을 위한 군국주의 음악이 오케를 통해 발매되기도 하였다. 1944년 이철 사망, 이듬해 태평양 전쟁 종전과 함께 일본 본사가 철수하여 오케레코드는 문을 닫았다.
4. 2. 대한민국
1948년에 같은 이름의 음반회사가 재설립되었다. 새로 설립된 오케레코드는 이전의 이철이 운영하던 오케레코드와 이름도 같고 음반상표도 유사하나, 실질적으로는 다른 회사이다. 이전의 오케레코드에서 핵심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로 활동했던 이난영, 장세정, 조명암, 김해송 등이 참여했다.부활한 오케레코드는 1948년 5월에 《울어라 은방울》과 《세월은 간다》를 발매하였다. 인기곡으로는 송민도의 〈고향초〉, 박재홍과 옥두옥의 듀엣곡인 〈눈물의 오리정〉, 남인수의 〈몽고의 밤〉 등이 있었고, 특히 조명암과 김해송 콤비가 만들고 장세정이 노래한 〈울어라 은방울〉은 오래 기억되는 명곡이다.[4] 그러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발매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오케레코드라는 이름을 달고 음반이 발매되었다. 《서울부기》, 《서울의 거리》, 《청춘 하이킹》, 《자유부인》 등이 있다. 그러나 《서울부기》를 낸 오케레코드가 한국 전쟁 전인 1948년에 《울어라 은방울》을 발매한 오케레코드와 정확히 같은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해체된 시기도 알 수 없다.
참조
[1]
서적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12-15
[2]
웹인용
레코드판
https://web.archive.[...]
대한민국 문화관공부 e뮤지엄
2008-07-09
[3]
뉴스
“2002 한·일 월드컵이 교포-日사회 융합 길 터줘” - 전국체전 50년 ‘개근’ 김영재 在日대한체육회 상임고문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7-04-07
[4]
뉴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