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복수
1. 개요
고복수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가수로, 193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으며, 대표곡으로는 〈타향〉, 〈짝사랑〉 등이 있다. 경상남도 울산 출신으로, 20대 초반 콜럼비아레코드 콩쿠르 입상을 계기로 데뷔했다. 이후 오케레코드, 빅타레코드 등에서 활동하며 황금심과 결혼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탈출하는 등 불운을 겪었으며, 은퇴 후 사업 실패로 어려움을 겪다 1972년 사망했다. 슬하에 고영준, 고영민, 고병준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미자와 안정애를 제자로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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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트로트 가수 -
반야월 (작사가)
반야월(본명 박창오)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활동한 작사가이자 가수로, 진방남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여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러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작사가로 전향하여 서민들의 애환과 향토적인 정서를 담은 수많은 곡을 작사하며 한국 대중가요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
일제강점기의 트로트 가수 -
황금심
황금심은 1936년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1등으로 데뷔하여 〈알뜰한 당신〉, 〈울산 큰애기〉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동하다가 1996년 파킨슨병으로 투병, 2001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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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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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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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고복수는 채규엽, 강홍식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초기의 가수로 분류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 한숨을 쉬는 듯한 분위기의 가창은 〈타향〉, 〈사막의 한〉, 〈짝사랑〉 등 한탄조의 가사로 이루어진 그의 인기곡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남인수와 백년설이 등장한 이래 인기가 수그러들면서 1940년대부터는 무대 공연 위주로 활동을 전환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 때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탈출했고, 1957년 은퇴 공연 이후 손대는 사업마다 계속 실패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는 등 인기 가수였지만 굴곡 많은 인생을 보냈다. 아내 황금심이 영화 주제곡을 부르며 생계를 연명하는 사이 고복수는 서적 외판원으로 일해야 했다. 이후 투병을 하다가 뇌신경 고혈압과 식도염으로 1972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및 데뷔
경상남도 울산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그의 집은 국수 공장을 했다. 유년 시절 축음기에 매달려 노래만 부르며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대 초반 콜럼비아레코드 주최 콩쿠르 부산 대회에 입상하고, 경성부 본선에서 3위를 차지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1934년 〈타향〉과 〈이원애곡〉을 발표, 음반은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타향〉은 후에 〈타향살이〉로 알려졌으며, 일제 강점기 최고의 대중가요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크게 유행했다.
1936년 말 "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라는 가사의 〈짝사랑〉이 히트하고, 이은파와의 듀엣곡 신민요 〈풍년송〉 등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오케레코드와 전속 공연단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하다 1940년부터 빅타레코드 반도악극좌로 이동, 〈알뜰한 당신〉의 인기 가수 황금심과 1941년 결혼했다.
2.2. 전성기 활동
20대 초반의 나이에 콜럼비아레코드가 주최한 콩쿠르 부산대회에 입상하고 경성부에서 열린 본선에 진출해 3위를 차지한 것이 가수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4년에 〈타향〉과 〈이원애곡〉을 발표하여 음반은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했다. 후에 〈타향살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된 〈타향〉은 일제 강점기 최고의 대중가요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크게 유행했다.
이후 1936년 말에 발표한 "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라는 가사의 〈짝사랑〉이 또다시 히트하고 이은파와의 듀엣곡인 신민요 〈풍년송〉 등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오케레코드와 전속 공연단인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부터 빅타레코드의 반도악극좌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 〈알뜰한 당신〉의 인기 가수 황금심과 만나 1941년에 결혼하였다.
고복수는 채규엽, 강홍식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초기의 가수로 분류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 한숨을 쉬는 듯한 분위기의 가창은 〈타향〉, 〈사막의 한〉, 〈짝사랑〉 등 한탄조의 가사로 이루어진 그의 인기곡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남인수와 백년설이 등장한 이래 인기가 수그러들면서 1940년대부터는 무대 공연 위주로 활동을 전환하게 되었다.
2.3. 광복 이후 활동 및 말년
고복수는 인기 가수였지만 인생에 굴곡이 많아 불운의 가수로도 기억된다. 한국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탈출했고, 1957년 은퇴 공연 이후 손대는 사업마다 계속 실패하여 어려운 생활을 했다. 아내 황금심이 영화 주제곡을 부르며 생계를 연명하는 사이 고복수는 서적 외판원으로 일해야 했다.
이후 투병을 하다가 뇌신경 고혈압과 식도염으로 1972년 사망했다. 향년 62세.
황금심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 가운데 맏아들이 트로트 가수 고영준, 둘째 아들이 가톨릭 복음가수 고영민, 셋째 아들이 작곡가 고병준이며, 둘째 며느리는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 손현희이다. 동화예술학원을 경영할 때 배출한 제자로는 이미자와 안정애가 있다.
3. 가족 관계
황금심과 夫婦중국어로 맺어져 슬하에 3남을 두었다.
| 관계 | 이름 |
|---|---|
| 장남 | 고영준 (1958년 ~ ) |
| 차남 | 고영민 (195? ~ ) |
| 며느리 | 손현희 (1962년 ~ ) |
| 삼남 | 고병준 (1962년 ~ 2005년 1월 1일) |
4. 학력
* 울산 일신보통학교 수료
* 울산 내선보통학교 졸업
*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졸업
5. 소속
동화예술학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