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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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옥쇄는 훌륭한 남자는 명예롭게 죽어야 한다는 뜻을 담은 말로, 원래는 중국 《북제서》에 등장하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이후 일본에서 군국주의 시기에 결의를 표명하거나,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 대신 전멸을 선택하는 상황을 미화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특히, 1943년 애투섬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전멸을 '옥쇄'로 표현하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전쟁 말기에는 '일억옥쇄'라는 슬로건으로 일본 국민의 저항 의지를 강조하는 데 활용되었다.

옥쇄
기본 정보
의미용사(勇士)라면 기왓장으로 무사히 생을 연명하기보다 차라리 옥이 되어 깨지는 편이 낫다는 뜻
국가 또는 조직을 위해 명예롭게 죽는다는 의미
유래《북제서(北齊書)》 '원경안전(元景安傳)'에서 유래
'와전(瓦全)하기보다는 옥쇄를 택한다'라는 고사에서 비롯
반대말와전
역사적 맥락
군사적 용례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사용한 용어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죽는다'는 의미로 사용
정치적 용례정당이나 내각의 사퇴를 비유적으로 표현
조직이나 개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의미
문화적 함의
긍정적 측면투지, 용기, 헌신, 자기희생 정신
명예를 중시하는 가치관 반영
부정적 측면비합리적인 희생 강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연결
생명 경시 풍조 조장
기타
관련 표현순사(殉死)
할복(割腹)
가미카제(神風)
사용 예시내각이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옥쇄할 각오를 다졌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옥쇄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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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래

'옥쇄'라는 말은 당나라 때 편찬된 《북제서》 원경안 열전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북위가 멸망하고 북제가 건국되자, 북위 황실의 씨 일족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그러나 원경안은 재빨리 귀순하여 북제 황실의 성씨인 '고'씨를 하사받았다. 원경안의 사촌인 원경호는 이에 대해 "어찌 본래의 종족을 버리고 다른 성을 따르겠는가. 대장부는 차라리 옥처럼 부서질지언정, 와전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고양에게 보고되어 원경호는 죽임을 당했다.

여기서 "대장부는 차라리 옥쇄할지언정, 와전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왔다. '옥쇄'는 명예롭게 죽는 것을, '와전'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비유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 고사를 본떠 "대장부는 옥쇄할지언정, 와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네"라는 시를 썼다.

1886년에 발표된 군가 "적은 몇만"에도 "기와가 되어 남느니 옥이 되어 부서지리"라는 가사가 있다.

만주 사변 중이었던 1932년, 고가 덴타로 대좌가 전사했을 때, 언론에서 "고가 연대 한 명도 남김없이 옥쇄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옥쇄'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결의를 표명하거나, 정쟁, 스포츠 보도 등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3. 태평양 전쟁

1943년 5월 29일 대본영은 애투섬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전멸한 것을 '옥쇄'라고 처음 발표했다. '전멸'이라는 단어가 국민에게 줄 동요를 줄이고, "옥과 같이 깨끗이 깨져 흩어졌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였다. 또한 보급로가 끊긴 수비대에 효과적인 지원을 하지 못해 "죽게 내버려둔" 군 상층부의 책임론을 회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애투섬 옥쇄 당시 수비대 2,650명 중 29명이 포로가 되었다.

3.1. 배경

1941년 1월 8일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가 내린 훈령(육훈일호)인 '전진훈'에 포함된 "살아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아니하고"라는 구절이 옥쇄 발생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포로로 잡히느니 전사나 자결을 택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지휘관은 상관의 명령 없이 항복이나 철수를 할 수 없었고, 이를 어기면 항명죄로 사형당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패전 경험이 적었기에 패전 시 상관의 체면이나 패전 은폐를 위해 자결·옥쇄가 강요된 측면이 있었다. 1939년 노몬한 사건에서 철수한 부대 장교 대다수가 자결을 강요받았다. 소련군 포로로 잡혔다가 일본으로 반환된 포로 역시 패전 은폐를 위해 장교는 자결을 강요받고, 하사관·병졸은 처분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소식이 끊긴 자도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훗날 전진훈의 구절이 장병의 항복 대신 옥쇄나 자결,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병 살해를 일반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사이판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 집단 자결 발생 역시 전진훈이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3.2. 전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서 '옥쇄'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공식 발표에서 쓰인 것은 1943년 애투섬 옥쇄이지만, 군대 내부 문서 등에서는 이전부터 사용례가 보인다.

예를 들어 1942년 제1차 바탄반도 전투에서는 기무라 부대로부터 사단사령부에 "제1 대대는 옥쇄코자 함(第一大隊ハ玉砕セントス)"라는 전문이 보내졌었다. 1942년 12월 8일 뉴기니 전선의 고나에서의 바사부아 수비대의 옥쇄를 기록, 이어진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1943년 1월 2일에는 같은 뉴기니 전선에서 부나의 육해군수비대가 옥쇄하였으나, 이것이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1944년 2월 이후의 일이다.

1943년 5월 29일 애투섬 일본군수비대가 전멸한 무렵 대본영 발표로서 처음으로 '옥쇄'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전멸'이라는 단어가 국민에게 주는 동요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여 "옥과 같이 깨끗이 깨져 흩어졌다"고 각인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아울러 보급로가 끊어진 수비대에 효과적인 원군이나 보급을 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죽게 내버려둔" 군 상층부에 대한 책임론을 회피시키려는 것이었다.

애투섬 옥쇄에서는 수비대 2,650명 중 29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후 옥쇄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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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밀어서 보기
년도월일옥쇄
1943년5월 29일애투 섬 수비대 옥쇄
1943년11월 22일길버트 제도의 마킨 수비대 ・타라와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2월 5일마셜 제도의 콰잘린 환초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2월 23일마셜 제도의 브라운 환초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7월 3일비악 섬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7월 7일사이판 섬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8월 3일테니안 섬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8월 11일괌 섬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9월 7일라맹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9월 13일텅웨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9월 19일앙가우르 섬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4년11월 24일펠렐리우 섬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5년3월 3일남태평양・뉴브리튼 섬 바이엔
1945년3월 17일이오지마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5년6월 23일오키나와 수비대 옥쇄 (지휘관의 자결로 인해 총원 장렬한 돌격 감행)
1945년8월 16일무단강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5년8월 21일슈무슈 섬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5년8월 21일계류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5년8월 25일사할린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5년8월 26일호두 요새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1945년9월 5일만주 수비대 총원 장렬한 전사

3.3. 일억옥쇄(一億玉碎)

전황이 절망적으로 치닫자, 일본 군부는 '본토 결전'을 주장하며, "일억 옥쇄"나 "일억(총) 특공", "신주불멸"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미 1941년부터 "나아가라 일억 불덩이다"라는 슬로건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 "일억"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만주, 조선반도, 대만 등 일본 본토 이외의 지역 거주자(그 대다수가 조선인대만인)를 포함한 숫자였으며, 일본 본토의 인구는 7천만 명 정도였다.

1944년 6월 24일, 대본영 육군부 전쟁지도반은 기밀 전쟁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더 이상 희망 있는 전쟁 정책은 수행할 수 없다. 남은 것은 일억 옥쇄를 통해 적의 전의를 꺾는 것뿐이다.

1944년 9월, 오카다 게이스케는 "일억 옥쇄하여 국체를 지키겠다는 결심과 각오로 국민의 사기를 고양하고, 그 결속을 굳게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1945년 1월 24일, 고노에 후미마로는 "요즘 전황의 위급함을 알리는 것과 함께 일억 옥쇄를 외치는 목소리가 점차 더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는 소위 우익자류이지만, 배후에서 이를 선동하고 있는 것은, 이를 통해 국내를 혼란에 빠뜨려 결국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공산 분자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쇼와 천황에게 경고했다(고노에 상주문 참조). 같은 해 4월, 전함 "야마토"의 오키나와 방면 출격은, 군 내의 마지막 통고에 "일억 옥쇄에 앞서 훌륭하게 죽어주기 바란다"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해상 특공" 또는 "수상 특공"이라고도 불렸다.

4. 옥쇄를 주제로 한 작품

* 오다 마코토 - 《옥쇄》(玉砕, 신호사, 1988년), 《옥쇄》(신초샤, 1998년)
* 후나사카 히로시 - 《옥쇄―암호전문으로 철한 팔라우의 사투》(玉砕―暗号電文で綴るパラオの死闘, 요미우리 신문사, 1968년)
* 후지타 쓰구하루 - 《아투 섬 옥쇄》(アッツ島玉砕, 그림책(전쟁화), 1943년)
* 미즈키 시게루 - 《총원 옥쇄하라!》(総員玉砕せよ!, 자전적 장편만화, 고단샤, 197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