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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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군국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이 군사력을 강화하고 팽창주의 외교 정책을 추구한 시기를 일컫는다. 프로이센의 군사 모델을 도입하여 징병제를 실시하고, '부국강병'을 표방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사회, 경제적 위기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며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팽창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 세력도 존재했으나,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미국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패배와 미국의 점령으로 일본 군국주의는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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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칙유는 메이지 천황이 1882년 육해군 장병에게 내린 칙유로, 군부의 동요를 막고 정신적 지주를 확립하기 위해 충절, 예의, 무용, 신의, 질소의 다섯 가지 덕목을 강조하며 군인의 정치 불관여를 명시하였다. - 일본군 - 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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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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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개요 | |
명칭 | 일본 군국주의 |
로마자 표기 | Nihon gunkoku shugi |
한자 표기 | 日本軍國主義 |
다른 표기 | 일본 제국주의 (日本帝󠄁國主義) |
관련 문서 | 쇼와 시대의 국가주의 |
특징 | |
설명 | 일본 제국 (1873–1945)이 추구했던 군사적 이데올로기 |
관련 개념 | |
구분 | 일본 파시즘, 일본의 내셔널리즘 |
참고 문헌 | |
서적 | 김용권, 《증보 개정 한국 성명자전: 한국·조선 사람 이름을 올바르게 읽기 위해서》, 삼수사, 2007년 12월 25일, 17쪽 |
2. 초기 군국주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부국강병과 척산흥업을 통해 제국주의적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로이센의 군사 이론은 일본 군국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73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도입한 징병제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애국주의적 가치를 교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슬로건은 일본 제국의 국력 확장과 군국주의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열강 세력에 합류했고, 확장주의적 외교 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대한제국 강제병합과 제1차 세계 대전 등을 통해 타이완, 조선, 관동주, 남양 제도 등을 지배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일본은 병합한 지역에 동화 정책을 실시하고, 만주 사변, 중일 전쟁(지나 사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대동아공영권과 팔홍일우를 내세워 황민화 교육을 강요했다. 이러한 일본 통치 시대는 대한민국 등에서 일제 시대라고 불리며 비판받고 있다.[18][19]
2. 1. 메이지 유신과 군부의 영향력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군은 일본의 근대 사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의 군사고문으로부터 근대 군사 이론과 황제에 대한 복종이라는 이상이 소개되었고, 1873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도입한 징병제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애국주의적 가치를 교육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표어는 일본 제국의 국력 확장과 군국주의의 연관을 보여준다.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확장주의적 외교 정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열강 세력에 합류하며 더욱 힘을 얻었다.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는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 사회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직 사무라이 또는 사무라이의 후손들이었으며, 공통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공유했다. 초기 메이지 정부는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이 위협받는다고 인식했고, 부국강병 정책의 주요 동기 중 하나는 강력한 군대를 건설하여 외부 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기 위한 경제적, 산업적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3]
1873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도입한 보병징병제와 1882년 칙어 반포는 군부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수천 명의 남성들을 군국주의적 가치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국체(國體)) 개념으로 사상 교육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야마가타는 농업 국가에서 선진 산업 및 군사 강국으로 변모한 프로이센의 성공에 큰 영향을 받아 해외 군사력 확장과 국내 권위주의 정부를 선호하는 프로이센의 정치 사상을 받아들였다. 프로이센 모델은 독립적인 군부에 대한 민간 통제의 개념을 약화시켰는데, 이는 일본에서도 군부가 국가 내 국가로 발전하여 정치 전반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3]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참모본부는 독일식 군사 모델의 우월성에 대한 야코프 메켈(Jakob Meckel) 소령의 견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메켈을 일본에 파견하여 오-요토이 가이코쿠진(외국인 고문)으로 임명했다.[4] 메켈은 군 사령부 구조 재편, 군수 및 수송 체계 강화, 징병 제도 개정 등 여러 가지 권고안을 제시했는데, 이러한 권고안들은 대부분 채택되었다.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육군사관학교 앞에는 메켈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5]
메켈은 클라우제비츠의 군사 이론[6]과 프로이센식 전쟁 게임을 도입하여 일본 군대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7] 그는 일본 장교들에게 전술, 전략, 조직에 대한 훈련을 시킴으로써 이전의 프랑스 고문들의 영향력을 자신의 철학으로 대체했다. 특히 메켈은 메이지 헌법 제11조~제13조에 명시된 대로, 프로이센 군사의 성공은 장교 계급의 군주인 천황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의 결과라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헤르만 뢰슬러의 천황에 대한 복종 이념을 강화했다.[8]
메이지 후기에는 겐요샤(1881년)와 흑룡회(1901년)와 같은 비밀 또는 준군사적 애국 단체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정치 활동과 준군사 활동 및 군사 정보 활동을 결합하고, 일본의 국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해외 확장주의를 지지했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부국강병이라는 말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일본 관리들이 제국주의를 존경과 권력을 얻는 수단으로 보았음을 보여준다.[9] 더욱 공격적인 대외 정책과 청일전쟁,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새로운 해외 제국을 확보하기 위한 강력한 군사력의 필요성은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서만 일본이 서구 열강의 존중을 얻고 불평등 조약을 개정할 수 있다는 인식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2. 2. 프로이센 군사 모델 도입
1873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도입한 보병 징병제와 1882년 칙어 반포는 군부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수천 명의 남성들을 군국주의적 가치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국체) 개념으로 사상 교육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3] 야마가타는 농업 국가에서 선진 산업 및 군사 강국으로 변모한 프로이센의 성공에 큰 영향을 받아 해외 군사력 확장과 국내 권위주의 정부를 선호하는 프로이센의 정치 사상을 받아들였다. 프로이센 모델은 독립적인 군부에 대한 민간 통제의 개념을 평가절하했는데, 이는 독일처럼 일본에서도 군부가 국가 내 국가로 발전하여 정치 전반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3]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 후,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참모본부는 야코프 메켈 소령의 견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메켈은 프랑스식 체제보다 독일식 군사 모델이 우월하다고 평가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메켈을 오-요토이 가이코쿠진으로 일본에 파견했다.[4] 메켈은 가쓰라 다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와카미 소로쿠 장군과 긴밀히 협력하며 군 사령부 구조를 사단과 연대로 재편하여 기동성을 높이고, 주요 군 기지를 철도로 연결하여 군수 및 수송 체계를 강화하며, 포병 및 공병 연대를 독립 사령부로 설립하고, 징병 제도를 개정하여 거의 모든 예외를 폐지하는 등 여러 가지 권고안을 제시했는데, 대부분 채택되었다.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육군사관학교 앞에는 메켈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5]
메켈은 일본 체류 기간(1885년~1888년)이 비교적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대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군사 이론[6]과 프로이센식 전쟁 게임(Kriegsspiel)을 도입하여 전술 개선 과정을 만들었다.[7] 당시 최고위급 일본 장교 60여 명에게 전술, 전략, 조직에 대한 훈련을 시킴으로써 이전의 프랑스 고문들의 영향력을 자신의 철학으로 대체했다. 특히 메켈은 메이지 헌법 제11조~제13조에 명시된 대로, 프로이센 군사의 성공은 장교 계급의 군주인 천황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의 결과라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헤르만 뢰슬러의 천황에 대한 복종 이념을 강화했다.[8]
일본 군국주의 성장의 기반에는 일본군이 누렸던 민간 통제로부터의 자유가 있었다. 1878년 일본 제국 육군은 독일 참모본부를 모델로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를 설립했다. 이 본부는 일본 육군성과 권한 면에서 독립적이며 동등했고(나중에는 우월해졌다). 일본 제국 해군도 곧 일본 제국 해군 참모본부를 설립했다. 이 참모본부들은 군사 작전 계획 및 실행을 담당했고, 천황에게 직접 보고했다. 참모총장은 내각 장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어떠한 민간 감독이나 통제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이었다.
3. 군국주의의 성장
1929년 대공황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농산물 가격 폭락과 공업 부문의 어려움으로 경제 위기가 심화되었고, 이는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침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권한을 확대하며 사회 불안과 경제 불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또한,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으로 인해 사회주의 확산을 우려한 지주와 자본가들은 군부를 지지하였다.
1930년대 일본에서 군부는 국가 정책 결정의 중심에 섰으며, 군비 확장과 침략 정책을 강화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등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1931년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 성립 직후 금 수출 금지가 재단행되고 일본 경제는 관리 통화 체제로 들어갔다. 이후 일본 엔(¥) 환율 하락을 기회로 삼아 수출을 증대시켰다. 미국의 뉴딜 정책, 영국의 블록 경제권 강화에 의해 일본 상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었지만, 일본의 면직물 수출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부상하였다. 만주사변으로 인한 군수 경기와 수출 증진으로 산업계는 활기를 되찾았고, 1933년경에는 공황 이전 수준으로 경기가 회복되었다. 특히 군수 산업과 연관된 중화학 공업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철강업에서는 일본 제철 회사가 생겨났고, 자동차 공업과 화학 공업에서도 닛산(Nissan) 콘체른, 일본 질소(日窒) 콘체른 등의 신흥 재벌이 등장하였다. 정부의 경제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정부의 혁신 관료 그룹이 대두하였고, 군부의 막료 그룹과 연계되어 국방 국가 일본 건설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일본은 국가주의 고양, 혁신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각 분야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무산 정당들조차도 국가 사회주의로 전향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1932년 아카마쓰 가쓰마로(赤松克麿)를 중심으로 일본 국가사회당이 결성되었다. 탄압받던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도 옥중에서 전향 성명서를 냈고, 일본 좌익은 '전향의 시대'를 맞아 사회주의 운동은 다시 한번 침체기에 들어갔다. 사상과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고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상, 학문에도 탄압이 계속되었다. 불온 서적 소지만으로도 체포되어 투옥되는 사상의 겨울이 도래하였다. 점차 군부가 주도하는 국가 사회주의적 움직임에 편승하려는 언론도 등장하였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일본 전통 문화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쇼와 시대 초기, 대공황으로 인한 세계 경제 질서 붕괴, 서구 열강의 무역 장벽 부과, 국내 테러는 일본 정계의 급진화를 불러왔다. 이는 군국주의적 애국심 부활, 민주 세력 약화, 군부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애국적인 교육은 ''팔굉일우'' 의식을 강화했다. 와타나베 조타로, 나가타 데쓰잔, 시데하라 기주로 등 "군사 해결책"에 저항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축출되거나 실질적인 역할에서 제외되었다.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은 전환점이 되었다. 하마구치 오사치와 민정당은 일본 해군력을 제한하는 조약에 동의했지만, 군부는 국가 안보 위협을 주장하며 반대했다. 정우회는 이를 미국 강요로 묘사하며 쇼와 시대의 외국인 혐오를 부채질했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암살당하면서 일본의 당파 정치는 몰락했다. 암살자들은 애국심으로 행동한 것으로 여겨졌고, 군부는 제약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3. 1. 경제적 요인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농민들이 큰 피해를 보았고, 공업 부문도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군부는 이러한 경제 불황과 사회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침략 정책을 강화하고 군부의 권한을 확대했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으로 인한 사회주의 확산을 우려하여 군부를 지지했다.1931년 12월,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금 수출 금지를 다시 시행하고, 일본 경제는 관리 통화 체제로 전환되었다. 일본은 일본 엔(¥) 환율 하락을 이용하여 수출을 크게 늘렸다. 미국의 뉴딜 정책, 영국의 블록 경제 강화로 일본 상품에 높은 관세가 부과되었지만, 일본 면직물 수출은 크게 증가하여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되었다. 만주사변으로 인한 군수 경기와 수출 증가는 산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933년경에는 경기가 대공황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특히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철강업에서는 일본 제철 회사가 설립되었고, 자동차 공업과 화학 공업에서는 닛산(Nissan) 콘체른, 일본 질소(日窒) 콘체른 등 새로운 재벌이 나타났다. 정부의 경제 통제가 강화되면서 정부의 혁신 관료 그룹이 등장했고, 이들은 군부 막료 그룹과 협력하여 국방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3. 2. 사회적 요인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국가주의 고양과 혁신 운동의 열기가 높아졌고, 이는 각 분야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내셔널리즘 고양 시대를 맞아 무산 정당들조차도 국가 사회주의로 전향(轉向)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1]아카마쓰 가쓰마로(赤松克麿)를 중심으로 1932년 일본 국가사회당이 결성되었다. 탄압받던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도 옥중에서 전향 성명서를 내기 시작했고, 일본의 좌익은 '전향의 시대'를 맞이하여 사회주의 운동은 다시 한번 침체기에 들어갔다. 사상과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고,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상과 학문에도 탄압이 계속되었다. 불온 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사상의 겨울이 다시 도래하였다. 점차 군부가 주도하는 국가 사회주의적 움직임에 편승하려는 언론도 등장하였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일본 전통 문화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
3. 3. 군부의 독립성
쇼와 시대 초, 대공황으로 인한 세계 경제 질서의 붕괴와 서구 열강의 무역 장벽 부과, 그리고 국내 테러 폭력은 일본 정계의 급진화를 불러왔다. 이는 "군국주의적" 애국심의 부활, 민주 세력의 약화, 그리고 군부가 국내외 모든 위협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1] 애국적인 교육 또한 일본의 지배 아래 아시아를 통일해야 한다는 신성한 사명인 ''팔굉일우'' 의식을 강화했다.[1]와타나베 조타로, 나가타 데쓰잔 장군, 시데하라 기주로 전 외무대신 등 "군사 해결책"에 계속 저항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축출되거나 실질적인 역할에서 제외되었다.[1]
전환점은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과 함께 찾아왔다. 하마구치 오사치 수상과 그의 민정당은 일본 해군력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조약에 동의했다. 이 조약은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한 군부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고, 야당인 정우회는 이 조약을 적대적인 미국에 의해 일본에 강요된 것으로 묘사하여 증가하는 쇼와 시대의 외국인 혐오를 더욱 부채질했다.[1]
일본의 당파 정치 체제는 1932년 5·15 사건으로 최종적으로 몰락했다. 당시 한 무리의 하급 해군 장교와 육군 사관생도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암살했던 것이다. 암살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애국심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여겨졌고, 군부가 거의 제약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1]
4. 군국주의의 팽창
1929년 대공황은 일본 경제에도 큰 영향을 주어 농산물 가격 폭락과 공업 부문의 침체를 야기했다. 이러한 경제 위기 속에서 일본 군부는 사회 불안을 해소하고 경제 불황을 타개한다는 명목으로 침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권한을 확대했다. 사회주의 확산을 우려한 지주와 자본가들은 군부를 지지했고, 1930년대 일본에서 군인 세력은 국가 정책 결정의 중심에서 군비 확장과 침략 정책을 주도했다.[16][17]
1931년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일본 엔(¥)화 가치 하락을 이용하여 수출을 증대시키는 관리 통화 체제를 도입했다. 미국의 뉴딜 정책, 영국의 블록 경제 강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면직물 수출은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만주사변 이후 군수 경기와 수출 증진으로 산업계는 활기를 되찾았고, 1933년경에는 경제가 회복되었다. 특히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전하여 일본 제철 회사, 닛산(Nissan) 콘체른, 일본 질소(日窒) 콘체른 등의 신흥 재벌이 등장했다. 정부의 경제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혁신 관료 그룹과 군부 막료 그룹이 연계하여 국방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1930년대 일본은 국가주의와 혁신 운동 열기가 고조되면서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쳤고, 무산 정당들조차 국가 사회주의로 전향하는 유행이 나타났다. 1932년 아카마쓰 가쓰마로를 중심으로 일본 국가사회당이 결성되었고, 탄압받던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도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며 좌익 사회주의 운동은 침체기에 들어갔다. 사상과 언론 통제가 강화되어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상과 학문이 탄압받고, 불온 서적 소지만으로도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군부 주도의 국가 사회주의에 편승하는 저널리즘이 등장하고, 일본 전통 문화를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대정 시대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체결, 국제 연맹 가입 등 평화 외교를 시도하며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했다. 그러나 쇼와 시대 초기 대공황, 서구 열강의 무역 장벽, 국내 테러(1932년 천황 암살 미수 사건 등)는 군국주의적 애국심을 부활시키고 민주 세력을 약화시켰다. 군부는 국내외 위협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고, 애국적인 교육은 팔굉일우 의식을 강화했다.
와타나베 조타로, 나가타 데쓰잔, 시데하라 기주로 등 군사 해결책에 저항한 인사들은 축출되거나 실질적인 역할에서 제외되었다.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하마구치 오사치 수상과 민정당은 조약에 동의했지만, 군부는 국가 안보 위협을 이유로 반대했고, 정우회는 이를 미국이 강요한 조약으로 묘사하며 쇼와 시대의 외국인 혐오를 부추겼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암살되면서 일본의 당파 정치는 몰락했다. 이 사건은 군부가 제약 없이 행동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4. 1. 군사적 모험주의의 성장
일본은 제1차 중일전쟁, 의화단 사건,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베리아 개입 등을 거치며 아시아 대륙에 지속적으로 개입해 왔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수상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은 장제스(蔣介石)의 통일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중국에 군대를 파병했다. 1928년 6월, 관동군(關東軍)의 모험주의적 장교들은 만주에서의 일본 이익 보호를 위해, 전 동맹이었던 군벌 장쭤린(張作霖) 암살을 포함한 무단적인 조치를 취하며 전면전을 일으키려 했다.[5]1931년 9월 발생한 만주사변은 일본군의 만주 전체 장악의 발판이 되었다. 관동군 음모자들은 선양 근처 남만주 철도(南満州鉄道) 선로를 수 미터 가량 폭파시키고, 이를 중국인의 파괴 행위로 몰아 침략과 광대한 영토 장악의 구실로 삼았다.[5] 한 달 후 도쿄에서는 군부 인사들이 쿠데타를 시도하는 사색사건이 발생했지만, 소식이 은폐되었고 가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5]
1932년 1월, 일본군은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상하이를 공격하여 휴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3개월간 비공식 전쟁을 벌였다. 도쿄의 민간 정부는 이러한 군사적 모험을 막을 힘이 없었고, 관동군의 행동은 비난받기는커녕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5]
4. 2. 대동아공영권
1931년 9월 만주사변은 일본 제국이 만주 전체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관동군 음모자들은 펑톈(瀋陽) 인근 남만주 철도(南満州鉄道)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의 소행으로 몰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5]한 달 뒤, 도쿄에서 군부 인사들이 쿠데타를 시도한 사색사건이 발생했으나 은폐되었고, 가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5]
1932년 1월, 일본군은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공격, 3개월간 비공식 전쟁을 벌였다. 도쿄 민간 정부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고, 관동군의 행동은 오히려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5]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의 뒤를 이어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추천한 군인들은 만주국(滿洲國)을 승인하고, 만주를 일본의 산업 기반, 이민 지역, 소련과의 전쟁 발판으로 삼으려는 군부의 행동을 대체로 승인했다. 권력 다툼 속에 반체제 탄압과 암살이 증가했고, 1936년 2·26 사건에서는 육군 제1사단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민간 지도부는 국내 폭력 종식을 위해 군부의 요구에 굴복, 일본은 전시 체제로 나아가며 방위 예산 증강, 해군 건설, 애국심 고취가 이루어졌다.[5]
1936년 11월, 일본과 나치 독일은 반코민테른 조약을 체결했다(이탈리아는 1년 후 가입).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소련-일본 국경 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5]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의 성공으로 확장된 영토는 대동아공영권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는 서구 지배에 맞서 일본 주도로 아시아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구상이었다.[5]
5.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
쇼와 시대 초기 일본 제국의 공격적인 정책에 대해 전국민적인 일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반대 세력이 존재했다.[1] 이는 쇼와 시대 일본의 저항 운동의 여러 형태 중 하나였다.[1]
군국주의에 대한 가장 조직적이고 공개적인 반대는 일본 공산당에서 비롯되었다.[1] 1930년대 초 공산당 활동가들은 징집된 군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했지만, 1930년대 중반 일본 내에서 당이 탄압받았다.[1]
개인적인 반대는 정치, 사업, 문화 분야의 개인들로부터 나왔다.[1]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라 다카시는 입헌정우회의 일반인이자 자유주의 사상가로, 1918년 "군국주의는 끝났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일본의 수상이 되었다.[1] 그러나 3년 후 하라는 암살당했다.[1]
- 시데하라 기주로는 중국에 대해 비간섭주의 정책을 추구하며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 안정화를 시도했다.[1] "시데하라 외교"라는 용어는 1920년대 일본의 자유주의적 외교 정책을 일컫는 말이 되었고, 국가를 약화시킨다고 믿는 군부의 비난을 받았다.[1]
- 단 다쿠마 남작은 미쓰이 은행 이사로, 일본의 해외 개입에 반대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친미적인 견해로 알려져 있었다.[1] 그는 1932년 3월 5일 혈맹단 사건에서 살해되었다.[1]
- 미노베 다쓰키치는 도쿄 제국대학의 존경받는 교수로, 1935년 천황을 국가 자체를 초월한 신성한 권력이 아닌 일본의 헌법 구조의 일부로 선언했다.[1] 그의 헌법 해석은 1930년대까지 관료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받아들여졌다.[1] 점점 더 군국주의적인 1930년대에, 이러한 생각들은 일본 귀족원에서 미노베에 대한 공격과 그의 귀족원 사퇴로 이어졌다.[1]
- 사이토 다카오는 예일 대학교 출신으로 입헌민정당 당원이었다.[1] 그는 1940년 2월 2일 일본 국회에서 연설을 통해 중일 전쟁 즉, 일본의 "성전"의 추진과 정당성에 대해 강하게 의문을 제기했다.[1] 그는 1940년 3월 7일 국회에서 제명되었고, 그의 연설은 고노에 후미마로에 의해 성전 목표를 믿는 국회의원 연맹의 창설로 이어졌다.[1]
-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 결정에 반대한 다카기 소키치 제독은 해군대신 시마다 시게타로로부터 1942년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의 패배를 분석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1] 그의 분석은 다카기로 하여금 일본의 불가피한 패배를 확신하게 했다.[1] 일본의 유일한 해결책은 도조 히데키가 이끄는 정부의 제거와 미국과의 휴전이라고 믿은 다카기는 1944년 7월 해임되기 전에 도조 히데키 수상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다.[1]
- 유도 창시자이자 현대 일본 교육 시스템의 창립자이며, 일본 올림픽 위원회 회원이자 일본의 사실상 외무장관이었던 가노 지고로는 군국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고 한다.[1] 그의 유도 학교인 고도칸이 군사 훈련 센터로 사용될 것을 우려하여 천황으로부터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1] 다른 자료에서는 사망 원인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에서는 그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한다.[1]
6. 진주만 공격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이 발생했다. 이 공격은 여러 사건들이 원인이 되었는데, 일본 국민들의 서구화 반대와 일본과 미국의 협상 결렬 등이 포함된다.[14]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점령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미국은 일본에 대한 모든 전쟁 물자와 자원의 판매를 중단하고 미국 내 일본 자산과 은행 계좌를 동결했다. 미국 함대는 일본의 공격을 다소 제어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진주만으로 이동했고, 일본이 더 많은 영토를 장악하고 통제하려 했기 때문에 필수 물자에 대한 금수 조치를 부과했다.[14]
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군의 패배와 미국의 점령으로 인해 일본 군국주의는 신뢰를 잃었다. 일본의 항복 후, 많은 전직 군 지도자들이 전쟁 범죄로 도쿄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게다가 일본의 정부와 교육 제도는 개정되었고, 평화주의가 전후 일본 헌법의 핵심 원칙 중 하나로 명시되었다.[16]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의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 제국주의」나 「일제」라는 표현은 특히 한국, 중국에서 반일 비판이 내재되어 있으며, 일본의 군사 대국으로의 부활 공포나, 그 전후 처리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비판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또한 일본 공산당 등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의 일본을 「일본 제국주의」로 정의하고 있다.[20]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대한 현황 인식은 일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에서도 나뉘어져, 일본 공산당은 「미국에 대한 사실상의 종속국의 입장이 되었다」[20]며 우선 미국 종속으로부터의 자립이 필요하다는 이단계 혁명론을 주장하지만, 많은 신좌파는 일본 제국주의가 부활하고 있다고 하여 직접적으로 일국 혁명론을 기둥으로 하는 소련형 사회주의 또는 반제반스타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일단계 혁명론을 주장했다.[21]
8. 연표
연도 | 사건 |
---|---|
1926년 | 히로히토 (쇼와 천황)가 아버지의 서거(12월 25일)로 천황이 됨. |
1927년 | 田中義一이 총리가 됨(4월 20일). |
1928년 | 히로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함(11월 10일). |
1929년 | 濱口雄幸이 총리로 취임함(7월 2일). |
1930년 | 하마구치 오사치가 암살 시도로 부상당함(11월 14일). |
1931년 | 하마구치 오사치 사망, 若槻禮次郎이 총리로 취임함(4월 14일). 犬養毅이 총리로 취임(12월 13일)하고 중국에 대한 군사 예산을 증액함. 만주사변 발생(9월 18일). |
1932년 | 상하이에서 일본 승려들에 대한 공격(1월 18일) 이후 일본군이 상하이를 포격함(1월 29일). 만주국이 아이신교로 푸이를 황제로 하여 건국됨(2월 29일). 쿠데타 시도 중 이누카이 쓰요시 암살, 齋藤實이 총리로 취임함(5월 15일). 일본이 국제 연맹으로부터 비난받음(12월 7일). |
1933년 | 일본이 국제 연맹 탈퇴(3월 27일). |
1934년 | 岡田啓介이 총리로 취임함(7월 8일). 일본이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탈퇴함(12월 29일). |
1936년 | 쿠데타 시도인 2.26 사건이 히로히토에 의해 진압됨. 廣田弘毅가 총리로 취임함(3월 9일). 일본이 나치 독일과 최초의 조약을 체결(11월 25일)하고 칭다오를 점령함(12월 3일). 몽강이 내몽골에 설립됨. |
1937년 | 林銑十郎이 총리로 취임함(2월 2일). 近衛文麿 친왕이 총리로 취임함(6월 4일). 중일 전쟁이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시작됨(7월 7일). 일본이 베이핑을 점령함(7월 31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12월 13일), 난징 대학살 시작. |
1938년 | 태얼장 전투(3월 24일). 광주가 일본군에 함락됨(10월 21일). |
1939년 | 平沼騏一郎이 총리로 취임함(1월 5일). 일본군이 소련군과의 할힌골 전투에서 패배함(9월 15일). 阿部信行이 총리로 취임함(8월 30일). |
1940년 | 米内光政이 총리로 취임함(1월 16일). 고노에 후미마로가 두 번째 임기로 총리로 취임함(7월 22일). 백군 작전(8월~9월). 일본이 파리 함락 여파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고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함(9월 27일). |
1941년 | 일본과 소비에트 연방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함(4월 13일). 東條英機 장군이 총리로 취임함(10월 18일). 일본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12월 7일)(진주만 공습 참조),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12월 8일)(태평양 전쟁 참조). 일본이 홍콩을 점령함(12월 25일). |
1942년 | 싱가포르가 일본에 항복함(2월 15일). 일본이 호주를 폭격함(2월 19일). 인도양 공습(3월 31일~4월 10일). 둘리틀 공습(4월 18일). 산호해 해전(5월 4일~8일). 삼호 작전이 중국 북부에서 실시됨. 필리핀의 미군 항복(5월 8일).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함(6월 6일). |
1943년 | 일본이 과달카날 전투(2월 9일)와 타라와 전투(11월 23일)에서 패배함. |
1944년 | 일본이 사이판 전투에서 패배함(7월 9일). 도조 히데키 사임, 小磯國昭이 총리로 취임함(7월 22일). |
1945년 | 미군 폭격기가 주요 일본 도시에 대한 소이탄 공격을 시작함. 일본이 이오지마 전투에서 패배함(3월 26일). 鈴木貫太郎 제독이 총리로 취임함(4월 7일). 마닐라 대학살.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배함(6월 21일). 미국이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함.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수락하는 전문을 연합국에 보냄(8월 10일 오전 7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8월 8일)하고 만주를 침공(8월 9일)하여 무단장 전투(8월 12일~16일)에서 돌파함.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 수용을 방송함(8월 15일). 도쿄 만에서 공식적인 항복식이 9월 2일에 이어짐: 일본 점령 시작(1952년 4월 28일까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시까지). |
9.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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