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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스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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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키자카 야스모토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1584년에 태어나 1653년에 사망했으며, 아버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뒤를 이어 와키자카 가문의 가독을 상속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력할 의사를 표명하여 영지를 보전받았다. 에도 막부에서 여러 역할을 수행하며, 이이다 번주로 재임하며 이이다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문화인으로서도 활동하여, 가인으로 칭송받고, 저서를 남기는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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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스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와키자카 야스모토 상" (부분, 개인 소장, 가노 모토토시(狩野元俊) 그림, 상부에 하야시 라잔(林羅山) 찬)
이름와키자카 야스모토
개명도루 (초명)
야스모토
야쿠모켄(八雲軒)
다른 이름후지 도루, 통칭: 진타로
시호야쿠모인(八雲院)
계명도테이 야스모토 야쿠모인(藤亭安元八雲院)
묘소교토부교토시의 묘신사 린카인(隣華院)
관위종5위하, 아와지노카미(淡路守)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씨족후지와라 성와키자카씨
생일덴쇼 12년 음력 3월 4일 (1584년4월 14일)
사망일조오 2년 음력 12월 3일 (1654년1월 21일)
가계
아버지와키자카 야스하루
어머니니시노토인 재상(西洞院宰相)의 딸 겐쇼인(玄昌院)
형제야스타다
야스모토
야스노부
야시게
야스쓰네
야스후사
야스나리
야스즈미
시미즈다니 사네토모(清水谷実任)의 부인
와키자카 가즈모리(脇坂一盛)의 부인
와키자카 가즈나가(脇坂一長)의 부인
다나카 야스요시(田中安義)의 부인
와키자카 야스모리(脇坂安盛)의 부인
와키자카 가게나오(脇坂景直)의 부인
자코지(座光寺) 모씨의 부인
배우자정실: 이시카와 미쓰모토(石川光元)의 딸 교코인(慶光院)
자녀양자: 야스쓰네(실제 동생), 야스토시(홋타 마사요시(堀田正吉)의 차남), 야스마사(홋타 마사모리(堀田正盛)의 차남)
영지
이요 오즈번 번주
시나노 이다번 번주
이다 번 영지2만 석
관직 경력
오즈번 번주1615년 ~ 1617년
이다번 번주1617년 ~ 1654년

2. 생애

덴쇼 12년(1584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의 요절 후 적자가 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시기에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서군에 속했으나,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보였다.[1] 오사카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아버지의 은거 후 이요 오즈 번 5만 3,500석을 상속받았다. 겐나 3년(1617년)에는 시나노 이이다 번으로 5만 5,000석[2]으로 영지가 늘어나며 옮겨갔다. 이이다 번주로서 성과 마을 정비, 교통 및 산업 진흥 등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쇼군가의 상경 수행, 조선 통신사 접대 등 막부의 여러 공무를 수행했으며, 슨푸성과 시모다테성의 관리도 맡았다. 조오 2년(1653년) 시나노 이이다에서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덴쇼 12년(1584년) 3월 4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차남으로 야마시로 국에서 태어났다. 형 야스다다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적자가 되었고, 게이초 3년(1598년)에는 오사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했다. 게이초 5년(1600년)에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종5위하 아와지노카미(淡路守)에 서임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 아이즈 정벌 당시 아버지 야스하루는 오사카에 머물렀고, 야스모토는 간토로 내려가 도쿠가와 측에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간토로 가는 길에 이에야스에 맞서 거병한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오미에서 오사카로 돌아와야 했다. 야스모토는 이에야스를 수행하던 야마오카 가게토모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이에야스에게 협력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에야스는 야스모토에게 보낸 답신(게이초 5년 8월 1일자)에서 그의 충심에 감사를 표하고, 곧 상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버지 야스하루가 오사카에 머무는 동안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면서, 와키자카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약 1,000명[1]의 병력을 이끌고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은 앞서 언급된 이에야스의 서신과 당시 정황을 근거로, 미쓰나리 거병 시 야스하루, 야스모토 부자가 오사카에 있었기에 서군 가담이 불가피했던 점을 이에야스가 참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그대로 보전해 주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에도성 보수 공사에 참여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선봉에 서서 활약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도도 다카토라의 지휘 아래 이쿠타마(生玉) 부근을 공격했고,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쓰와 함께 덴노지 부근을 공격하는 등 공을 세웠다. 오사카 전투가 끝난 같은 해, 아버지 야스하루가 은거하자 이요 오즈의 5만 3,500석 영지를 상속받아 번주가 되었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덴쇼 12년(1584년) 3월 4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차남으로 야마시로 국에서 태어났다. 형 야스다다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면서 적자가 되었고, 게이초 3년(1598년) 오사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했다. 게이초 5년(1600년)에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종5위하 아와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국면에서, 아버지 야스하루는 오사카에 머물렀고 야스모토는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합류하기 위해 간토로 향했다. 그러나 간토로 가는 도중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거병한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오미를 거쳐 오사카로 돌아와야 했다. 야스모토는 이에야스를 수행하던 야마오카 가게토모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이에야스에게 협력할 뜻을 전달했다. 이에야스는 야스모토에게 보낸 답신(게이초 5년 8월 1일 와키자카 야스모토 앞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신)에서 그의 충심에 사의를 표하고 조만간 상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아버지 야스하루는 오사카에 머무르던 중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자 어쩔 수 없이 약 1,000명[1]의 병력을 이끌고 서군에 가담했다. 와타나베 다이몬에 따르면, 앞서 언급된 이에야스의 서신을 언급하며,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했을 때 우연히 야스하루, 야스모토 부자가 상경해 있었기 때문에 와키자카 가문이 서군에 속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고려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후 처리에서 책임을 묻지 않고 영지를 안도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에도성 보수 공사에 참여했다.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는 동군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도도 다카토라의 지휘 아래 이쿠타마 부근을 공격했고,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쓰와 함께 덴노지 부근을 공격하는 등 공을 세웠다. 같은 해, 아버지 야스하루가 은거하자 이요 오즈 번의 5만 3,500석 영지를 상속받았다.

겐나 3년(1617년), 이요 오즈 번에서 시나노 이이다 번으로 5만 5,000석[2]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이후 2대 번주인 아들 야스마사와 함께 55년 동안 이이다 지역 통치에 힘썼다. 이이다성의 해자를 완성하고 성 아랫마을인 이이다 18정(町)을 완성했으며, 가도의 유통과 역참 제도를 확립하고 문화 및 산업 진흥에도 힘쓰는 등 이이다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겐나 9년(1623년) 히데타다의 상경, 간에이 3년(1626년) 9월 히데타다와 이에미쓰의 상경, 간에이 11년(1634년) 7월 11일 이에미쓰의 상경 등 여러 차례 쇼군의 교토 행차를 수행했다. 또한 칙사 접대역으로서 칙사의 닛코 참배를 수행하거나, 에도 혼쇼지에서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등 접대역으로서도 활약했다. 간에이 9년(1632년) 12월에는 개역된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거성 슨푸성의 관리를 맡았으며, 쇼호 원년(1644년) 4월 1일부터 1년 동안은 당시 막부 직할령이었던 시모다테성의 수비를 담당했다. 이 시모다테성 예탁 시대 1년간의 기록은 "시모다테 일기(下館日記)"로 남아 있다.

조오 2년(1653년) 12월 3일, 시나노 이이다에서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2. 3. 에도 막부에서의 활동

게이초 3년(1598년)에 오사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했다. 게이초 5년(1600년)에는 도요토미 성(姓)을 하사받고 종5위하, 아와지노카미(淡路守)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아이즈 정벌 때, 아버지 야스하루는 오사카에 머물렀고, 야스모토는 이에야스 측에 합류하기 위해 간토로 향했으나, 도중에 이시다 미쓰나리의 방해로 오사카로 돌아가야 했다. 야스모토는 야마오카 가게토모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협력 의사를 전달했고, 이에야스는 야스모토의 충성심에 감사를 표하는 답신을 보냈다. 당시 아버지 야스하루가 오사카에 체류 중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했기 때문에, 와키자카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약 1,000명[1]의 병력을 이끌고 서군(西軍)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정이 고려되어 세키가하라 전투 후 처리에서는 책임을 묻지 않고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에도성 보수 공사에 참여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막부군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도도 다카토라의 지휘 아래 이쿠타마(生玉) 부근을 공격했고,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쓰와 함께 덴노지(天王寺) 부근을 공격하는 등 공을 세웠다. 같은 해, 아버지 야스하루가 은거하자 이요 오즈의 5만 3,500석 영지를 상속받았다.

겐나 3년(1617년), 시나노 이이다 번으로 5만 5,000석[2]으로 영지가 늘어나며 옮겨갔다. 이후 아들 야스마사와 함께 2대에 걸쳐 55년간 이이다 지역 발전에 힘썼다. 이 기간 동안 이이다성의 해자를 완성하고, 성 아래 마을인 조카마치(城下町)를 정비하여 이이다 18정(町)을 완성했다. 또한 가도의 유통과 역참(덴마, 伝馬) 제도를 확립하고 문화 산업 진흥에도 힘쓰는 등 이이다 발전에 기여했다.

겐나 9년(1623년) 히데타다의 상경(上洛), 간에이 3년(1626년) 히데타다와 이에미쓰의 상경, 간에이 11년(1634년) 이에미쓰의 상경 등 쇼군의 교토 방문을 여러 차례 수행했다. 또한, 칙사 접대역을 맡아 칙사의 닛코 참배를 수행했으며, 조선 통신사가 에도를 방문했을 때는 접대역으로서 에도 혼쇼지에서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등 외교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간에이 9년(1632년) 12월에는 영지를 몰수당한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거성 슨푸성 수비를 맡았고, 쇼호 원년(1644년) 4월부터 1년간은 막부 직할령(천령, 天領)이었던 시모다테성의 수비를 담당했다. 이 시모다테성 수비 기간의 기록은 "시모다테 일기(下館日記)"로 남아 있다.

조오 2년(1653년) 12월 3일, 시나노 이이다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4. 이이다 번주 시대

겐나 3년(1617년), 이요 오즈에서 시나노 이이다 번 5만 5000석[2]으로 영지가 늘어나며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아들인 2대 번주 야스마사와 함께 55년 동안 이이다 지역을 다스리며,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정비하고 이이다성의 해자를 완성했으며, 이이다 18정(町)을 완성했다. 또한, 가도의 유통과 덴마(역참 제도)를 확립하고 문화 산업 진흥에도 힘쓰는 등, 이이다의 발전에 헌신했다.

겐나 9년(1623년) 히데타다의 상경(교토 방문), 간에이 3년(1626년) 9월 히데타다와 이에미쓰의 상경, 간에이 11년(1634년) 7월 11일 이에미쓰의 상경 등 쇼군가의 상경에 여러 번 따랐다. 칙사 접대역으로서 칙사의 닛코 참배를 따르거나, 조선 통신사에도 혼쇼지에서 접대하는 등 에도 접대역으로서도 활약했다.

간에이 9년(1632년) 12월에는 영지를 몰수당한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거성 슨푸성의 수비를 맡았고, 쇼호 원년(1644년) 4월 1일부터 1년 동안은 당시 막부 직할령이었던 시모다테성의 수비를 담당했다. 이 시모다테성 수비 기간 1년간의 기록은 "시모다테 일기(下館日記)"로 남아 있다.

조오 2년(1653년) 12월 3일, 시나노 이이다에서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2. 5. 쇼군가 및 외교 의전

겐나 9년(1623년)의 히데타다의 상경과 간에이 3년(1626년) 9월의 히데타다·이에미쓰의 상경, 간에이 11년(1634년) 7월 11일의 이에미쓰의 상경 등 쇼군가의 상경에 여러 번 따랐다. 또한, 칙사 접대역으로서 칙사의 닛코 참배를 따르거나, 조선 통신사에도 접대역으로서 에도 혼쇼지에서 접대하는 등 접대역으로서도 활약했다. 간에이 9년(1632년) 12월에 영지가 몰수된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거성 슨푸성쇼호 원년(1644년) 4월 1일부터 1년 동안, 당시 막부 직할령이었던 시모다테성의 수비를 맡았다. 이 시모다테성 관리 시대 1년간의 기록이 "시모다테 일기"로 남아 있다.

2. 6. 만년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에도성의 보수 공사에 참여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선봉으로 활약했는데, 오사카 겨울 전투가 발발하자 도도 다카토라의 지휘 아래 이쿠타마 부근을 공격했고,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쓰와 함께 덴노지 부근을 공격하는 등 공을 세웠다. 같은 해, 아버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은거함에 따라 이요 오즈 5만 3,500석을 상속받았다.

겐나 3년(1617년), 이요 오즈에서 시나노 이이다 번 5만 5,000석[2]으로 영지가 늘어나며 이봉되었다. 이후 2대 번주가 되는 아들 야스마사와 함께 55년 동안 이이다 지역 통치에 힘썼다. 이 기간 동안 이이다의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정비하고, 이이다성의 해자를 완성했으며, 이이다 18정(町)을 완성했다. 또한 가도(街道)의 유통과 덴마(伝馬, 역참마) 제도를 확립하고 문화 및 산업 진흥에도 힘쓰는 등, 이이다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겐나 9년(1623년)의 히데타다 상경, 간에이 3년(1626년) 9월의 히데타다 및 이에미쓰 상경, 간에이 11년(1634년) 7월 11일의 이에미쓰 상경 등 쇼군가의 교토 상경에 여러 차례 수행했다. 또한, 칙사 접대역으로서 칙사의 닛코 참배를 수행하거나, 조선 통신사를 에도 접대역으로서 에도 혼쇼지에서 접대하는 등 막부의 중요한 접대 업무를 맡기도 했다.

간에이 9년(1632년) 12월에는 영지가 몰수된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거성 슨푸성의 수비를 맡았고, 쇼호 원년(1644년) 4월 1일부터 1년 동안은 당시 막부 직할령이었던 시모다테성의 수비 책임자(城代)를 맡았다. 시모다테성 근무 당시 1년간의 기록은 "시모다테 일기"(下館日記)로 남아 있다.

조오 2년(1653년) 12월 3일, 시나노 이이다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가문 보전 노력

와키자카 야스모토는 가문 보전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양자로 삼았던 친동생 야스츠네가 살해당하고, 호리타 가문에서 데려온 양자 야스토시가 사망한 후에도 가문의 안정을 꾀했다. 비록 막내 동생 야스후사(하타모토, 야스모토 사후 2천 석 분할)가 있었지만, 야스모토는 그를 후계자로 삼지 않고 다시 호리타 가문에서 야스마사를 양자로 맞이했다.

이는 와키자카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과 연관이 깊은 도자마 다이묘라는 점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 체제 하에서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막부의 유력 가문인 호리타 가문에서 양자를 들여 막부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가문의 존속을 도모하려 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간에이 9년(1632년) 4월 야스츠네 살해 사건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야스모토의 또 다른 친동생이자 미노국 와키사카 번의 번주였던 와키사카 야스노부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영지를 몰수당했다.

야스모토 사후 와키자카 가문은 양자 야스마사 대에 이르러 후다이 다이묘에 준하는 대우(원후다이)를 막부에 청원하여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호리타 가문에서 여러 차례 양자가 들어오면서, 와키자카 가문은 몇 대 후에 정식 후다이 다이묘로 인정받게 되었다.

4. 문화인으로서의 면모

당시 야스모토는 무사들 중 제일가는 가인(歌人)으로 칭송받았으며, '''팔운헌'''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담반중(談伴衆, 쇼군의 말상대)을 맡을 정도로 교양 있는 인물이었고, 일본과 중국의 서적 수천 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시모다테 일기', '재석초' 등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하야시 라잔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반대로 야스모토가 라잔에게 가도(歌道)를 가르치는 사제 관계이기도 했다. 또한, 가노파의 화가 가노 모토토시와도 친분이 깊어, 야스모토가 시모다테 성에 머무를 때 에도에서 모토토시가 찾아올 정도였다. 이 시기 토사파 화가 토사 잇토쿠에 관한 기록도 남겼는데, 잇토쿠의 용모나 행동이 다소 특이했음에도 야스모토는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며, 한 가지 재주에 뛰어난 것은 훌륭하다"며 그를 칭찬했다. 잇토쿠는 야스모토의 요청으로 반 달 가량 그림을 그렸고, 야스모토는 후한 사례를 지불했다.

야스모토의 교양과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이에미쓰 시대의 '간에이 제씨 계도전' 편찬 이야기가 유명하다. 당시 전국 시대에 신분이 상승한 여러 다이묘 가문들이 겐페이 도키쓰와 같은 명문 출신임을 내세우며 가짜 족보를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야스모토는 자신의 가문이 "조상이 후지와라 씨인 것 같다"는 것 외에는 확실히 알 수 없었기에, 할아버지인 와키자카 야스아키부터 시작하는 짧은 계도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서두에 北南 またはしらじ この糸の ゆかりばかりの 末の藤原|호쿠난 마타와 시라지 고노 이토노 유카리바카리노 스에노 후지와라일본어 (북가·남가 나아가 쿄가, 식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상 대부터 우연히 후지와라 씨의 후손을 칭하고 있을 뿐)라는 와카를 지어 제출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당시 세태와 달리 자신의 가문이 대단한 출신이 아님을 솔직하게 밝힌 것으로 평가받는다.

참조

[1] 서적 関ヶ原の役 徳間書店 2009
[2] 문서 上総国一宮5000石を含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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