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프라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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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왓 프라깨오(Wat Phra Kaew)는 태국 방콕에 위치한 왕실 사원이다. 1784년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건립되었으며, 에메랄드 불상(Phra Kaeo Morakot)을 비롯한 여러 불상과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왓 프라깨오는 태국 군주의 대관식과 같은 중요한 불교 의식과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며,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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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프라깨오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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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왓 프라깨오 (Wat Phra Kaeo) |
태국어 명칭 | วัดพระแก้ว (Wat Phra Kaeo) |
로마자 표기 | Wat Phra Kaeo |
완전한 태국어 명칭 | วัดพระศรีรัตนศาสดาราม (Wat Phra Si Rattana Satsadaram) |
로마자 표기 | Wat Phra Si Rattana Satsadaram |
다른 이름 | 에메랄드 불상 사원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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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국가 | 태국 |
도시 | 방콕 |
구역 | 프라나콘 구 |
위치 | 대왕궁 |
건축 정보 | |
설립자 | 라마 1세 |
완공 년도 | 1785년 |
2. 역사
전설에 따르면, 이 불상은 인도에서 왔으며, 캄보디아 왕국에서 표면이 입혀져 1434년 아유타야 왕국에 선물로 전해졌다. 버마 침공으로 사라졌다가 1세기 후 치앙 싸엔에서 홍수로 발견되어 치앙라이, 치앙마이를 거쳐 루앙 프라방으로 옮겨졌다. 쎄따띠랏 왕자가 싸얌 왕위를 이으며 비엔티엔으로 옮겨졌으나, 딱신 대왕이 라오스와 싸워 에메랄드 부처를 시암으로 반환, 1784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라마 1세는 1784년 버마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왕조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옮겼다.[1][2] 이는 타크신 왕의 이전 통치 체제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목적도 있었는데, 그는 시암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톤부리에 있는 구 왕궁은 규모가 작고 왓 아룬과 왓 타이 탈랏 사이에 위치하여 확장이 불가능했다.[1][2]
라마 1세는 차오프라야강 동쪽에 대궁전을 세웠고, 궁궐 부지 내에 왕실 전용 사원을 건설했다. 이 사원은 승려들의 수도 생활 공간을 제외하고 모든 일반적인 불교 사찰의 특징을 갖추었으며, 국왕의 거주 공간과는 별개로 예배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양식은 수코타이 역사 공원의 왓 마하탓, 아유타야 역사 공원의 왓 프라 시 산펫, 톤부리의 왓 아룬과 같았으며,[2] 특히 아유타야 국왕의 왕궁 옆에 세워진 왓 프라 시 산펫이 이 새로운 사원의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3]
사원 건설은 1783년에 시작되었으며, 공식 명칭은 "왓 프라 시 라타나 삿사다람"으로, "신의 스승의 수도원의 아름다운 보석을 담고 있는 사원"을 의미한다.[4] 1785년 2월/3월, 에메랄드 불상은 톤부리의 왓 아룬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1786년 라마 1세는 방콕을 시암의 새로운 수도로 공식 지정했다.
이 사원은 라마 3세와 라마 4세의 통치 시대부터 여러 번의 주요 개조 공사를 거쳤다. 이후 라마 5세, 라마 7세, 라마 9세에 의해 복원되었다.[9][10][2]
왕실 사원으로서 왓 프라깨오는 국왕과 왕족이 수행하는 불교 의식, 예를 들어 대관식과 같은 주요 행사의 장소로 사용된다. 또한, 주요 불교 휴일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도 열린다.[11] 현재는 대궁전의 특정 지역과 함께 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2. 1. 건립 배경
라마 1세는 1784년 버마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왕조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옮겼다.[1][2] 이는 타크신 왕의 이전 통치 체제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목적도 있었는데, 그는 시암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톤부리에 있는 구 왕궁은 규모가 작고 왓 아룬과 왓 타이 탈랏 사이에 위치하여 확장이 불가능했다.[1][2]
라마 1세는 차오프라야강 동쪽에 대궁전을 세웠고, 궁궐 부지 내에 왕실 전용 사원을 건설했다. 이 사원은 승려들의 수도 생활 공간을 제외하고 모든 일반적인 불교 사찰의 특징을 갖추었으며, 국왕의 거주 공간과는 별개로 예배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양식은 수코타이 역사 공원의 왓 마하탓, 아유타야 역사 공원의 왓 프라 시 산펫, 톤부리의 왓 아룬과 같았으며,[2] 특히 아유타야 국왕의 왕궁 옆에 세워진 왓 프라 시 산펫이 이 새로운 사원의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3]
사원 건설은 1783년에 시작되었으며, 공식 명칭은 "왓 프라 시 라타나 삿사다람"으로, "신의 스승의 수도원의 아름다운 보석을 담고 있는 사원"을 의미한다.[4] 1785년 2월/3월, 에메랄드 불상은 톤부리의 왓 아룬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1786년 라마 1세는 방콕을 시암의 새로운 수도로 공식 지정했다.
이 사원은 라마 3세와 라마 4세의 통치 시대부터 여러 번의 주요 개조 공사를 거쳤다. 이후 라마 5세, 라마 7세, 라마 9세에 의해 복원되었다.[9][10][2]
왕실 사원으로서 왓 프라깨오는 국왕과 왕족이 수행하는 불교 의식, 예를 들어 대관식과 같은 주요 행사의 장소로 사용된다. 또한, 주요 불교 휴일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도 열린다.[11] 현재는 대궁전의 특정 지역과 함께 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2. 2. 건립 과정
라마 1세는 1782년 4월 6일 방콕을 랏타나코신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차크리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궁과 사원을 건설했다.[1][2] 타크신 왕조의 톤부리에 있는 구 왕궁은 왓 아룬과 왓 타이 탈랏 사이에 위치하여 확장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수도를 이전했다.[1][2]
라마 1세는 차오프라야강 동쪽, 현재 랏타나코신 섬으로 알려진 요새화된 도시 지역 내에 대궁전을 세웠다. 왕궁 부지 내에는 전통적으로 왕과 왕족의 개인적인 용도를 위한 왕실 사원이나 예배당을 짓기 위한 구역이 할당되었다. 이 사원(또는 왓)은 승려들을 위한 수도 생활 공간을 제외하고 모든 일반적인 불교 사찰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으며, 국왕의 거주 공간과는 별개로 예배를 위한 뚜렷한 공간이었다.[2] 수코타이 역사 공원의 왓 마하탓, 아유타야 역사 공원의 왓 프라 시 산펫, 톤부리의 왓 아룬과 같이 왕궁 안에 사원이 지어졌기 때문에 승려들은 머물지 않았다.[2] 특히 아유타야 국왕의 왕궁 옆에 세워진 왓 프라 시 산펫이 이 새로운 사원의 건설에 영향을 미쳤다.[3]
1783년에 시작된 사원 건설은 "신의 스승의 수도원의 아름다운 보석을 담고 있는 사원"을 의미하는 왓 프라 시 라타나 삿사다람으로 공식 명명되었다.[4] 사원 본당은 궁궐 단지 전체에서 석조로 완성된 최초의 건물이었으며, 국왕의 거처는 여전히 나무로 만들어졌다. 사원 단지는 대궁전 외곽 법정의 북동쪽 모서리에 세워졌다. 1785년 2월/3월, 에메랄드 불상은 톤부리의 왓 아룬에서 랏타나코신 쪽으로 강을 건너 현재 위치에 안치되는 대대적인 의식을 치르며 옮겨졌다.[5][6][7] 1786년 라마 1세는 방콕을 시암의 새로운 수도로 공식 지정했다. 그 이름은 "천사의 도시, 위대한 도시, 에메랄드 불상의 거처, 신 인드라의 위대한 도시, 아유타야, 아홉 개의 귀중한 보석으로 풍요로운 세계, 환생한 신들이 거주하는 천상의 거처를 닮은 위대한 왕궁이 풍부한 행복한 도시, 인드라가 부여하고 비슈바카르만이 건설한 도시"로 번역된다.[8]
이 사원은 라마 3세와 라마 4세 통치 시기부터 여러 번의 주요 개조 공사를 거쳤다. 1832년 방콕 50주년 기념, 1882년 방콕 백주년 기념, 1932년 방콕 150주년 기념, 1982년 200주년 기념 행사에 맞춰 재건 및 복원이 이루어졌다.[9][10][2]
왕실 사원으로서 왓 프라깨오는 국왕과 왕족이 수행하는 불교 의식, 대관식, 왕실 수계, 최고 대주교 임명식 등 주요 행사의 장소로 사용된다. 비사카 부자, 아살하 부자, 마가 부자와 같은 주요 불교 휴일 기념 연례 행사, 계절 변화를 기념하는 에메랄드 불상 금의 교체 의식, 차크리 기념일, 왕실 경작 의례, 국왕 생일, 쏭크란 등 연례 의식도 열린다.[11]
왓 프라깨오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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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이 불상은 인도에서 왔으며, 캄보디아 왕국에서 표면이 입혀져 1434년 아유타야 왕국에 선물로 전해졌다. 버마 침공으로 사라졌다가 1세기 후 치앙 싸엔에서 홍수로 발견되어 치앙라이, 치앙마이를 거쳐 루앙 프라방으로 옮겨졌다. 쎄따띠랏 왕자가 싸얌 왕위를 이으며 비엔티엔으로 옮겨졌으나, 딱신 대왕이 라오스와 싸워 에메랄드 부처를 시암으로 반환, 1784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2. 3. 증축 및 개보수
라마 1세는 1782년 방콕을 랏타나코신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차크리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궁과 사원을 건설했다.[1][2] 톤부리의 구 왕궁은 왓 아룬과 왓 타이 탈랏 사이에 위치하여 확장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차오프라야강 동쪽, 현재 랏타나코신 섬으로 알려진 요새화된 지역에 대궁전을 세웠다.[1][2]
왕궁 부지 내에는 전통에 따라 왕실 전용 사원인 왓 프라깨오가 건설되었다. 이 사원은 승려들의 수도 생활 공간을 제외한 모든 불교 사찰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국왕의 거주 공간과는 별개로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2] 수코타이 역사 공원의 왓 마하탓, 아유타야 역사 공원의 왓 프라 시 산펫, 톤부리의 왓 아룬과 같이 왕궁 안에 사원이 지어졌으며, 특히 아유타야 국왕의 왕궁 옆에 세워진 왓 프라 시 산펫이 새로운 사원의 건설에 영향을 미쳤다.[2][3]
1783년에 시작된 사원 건설은 "신의 스승의 수도원의 아름다운 보석을 담고 있는 사원"을 의미하는 왓 프라 시 라타나 삿사다람으로 공식 명명되었다.[4] 사원 본당은 궁궐 단지에서 석조로 완성된 최초의 건물이었으며, 1785년 2월/3월에 에메랄드 불상이 톤부리의 왓 아룬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5][6][7] 1786년 라마 1세는 방콕을 시암의 새로운 수도로 공식 지정했다.[8]
1784년, 버마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라마 1세가 왕조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옮김과 동시에, 당시의 건축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건설되었다.
이 사원은 라마 3세와 라마 4세 통치 시대부터 여러 차례 주요 개조 공사를 거쳤다. 1832년 방콕 50주년, 1882년 방콕 백주년, 1932년 방콕 150주년, 그리고 1982년 200주년 기념 행사 때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졌다.[9][10][2]
왕실 사원으로서 왓 프라깨오는 국왕과 왕족이 수행하는 불교 의식, 주요 불교 휴일 기념 연례 행사, 계절 변화를 기념하는 왕실 의식 등 다양한 행사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11]
2. 4. 현대
라마 1세가 1782년 4월 6일 방콕을 랏타나코신 왕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 새로운 차크리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적합한 왕궁과 사원이 필요했다.[1][2] 국왕이 수도를 옮긴 이유는 타크신 왕의 이전 통치 체제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는데, 그는 시암의 왕위를 찬탈했다. 톤부리에 있는 구 왕궁은 작았고, 왓 아룬과 왓 타이 탈랏이라는 두 사원 사이에 끼어 있어서 더 이상 확장을 할 수 없었다.[1][2]라마 1세는 차오프라야강 동쪽에 대궁전을 세웠는데, 이 지역은 현재 랏타나코신 섬으로 알려진 요새화된 도시 지역 내에 위치해 있다. 전통적으로 왕과 왕족의 개인적인 용도를 위한 왕실 사원이나 예배당을 짓기 위해 궁궐 부지 내에 구역을 할당했다. 이 사원(또는 왓)은 승려들을 위한 수도 생활 공간을 제외하고 모든 일반적인 불교 사찰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이 사원은 국왕의 거주 공간과는 별개로 예배를 위한 뚜렷한 공간이었다. 사원이 국왕의 궁궐 안에 지어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승려들이 머물지 않았다. 대신, 다른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초청되어 의식을 수행한 후 떠났다. 이것은 수코타이 역사 공원의 왕궁 부지 안에 있는 왕실 예배당인 왓 마하탓, 아유타야 역사 공원의 왓 프라 시 산펫 및 톤부리의 왓 아룬의 경우와 같았다.[2] 특히 아유타야 국왕의 왕궁 옆에 세워진 왓 프라 시 산펫이 이 새로운 사원의 건설에 영향을 미쳤다.[3]
사원 건설은 1783년에 시작되었다. 이 사원은 공식적으로 왓 프라 시 라타나 삿사다람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신의 스승의 수도원의 아름다운 보석을 담고 있는 사원"을 의미한다.[4] 이 사원의 본당은 궁궐 단지 전체에서 석조로 완성된 최초의 건물이었으며, 국왕의 거처는 여전히 나무로 만들어졌다. 사원 단지는 대궁전 외곽 법정의 북동쪽 모서리에 세워졌다. 1785년 2월/3월, 에메랄드 불상은 톤부리의 왓 아룬에서 랏타나코신 쪽으로 강을 건너 현재 위치에 안치되는 대대적인 의식을 치르며 옮겨졌다. 1786년 라마 1세는 방콕을 시암의 새로운 수도로 공식 지정했다. 번역하면, 이 이름은 사원과 에메랄드 불상 자체를 언급한다: "천사의 도시, 위대한 도시, 에메랄드 불상의 거처, 신 인드라의 위대한 도시, 아유타야, 아홉 개의 귀중한 보석으로 풍요로운 세계, 환생한 신들이 거주하는 천상의 거처를 닮은 위대한 왕궁이 풍부한 행복한 도시, 인드라가 부여하고 비슈바카르만이 건설한 도시".[8]
이 사원은 라마 3세와 라마 4세의 통치 시대부터 시작하여 여러 번의 주요 개조 공사를 거쳤다. 라마 3세는 1832년 방콕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31년에 재건을 시작했고, 라마 4세의 복원은 라마 5세가 1882년 방콕 백주년 기념 행사에 맞춰 완료했다. 이후 복원은 1932년 방콕 150주년 기념 행사 동안 라마 7세의 통치하에, 그리고 1982년 20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라마 9세의 통치하에 이루어졌다.[9][10][2]
왕실 사원으로서 왓 프라깨오는 국왕과 왕족이 수행하는 불교 의식, 예를 들어 대관식, 왕실 수계 및 최고 대주교의 임명식과 같은 주요 행사의 장소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국왕 또는 지명된 사람은 또한 사원에서 열리는 비사카 부자, 아살하 부자 및 마가 부자와 같은 주요 불교 휴일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에 참석한다. 일 년에 세 번, 에메랄드 불상 의 금의는 계절의 변화를 기념하는 왕실 의식으로 바뀐다. 차크리 기념일, 왕실 경작 의례, 국왕 생일 및 쏭크란 (전통 태국 설날)에도 연례 의식이 열린다.[11] 다른 대부분의 날에는 이 사원은 대궁전의 특정 지역과 함께 방문객에게 공개되며, 이들은 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1784년, 버마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라마 1세가 왕조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옮김과 동시에, 당시의 건축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건설되었다.
3. 주요 건물
- '''본당'''
- :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한다.
- '''프라 시 랏타나 체디'''
- : 금색의 불탑.
- '''프라 몬돕'''
- : 경전이며, 삼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 '''프라삿 프라 테 핖돈(로열 판테온)'''
- : 라마 1세부터 8세까지의 조상을 안치.
3. 1. 우보솟 (본당)
프라 우보솟 (พระอุโบสถth) 또는 승인전은 사원 단지의 거의 전체 남쪽 부분을 차지한다. 우보솟은 낮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분리는 건물의 신성한 성격을 강조한다. 벽에는 높은 첨탑이 있는 8개의 작은 정자가 있으며, 각 정자에는 금박으로 덮인 두 개의 ''바이 세마'' 석재가 있다. 태국 사원 건축에서 이러한 석재는 전통적으로 승려의 서품을 수행할 수 있는 신성한 경계를 나타낸다.[12]우보솟의 건설은 라마 1세 시대인 1783년에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건물은 사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 중 하나이다. 우보솟은 1779년 비엔티안, 라오스에서 왕이 가져온 태국 불상인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전에는 이 불상이 짜오프라야강의 톤부리 쪽에 있는 왓 아룬 단지의 에메랄드 불상 홀에 안치되어 있었다. 에메랄드 불상은 1785년 2/3월에 사원의 현재 위치에 의례적으로 안치되었다.[12] 1831년 라마 3세는 우보솟의 외부에 대한 대대적인 개조를 명령했다.[13]

우보솟은 직사각형의 단층 건물로, 동쪽 끝에 주 출입구가 있다.[3] 홀은 거대한 지붕을 받치는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다. 홀의 동쪽과 서쪽 끝에는 추가 기둥이 있는 확장된 현관이 튀어나와 있다. 지붕은 파란색, 노란색, 주황색의 유약 타일로 덮여 있다. 지붕 양쪽 끝의 페디먼트는 힌두교의 신 나라야나(또는 비슈누)가 가루다(신화 속의 반인반조)를 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며, 가루다는 두 손으로 두 마리의 나가 뱀의 꼬리를 잡고 있다. 이 신의 형상은 전통적인 왕권의 상징이며, 고대부터 태국 왕들이 자신의 상징으로 채택했다. 신의 ''바하나''(또는 탈것)는 신화 속의 가루다이다. 가루다는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존재로, 태국의 국장으로 채택되었다. 지붕의 처마를 따라 수백 개의 작고 금박을 입힌 풍경이 매달려 있으며, 보리수 잎 모양의 돛이 달려 있다.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 상단에서 돌출된 브래킷은 머리가 아래쪽을 향한 나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비로부터 그를 보호했던 나가의 왕 무칼린다의 전설을 기념한다.[14] 우보솟은 48개의 사각형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 기둥에는 12개의 들쭉날쭉한 모서리가 있다. 각 기둥은 유리 모자이크와 금박 테두리로 장식되어 있으며, 기둥머리는 색색의 유리 모자이크로 덮인 연꽃 잎을 묘사하고 있다.[15]
우보솟의 외벽은 금박과 색색의 유리로 만든 전통적인 태국 장식으로 덮여 있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홀은 지면 위로 높이 솟아 있으며, 계단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기단의 가장 낮은 층은 옅은 파란색 배경에 꽃무늬 그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다음 층은 색색의 유리로 된 연꽃 디자인 기단이다. 그 위층은 가루다로 장식되어 있다. 각각 두 마리의 나가 뱀을 발톱으로 움켜쥔 112마리의 가루다가 우보솟의 사면을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금박을 입히고 유리 모자이크를 박아 넣었다. 건물 양쪽 끝에 각각 세 개씩 총 여섯 개의 문이 있으며, 각 문 꼭대기에는 왕관 모양의 뾰족한 장식이 있고 짧은 계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다른 문보다 약간 더 큰 중앙 문은 왕만 사용한다. 문은 자개 상감으로 신화 속 동물과 잎사귀 디자인을 묘사하고 있다.[15] 우보솟의 벽은 매우 두껍고, 안쪽 문틀 안에는 창이나 칼을 들고 있는 수호신이 금으로 묘사되어 있다.[16]
외부에는 우보솟의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양쪽에 12마리의 청동 사자가 서 있다. 이 중 일부는 라마 3세가 주조했을 것으로 보이는 복제품이다. 이들은 라마 1세가 캄보디아에서 가져온 한 쌍의 원래 사자를 모델로 했다.[16]
우보솟(Ubosot) 내부 전체는 부처에 관한 이야기를 묘사한 채색된 벽화로 덮여 있다. 나무 천장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유리 모자이크로 별 디자인을 했다. 우보솟(Ubosot)의 서쪽 끝에는 에메랄드 불상이 앉아 있는 다층 받침대가 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다른 불상들이 있다.[17] 동쪽 벽에는 부처와 악마 마라에 대한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이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마라와 그의 군대가 그를 막으려 했던 이야기를 전한다. 대신, 마라비자야 자세로 앉아 있던 부처는 대지의 여신 프라 매 토라니에게 그를 옹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중앙 문 바로 위에 묘사되어 있으며, 머리카락에서 물을 짜내어 마라와 그의 군대를 익사시키는 큰 홍수를 일으키고 있다. 에메랄드 불상 뒤 서쪽 벽에는 ''트라이품'' 또는 불교 우주론이 묘사되어 있다. 북쪽과 남쪽 벽의 벽화는 수평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부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창문 위 상단에 묘사되어 있다.[18] 각 창문 사이에는 부처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자타카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창문 아래 북쪽 벽에는 왕이 전쟁 코끼리에 앉아 양쪽에 군대를 거느리고 육로로 행진하는 왕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 벽 아래에는 왕실의 배와 다른 군함이 강을 따라 왕을 호위하는 물 위에서의 왕실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19]

3. 1. 1. 에메랄드 불상
에메랄드 불상 또는 프라 깨오 모라콧(พระแก้วมรกตth)은 공식적으로 프라 풋타 마하 마니 라타나 파티마콘(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th)으로 불리며, 사찰의 주요 불상이자 사찰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이 신성한 불상은 반귀석 녹색 돌(옥)로 만들어졌으며, 금으로 옷을 입고,[20] 높이가 약 66cm이다.[21][22]
에메랄드 불상의 여러 층으로 된 받침대(ฐานชุกชีth: )는 ''부사복'' 왕좌, 즉 피라미드형 기단 위에 높은 첨탑이 있는 개방형 파빌리온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화려하게 장식된 받침대는 라마 1세 통치 시대에 조각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금박을 입혔다. 이후 라마 3세는 받침대 아래에 라마 2세의 장례 상여를 기단으로 추가하여 받침대를 높였다.[23] 받침대 주변에는 수많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지난 200년 동안 여러 왕들이 기증한 보물들이 쌓여 있다. 예를 들어, 1908년에 사원에 기증된 유럽산 대리석 화병 한 쌍과 대리석 설교 옥좌가 있다.[19]
- 본당
- :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한다.
3. 1. 2. 기타 불상
좌대 주변에는 여러 왕들이 만들어 사찰에 기증한 다른 불상들이 있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불상들은 다음과 같다.입구에서 바라볼 때 에메랄드 불상의 앞쪽과 오른쪽에 서 있다(대좌의 북쪽). 서 있는 불상은 양손을 밖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아바야무드라라고 불리는 손짓, 즉 두려움 없는 제스처이다.[24] 이 도상학적 자세는 "물의 진정"이라고 불린다. 이 자세는 그가 홍수가 자신의 거처에 닿는 것을 막았을 때의 붓다의 기적 중 하나를 기념한다. 이 자세는 붓다의 열정에 대한 지배력을 상징한다.[25] 불상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는데, 왕관, 목걸이, 반지, 팔찌 및 기타 왕실 장식을 착용하고 있다. 이러한 붓다의 모습은 아유타야 시대와 초기 방콕 시대에 왕과 왕족이 조각한 이미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불상은 3미터가 넘는 높이이며, 1841년 라마 3세의 명령에 따라 청동으로 주조되어 금으로 도금되었으며, 그의 할아버지 라마 1세의 통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23]
두 번째 불상은 에메랄드 불상(받침대의 남쪽)의 앞쪽 왼쪽에 위치해 있다. 이 불상은 다른 불상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불상은 라마 2세의 통치를 기념한다. 이 두 불상의 이름인 쁘라 풋타 욧파 쭐라록(พระ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th)과 쁘라 풋타 렛라 나팔라이(พระพุทธเลิศหล้านภาลัยth)는 라마 3세가 발표한 왕실 포고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여되었으며, 이 두 명의 선왕이 앞으로 알려지게 될 공식 통치 명칭이기도 하다. 이후 라마 4세는 각 불상의 왕관 안에 부처의 유물을 안치했다.[23]
에메랄드 불상의 중앙 받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짜끄리 왕조 초기 구성원의 삶을 기리는 10개의 다른 불상들이다. 이 불상들은 모두 역대 국왕들이 돌아가신 조상이나 친족을 위해 주조한 것이다. 이 불상들 역시 "물의 평온"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가사로 구별되는데, 가사가 밖으로 펼쳐진 불상은 남성 왕족을, 몸에 바짝 붙는 가사를 한 불상은 여성 왕족을 나타낸다. 이 불상들은 3개의 층에 배치되어 있는데, 최상층 받침대의 네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중간층 모서리에 유사하게 4개가 있으며, 최하층 받침대 앞쪽에 2개가 있다.[26]
받침대 앞쪽에 위치한 것은 쁘라 삼풋타 판니(พระสัมพุทธพรรณีth)이다. 이 불상은 1830년 라마 4세가 승려였을 때 만들어졌다. 1851년 그가 왕이 된 후, 그는 이 불상을 쁘라 풋타 시힝과 교체했으며, 이 불상은 앞 궁전으로 옮겨져 그의 형제 핑크라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황금 불상은 명상 자세로 묘사되어 있으며, 키는 67.5cm이다. 불상의 형태와 예술성은 이전 부처의 전통적인 도상학에서 명백한 탈피였다. 자연스러운 얼굴과 사실적인 옷차림은 라마 4세가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27][26]
왓 프라깨오 우보솟 안의 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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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불상 전당
세 개의 건물이 우보솟의 서쪽 벽을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모두 라마 4세가 의뢰했다.[28][29] 가장 북쪽에 위치한 랏차코라만우손 불상 전당(หอพระราชกรมานุสรณ์th)과 그 뒤를 잇는 랏차퐁사누손 불상 전당(หอพระราชพงศานุสรth)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랏차퐁사누손 전당에는 아유타야와 톤부리 왕국의 전 왕들을 나타내는 34개의 불상이 있으며, 내부 벽화는 아유타야 건국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28][29] 반면 랏차코라만우손 전당에는 라타나코신 왕국의 8개의 불상이 있으며, 벽화는 방콕 건국을 묘사한다.[28][29] 모든 불상은 라마 3세를 위해 구리로 주조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라마 4세는 이 불상들에 금을 입혔다.[28][29] 이 전당들 사이에는 왕관 모양의 첨탑이 있는 ''부사복'' 옥좌인 프라 포티탓 피만(พระโพธิธาตุพิมานth)이 있다. 내부에는 라마 4세가 태국 북부에서 얻은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작은 금색 탑이 있다.[28][29]
3. 3. 파이티 테라스
탄 파이티(ฐานไพทีth)는 사원 내부의 여러 중요한 구조물을 높이는, 융기된 테라스 또는 기단으로, 주요 구조물로는 프라 텝 비돈, 프라 몬돕, 프라 시 랏타나 체디가 있다. 테라스로 올라가는 계단은 북쪽에 2개, 동쪽에 1개, 남쪽에 2개, 서쪽에 1개 등 총 6개이다. 원래 테라스에는 프라 몬돕만 있었으나, 1855년 라마 4세가 기단의 확장을 명령했고, 이후 다른 두 구조물이 건설되었다.[34] 이 구조물들이 일렬로 배치된 것은 수코타이와 아유타야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배치 방식을 반영한다.[35]
3. 3. 1. 프라 텝 비돈 (왕실 판테온)

프라삿 프라 텝 비돈(ปราสาทพระเทพบิดรth)은 탄 파이티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원래 라마 4세에 의해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첫 번째 건물은 당시 푸타프랑 프라삿(พุทธปรางค์ปราสาทth)이라고 불렸고, 1855년 아유타야 왕궁의 프라삿 통을 모델로 건설이 시작되었다. 1882년 왕이 완공 전에 사망하여 에메랄드 불상을 이곳으로 옮기려던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903년 화재로 건물이 파괴되어 전면적인 재건축이 필요했다. 현재의 건물은 라마 6세 통치 기간인 20세기 초에 완공되었다. 왕은 건물의 용도를 변경하여 선대 왕들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름은 프라삿 프라 텝 비돈으로 변경되었으며, 영어로는 로열 판테온(Royal Pantheon)으로 알려져 있다. 라마 6세는 최초의 5명의 차크리 왕들의 실물 크기의 조각상을 제작하여 판테온에 설치했다. 1927년, 1959년 및 2020년에 추가 조각상이 추가되었다. 현재, 판테온에는 9개의 조각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지만, 판테온은 태국의 국경일인 차크리 기념일인 4월 6일에 연례적으로 개방된다.[36]
판테온은 십자형 평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 팔의 끝에 하나씩, 총 4개의 입구가 있으며, 주 입구는 동쪽에 있다. 건물은 ''프라삿'' 형태로, 지붕 중앙에 높은 첨탑이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왕실 저택에만 사용되는 특징이다. 지붕은 녹색과 주황색 타일로 덮여 있다. 판테온의 4개 페디먼트에는 최초의 4명의 차크리 왕들의 개인 문장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이전에는 왕실 사원에서 볼 수 있었던 나라야나의 전통적인 묘사와는 다른 방식이다. 북쪽 페디먼트에는 라마 1세의 개인 문장(타이 숫자 1), 남쪽에는 라마 2세의 개인 문장(가루다), 서쪽에는 라마 3세의 개인 문장(세 개의 문이 있는 비마나), 동쪽에는 라마 4세의 개인 문장(왕관)이 묘사되어 있다. 판테온의 외벽은 꽃무늬가 있는 파란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왕관이 판테온의 각 문과 창문의 상단을 장식하고 있다. 판테온으로 이어지는 탄 파이티의 동쪽 계단은 대리석 계단으로 재설계되었으며, 양쪽 난간은 두 개의 머리에 왕관을 쓴 파야 나가 형태로 되어 있다.[37][38]
3. 3. 2. 프라 몬돕

프라 몬돕(พระมณฑปth)은 탄 파이티(Than Phaithi) 중앙에 위치해 있다. 프라 몬돕은 때때로 도서관(''호 트라이'')이라고 불리는 성스러운 경전의 보관소이다. 현재의 구조물은 라마 1세가 화재로 소실된 이전 구조물을 대체하기 위해 지었다. 이전 구조물은 흰개미로부터 경전을 보호하기 위해 기둥을 세워 연못 중앙에 지어졌으며, 이러한 건물은 태국 사찰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새로운 프라 몬돕은 이러한 특징을 버리고 대신 도서관을 높은 기단 위에 설치했다. 1788년 라마 1세는 이전 왕실 사본이 1767년 아유타야 약탈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삼장(Tripitaka)의 완전한 개정 및 편집을 명령했다. 이 개정은 왓 마하탓 유와랏랑사릿 사원의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개정이 완료되자 텍스트 세트가 프라 몬돕 내부에 보관되었다. 라마 3세 치세 동안 프라 몬돕의 외관은 1832년 방콕 건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되었다. 프라 몬돕은 대략 사각형 윤곽을 가지고 있으며, 사각형 기단의 뾰족한 첨탑인 ''몬돕'' 스타일의 지붕을 가지고 있다. 라마 4세는 프라 몬돕 양쪽에 두 개의 구조물을 짓기로 결정했을 때 첨탑의 높이를 상당히 낮추기로 결정했다. 프라 몬돕은 외벽이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모서리가 안으로 들어간 20개의 사각 기둥이 중앙 홀을 둘러싸고 있다. 기둥은 흰색, 녹색 및 빨간색 유리를 사용하여 장식되어 있다. 외벽은 금박으로 덮이고 녹색 유리가 둘러싸인 기도하는 천신상인 ''테판놈''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리수 잎 돛이 달린 수많은 작은 금도금 풍경이 모든 면의 처마에서 매달려 있다. 왕관은 프라 몬돕 측면의 네 개의 문 상단을 장식한다. 도서관의 네 모서리에는 라마 5세가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얻은 네 개의 석조 불상이 있다. 이 보로부두르 양식의 불상은 복제품이며, 원본은 현재 에메랄드 사원 박물관에 있다.[39][40] 프라 몬돕에는 방이 하나만 있으며, 바닥은 은으로 짠 매트로 덮여 있다. 방 중앙에는 삼장의 84,000장에 달하는 모든 장을 담고 있는 고도로 정교한 자개 상감 필사본 캐비닛이 있다. 네 개의 작은 캐비닛이 방의 네 모서리에 놓여 있다.[41][42]
3. 3. 3. 프라 시 랏타나 체디
프라 시 랏타나 체디(พระศรีรัตนเจดีย์th)는 탄 파이티 서쪽에 위치하며, 라마 4세에게 주어진 스리랑카 부처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1855년에 건설된 원형 종 모양의 탑 (또는 '체디')은 벽돌 조적조로 지어졌다. 이 탑은 나중에 라마 5세가 이탈리아에서 특별히 수입한 금색 타일로 완전히 덮였다. 종 모양의 탑은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큰 둥근 받침대에서 시작하여 종 모양의 중간 부분으로 이어지고, 정사각형 부분이 중간에 위치하며, 20개의 동심원 원반이 꼭대기에 솟아 있고, 키가 큰 첨탑으로 마무리된다. 이 디자인은 아유타야의 왓 프라 시 산펫의 탑을 기반으로 하며, 이는 다시 스리랑카의 탑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탑은 돌출된 현관이 있는 네 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다. 각 현관은 탑의 정확한 미니어처로 장식되어 있으며 세 면에 박공으로 장식되어 있다. 탑의 내부는 둥근 홀이며, 천장에는 ''차트라''(다층 왕실 우산)가 매달려 있다. 홀 중앙에는 검은 래커로 칠해진 더 작은 탑이 있는데, 이곳이 부처의 유물이 보관된 유물함이다.[43][35]
3. 4. 왕실 휘장 기념물
왕실 휘장 기념물(프라 보롬 라차 사냘락/พระบรมราชสัญลักษณ์th)은 짜끄리 왕조의 아홉 가지 왕실 휘장을 묘사한 네 개의 기념물이다. 1882년 방콕 건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라마 5세는 이전 왕들의 휘장을 묘사하기 위해 ''붓사복''(butsabok) 형태의 세 개의 기념물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이 휘장은 왕들의 개인 인장을 기반으로 했다.[46] 이후, 후대 왕들을 위해 네 번째 기념물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프라 몬돕(Phra Mondop)의 각 코너를 둘러싸고 있다. 각각의 황금 ''붓사복'' 옥좌는 대리석으로 된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각 면에는 각 왕이 사찰 자체의 건설 또는 수리에 기여한 내용을 설명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46] 각 코너에는 두 개의 작은 황금색 다단 우산이 있는데, 상단 레벨의 네 개는 7단이고 하단 레벨의 우산은 5단이다. 기념물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작은 청동 코끼리이다. 이들은 각 왕의 통치에 중요한 흰 코끼리를 나타낸다.[46]
북서쪽 코너의 첫 번째 기념물은 라마 1세(귀 장식이 없는 왕관), 라마 2세(가루다) , 라마 3세(3중 문 비마나) 등 처음 세 왕의 휘장을 묘사한다. 남동쪽 기념물에는 라마 4세의 휘장(왕관)이 있으며, 남서쪽 기념물은 라마 5세의 휘장(왕관)이 있다. 북동쪽 코너의 네 번째 기념물은 라마 6세(번개 또는 ''바지라''), 라마 7세(세 개의 화살), 라마 8세(보살), 라마 9세(팔각형 옥좌와 ''차크라'') 등 네 왕의 휘장을 묘사한다.[46]
3. 5. 프라 체디 송크르엉
프라 시 랏타나 체디 뒤편에는 프라 체디 송크르엉(พระเจดีย์ทรงเครื่องth)이라 불리는 네 개의 장식된 체디가 위치해 있으며, 서쪽 현관 양쪽에 두 개씩 자리 잡고 있다. 이 체디들은 모서리가 들어간 사각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기단은 흰색이며 상단은 금박과 색유리로 장식되어 있다. 두 개의 금색 체디와 마찬가지로 이 체디들도 테라스 확장을 위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43][47]3. 6. 앙코르 와트 모형

앙코르 와트 모형은 끄메르 사원 중 하나를 방콕으로 옮기려는 라마 4세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는 실현 불가능했기에 그는 대신 앙코르 와트의 상세한 축척 모형을 제작하도록 명령했다. 고대 크메르 제국 사원 단지는 1860년 당시 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캄보디아에서 최근 재발견되었다. 이 매우 상세한 모형은 프라 몬돕 북쪽에 설치되었다.[47]
3. 7. 신화적 인물
테라스를 장식하는 7쌍의 신화 속 인물들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금박으로 도금되었다. 이들은 전통에 따르면 신화적인 히마반타 숲에 거주했던 반인반수의 천상의 존재들이다.[48]- 날개 달린 팔, 새의 하체, 사람의 발을 가지고 칼을 든 인간 남성의 상체를 가진 ''텝팍시''[48]
- 인간 남성의 상체, 사자의 하체를 가지고 꽃을 든 ''텝노라시''[48]
- 원숭이의 상체, 사자의 하체를 가지고 홀을 든 ''싱하파논''[48]
- 인간 여성의 상체와 사자의 하체를 가진 ''Apsarasingha''(''압손시'')[48]
- 거인의 상체와 새의 하체를 가진 ''아수라팍시''[48]
- 인간 남성의 상체와 새의 하체를 가진 ''킨논''(''킨나라'')[48]
- 거인의 상체, 새의 하체를 가지고 곤봉을 든 ''아수라와유팍''이다.[48]
3. 8. 기타 건축물
왓 프라깨오 경내에는 다양한 건축물이 존재한다.[12] 우보솟(Ubosot) 주변에는 12개의 개방형 ''살라 라이''(ศาลาราย), 즉 정자가 있다. 이 살라는 라마 1세 치세에 신자들이 우보솟 내부에서 나오는 찬송가나 설교를 듣도록 지어졌으며, 여러 차례 재건 및 복원되었다.[12][30] 12개의 정자는 모두 동일한 디자인과 크기로, 6개의 사각 기둥이 파란색과 주황색 유약을 칠한 타일 지붕을 받치고 있다.우보솟 정면에는 짜오 매 콴 임(Chao Mae Kuan Im)(관세음보살) 석상이 있다. 대승 불교에서 관자재보살(Avalokiteśvara)로 알려진 보살이다. 우보솟 뒤에는 은자(리쉬) 지바카 코마라바차(ชีวกโกมารภัจจ์)의 상이 있다.[31][32]

남쪽 현관은 프라 몬돕으로 들어가는 이전의 입구였으며, 테라스가 확장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서쪽 현관은 라마 4세가 확장된 테라스로 들어가는 입구로 건설했다. 파놈 막(พนมหมาก)은 꽃과 바나나 잎 공양물을 나타내는 18개의 장식 조각품이다.[49][50][45]

프라 사웨트 쿠다칸 위한 욧(Phra Sawet Kudakhan Wihan Yot) (พระเศวตกุฏาคารวิหารยอดth) 또는 위한 욧은 사원 테라스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다. 라마 3세에 의해 처음 지어져 많은 중요한 불상을 보관했다.[51]

호 프라 칸타라랏 (หอพระคันธารราษฎร์th)은 프라 몬돕 욧 프라 (พระมณฑปยอดปรางค์th)와 기단을 공유하며, 라마 4세의 명령에 따라 건립되었다. 우보솟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부처 조각상인 프라 칸타라랏(Phra Khanthararat)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이 불상은 왕실 경작 의식과 관련이 있다.[52][53] 프라 몬돕 욧 프라앙은 호 프라 칸타라랏 뒤에 더 높은 플랫폼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종탑은 호 라캉(หอระฆังth)이라고도 하며, 단지 남쪽에 위치해 있다. 첫 번째 종탑은 라마 1세에 의해 지어졌으며, 하나의 종을 보관하고 있었다. 라마 4세는 이를 완전히 재건축하도록 명령했다.[55][56] 종은 최고위 승계식에서만 울린다.[57]

호 프라 낙(หอพระนากth)은 사원 북서쪽에 위치한 왕실 묘소이다. 이전에는 불상 전당이었으며, 라마 1세가 아유타야에서 가져온 금과 구리로 만들어진 신성한 ''프라 낙'' 불상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다.[58][59]

호 프라 몬티안탐 (หอมณเฑียรธรรมth)은 사찰의 북동쪽에 위치한 경전당이다. 이 건물은 라마 1세의 형제인 마하 수라 싱하나트 부왕의 후원으로 건설되었다.[60][61]

8개의 프라앙은 공식적으로는 쁘라 앗사다 마하 체디(พระอัษฎามหาเจดีย์th)로 알려져 있으며, 라마 1세에 의해 건설되었고, 후에 라마 3세에 의해 섬세한 색상의 도자기로 덮였다. 각 프라앙은 불교의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62][63]
4. 라마키엔 갤러리
갤러리 또는 프라 라비앙(프라 라비앙/พระระเบียงth)은 한쪽 벽으로 막힌 덮인 복도로, 회랑처럼 사원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64][65] 갤러리 벽의 벽화는 인도 라마야나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라마키엔''의 전체 줄거리를 묘사한다.[64][65] 이 버전은 1797년경 라마 1세의 감독하에 태국 시 형식으로 번역되고 재구성되었다.[64][65] 이야기는 다섯 개의 긴 에피소드로 나뉜다.[64] 이 벽화는 라마 1세가 그의 버전의 서사시를 알리기 위해 의뢰했다.[64] 사실, 사원 전체의 주요 장식 테마는 ''라마키엔'' 이야기이다.[64] 이 서사시 안의 정당한 왕권의 개념은 오랫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인식되어 왔으며, 많은 왕들이 그들의 나라를 전설적인 도시 아야디아와 주인공 라마에 비유하기 위해 차용했다.[64] 벽화는 라마 3세의 명령에 의해 지워지고 완전히 다시 칠해졌다.[64] 그 이후로 자주 복원되었다.[64] 벽을 따라 있는 벽화는 장면의 요약이 축약된 178개의 장면으로 나뉜다.[64][65] 첫 번째 장면은 위한 욧 게이트(Wihan Yot Gate)인 7번 게이트의 오른쪽에 묘사되어 있다.[64][65]
5. 문
왓 프라깨오 사원 벽에는 동쪽에 2개, 남쪽에 1개, 서쪽에 3개, 북쪽에 1개 등 총 7개의 문이 있다. 동쪽 첫 번째 문은 1번 문인 앞쪽 꺼이 사뎃 문으로, 프라 텝 비돈 궁전 정반대에 있으며 라마 4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문은 왕관 모양의 첨탑으로 장식된 유일한 문이며, 문 밖에는 작은 휴식 정자와 코끼리 탑승 플랫폼이 있다.[66] 2번 문인 나 우아 문은 우보솟 입구 맞은편에 있다.[67] 남쪽의 3번 문인 씨 라타나 삿사다 문은 사원을 대궁전의 중간 마당과 연결하며, 방문객들이 이 문을 통해 사원에서 나간다.[68]
서쪽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장 남쪽에 있는 문은 4번 문인 은둔자 문으로, 정반대에 있는 은둔자 조각상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문은 방문객들이 사원에 들어가는 주요 입구이다.[69] 5번 문은 뒤쪽 꺼이 사뎃 문으로, 서쪽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외부에는 휴식 정자와 코끼리 탑승 플랫폼이 있다. 이 문은 왕이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사원에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문이므로 일반적으로 닫혀 있다.[70] 6번 문인 사남 차이 문은 대궁전 외부 마당에 있는 문 밖의 작은 들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북쪽의 7번 문인 위한 욧 문은 같은 이름을 가진 건물과 마주보고 있으며, 수호 거인이 없는 유일한 문이다.[71]
12개의 야차(혹은 거인) 조각상은 사원 벽의 세 면(북쪽 제외)을 따라 6개의 문을 지키고 있다. 이 거인들은 ''라마키엔'' 서사시의 등장인물들로, 피부색과 왕관으로 구별된다. 각 거인은 키가 약 5m이며, 모두 앞에 철퇴 또는 가다를 쥐고 있다.[72] 1번 문인 앞쪽 쾨이 사뎃 문 앞에 있는 왼쪽 거인부터 시계 방향으로, 수리야폽은 대나무 싹 왕관을 쓰고 붉은색을 띠고, 인타라칫은 비슷한 왕관을 쓰고 녹색을 띤다.[72] 멍콘칸은 나가 왕관을 쓰고 녹색을 띠고, 위룬혹은 비슷한 왕관을 쓰고 짙은 청색을 띤다.[72] 토사키리톤은 코 대신 코끼리 코와 대나무 싹 왕관을 쓰고 짙은 붉은색을 띠며, 토사키리완은 비슷한 코와 왕관을 쓰고 녹색을 띤다.[72] 짜크라왓은 깃털 왕관 위에 작은 머리가 있고 흰색을 띠고, 아싸칸말라는 비슷한 추가 머리가 있지만 일반적인 왕관을 쓰고 보라색을 띤다.[72] 토사칸은 왕관 위에 두 층의 작은 머리가 있고 녹색을 띠고, 사핫사데차는 여러 개의 머리가 있고 흰색을 띠며, 마이아랍은 꼬리 왕관을 쓰고 옅은 보라색을 띠고, 위룬참방은 비슷한 왕관을 쓰고 짙은 청색을 띤다.[72]
6. 갤러리
갤러리 또는 프라 라비앙(พระระเบียงth)은 한쪽 벽으로 막힌 덮인 복도로, 회랑처럼 사원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갤러리 벽의 벽화는 인도 라마야나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라마키엔''의 전체 줄거리를 묘사한다. 이 버전은 1797년경 라마 1세의 감독하에 태국 시 형식으로 번역되고 재구성되었다. 이야기는 다섯 개의 긴 에피소드로 나뉜다. 이 벽화는 라마 1세가 그의 버전의 서사시를 알리기 위해 의뢰했다. 사실, 사원 전체의 주요 장식 테마는 ''라마키엔'' 이야기이다. 이 서사시 안의 정당한 왕권의 개념은 오랫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인식되어 왔으며, 많은 왕들이 그들의 나라를 전설적인 도시 아야디아와 주인공 라마에 비유하기 위해 차용했다. 벽화는 라마 3세의 명령에 의해 지워지고 완전히 다시 칠해졌다. 그 이후로 자주 복원되었다. 벽을 따라 있는 벽화는 장면의 요약이 축약된 178개의 장면으로 나뉜다. 첫 번째 장면은 위한 욧 게이트(Wihan Yot Gate)인 7번 게이트의 오른쪽에 묘사되어 있다.[64][65]
참조
[1]
기타
[2]
기타
[3]
기타
[4]
기타
[5]
서적
พระราชพงศาวดาร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 รัชกาลที่ ๑
https://vajirayana.o[...]
Bureau of Literature and History, Fine Arts Department
1988
[6]
서적
จดหมายเหตุการสร้างเครื่องทรง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 / Čhotmāihēt kānsāng khrư̄angsong Phra Phutthamahāmanīrattanapatimākō̜n
Treasury Department, Ministry of Finance
1997
[7]
웹사이트
ปฏิทิน 100 ปี พ.ศ.2327–2328(2327) / ค.ศ.1784–1785
https://www.myhora.c[...]
2023-09-08
[8]
기타
[9]
서적
The Sights of Rattanako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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พระราชพิธีสิบสองเดือนในสมัย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 – มูลนิธิเล็ก-ประไพ วิริยะพันธุ์พระราชพิธีสิบสองเดือนในสมัย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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ในหลวง ทรงประกอบพิธีประดิษฐานพระบรมรูป ร.9 ณ ปราสาทพระเทพบิด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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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왓 프라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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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왕궁과 에메랄드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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