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차차웅
1. 개요
남해 차차웅은 신라의 제2대 왕으로, '차차웅'은 존장의 칭호로 남해왕에게만 사용되었다. '차차웅'은 무당을 뜻하는 '자충'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거서간'에서 이어지는 호칭이라는 설이 있다. 재위 기간 중 낙랑, 왜 등의 침입이 있었고, 가뭄과 메뚜기떼로 인한 흉년이 들었으며, 예왕의 인장이 발견되는 사건도 있었다. 혁거세 거서간의 묘를 세우고 석탈해를 등용하는 등 내치를 다졌으나, 잦은 외침과 자연 재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유리 이사금을 비롯한 자녀를 두었으며, 24년에 사망하여 사릉원에 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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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사망 -
왕랑 (신)
왕랑은 신나라 말 하북 지역에서 전한 성제의 사생아 유자여라고 칭하며 황제를 사칭하고, 유림 등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으나 유수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붙잡혀 살해되었다. -
24년 사망 -
스트라본
스트라본은 폰토스 출신의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 역사가, 철학자이며,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로마 제국을 지지했고, 17권의 《지리학》과 47권의 《역사》를 저술했다. -
기원전 1세기 사람 -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에 태어나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의 지지로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가 되었으며, 재정 개혁과 영토 확장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원로원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고 정치적 암투 속에 54년 사망,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는 다작의 저술가이다. -
기원전 1세기 사람 -
혁거세 거서간
혁거세 거서간은 신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기원전 69년 알에서 태어나 13세에 왕으로 추대되어 서라벌을 다스리다가 승천했으며, 현대 박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
1세기 한국의 군주 -
기루왕
기루왕은 백제의 제5대 국왕으로, 다루왕 사후 즉위하여 신라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신라와 평화 조약을 맺었으며 말갈의 침입 시 신라의 지원을 받았고 자연재해가 빈번했다. -
1세기 한국의 군주 -
수로왕
김수로왕은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초대 왕으로, 42년에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알에서 태어나 가락국을 건국하고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여 가야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능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위치하고 김해 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2. 왕호
차차웅은 남해 거서간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남해 거서간에게만 사용된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칭호였다.
2.1. 어원 및 해석
《삼국유사》에는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존장의 칭호로서 오직 이 임금에게만 칭한 것이다" 라고 전한다. 《삼국사기》는 김대문을 인용하여, "차차웅 혹은 자충(慈充)은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에, 그를 외경해 마침내 존귀한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고 하게 되었다." 고 전하는 바, 이는 신라가 초기에는 샤머니즘 사회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태진 교수는 "차차웅"은 가가웅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거서간"에서 이어지는 호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대부터 "ㅊ, ㅉ" 발음은 "ㅋ, ㄱ" 발음과 혼용되어 왔다. 고대 로마에서 카간을 차가누스라고 부른 것처럼 말이다. "차차웅" 또한 "가가웅, 카카웅"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각간을 각찬이라고도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차차웅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난 호칭이 아닌 거서간에 연속성이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는 김대문 (8세기 신라의 학자)의 해설로, "차차웅"은 "자충"이라고도 하며, 무(무당)를 나타내는 말이며, 귀신을 섬기는 무당에 대한 외경심에서 존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칭호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신라 초기 사회는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부족 사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3. 치세
4년에 즉위하여 낙랑의 침입을 막았다. 6년(즉위 3년) 음력 1월에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사당을 세웠다. 8년(즉위 5년) 석탈해를 맏사위로 맞아들였고, 10년(즉위 7년)에는 대보로 삼아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잦은 외침이 있었다. 한번은 남해 차차웅이 신하들에게 자신이 덕이 없어 이웃 나라가 침범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자, 신하들은 적이 국상을 틈타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며 왕을 안심시켰다. 14년(즉위 11년) 왜가 백성들을 노략하여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였다.
18년(즉위 15년) 경주에 가뭄이 들고, 음력 7월에는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열어 구휼하였다. 고구려에 복종하는 일곱 나라가 와서 투항하였다.(월 미상) 19년(즉위 16년) 봄 2월,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하여 바쳤다. 22년(즉위 19년)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았고,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24년(즉위 21년)에 사망하여 경주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3.1. 주요 사건
3.2. 대외 관계
남해 차차웅 재위 기간 동안 신라는 잦은 외침에 시달렸다. 4년에는 낙랑이 금성을 포위했으나 격퇴되었고, 14년에는 왜가 침략하여 민가를 노략하자 6부의 병사들을 보내 격퇴하였다. 왜가 물러간 틈을 타 낙랑이 다시 침입했으나, 혜성이 떨어지자 낙랑 군인들이 겁을 먹고 물러났다고 한다.
19년(즉위 16년) 봄 2월,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하여 남해 차차웅에게 바쳤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條)에는 "그 나라 인장에는 '예왕지인'이라 한 글귀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와 예 또는 부여가 지리적으로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당시 신라의 세력을 고려할 때 이러한 기록이 황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3.3. 평가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다. 남해 차차웅이 신하들에게 자신이 덕이 없어 이웃 나라가 침범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자, 신하들은 적이 국상을 틈타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며 왕을 안심시켰다. 이후 왜가 민가를 노략하자 6부의 병사들을 보내 격퇴하였다.
18년에는 경주에 가뭄과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구휼하였다. 고구려에 복종하던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으며, 19년에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 예왕의 인장을 발견해 바쳤다. 이는 신라와 예, 부여가 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비추어 황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22년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았고,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는 김대문의 해설을 인용, "차차웅"은 무당을 나타내는 말이며, 귀신을 섬기는 무당에 대한 존경심에서 존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러한 칭호는 신라 초기 사회가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부족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