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프란츠 엥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한 프란츠 엥케는 19세기 독일의 천문학자이다. 그는 엥케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고 주기를 예측했으며, 금성의 태양면 통과 관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태양 시차를 계산했다. 베를린 천문대 건립 및 운영에 기여했고, 별지도 제작 및 천문 연감 편집에도 참여했다. 토성 A 고리의 밝기 변화를 발견했으며, 소행성 운동 계산 방법을 개선했다. 엥케 혜성, 엥케 간극, 엥케 크레이터, 소행성 9134 엥케 등 여러 지명이 그의 업적을 기려 명명되었다.

요한 프란츠 엥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요한 프란츠 엔케
이름요한 프란츠 엔케
원어 이름Johann Franz Encke
출생1791년 9월 23일
출생지함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
사망1865년 8월 26일
사망지슈판다우(현재의 베를린 일부), 브란덴부르크 주
국적프로이센 왕국
학력
모교괴팅겐 대학교
박사 지도 교수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박사 학위 제자요한 고트프리트 갈레
레오폴트 크로네커
데메트리오스 코키디스
경력
직업천문학자
근무 기관제베르크 천문대
베를린 천문대
베를린 대학교
업적
주요 업적엔케 혜성 궤도 계산
소행성 궤도 결정
수상
수상 내역코타 상(1817년)
왕립 메달(1828년)
왕립 천문학회 골드 메달(1824년, 1830년)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65년 사망 -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무정부주의자로, 사유 재산 제도를 비판하고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자유로운 사회를 옹호했으며, 반유대주의와 여성 차별적인 견해로 비판받았다.
  • 1865년 사망 - 로버트 피츠로이
    로버트 피츠로이는 영국의 해군 장교이자 과학자로, 비글호 함장으로서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하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연구에 기여했고, 뉴질랜드 총독을 역임한 후 기상 예보 시스템의 기초를 마련했으나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 1791년 출생 - 새뮤얼 모스
    새뮤얼 모스는 미국의 화가이자 발명가로, 초상화가로서 작품을 남겼으며, 아내의 사망 소식을 늦게 접한 것을 계기로 전신 시스템과 모스 부호를 발명하여 통신 기술 발전에 기여했고, 만년에는 정치적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 1791년 출생 - 민망 황제
    민망 황제는 응우옌 왕조의 제2대 황제로 즉위 후 국호를 변경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으나, 기독교 탄압과 반란 야기로 국제적 고립과 프랑스 식민지화의 길을 열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 로열 메달 수상자 - 앤드루 와일스
    앤드루 와일스는 1953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수학자이며, 1995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여 수학계에 기여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 로열 메달 수상자 - 존 콘포스
    존 콘포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유기화학자로, 페니실린 연구와 스테로이드 생합성 경로 규명에 기여한 공로로 197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콘포스 전위와 콘포스 시약이 화학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2. 생애

요한 프란츠 엥케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요하네움 학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811년부터 괴팅겐 대학교에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밑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했지만, 1813년부터 1814년까지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한자 동맹군에 입대하여 홀슈타인메클렌부르크에서 프로이센 군대의 포병 중사로 복무했다. 1814년 대학교 공부를 재개했지만,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자 다시 군대에 복귀하여 1815년까지 중위로 복무했다.

1816년 괴팅겐으로 돌아온 그는 베른하르트 폰 린데나우에 의해 고타 근처 제베르크 천문대의 조수로 임명되었다. 제베르크 천문대에서 1680년의 대혜성에 대한 연구를 완료했고, 1817년 가우스와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코타 상을 수상했다. 1812년의 혜성(현재 12P/폰스-브룩스로 알려짐)의 주기를 71년으로 정확하게 계산했다.

1818년 발견된 세 혜성 중 하나가 1805년 장-루이 퐁스가 발견한 혜성과 같을 것이라고 퐁스가 제안하자, 엥케는 이 혜성의 궤도 요소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알려진 모든 혜성은 70년 이상의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었고, 원일점은 천왕성 궤도 너머에 있었다. 엥케는 1822년에 그 혜성의 귀환을 예측했는데, 남반구에서만 관측 가능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카를 루드비히 크리스티안 륌케르가 관측했다. 이 혜성은 1786년 피에르 메상과 1795년 캐롤라인 허셜이 관측한 혜성과도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엥케는 계산 결과를 가우스,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 프리드리히 베셀에게 보냈다. 가우스는 이 내용을 발표했고, 엥케는 단주기 혜성 발견자로 유명해졌다. 이 혜성은 엥케 혜성으로 명명되었는데, 발견자가 아니라 궤도를 계산한 사람의 이름을 딴 몇 안 되는 혜성 중 하나이다. 엥케 혜성은 이후 황소자리 유성우의 기원으로 확인되었다.

1824년 왕립천문학회는 엥케에게 왕립천문학회 금메달을 수여했다. 같은 해 엥케는 아말리 베커와 결혼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825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베를린 논문집(Berliner Abhandlungen)(1829-1859)에 혜성 움직임에 관한 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761년1769년 금성태양면 통과에 대한 논의를 통해 8.57각초의 태양 시차를 유도했고, 이 값은 오랫동안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연구 결과는 태양까지의 거리(Die Entfernung der Sonne)(1822-1824)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출판되었다.

1822년 제베르크 천문대장이 되었고, 1825년 베를린에서 알렉산더 폰 훔볼트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지원을 받아 건설된 베를린 천문대(1835년 개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베셀의 추천으로 엥케는 베를린 천문대장과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서기를 겸임했다. 베를린 천문대에서 아카데미 별지도 제작(1830-1859)을 감독했고, 1830년부터 천문 연감(Astronomisches Jahrbuch)을 편집했으며, 베를린 천문대 관측(Astronomische Beobachtungen auf der Sternwarte zu Berlin)(1840-1857) 4권을 발행했다.

1837년 토성 A 고리의 광도 변화를 설명했고, 엥케 간극은 그의 토성 고리 관측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1844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소행성 운동 계산 간략화에 노력하여, 1849년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세 번의 관측으로 타원 궤도를 결정하는 방법을, 1851년에는 직교 좌표를 사용해 행성 섭동을 계산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표했다.

1840년 영국을 방문했다. 1836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1839년 미국 철학 학회 회원, 1849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명예 외국 회원이 되었다. 1863년 초기 뇌 질환으로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1865년 8월 26일 슈판다우에서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천문대장 직함을 유지했다. 후임은 빌헬름 율리우스 푀르스터였다.

천문학 정기 간행물에 기여했다. 엥케의 무덤은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예루살렘 교회와 신교회 교회 공동묘지 2호에 있으며,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 무덤 근처에 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요한 프란츠 엥케는 1791년 9월 23일 함부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했다. 한 교사의 재정적 지원 덕분에 엥케는 요하네움 학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811년, 엥케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밑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13년부터 1814년까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한자 동맹군 소속 포병 중사로 복무했다. 1814년 학업을 재개했지만,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다시 군에 복귀하여 1815년까지 중위로 복무했다.

1816년 괴팅겐으로 돌아온 엥케는 베른하르트 폰 린데나우에 의해 고타 근처 제베르크 천문대의 조수로 임명되었다. 엥케는 군 복무 중 폰 린데나우와 알게 되었다. 제베르크 천문대에서 엥케는 1680년의 대혜성에 대한 연구를 완료했고, 1817년 가우스와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코타 상을 수상했다. 또한 1812년의 혜성(현재 12P/폰스-브룩스로 알려짐)의 주기를 71년으로 정확하게 계산했다.

2.2. 엥케 혜성의 발견과 연구

1818년 장-루이 퐁스가 발견한 혜성이 1805년에 발견된 혜성과 같은 혜성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엥케는 이 혜성의 궤도 요소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알려진 혜성들은 대부분 70년 이상의 주기를 가졌지만, 엥케는 이 혜성의 주기가 3.3년에 불과하며 원일점이 목성 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당시 천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엥케는 이 혜성이 1786년 피에르 메생, 1795년 캐롤라인 허셜이 관측한 혜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1822년 이 혜성의 귀환을 예측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카를 루드비히 크리스티안 륌케르가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이 혜성은 엥케의 이름을 따서 엥케 혜성으로 명명되었으며, 궤도 계산자의 이름이 붙은 몇 안 되는 혜성 중 하나이다. 엥케 혜성은 이후 황소자리 유성우의 기원으로 밝혀졌다.

2.3. 베를린 천문대장 재직

1822년 엥케는 제베르크 천문대장이 되었고, 1825년에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지원을 받아 베를린에 건설된 새로운 베를린 천문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천문대는 엥케의 감독하에 건설되어 1835년에 개관했다. 엥케는 프리드리히 베셀의 추천으로 베를린 천문대장과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서기를 겸임했다.

엥케는 베를린 천문대에서 아카데미 별지도 제작(1830-1859)을 감독했고, 1830년부터 천문 연감(Astronomisches Jahrbuch)을 편집하고 크게 개선했으며, 베를린 천문대 관측(Astronomische Beobachtungen auf der Sternwarte zu Berlin)(1840-1857) 4권을 발행했다. 또한, 다른 단주기 혜성과 소행성의 발견 및 궤도 매개변수 결정에도 참여했다.

1837년 엥케는 토성의 A 고리 밝기에 넓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그의 토성 고리 관측을 기리기 위해 A 고리의 틈에 엥케 간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4. 말년

1844년, 엥케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의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소행성의 운동 계산을 간략화하는 방법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49년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세 번의 관측으로 타원 궤도를 결정하는 방법을, 1851년에는 직교 좌표를 사용하여 행성의 섭동을 계산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표했다.

1863년, 초기 뇌 질환으로 인해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1865년 8월 26일 슈판다우에서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천문대장 직함을 유지했다. 그의 후임은 빌헬름 율리우스 푀르스터였다.

3. 업적

요한 프란츠 엥케는 다양한 천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1818년에 발견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여 이 혜성이 3.3년이라는 짧은 주기를 가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혜성은 엥케 혜성으로 명명되었으며, 발견자가 아닌 궤도 계산자의 이름이 붙여진 몇 안 되는 혜성 중 하나이다. 엥케 혜성은 이후 황소자리 유성우의 기원으로 확인되었다.

1761년과 1769년 금성의 태양면 통과 관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태양 시차를 8.57각초로 계산했는데, 이 값은 오랫동안 권위 있는 값으로 사용되었다.

1822년 제베르크 천문대장이 되었고, 1825년에는 그의 감독하에 베를린 천문대가 건설되었다. 베를린 천문대에서 별지도 제작을 감독하고, 천문 연감(Astronomisches Jahrbuch)을 편집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토성의 A 고리 밝기 변화를 관측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토성 고리의 틈은 엥케 간극으로 명명되었다. 소행성 운동 계산 방법을 개선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 9134 엥케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수상

* 1817년: 코타 상 수상
* 1824년, 1830년: 왕립천문학회 금메달 수상
* 1828년: 로열 메달 수상

5. 기타

엥케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부르크의 성 야고보 교회 목사였다. 그는 여덟 형제 중 막내였고,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다. 한 교사의 재정적 지원 덕분에 그는 요하네움 학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840년 영국을 방문했다. 초기 뇌 질환으로 인해 1863년 11월 공식 생활에서 물러났다. 1865년 8월 26일 슈판다우에서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천문대장을 역임했다. 그의 후임은 빌헬름 율리우스 푀르스터였다.

그는 천문학 정기 간행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엥케의 무덤은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의 묘지인 de에 보존되어 있으며, 수학자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의 무덤 근처에 있다.

5.1. 가족

1824년, 요한 프란츠 엥케는 서적 판매업자이자 출판업자인 de의 딸 de(1787-1879)와 결혼했다. 엥케 부부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5.2. 사회 활동

요한 프란츠 엥케는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1825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36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1839년 미국 철학 학회 회원이 되었으며, 1849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명예 외국 회원이 되었다.

6. 평가

엥케는 19세기 천문학, 특히 혜성 연구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엥케 혜성의 궤도 계산은 당시 천문학계의 상식을 깨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으며, 단주기 혜성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연구는 혜성뿐만 아니라 소행성, 행성 운동, 천체역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의 업적은 현재까지도 천문학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1818년에 발견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면서, 엥케는 이 혜성이 이전에도 여러 차례 관측되었음을 밝혀냈다. 당시 알려진 혜성들은 대부분 70년 이상의 주기를 가졌고, 원일점은 천왕성 궤도 바깥에 있었다. 그러나 엥케가 계산한 혜성의 주기는 3.3년으로 매우 짧았고, 원일점은 목성 궤도 안에 있었다. 이는 당시 천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엥케는 이 혜성의 1822년 귀환을 예측했고, 이는 남반구에서 관측되었다. 이 혜성은 엥케 혜성으로 명명되었으며, 발견자가 아닌 궤도 계산자의 이름을 딴 몇 안 되는 혜성 중 하나이다. 엥케 혜성은 이후 황소자리 유성우의 기원으로 밝혀졌다.

엥케의 업적은 왕립천문학회에서 두 차례 금메달을 수여(1824년, 1830년)함으로써 인정받았다. 그는 또한 토성의 A 고리에 있는 '엥케 간극'을 발견하는 등, 태양계 천체 연구에도 기여했다.

7. 엥케의 이름을 딴 것들

엥케 혜성은 엥케가 궤도를 계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행성 9134 엥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의 엥케 크레이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토성 고리의 엥케 간극은 엥케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