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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무라 나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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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무라 나오미는 일본의 등반가이자 모험가로, 1941년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이지 대학 산악부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1970년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이후 5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정했으며, 개썰매를 이용해 북극점에 도달하는 등 극지 탐험에도 성공했다. 1984년 데날리 동계 단독 등반 중 실종되었으나, 그의 업적을 기려 국민영예상을 수상하고, 그의 이름을 딴 모험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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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무라 나오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나오미 우에무라
이름우에무라 나오미
본명우에무라 나오야스 (植村 直已)
출생1941년 2월 12일
출생지일본 효고현 기노사키군 히다카정 (현재의 도요오카시)
실종일1984년 2월 13일
실종 장소미국 알래스카주 매킨리산 (현재의 데날리산) 산중
현황행방불명 (인정사망)
국적일본
신장162cm
체중60kg 내외
학력
출신 학교메이지 대학 농학부 졸업
경력
직업등산가, 탐험가
활동 기간불명
주요 업적세계 최초 5대륙 최고봉 등정 (1970년)
세계 최초 개썰매 단독 북극점 도달 (1978년)
세계 최초 매킨리산 (현재 데날리산) 동계 단독 등정 (1984년)
수상
수상 내역배럴 인 스포츠 상 (1978년)
국민영예상 (1984년)
가족 관계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부모정보 없음
친척정보 없음
기타 정보
서명정보 없음
공식 웹사이트정보 없음

2. 생애

우에무라 나오미는 1960년 메이지 대학 농학부에 입학하여 산악부에 가입하면서 등산을 시작했다.[3] 1964년, 단돈 110달러를 가지고 일본을 떠나 미국과 프랑스를 거쳐 유럽 최고봉인 몽블랑 단독 등반을 시도했다.[4] 보송 빙하의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겪었지만, 살아남아 스키 리조트에서 일하며 등반 자금을 마련했다.

1965년 메이지 대학 산악부와 함께 히말라야 산맥의 초오유 등반에 성공했고,[4] 1966년 킬리만자로 산과 케냐 산, 1967년 아콩카과 산을 차례로 등정했다. 1968년에는 아마존 강에서 6000km를 혼자 래프팅했다.

1970년 데날리 산(당시 매킨리 산)에 단독으로 올라 최초로 혼자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다.[4] 1978년에는 북극점에 혼자 도달하고, 그린란드 빙상을 개 썰매로 종주하는 등 극지 탐험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5] 북극곰의 습격과 유빙 붕괴 등 여러 위험을 극복하고 탐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남극 횡단을 꿈꾸며 1976년 그린란드에서 알래스카까지 12000km를 개썰매로 여행하는 등 철저히 준비했다.[6][7] 그러나 1984년 겨울, 데날리 산을 단독 등반하던 중 실종되었다. 정상 등정 후 하산 도중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색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8]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우에무라 나오미는 1941년 2월 12일, 효고현 히다카시(현재 도요오카시의 일부)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3] 아버지 우에무라 후지지로와 어머니 우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가는 농업새끼 제조를 하였다.[3]

원래 이름은 "나오미"였으나, 촌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호적에는 "나오이"로 기재되었다.[21] 이후 대학 시절부터 "나오미"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21]

1947년 4월, 코후무라립 후츄 초등학교(현: 도요오카 시립 후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18] 1953년 4월에는 코후무라립 후츄 중학교(현: 도요오카 시립 히다카 히가시 중학교)에 입학했으며,[18] 1956년 4월에는 효고현립 도요오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18]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소풍으로 소부산(해발 1,074m)에 올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산에 대한 특별한 흥미는 없었다. 1959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4월, 도요오카시의 신일본운수에 취직했으나,[18] 1960년 2월에 퇴사했다.

1960년 4월, 메이지 대학 농학부 농업제조학과에 입학하여 산악부에 가입했다.[3] 내성적인 성격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등산을 시작했다.[3] 산악부 활동을 통해 등산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가스통 레뷔파의 '별과 폭풍'과 가토 분타로의 '단독행'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대학 3학년 겨울에는 구로베 댐에서 쓰루기산까지 5일간의 단독 산행을 하기도 했다. 대학 4학년 때는 산악부의 서브 리더를 맡았다. 산악부 동기이자 절친인 고바야시 마사히사로부터 미국 알래스카 여행 이야기를 듣고 해외의 산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1964년 3월, 메이지 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2. 2. 세계 모험 (1964~1968)

1964년, 우에무라는 23세 때 단돈 110USD(2023년 기준 약 1000USD)를 가지고 일본을 떠나 관광 비자로 로스앤젤레스행 배를 탔다. 프레즈노 근처 농장에서 일하다 이민 관리국에 발각되었지만, 추방은 면하고 불법 고용 중단 및 출국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20일, 뉴욕에서 프랑스 르아브르행 배를 타고 그달 말 샤모니에 도착했다.

11월 10일, 유럽 최고봉 몽블랑(해발 4807m) 단독 등반을 시도했으나, 사흘째 되는 날 보송 빙하의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다행히 살아남았다.[4] 그해 말, 스위스 국경 근처 모르진의 아보리아즈 스키 리조트에서 스키 순찰대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어 등반 여행에 사용했다. 이 리조트는 올림픽 알파인 스키 선수 장 바르네가 운영했다.

1965년, 히말라야 산맥 등반을 위해 메이지 대학 산악부에 합류하고자 네팔 카트만두로 떠났다. 셰르파들과 함께 초오유를 등반, 고줌파 빙하에서 캠핑 후 정상에 도달했다.[4]

1966년 9월, 킬리만자로 산과 케냐 산 등반을 위해 케냐를 여행했다. 11월 아보리아즈로 돌아온 후, 1967년 목표를 그린란드 방문, 아콩카과 단독 등반, 프랑스어와 영어 실력 향상으로 설정했다.

1967년 12월, 스페인에서 남아메리카로 건너가 아콩카과 산 단독 등반에 나섰다. 현지 관계자들은 그의 능력에 의문을 품고 군의 허가, 보증인, 아르헨티나 주재 일본 대사관의 동의를 요구했다. 아르헨티나 멘도사의 등산 협회 회원들이 보증을 자청했고, 군의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세로 엘 플라타 산(해발 5968m)을 등반하여 능력을 증명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이름 없는 산봉우리에 메이지 대학을 기려 "메이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1968년 4월, 아콩카과 산 등정에 성공한 후, 페루 이키토스에서 아마존 강을 따라 60일 동안 6000km를 혼자 래프팅하여 브라질 마카파까지 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과일 공장에서 일하며 알래스카를 방문, 데날리 등반을 시도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해 산포드 산을 등반했다.

2. 3. 5대륙 최고봉 등정 (1966~1970)

1966년 9월, 우에무라는 킬리만자로 산과 케냐 산을 등반하기 위해 케냐를 여행했다. 1967년 12월에는 남아메리카로 건너가 아콩카과 산을 혼자 등반했다. 현지 관계자들은 그의 능력에 의문을 품었으나, 아르헨티나 멘도사의 등산 협회 회원들이 보증을 서고, 세로 엘 플라타 산(해발 5,968m) 등반으로 능력을 증명하여 등반 허가를 받았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이름 없는 산봉우리에 메이지 대학의 이름을 따 "메이지"라는 이름을 붙였다.[4]

1968년 4월, 아콩카과 산 등정에 성공한 후, 페루 이키토스에서 브라질 마카파까지 아마존 강을 따라 60일 동안 6,000km를 혼자 래프팅했다.[4]

1970년 8월, 우에무라는 데날리 산(당시 매킨리 산)에 단독으로 등반하여 최초로 혼자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평균 등반 기간(14일)보다 훨씬 빠른 8일 만에 등반을 마쳤고, 짐 무게(약 24.95kg)도 평균의 절반 정도였다. 당시에는 일반적인 등반 시즌이 끝난 후였기 때문에 산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4]

2. 4. 극지 탐험 (1971~1978)

우에무라는 1978년 북극점 탐험 중 두 번이나 포기할 뻔했다고 회상했다. 탐험 4일째 되던 날, 북극곰이 그의 캠프를 습격하여 보급품을 먹어치웠다. 우에무라가 침낭에 누워 움직이지 않자, 북극곰은 침낭에 코를 들이밀었다. 다음 날 곰이 다시 나타났을 때, 우에무라는 곰을 사살했다. 탐험 35일째 되는 날에는 말라뮤트와 함께 유빙 위에 있었는데,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유빙이 깨졌다. 그는 개들과 함께 흔들리는 얼음 섬에 고립되었다가, 약 0.91m 폭의 얼음 다리를 찾아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5]

그는 포기하지 않고 북극점에 혼자 도달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57일간의 탐험을 마치고 그는 "나를 계속 나아가게 한 것은 나를 돕고 지원해 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포기한다면 그들을 절대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이 탐험에서 그는 캐나다 공군의 협력으로 헬리콥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았다. 탐험 후 그는 이러한 지원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보급품을 짊어지고 다니기로 결심했다.[5]

북극점 탐험 이후 우에무라는 그린란드 빙상을 개 썰매로 종주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1978년 5월 10일부터 8월 22일까지 이 탐험을 완료했다. 그린란드 남부 나르사르수아크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패가 있다.[5]



그린란드의 누나타크 우에무라 산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우에무라는 1978년 그린란드 횡단의 종착지로 이 봉우리를 선택했다.[5]

우에무라는 아마존강 단독 뗏목, 개썰매에 의한 북극점 도달 단독 행, 개썰매에 의한 그린란드 종단 단독 행 등 수많은 모험을 달성했다.

그의 단독 행 특징은 현지에서 생활하며 현지 사람들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기술을 습득하는 "생활 순응"을 하는 점이다.

특히, 개썰매 행에 앞서 약 5개월 동안,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와 함께 생활하며, 의식주와 사냥·낚시·개썰매 기술 등을 극지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배웠다. 이러한 경험은 개썰매 행에서 북극곰에게 습격당한 다음 날, 같은 북극곰으로 보이는 개체를 사냥하고 해체하여 생고기를 먹어 극지에서 귀중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데 활용되었다. 키비악은 특이한 제조법과 강렬한 악취로 알려져 있지만, 우에무라는 이것을 매우 좋아했다.[63]

2. 5. 남극 대륙 횡단 시도와 좌절 (1979~1982)

우에무라는 아마존강 단독 뗏목 타기, 개썰매에 의한 북극점 단독 도달, 개썰매에 의한 그린란드 종단 단독 행 등 수많은 모험을 달성했다.

우에무라가 단독으로 행동할 때의 특징은 등산에서의 고도 순응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모험하는 현지에서 생활하며 현지 사람들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기술을 습득하는 "생활 순응"을 하는 점이다.

특히, 개썰매 행에 앞서 약 5개월 동안,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와 단신으로 공동 생활하며 의식주와 사냥, 낚시, 개썰매 기술 등을 극지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배웠다. 이러한 경험은 개썰매 행에서 북극곰에게 습격당한 다음 날, 같은 북극곰으로 보이는 개체를 사냥해서 잡고 해체하여 생고기를 먹어 극지에서는 귀중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데 활용되었다. 키비악은 특이한 제조법과 강렬한 악취로 알려져 있지만, 우에무라는 이것을 매우 좋아했다.[63]

겨울 산 단독 행에서는 1964년 11월, 몽블랑에서 크레바스에 떨어진 적이 있는데, 이때 아이젠과 짐이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이 경험으로 우에무라는 여러 개의 대나무 장대를 스토퍼로 몸에 묶고 다녔다. 우에무라가 행방 불명된 마지막 데날리 산행에서도 허리에 대나무 장대를 묶고 등반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64]

2. 6. 데날리 동계 단독 등정과 실종 (1984)

우에무라는 겨울에 데날리 산을 다시 혼자 등반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래스카 등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겨울 등반의 어려움을 종종 오판할 수 있다. 1967년 그레그 블롬버그가 데날리 산 정상 등반 원정대를 조직하기 전까지(블롬버그 본인은 정상을 정복하지 못했다) 겨울에 알래스카의 대형 봉우리를 성공적으로 등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8] 이 팀은 등반 중 한 명의 대원을 잃었고, 하산길에 폭풍을 만나 남은 대원들을 거의 잃을 뻔했다. 팀원 아트 데이비슨의 저서 《영하 148도》는 이 등반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팀을 위협했던 폭풍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빙하를 오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얼음을 가로지르는 짧은 거리의 이동조차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빙하에는 종종 크레바스라고 불리는 틈이 생기며, 이 틈은 눈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과 다른 근본적인 요인들로 인해, 팀 없이 등반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하다.

우에무라는 어깨에 묶은 대나무 막대들로 구성된 "자가 구조" 장치를 개발했다. 이 막대들은 그가 빠진 크레바스 위로 뻗어 그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는 약 18.14kg 팩과 썰매만 가지고 매우 가벼운 등반을 계획했다. 그는 눈 동굴에서 잠을 자고 텐트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도록 하여 장비를 가볍게 유지했다. 또한 연료를 아끼고 차가운 음식을 먹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84년 2월 초에 등반을 시작하여 2월 12일에 정상에 도달했다. 훗날 등반가들은 그가 정상에 꽂아둔 일본 국기를 발견하게 된다.[8] 1984년 2월 13일, 43번째 생일 다음 날, 우에무라는 데날리 상공을 비행하는 일본 사진작가들과 무선으로 통신하며 정상에 올랐으며 약 5486.40m까지 하산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틀 안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정상 부근에 강풍이 불었고 기온은 약 약 -45.6°C였다. 비행기들이 산 위를 날았지만 그날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다음 날 약 약 5059.68m 지점(아마도 헤드월 바로 위의 능선)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수색이 어려워졌다.

이 시점에서 우에무라의 연료가 거의 바닥났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아무도 그를 불쾌하게 할까 봐 구조대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 지난 한 주 동안 "우에무라를 발견"했던 부시 파일럿 중 한 명인 더그 기팅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누군가(구조대)를 산에 보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2월 20일, 날씨가 맑아졌지만 우에무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약 5059.68m 지점에 있던 그의 이전 캠프의 흔적은 없었고, 근처 다른 등반가들이 남긴 물건이 훼손된 증거도 없었다.

두 명의 경험 많은 등반가들이 수색을 시작하기 위해 약 4267.20m 지점에 투입되었다. 또 다른 폭풍이 몰아쳤지만, 그들은 2월 26일까지 산에 머물면서 우에무라가 올라가는 길에 약 4267.20m 지점에 머물렀던 동굴을 발견했지만, 우에무라 자신은 찾지 못했다. 동굴에서 발견된 일기에는 우에무라가 정상 공격 시 짐을 줄이기 위해 장비를 거기에 두고 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는 또한 최악의 크레바스 지대를 지났다는 것을 알고 자가 구조용 폴을 약 2895.60m 지점에 두고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헤드월 하강 중 추락하여 부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눈에 파묻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론은 그가 약 4328.16m(헤드월 기저부)까지 도달한 다음 그곳의 많은 크레바스 중 하나에 빠져 사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 등반가 그룹이 시신을 찾기 위해 도착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약 5242.56m 지점에서 그의 장비 대부분을 찾아냈다.

약 4267.20m 동굴에서 발견된 일기는 일본어와 영어로 출판되었다. 그것은 우에무라가 겪었던 상황들, 즉 크레바스 추락, 영하 40도의 날씨, 얼어붙은 고기, 열악한 은신처 등을 묘사하고 있다. 일기 내용들은 그가 기분이 좋았고, 그의 과제에 집중하기 위해 불렀던 노래들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일기에는 "따뜻한 침낭에서 잠들 수 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맥킨리 산을 오를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생전에 "모험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절대,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이다"라는 말을 남겼지만,[66][67] 최후는 모험의 하산 중에 실종되었다.

1984년 3월 8일수색 중단 소식을 접한 다음 날인 3월 9일, 아내인 고우코가 메이지 대학에서 기자 회견에 응했다.[66][67]

:: 기자: "만약 살아있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습니까?"

:: 고우코: "항상 '모험은 살아 돌아오는 것'이라고 잘난 척 말했으니, 좀 엉성하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68][69]"

:: 기자: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 고우코: "어떤 여행에도 전부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겐 이것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반대해도 떠나는 사람이었습니다[70]"

실종 후, 해발 고도 4,200m의 설동에서 발견된 일기에는, 등정 어택 전 마지막 날인 2월 6일날짜로,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매킨리를 등반한다"라고 쓰여 있었다.[71] 이에 대해 노구치 켄은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말은 초보자가 쓰는 말이며, 그 말을 바꾸면 "어떤 상황에서도 결행하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다.[72]

3. 주요 등반 및 탐험


  • 1968년 알래스카주 샌포드 산 단독 등반. 1968년 9월 19일 정상 등반 (산 정상 등반 4번째).[16]

4. 사후

우에무라 나오미는 잦은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모험을 널리 알렸다. 특히 그의 어린이용 모험 소설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도쿄와 도요오카시(효고현)에는 그를 기리는 박물관[9][10]이 있다.

메이지 대학은 1984년 6월 우에무라 나오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11] 그는 사후 국민영예상을 받았으며,[12]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우에무라 나오미 상이 제정되어 뛰어난 모험가들을 기리고 있다.[13]

1986년에는 그의 모험을 다룬 영화 "황야에 갇히다" (植村直己物語|우에무라 나오미 모노가타리일본어)가 개봉되었다.[14]

우에무라 나오미는 뛰어난 등반가이자 모험가였을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하고 겸손한 성품으로도 기억된다. 작가 조나단 워터먼은 "그의 놀라운 업적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점은 그의 진정한 겸손함과 소탈한 성격이었다. 그의 위대함의 또 다른 부분은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데에 있었다."라고 평가했다.[15]

효고현 도요오카시에 있는 뢰광사(頼光寺)는 우에무라 가문의 보제사이며, 뒷산에는 니시보리 에이자부로의 글씨로 "우에무라 나오미의 묘"라고 새겨진 묘비가 있다. 묘비 뒷면에는 우에무라의 계명과 사망 날짜가 새겨져 있고,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추모 문구도 새겨져 있다.

도쿄도 이타바시구의 조렌지(乗蓮寺) 경내에도 묘비가 있는데, 1985년 6월 1일 그의 1주기에 맞춰 세워졌다.[73] 쿠사노 신페이의 추모시와 아내 키미코가 쓴 계명이 새겨져 있다.[74]

효고현 도요오카시에는 우에무라 나오미 기념 스포츠 공원이 있으며, 그 안에는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관이 있다. 도쿄도 이타바시구에도 우에무라 모험관이 있는데, 이곳은 그가 데날리(매킨리)에서 실종되기 전 약 15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5. 저서

우에무라 나오미의 저서 목록
연도한국어 제목일본어 제목영어 제목
1971청춘을 산에 걸고青春を山に賭けてBetting the Youth on the Mountains
1974극북으로 달리다極北へ駈けるRun to the Far North
1976북극권 1만 2천 킬로미터北極圏1万2千キロ12,000 kilometers above the Arctic Circle
1978북극점 그린란드 단독 여행北極点グリーンランド単独行Solo trip to North Pole Greenland
1980모험冒険Adventures

[17]


  • 『청춘을 산에 걸고』 (1971년 3월, 마이니치 신문사(毎日新聞社))
  • * 1976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개정 신판 발행
  • * 1977년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서 문고본 발행
  • * 2008년 분게이슌주에서 문고 신장판 발행
  • 『극북으로 달려가다』 (1974년 7월 5일, 분게이슌주)
  • * 1977년 분게이슌주에서 문고본 발행
  • * 2000년 야마케이 출판사(山と溪谷社)에서 단행본 재간행
  • * 2011년 분게이슌주에서 문고 신장판 발행
  • 『북극권 1만 2천 킬로』 (1976년 9월 1일, 분게이슌주)
  • * 1979년 분게이슌주에서 문고본 발행
  • * 2014년 야마케이 출판사에서 『북극권 1만 2000킬로』로 제목 변경 후 문고본 재간행
  • 『북극점 그린란드 단독행』 (1978년 10월 15일, 분게이슌주)
  • * 1982년 분게이슌주에서 문고본 발행
  • 『모험과 인생』 (1980년 2월, 세이쿄 신문사(聖教新聞社))
  • 『모험』 (1980년 12월 30일, 마이니치 신문사(毎日新聞社))
  • * 1984년 오분샤(旺文社)에서 문고본 발행
  • * 1988년 오분샤에서 신서 재간행
  • * 1998년 쇼가쿠칸(小学館)에서 문고본 재간행
  • 『남성에게 모험이란 무엇인가: 우에무라 나오미 대담·에세이집』 (1981년 1월 15일, 시오 출판사(潮出版社))
  • * 1984년 시오 출판사에서 부제 삭제 후 문고본 발행
  • 『에베레스트를 넘어서』 (1982년 7월 15일, 분게이슌주)
  • * 1984년 분게이슌주에서 문고본 발행
  • 『우에무라 나오미의 모험 학교』 (1986년 8월 30일, 분게이슌주)
  • * 1994년 분게이슌주에서 문고본 발행
  • 『우에무라 나오미와 산에서 하룻밤: 등산화를 벗은 모험가, 마지막 세상 이야기』 (1993년 8월 20일, 쇼가쿠칸(小学館))
  • * 1999년 쇼가쿠칸에서 문고본 발행
  • * 2013년 쇼가쿠칸에서 문고본 재간행 (비파루 부록)
  • 『우에무라 나오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2002년 10월 20일, 분게이슌주)
  • 『우에무라 나오미, 도전을 말하다』 (2004년 7월 19일, 분게이슌주)
  • 『온천 천국』 (2017년 12월 30일, 가와이데 쇼보 신샤(河出書房新社), 공저) - 우에무라 나오미의 『고향 키노사키 온천』 수록
  • 존 브래시포드-스넬, 알리스테어 발렌타인 공편 『탐험: 전문가의 길』 (1979년 5월, 일본교통공사 출판사업국)

6. 평가

우에무라 나오미는 공개 강연을 자주 했고, 자신의 여행에 관한 글도 썼다. 그의 어린이 모험 소설은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다. 도쿄효고현 도요오카시에는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9][10]

메이지 대학은 1984년 6월 우에무라 나오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11] 그는 사후에 국민영예상을 받았다.[12] 일본에서는 그의 사후 뛰어난 모험가들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우에무라 나오미 상이 제정되었다.[13]

1986년에는 그에 관한 모험 드라마 영화 "황야에 갇히다" (植村直己物語|우에무라 나오미 이야기일본어)가 개봉되었다.[14]

그는 재능 있는 등반가이자 열정적인 모험가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점으로 기억된다. 작가 조나단 워터먼은 "그의 놀라운 업적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점은 그의 진정한 겸손함과 소탈한 성격이었다. 그의 위대함의 또 다른 부분은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데에 있었다."라고 말했다.[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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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행물 QST Magazine QST Magazine 197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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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뉴스 Doctor plans a global trek to explore how Japanese got here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04-07-06
[13] 뉴스 Huge hot-air balloon debuts for Pacific try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03-01-15
[14] 웹사이트 Uemura Naomi monogatari https://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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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植村直己の本おすすめランキング一覧|作品別の感想・レビュー https://bookmeter.co[...]
[18] 웹사이트 植村直己冒険館ホームページ. 植村直己について. 略年譜 http://www3.city.toy[...] 植村直己冒険館 201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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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国民栄誉賞 写真特集 https://www.jiji.com[...] 時事通信|時事ドットコム 202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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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登頂ゴジュンバ・カン 茗溪堂 1967
[24] 서적 登頂ゴジュンバ・カン 茗溪堂 1967
[25] 서적 登頂ゴジュンバ・カン 茗溪堂 1967
[26] 서적 登頂ゴジュンバ・カン 茗溪堂 1967
[27] 뉴스 아콩카구아에 등정: 우에무라씨 朝日新聞 196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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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방송 NHK「ドキュメンタリーエベレスト」 1970-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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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뉴스 우에무라씨 〈가장 용감한 스포츠맨〉: 영 바라상 알리 등을 제치고: 씩 웃는 "고독의 왕자" 毎日新聞 197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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