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우투시부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투시부카는 원나라 황족으로, 출생 연도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원 인종의 아들이며,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즉위 후 순양왕으로 강등되어 투옥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의 생애는 원 무종, 원 인종, 원 영종 시기까지 이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원 인종의 황자 - 원 영종 (9대)
    원 영종(9대)은 원 인종의 아들이자 쿠빌라이 칸의 증손으로, 유교적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개혁 정치를 추진했으나 몽골 귀족들의 반발로 1323년 암살당했다.
  • 1321년 사망 - 단테 알리기에리
    단테 알리기에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신곡》을 저술하고 이탈리아어 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치 활동과 망명 생활을 겪고 기독교 사상과 당대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을 통해 세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321년 사망 - 비르예르 망누손
    비르예르 망누손은 망누스 3세의 아들로 스웨덴 국왕이 되었으며, 핀란드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으나 형제들과의 갈등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덴마크로 망명했다.
  • 원나라의 군인 -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원 순제와 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은 고려 출신 어머니의 배경으로 몽골 귀족의 반대에 부딪히며 권력 투쟁을 겪었고, 명나라의 대도 함락 후 북원을 건국하여 저항했으나 실패하고 카라코룸에서 사망했다.
  • 원나라의 군인 - 알탄 칸
    알탄 칸은 16세기 몽골의 지배자로서 투메트부를 다스리고 명나라와 교역을 시도하다 베이징을 공격하고 화의를 맺었으며, 티베트 불교를 몽골에 부흥시키고 후허하오터를 건설하는 등 몽골의 종교적,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
우투시부카
기본 정보
한국어 이름우투시부카
로마자 표기Utusibuka
일본어 이름兀都思不花 (うつしふか)
생애
출생 연도1236년
사망 연도1304년
직업원나라의 정치가, 군인
가문
출신위구르족
아버지바르추크 아르트 테긴
자녀낭가다이
테무르 부카
관직 및 경력
주요 활동고려 정동행성 우승상
진압군 사령관
봉작안서무민왕(安西武愍王)

2. 생애

1320년 아버지 원 인종 아유르와르바다가 붕어하자, 대도(현 베이징)로 가서 분상하였다. 그러나 형제 또는 이복 형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이 즉위한 직후인 그해 7월 19일 순양왕(順陽王) 혹은 고양왕(顧陽王)으로 강봉되었다.[12] 우투시부카가 강등된 이유와 강등된 날짜는 원사, 원사연의 등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때 다기 태후의 총신 시레문(失列门) 등은 옹기라트부의 지원을 받아 영종 시데발라를 폐위하고 그를 추대하려고 모반을 일으켰다가, 사전에 시데발라의 측근 바이주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옹기라트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지만 영종 시데발라는 다기 카툰과 옹기라트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우투시부카는 곧바로 투옥됐다가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일설에는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사망 원인과 정확한 사망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1320년 11월 5일 그의 사저와 왕부의 재산은 조사 후 모두 몰수되어 장패감(章佩監)과 중정원(中政院)에서 환수하였다.

우투시부카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원사』 제108권 제왕표에는 순양왕으로 강등된 후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예순테무르 칸의 재위 기간 중에도 살아있었다는 설이 있다. 『원사』 27권에는 그가 투옥된 지 몇 개월 후, 황제가 우투시부카의 저택에 신하를 파견하여 재물을 하사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우투시부카의 출생년대와 출생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아버지는 아유르와르바다이다. 어머니는 장의자성황후(莊懿慈聖皇后) 콩기라트씨라는 설과, 고려인 고려 도원수, 도첨의중찬 김심(金深)의 딸 답리마실리황후 김씨(答里麻失里皇后 金氏)라는 설, 원 인종 아유르와르바다의 이름 미상의 후궁이라는 설 등이 있다. 또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친동생이라는 설,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이복동생이라는 설과 인종의 서장자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이복 형이라는 설이 있다.[1]

초기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1307년(대덕 11년) 7월 원 무종 카이산 즉위 후, 월왕 트레와 함께 원 무종에게 정(錠)을 하사받았다.[2] 그가 무종 카이산의 즉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우투시부카는 어려서 할머니 다기 카툰 콩기라트씨로부터 심히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한때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315년(연우 2년) 안왕(安王)에 봉해졌으며, 원 인종으로부터 수뉴금인(兽纽金印)을 하사받고 화림(和林, 현 몽골 카라코룸)으로 출진하였다.[3]

1316년 원 인종은 아들 케켄 칸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는데 방해가 되는 쿠살라를 모살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쿠살라를 윈난 성으로 추방했다. 윈난 성으로 추방된 쿠살라는 차가타이 칸국으로 망명했다. 인종은 쿠살라가 서북쪽으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우투스부카에게 대량의 군수품, 군량을 지급하였다. 1317년(연우 4년) 왕부를 설치하였다.[4] 1318년 호주로 등을 봉지로 하사받았다.[5] 그의 봉지와 영토의 호구 수는 위왕 에무게(魏王阿木哥)의 사례를 참조했다 한다.[6][7]

1320년 아버지 원 인종 아유르와르바다가 졸하자, 분상하러 대도(현, 베이징)로 왔다. 그러나 형제 또는 이복 형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즉위 직후, 그해 7월 19일 순양왕(順陽王) 혹은 고양왕(顧陽王)으로 강봉되었다.[12] 우투시부카가 강등된 이유와 강등된 일자는 원사, 원사연의 등에 기록이 없다. 이때 다기 태후의 총신 시레문(失列门) 등은 옹기라트부의 지원을 받아 영종 시데발라를 폐위하고 그를 추대하려고 모반을 일으켰다가, 사전에 시데발라의 측근 바이주에게 바로 발각되어 체포됐다. 옹기라트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지만 영종 시데발라는 다기 카툰과 옹기라트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2. 2. 원 무종 시기

1307년(대덕 11년) 7월 원 무종 카이산 즉위 후, 우투시부카는 월왕 트레와 함께 정(錠)을 하사받았다.[2] 무종 카이산의 즉위에 우투시부카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우투시부카는 어려서 할머니 다기 카툰 콩기라트씨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한때 할머니는 그를 태자로 세우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2. 3. 원 인종 시기

아유르와르바다의 아들로, 어머니는 장의자성황후(莊懿慈聖皇后) 콩기라트씨라는 설과, 고려인 고려 도원수, 도첨의중찬 김심(金深)의 딸 답리마실리황후 김씨((答里麻失里皇后 金氏)라는 설, 원 인종의 이름 미상의 후궁이라는 설 등이 있다.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친동생이라는 설, 이복동생이라는 설과 인종의 서장자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이복 형이라는 설이 있다.

1307년(대덕 11년) 7월 원 무종 카이산 즉위 후, 월왕 트레와 함께 정(錠)을 하사받았다.[2] 우투시부카가 무종 카이산의 즉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어려서 할머니 다기 카툰 콩기라트씨로부터 총애를 받았으며, 한때 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315년(연우 2년) 안왕(安王)에 봉해졌으며, 수뉴금인(兽纽金印)을 하사받고 화림(和林, 현 몽골 카라코룸)으로 출진하였다.[3]

1316년 원 인종은 아들 케켄 칸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는데 방해가 되는 쿠살라를 모살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윈난 성으로 추방했다. 쿠살라는 차가타이 칸국으로 망명했다. 인종은 쿠살라가 서북쪽으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우투스부카에게 대량의 군수품, 군량을 지급하였다. 1317년(연우 4년) 왕부를 설치하였다.[4] 1318년 호주로 등을 봉지로 하사받았다.[5] 그의 봉지와 영토의 호구 수는 위왕 에무게(魏王阿木哥)의 사례를 참조했다 한다.

2. 4. 원 영종 시기

원 인종 아유르와르바다의 아들로, 출생년대와 출생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어머니는 장의자성황후(莊懿慈聖皇后) 콩기라트씨라는 설과, 고려인 고려 도원수, 도첨의중찬 김심(金深)의 딸 답리마실리황후 김씨((答里麻失里皇后 金氏)라는 설, 원 인종 아유르와르바다의 이름 미상의 후궁이라는 설 등이 있다. 또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친동생이라는 설,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이복동생이라는 설과 인종의 서장자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이복 형이라는 설이 있다.

초기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1307년(대덕 11년) 7월 원 무종 카이산 즉위 후, 월왕 트레와 함께 원 무종에게 정(錠)을 하사받았다.[2] 그가 무종 카이산의 즉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우투시부카는 어려서 할머니 다기 카툰 콩기라트씨로부터 심히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한때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315년(연우 2년) 안왕(安王)에 봉해졌으며, 원 인종으로부터 수뉴금인(兽纽金印)을 하사받고 화림(和林, 현 몽골 카라코룸)으로 출진하였다.[3]

1316년 원 인종은 아들 케켄 칸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는데 방해가 되는 쿠살라를 모살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쿠살라를 윈난 성으로 추방했다. 윈난 성으로 추방된 쿠살라는 차가타이 칸국으로 망명했다. 인종은 쿠살라가 서북쪽으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우투스부카에게 대량의 군수품, 군량을 지급하였다. 1317년(연우 4년) 왕부를 설치하였다.[4] 1318년 호주로(湖州路) 등을 봉지로 하사받았다.[5] 그의 봉지와 영토의 호구 수는 위왕 에무게(魏王阿木哥)의 사례를 참조했다 한다.

1320년 아버지 원 인종 아유르와르바다가 붕어하자, 분상하러 대도(현, 베이징)로 왔다. 그러나 형제 또는 이복 형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즉위 직후, 그해 7월 19일 순양왕(順陽王) 혹은 고양왕(顧陽王)으로 강봉되었다.[8] 우투시부카가 강등된 이유와 강등된 일자는 원사, 원사연의 등에 기록이 없다. 이때 다기 태후의 총신 시레문(失列门) 등은 옹기라트부의 지원을 받아 영종 시데발라를 폐위하고 그를 추대하려고 모반을 일으켰다가, 사전에 시데발라의 측근 바이주에게 바로 발각되어 체포됐다. 옹기라트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지만 영종 시데발라는 다기 카툰과 옹기라트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바로 우투시부카는 투옥됐다가,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일설에는 피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사망원인과 정확한 사망지는 기록에 알려진 것이 없다. 1320년 11월 5일 그의 사저와 왕부의 재산은 조사 후 모두 몰수, 장패감(章佩監), 중정원(中政院)에서 환수하였다.

우투시부카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원사 제108권 제왕표에는 순양왕으로 강등된 후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예순테무르 칸의 재위 기간 중에도 살아있었다는 설이 있다. 원사 27권에 의하면 그가 투옥된 지 몇 개월 후, 황제가 우투시부카의 저택에 신하를 파견하여 재물을 하사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2. 5. 최후

1320년 아버지 원 인종 아유르와르바다가 사망하자, 분상하러 대도(현 베이징)로 왔다. 그러나 형제 또는 이복 형제 영종 시데발라 케켄 칸의 즉위 직후, 그해 7월 19일 순양왕(順陽王) 혹은 고양왕(顧陽王)으로 강봉되었다.[12] 우투시부카가 강등된 이유와 강등된 일자는 원사, 원사연의 등에 기록이 없다. 이때 다기 태후의 총신 시레문(失列门) 등은 옹기라트부의 지원을 받아 영종 시데발라를 폐위하고 그를 추대하려고 모반을 일으켰다가, 사전에 시데발라의 측근 바이주에게 바로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옹기라트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지만 영종 시데발라는 다기 카툰과 옹기라트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바로 우투시부카는 투옥됐다가,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일설에는 피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사망 원인과 정확한 사망지는 기록에 알려진 것이 없다. 1320년 11월 5일 그의 사저와 왕부의 재산은 조사 후 모두 몰수, 장패감(章佩監), 중정원(中政院)에서 환수하였다.

우투시부카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원사』 제108권 제왕표에는 순양왕으로 강등된 후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예순테무르 칸의 재위 기간 중에도 살아있었다는 설이 있다. 『원사』 27권에 의하면 그가 투옥된 지 몇 개월 후, 황제가 우투시부카의 저택에 신하를 파견하여 재물을 하사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게겐 칸의 치세 말기에 등장하는 "우루스 부화"가 우두스 부카와 동일 인물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10] "우루스 부화"는 올루크 테무르 등과 함께 게겐 칸을 암살한 집단에 속해 있었으며, 형제에게 냉대받은 앙심 때문에 칸 암살에 협력하게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우루스 부화"는 예순 테무르에 의해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11]

3. 추가 정보

우투시부카에 대한 추가 정보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3. 1. 우루스 부화 동일 인물설

게겐 칸(시데바라) 통치 말기에 등장하는 "우루스 부화"는 우두스 부카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10] 우루스 부화는 올루크 테무르 등과 함께 게겐 칸을 암살한 집단에 속해 있었는데, 형제에게 냉대받은 앙심 때문에 칸 암살에 협력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우두스 부카의 최후는 불분명하며, 『원사』 권108 제왕표에는 "순양왕"으로 강등된 후 살해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우루스 부화는 예순 테무르에 의해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11]

참조

[1] 서적 新元史』や『蒙兀児史記』では英宗本紀冒頭の「臣幼無能、且有兄在、宜立兄、以臣輔之」というシデバラの言葉を基にウドゥス・ブカが庶長子であると記しているが、杉山正明はここで言う「兄」とは実際には従兄弟のコシラを指すものであると指摘している 1995
[2] 서적 元史』巻22武宗本紀1,「[大徳十一年秋七月]乙亥……賜越王禿剌鈔万錠、諸王兀都思不花所部三万五千二百二十錠」
[3] 서적 元史』巻108表第3諸王表,「安王兀都思不花、延祐二年封、七年降封順陽王、尋被殺」
[4] 서적 元史』巻26仁宗本紀3,「[延祐四年]夏四月戊戌、給安王兀都思不花部軍糧三月」
[5] 서적 元史』巻26仁宗本紀3,「[延祐五年三月]戊寅、以湖州路為安王兀都思不花分地、其戸数視衛王阿木哥」
[6] 서적 元史』巻26仁宗本紀3,「[延祐五年五月]丁卯、賜安王兀都思不花金五百両・銀五千両」
[7] 서적 元史』巻26仁宗本紀3,「[延祐五年五月]丁巳、賜安王兀都思不花等金束帯及金二百両・銀一千五十両・鈔二千二百錠・幣帛二百八十匹」
[8] 서적 元史』巻27英宗本紀1,「[延祐七年秋七月]丙申……降封安王兀都思不花為順陽王」
[9] 서적 元史』巻27英宗本紀1,「[延祐七年十一月]庚辰……遣定住等括順陽王兀都思不花邸財物、入章佩監・中政院」
[10] 서적 「兀魯思不花」をモンケの子のウルス・ブカとする説もあるが、その場合ウルス・ブカの寿命が不自然に長くなるため何らかの誤記ではないかと推測されている 2013
[11] 서적 2013
[12] 문서 원사에는 순양왕, 신원사에는 고양왕으로 등장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