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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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 인종(1285년 ~ 1320년)은 몽골 제국 원나라의 제7대 황제이다. 쿠빌라이 칸의 손자이자 다르마발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리학을 배우며 유교적 소양을 쌓았다. 1307년 쿠데타를 통해 섭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1311년 황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적 문화를 장려하고 과거 제도를 부활시켰으며, 몽골 부족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친중국 정책을 추진했다. 132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시데발라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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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인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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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아유르바르와다 |
칭호 | 몽골 제국 제8대 황제 (카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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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1311년 4월 7일 ~ 1320년 3월 1일 |
대관일 | 1311년 4월 7일 |
별칭 | 부얀투 카안 보안독 황제 |
전체 이름 | 몽골어: 중국어: 愛育黎拔力八達 (애육려발력팔달) |
배우자 | 라드나시리 |
자녀 | 시데발라 우두스 부카 |
왕가 | 쿠빌라이 가 |
아버지 | 다르마발라 |
어머니 | 다기 |
출생일 | 1285년 4월 9일 |
출생지 | 상도 진산현 |
사망일 | 1320년 3월 1일 |
사망 장소 | 대도, 광천궁 |
매장지 | 기련곡/케를렌 산 (몽골 고원) |
중국 황제 정보 | |
묘호 | 인종 (仁宗) |
시호 | 성문흠효황제 (聖文欽孝皇帝) |
연호 | 황경: 1312년 - 1313년 연우: 1314년 - 1320년 |
능묘 | 기련곡 (몽골 고원) |
칸 정보 | |
칸호 | 부얀투 카안 () |
기타 정보 | |
종교 | 티베트 불교, 텡그리즘, 샤머니즘 → 유교 성리학 |
2. 생애
1285년 음력 3월 4일 쿠빌라이 카안의 손자 다르마발라와 콩기라트 출신 비(妃) 다기 카툰의 차남이자, 무종 카이샨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장수를 뜻하는 '아유르-파바다'를 몽골어 음차대로 적은 것이다.[2] 어린 시절부터 유학자 리 멍에게 성리학을 배우며 유교적 소양을 쌓았다.[2]
성종 테무르가 즉위하자, 어머니 다기 카툰과 함께 회주(현 허난성)로 추방되기도 했다. 1307년 성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불간 황후는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으나, 아유르바르와다는 대도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켜 불간과 아난다를 체포했다. 몽골 고원에 주둔하던 형 카이샨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아유르바르와다는 섭정을 칭하며 카이샨을 맞이하고 황태자가 되었다.
1311년 1월, 무종 카이샨 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아유르바르와다는 황태제로서 섭정을 맡아 조정을 장악했다.[4] 그는 무종의 측근들을 숙청하고, 이맹 등 한인 출신 유학자들을 등용했다. 지대 4년(1311년) 4월 7일 몽골 왕공족과 부족장 1만 4천 명을 소집, 형식적인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으로 공식 즉위하였다.[5] 연호는 황경(皇慶), 연우(延祐)로 정했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유교 원칙에 기반한 정부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는 일부 몽골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무종 때 설립된 상서성을 폐지하고 중서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5] 무종 시대의 재정 정책을 개혁하고, 지대은초를 폐지하고 지원초를 다시 발행했다.[6]
1313년부터 과거 제도 시행을 추진, 1315년 이맹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시험을 부활시켰다. 과거 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로 시행하고, 중서성에서 직접 주관하게 했다.[7] 정동행성에서도 과거를 주관하여 고려인 3명이 선발되기도 했다.
1317년 원 무종의 측근 투쿠치가 코실라를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5] 황태후 다기와 권신 테무데르의 전횡에 맞서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4] 1320년 대도 황궁 광천궁에서 36세로 붕어했다.
2. 1. 초기 활동
1285년 음력 3월 4일 쿠빌라이 카안의 손자 다르마발라와 다기 카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장수를 뜻하는 '아유르-파바다'를 몽골어 음차대로 적은 것이다.[2] 어린 시절부터 유학자 리 멍에게 성리학을 배우며 유교적 소양을 쌓았다.[2]성종 테무르가 즉위하자, 어머니 다기 카툰과 함께 회주(현 허난성)로 추방되기도 했다. 1307년 성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불간 황후는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으나, 아유르바르와다는 대도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켜 불간과 아난다를 체포했다.
몽골 고원에 주둔하던 형 카이샨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아유르바르와다는 섭정을 칭하며 카이샨을 맞이하고 황태자가 되었다.
2. 2. 청년기
1286년 1월 할아버지 친킴이 증조부 세조 쿠빌라이보다 일찍 죽자, 아버지 다르마발라가 황태자로 책봉됐다. 그러나 1292년 봄, 아버지 다르마발라는 대도에서 병으로 진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이후 황태자 지위는 아유르바르와다의 삼촌 테무르에게 넘어갔다.1286년부터 서하 출신 가타푸지(乞台普济)가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의 보육과 유학을 담당하였다. 가타푸지는 그의 할아버지 친킴의 측근으로 20년간 있었으며, 가타푸지의 조부 라길이르(拉吉爾威)는 서하 출신으로 칭기즈칸의 숙위를 담당했었다. 1313년 인종은 가타푸지를 안길왕(安吉王)에 봉했다. 등문용(董文用), 위구르계 출신 아시테무르(阿失帖木兒) 등도 유년 시절 카이산, 아유르바르와다 형제의 보도를 담당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인자하고 관대하며 효성이 지극한 성격으로, 검소하고 공손했다. 유교 사서와 지식에 통달했고, 불교 경전을 이해하고 깊이 해석하였다. 10대 초반부터 대도에 체류하며 이맹(李孟)에게서 성리학을 배웠고, 왕약(王約), 왕유이, 조맹부(趙孟頫), 왕치이, 장양호(張養浩) 등과 교류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성격이 유약하여 어머니 다기 카툰에게 휘둘렸고, 그녀의 뜻에 거스르지 않게 행동했다.
1294년 원 성종 즉위 직후, 불루간 카툰에 의해 어머니 다기와 함께 쿠빌라이 가문 혹은 다르마발라의 영지였던 하남의 회주(懐州) 회맹로(懐孟路)로 잠시 추방되었다. 회주에 있을 당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행사와 조세를 폐지하고, 규정을 엄격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감격했다. 다기 카툰은 몽골족의 수계(형사취수)에 따라 남편 다르마발라의 동생 원 성종과 재혼하기로 하였으나, 불루간 대카툰이 반대하였다. 이 일로 다기 카툰과 불루간 대카툰은 갈등하였고, 불루간에게서 아들 테이슈가 태어나자 성종은 아유르바르와다 등을 경계하였다. 1305년 12월 테이슈 태자 출생 직후, 아유르바르와다는 불루간 대카툰에 의해 회주 회맹로(현, 허난 성 회경로)로 다시 추방되었다.
1298년 7월 성종 테무르의 명으로 고려 왕태자 왕선이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고려 태자 왕선은 아유르바르와다, 카이산 형제와 가깝게 지냈다.
2. 2. 1. 정국 혼란
1307년 1월, 성종 테무르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황후 불루간 카툰은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다.[2] 그러나 아난다는 이슬람 신자였고, 몽골 귀족들은 그의 이슬람 신앙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이에 반대하며, 우승상 하라하슨과 협력하여 대도를 장악하고 불루간 카툰과 아난다를 체포했다.[2]몽골 고원에 주둔하던 형 카이샨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아유르바르와다는 섭정 지위를 양보하고 카이샨이 무종으로 즉위했다. 무종은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상서령에 임명하여 조정의 실권을 주었다.
2. 2. 2. 황태제 겸 상서령 시절
아유르바르와다는 형 퀼리그 칸 카이산 아래에서 중서성(최고 중앙 행정 기관)의 수장이 되었다.[2] 그는 유교와 중국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어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중국 회화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3] 유교적 정치 윤리에 영향을 받은 그는 형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3]카이산의 지지자들은 리 멍이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스스로 왕위를 지키라고 조언했다고 비난했지만, 아유르바르와다는 리 멍을 변호했다.[3] 그러나 형의 고위 관리들과의 갈등은 그가 즉위할 때까지 표면화되지 않았다.[3]
카이산은 1311년 1월에 사망했고, 아유르바르와다는 1311년 4월에 형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이는 원나라 역사상 평화롭고 순조로운 권력 승계였다.[4] 이는 1307년의 합의에 따라 카이산이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지명하고, 중서성의 수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4]
2. 3. 섭정으로 조정 장악
1311년 1월, 무종 카이산 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아유르바르와다는 황태제로서 섭정을 맡아 조정을 장악했다.[4] 그는 무종의 측근들을 숙청하고, 이맹 등 한인 출신 유학자들을 등용했다.지대 4년(1311년), 형 카이샨의 죽음과 함께 카안으로 즉위하자마자 대덕 11년 쿠데타에서 활약한 어머니 다기 및 콩기라트파의 중신들이 정권을 잡았다. 카이샨 측근 중신들이 부정 혐의로 추방되어 숙청되면서, 카이샨 시기 재정 우선의 국가 체제가 개정되어 그 중심인 상서성이 폐지되고, 유일한 중앙 행정 관청이 된 중서성의 장관인 우승상에는 다기의 총신 테무데르가 취임했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유교와 중국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어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중국 회화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3] 그는 유교적 정치 윤리의 영향을 받아 형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2. 4. 치세 기간
카이산 사후, 그의 아들들 대신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다. 카이산 치세는 대대로 곤기라트씨 출신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 어머니 다기 카툰이 궁정 내 권력을 장악했다. 다기 카툰은 섭정은 아니었으나,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는 1320년에 끝나고,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시데바라가 계승했다.1310년 상서령 삼보노(三寶奴) 등은 아유르바르와다 대신 무종의 아들 중에서 황태자를 세우라고 상소했다. 삼보로는 황태자 교체를 주장했고, 캉글리 토토는 반대했다. 무종은 삼보로 등의 요구를 현실성이 없다며 거절했고, 이 사건으로 아유르바르와다는 무종의 측근들을 미워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는 형 원 무종의 적극적인 외교 정책에 반대했다. 또한 형 무종 카이산의 측근들과도 갈등하였다. 유교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아유르바르와다는 형 카이산의 세금 인상 정책을 착취 정책으로 보고 반대하였다. 카이산의 측근들은 이맹이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칸위에 오르도록 사주했다고 비난했다. 이맹은 카이산 즉위 후 조정에서 은퇴했다. 그는 어머니 다기 카툰의 뜻을 따랐으나 다기 카툰과 그의 측근 테무데르에게 반감을 품어, 이들과 암암리에 갈등, 대립하였다.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는 한(漢) 문화와 지식인들이 우대받았기 때문에 한인이 편찬한 역사서에서는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원(元) 왕조가 정복 왕조로서 성숙을 보인 시대라고도 한다.
2. 4. 1. 즉위 초
1311년 4월 7일 몽골 왕공족과 부족장 1만 4천 명을 소집, 형식적인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으로 공식 즉위하였다.[5] 연호는 황경(皇慶), 연우(延祐)로 정했다.즉위 직후 아유르바르와다는 원 무종의 측근 5명을 부패 혐의로 처형하고, 중서성 내 카이산 칸의 측근들을 모두 해임하거나 감금했다. 일부 관료들은 고려로 추방되었다.[5] 이맹, 장규(張珪) 등 한인 출신 유학자들을 등용했다.[5]
아유르바르와다는 유교 원칙에 기반한 정부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는 일부 몽골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무종 때 설립된 상서성을 폐지하고 중서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5] 무종 시대의 재정 정책을 개혁하고, 지대은초를 폐지하고 지원초를 다시 발행했다.[6]
쿠빌라이 통치 시절 수준으로 관료제를 정리하고, 새로운 고위직은 축소되었다. 무종의 다양한 공공 건설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6] 농업을 장려하고,[11] 상업과 무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수를 확보하려 했다.[6]
2. 4. 2. 즉위 중반
1311년 형 카이샨이 죽고 카안으로 즉위하자, 대덕 11년 쿠데타에서 활약한 어머니 다기 카툰 및 콩기라트파 중신들이 정권을 잡았다. 카이샨 측근 중신들은 부정 혐의로 추방되어 숙청되었고, 카이샨 시기 재정 우선 국가 체제는 개정되어 그 중심인 상서성이 폐지되었다. 유일한 중앙 행정 관청이 된 중서성의 장관인 우승상에는 다기의 총신 테무데르가 취임했다.[11]테무데르는 카이샨 시기 인플레이션 억제책의 핵심이었던 신 지폐 지대은초를 폐지하고, 쿠빌라이 시기의 지원초로 되돌렸다. 대신 상업세 징수를 강화하는 등 징세 개혁으로 수입 증대를 꾀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는 그대로 미뤄졌다.[11]
1312년, 몽골 목장 관리국을 설치하여 목축업 관리를 강화했다. 『정관정요』를 몽골어로 번역하고, 한자로 된 백과사전 편찬을 지시하는 등 문화 정책을 추진했다.[12] 1313년 주자의 사서, 사서장구집주, 오경 등의 재간행을 명했다. 킵차크 칸국의 내분에 개입하여 토크타 칸의 아들들을 지원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13]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에는 테무데르와 그의 후원자인 황태후 다기의 권세가 카안의 권력을 훨씬 능가하여, 카안의 성지(자르리그)보다 황태후의 의지(우게)가 권위를 가졌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아유르바르와다는 궁정에 틀어박히는 경향을 보였다.[11]
2. 4. 3. 제도 정비와 과거제도 시행
1313년부터 과거 제도 시행을 추진, 1315년 이맹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시험을 부활시켰다. 과거 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로 시행하고, 중서성에서 직접 주관하게 했다.[7] 정동행성에서도 과거를 주관하여 고려인 3명이 선발되기도 했다.쿠빌라이 칸 통치 기간 동안 과거제는 반복적으로 논의되었지만, 시행되지 않았다.[7] 연우 2년(1315년)에 몽골인과 한족 모두 정부에 문관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종별 할당량이 설정된 과거제가 도입되었다. 유망한 공무원을 위한 시험이 도입되어 중요한 역사적 작품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했으며, 같은 해 법원에 300명의 임명이 이루어졌으며, 그 중 4분의 1은 한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주어졌다.[7] 1315년, 한림원에 명하여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 장관, 장군의 전기를 편찬하도록 했다.
2. 4. 4. 후계자 선정 갈등
아유르바르와다는 카이샨이 죽은 뒤, 통치 말년에 자신의 약속을 어기고 1316년에 자신의 아들 시디바라를 황태자로 지명했다.[16]2. 5. 생애 후반
1313년부터 인종은 과거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어떤 이유로 지연되었다. 1314년 인종은 몽골 유목민들에게 2년간 세금과 관세를 면제하고 금주령을 내렸다. 1315년 그의 세금 정책에 반발하여 장쑤 성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1315년 평장사 이맹의 건의로 과거 시험을 시행, 인종이 직접 시험을 주관하였다. 같은 해 과거 시험을 부활하여 각지의 인재를 채용하였는데, 성리학자들이 등용되었다. 이전에도 진사시험은 존재하였으나 대과는 그가 1315년 부활을 선언하면서 다시 시행되었다. 과거 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로 시행하되 중서성에서 직접 주관하게 했고, 정동행성에서도 주관하게 하여 고려인 3백여 명이 응시, 3명의 고려인이 선발되었다.
1315년 인종은 한림원에 명하여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 장관, 장군의 전기를 편찬하도록 명하고 법령으로 공포하였다. 완성된 전기들은 황제의 비밀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또한 인종은 당나라 오정(吳正), 정광국(鄭光國) 등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 유교 고전을 몽골어로 번역하여 몽골인 신하들에게 유교 관료제를 읽어주었다.
1315년 장군 토가치를 보내 일 한국의 올제이투 칸과 전쟁하였다. 2년간의 전쟁 끝에 올제이투 칸으로부터 형식적인 항복을 받아냈다.
1317년 원 무종의 측근 투쿠치가 코실라를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5] 황태후 다기와 권신 테무데르의 전횡에 맞서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4] 1320년 대도 황궁 광천궁에서 사망했다.
2. 5. 1. 태자 책봉 논란과 차가타이 한국의 독립
1316년 초 중서우승상 테무데르는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계속 재촉했지만, 인종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만년에 인종은 형 무종과의 합의를 깨고 자신의 아들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삼으려 시도했다.[10] 1316년 3월 인종은 무종의 아들 쿠살라를 윈난성으로 추방했는데, 일부 신하들은 쿠살라를 추방하는 것은 잘못이라 상소했으나 인종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10]1316년 11월 쿠살라는 연안부(현 산시성 옌안시)로 가서 부황 무종의 측근 군인들과 비밀리에 만났다. 이는 인종에게 그대로 보고되었고, 쿠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고원으로 비밀리에 도주, 은신하다가 차가타이 한국으로 망명했다.[10]
차기 황제위를 위해 인종의 지지자와 옛 무종의 지지자가 대립하는 가운데, 형제들의 지지자들은 지폐로 몽골과 중국의 귀족,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지지자를 매수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인종의 치세 후반 약 500,000장의 대량 지폐 발행으로 이어졌다. 다기 카툰과 옹기라트부가 시데발라의 손을 들어주면서 후계자 선정 대립은 종결되었다.[10]
아유르바르와다는 1316년부터 일 한국의 울제이투와 동맹하여 원나라를 공격한 차가타이 한국의 에센부카 칸에게 대항하였다.[11] 1316년 아유르바르와다는 에센부카를 이식쿨호 근처에서 격파하였고, 에센부카 사후 케벡이 원나라와 화의하였다. 에센부카의 잔당은 1318년에 최종 진압되었다.[11]
인종은 당초 조카들 중 한 사람에게 칸위를 물려주겠다는 퀼리그 칸 카이산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1316년 12월 19일 자신의 아들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고, 차기 칸위를 잇게 하였다.[12]
1316년 12월 시데발라는 자신이 태자로 적합하지 않으며 카이산 칸의 아들 중 한 사람을 태자로 옹립하면 옆에서 잘 보좌하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시데발라의 나이가 어린 점을 들어 다기 카툰과 옹기라트부는 시데발라의 태자 책봉을 지지하였다.[13] 1317년 1월 인종은 태자 시데발라에게 중서령, 상서령, 영추밀원사를 겸직하게 하고 군권을 부여하여 행정권과 군권을 사전에 장악하게 했다.[13]
1316년 12월 테무데르를 태자태사에 임명하자, 어사중승 조세연(趙世延)은 사악한 자를 태자의 사부로 임명하느냐며 탄핵 상소를 올렸다. 옹기라트부 테무데르 일파는 조세연 처벌을 요구했다. 테무데르 일파의 권력남용을 인정한 인종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조세연을 파직, 추방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후 40명의 관리들이 연명상소를 올려 테무데르를 제멋대로 통치하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13]
1316년부터 1318년 차가타이 한국에서 에센 부카가 원나라의 영향력에 반발, 봉기를 일으켰다. 인종은 계속 군사를 보내 작전을 펼쳐, 1318년 에센부카를 최종적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인종 사후, 원나라는 다른 칸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계속된 원나라 황제의 잦은 교체와 궁정의 혼란으로 각 칸국에 내정과 전쟁 문제에 개입, 통제할 능력도 사라졌다.[14]
2. 5. 2. 몽골 부족장의 한화 반대와 최후
1317년 무종의 측근 투쿠치가 코실라를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5] 황태후 다기와 권신 테무데르의 전횡에 맞서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4] 1320년 대도 황궁 광천궁에서 사망했다.3. 사후
아유르바르와다는 1320년 3월 1일에 사망했다.[16] 그의 아들 시디바라는 영종으로 즉위했으나, 3년 뒤 암살당했다. 영종의 암살로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이후 원나라는 20년간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고, 콩기라트 세력은 조정에서 더욱 강력해졌다.
4. 가족 관계
- 조부: 추존 황제 유종 진킴
- 조모: 추존 황후 휘인유성황후 콩기라트씨
- 아버지: 추존 황제 순종 다루마바라
- 어머니: 추존 황후 소헌원성황후 옹기라트씨
《원사》 권106 표1 황후표에는 후비 2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아래 두 사람은 황후표에 나타나지 않는다.
; 아들
# 황태자 시데발라 - 장의자성황후 소생. 대원의 제9대 카안 영종.
# 안왕 올도사불화 (兀都思不花, ? ~ 1321년) - 나중에 순양왕으로 강등. 일설에는 고려인 김씨 소생
; 딸
# 노국공주 활활륜(闊闊倫) - 옹기라트부 데이 세첸의 후손 탈라화(脫羅禾, 도르벤)에게 하가.
# 변국공주 - 요절함.
그에게는 세 명의 배필이 있었고, 그중 두 명만이 아들을 낳았다.
# 라드나시리 카툰 (1322년 사망) - 콩기라드 부족 출신
#* 시디발라, 훗날 게겐 칸
# 다르마시리 카툰[17] - 한국 출신, 김씨
#* 우두스 부카, 안왕 (1315년부터), 순양왕 (1320년부터)
# 바얀 쿠투그 카툰(伯顔忽篤皇后|바얀 쿠투그 황후중국어) - 한국 출신, 왕씨
그는 또한 쾨켈룬 공주라는 딸을 두었는데, 그녀는 다이 세첸의 후손이자 보르테의 아버지인 콩기라드 부족의 지도자인 두오루벤 큐르겐과 결혼했다.
5. 기년
1312년부터 1320년까지 사용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
인종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
서력 (西曆) | 1312년 | 1313년 | 1314년 | 1315년 | 1316년 | 1317년 | 1318년 | 1319년 | 1320년 |
간지 (干支) | 임자(壬子) | 계축(癸丑) | 갑인(甲寅) | 을묘(乙卯) | 병진(丙辰) | 정사(丁巳) | 무오(戊午) | 기미(己未) | 경신(庚申) |
연호 (年號) | 황경(皇慶) 원년 | 2년 | 3년 연우(延祐)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3월 23일 기련곡에 장사하였다. 몽골식 존호는 부얀투 칸이다. 부얀투란 중세 몽골어로 선자(善者), 복자(福者), 또는 유덕하다, 덕이 있다는 뜻이다. 그가 죽자 다기 카툰은 다시 테무데르를 승상으로 임명하여 조정에 복귀시켰다. 그는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근면한 군주로 여겨졌다.
1320년 아들 시데발라가 영종으로 즉위했으나, 시데발라가 고분고분하지 않자 옹기라트부는 안왕(安王) 우투시부카(兀都思不花)를 추대하려 했고, 영종은 우투시부카 지지 세력과 우투시부카를 처형했다. 3년 뒤 영종도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시데발라와 우투시부카 이외에 다른 자손의 존재 여부는 불분명하다.
1322년 11월 1일에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카말라의 후손을 지지하는 몽골고원 세력과, 그의 형 카이산의 아들들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알력이 발생, 몽골고원 세력이 정쟁에서 승리하고 예순 테무르가 칸위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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