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무종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원 무종은 원나라의 제7대 황제이다. 다르마발라의 아들로, 1281년에 태어나 1311년에 사망했다. 몽골 고원에서 군사적 공을 세워 회녕왕에 봉해졌으며, 1307년 황위에 올라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임명했다. 재위 기간 동안 재정난을 겪었으며, 지폐 발행, 상서성 부활 등의 정책을 추진했지만, 인플레이션 억제에 실패했다. 1311년 급사 후 아유르바르와다가 즉위하면서 그의 측근들이 숙청되었고, 그의 아들들은 황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11년 사망 - 피에트로 그라데니고
- 1311년 사망 - 인후
인후는 고려 시대 인물로, 인승광과 인승단이라는 아들과 원선장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 1281년 출생 - 유리 3세
유리 3세는 모스크바 공국의 다닐 알렉산드로비치의 아들이자 이반 1세의 형으로, 1303년 모스크바 공작이 되어 트베리 공 미하일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1318년부터 1322년까지 블라디미르 대공을 역임하며 금장 칸국과의 외교를 통해 모스크바 공국의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루스 공국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 1281년 출생 - 루돌프 1세 (보헤미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루돌프 1세는 독일 왕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로, 1306년부터 1307년까지 보헤미아 왕으로 재위했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짧고 혼란스러운 통치를 마쳤으며, 그의 죽음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헤미아 왕위 획득 시도를 좌절시키고 왕국 내 혼란을 야기했다. - 원나라의 황제 - 원 혜종
원 혜종은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이자 북원의 초대 대칸으로, 권신들의 발호와 홍건적의 난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명나라에 의해 대도를 빼앗기고 북원을 건국하여 저항하다 사망했으며, 고려 출신 기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 원나라의 황제 - 원 명종
원 명종은 무종 카이산의 아들로, 킵차크 군벌 엘 테무르의 지지를 받아 동생으로부터 제위를 양보받아 원나라의 제9대 황제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죽음은 원나라 말기 군벌 정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천력의 내란'을 야기했다.
원 무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제7대 몽골 제국의 카안(명목상, 제국의 분할로 인해) 중국 황제(제3대 원나라 황제) |
전체 이름 | 몽골어: "카이산" "하이산" |
칸호 | 쿨룩 칸 (; ) |
묘호 | 무종(武宗) |
시호 | 인혜선효황제(仁惠宣孝皇帝) |
연호 | 지대(至大) 1308–1311 |
통치 | |
즉위 | 1307년 6월 21일 |
퇴위 | 1311년 1월 27일 |
대관식 | 1307년 6월 21일 |
이전 통치자 | 테무르 칸 |
다음 통치자 | 아유르바르와다 부얀투 칸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281년 8월 4일 |
출생지 | 칸발리크, 원나라 |
사망일 | 1311년 1월 27일 (29세) |
사망지 | 칸발리크, 원나라 |
배우자 | |}} |
왕가 | 보르지긴 |
왕조 | 원나라 |
아버지 | 다르마발라 |
어머니 | 다기 카툰 |
종교 | 불교 |
2. 생애
카이산은 옹기라트 부족 출신 다르마발라[1]와 다기 카툰의 장남이자 아유르바르와다의 친형제였다. 1299년 몽골 고원으로 파견되어 카이두 등 중앙아시아 왕자들에 맞서 원나라의 서쪽 전선을 방어하는 군대를 맡았다. 1301년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1304년 회녕왕(懷寧王)에 봉해졌다. 1306년 알타이 산맥에서 멜리게 테무르를 항복시키는 등 군사적 업적을 통해 몽골 왕자들과 비몽골 군단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삼촌 테무르 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주요 후보로 여겨졌다.
1307년 테무르가 사망하자 카이산은 카라코룸에서 정세를 엿보았다. 테무르의 황후 불간은 아난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콩기라트파 중신들은 아유르바르와다를 대도로 불러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카이산은 군대를 이끌고 상도로 가서 동생에게 양위를 받고 1307년 6월 21일 제7대 카안으로 즉위했다.
카이산은 즉위 과정에서의 내분으로 인해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세우고, 어머니 다기를 황태후로 세우는 등 왕족과 몽골 귀족들에게 많은 상을 내려 인기를 얻었다. 1308년에는 차가타이 울루스, 조치 울루스, 일 칸국의 당주들에게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세시(歳賜) 증가와 외정으로 인한 군사비는 원나라 재정에 부담을 주었고, 조정은 재정 혼란에 시달렸다. 카이산은 상서성을 부활시키고 전매제를 강화하는 한편, 신지폐 지대 은초(至大銀鈔)를 발행하여 인플레이션 억제를 시도했다. 또한 건설을 시작했다.[18] 그러나 카이산의 치세가 짧아 정책들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한족 민중과 관료들의 불만을 샀다.
카이산은 고원 주둔군 시절 측근들을 고위직에 기용하고 킵차크 친위군 등 비몽골계 친위군을 총애했지만, 아유르바르와다의 쿠데타를 도운 콩기라트파 중신들에게는 보답이 적어 불만을 샀다.
1311년 카이산은 30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아유르바르와다가 즉위하자 콩기라트파는 카이산파 중신들을 추방했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카이산의 아들을 카안으로 한다는 약속을 어겼고, 카이산의 장남 코실라는 추방되었다. 킵차크 친위군 등은 1328년 카이산의 차남 토크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불만을 품게 되었다.
2. 1. 생애 초반
1281년 8월 4일 카이산은 원나라 대도(칸발리크) 황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태자 다르마발라였고, 어머니는 옹기라트 씨족 출신의 다기 카툰이었다.[1] 동생으로 아유르바르와다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는 아목가가 있었다. 카이산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한자 이름으로 산과 바다라는 뜻이며, 중세 몽골어로는 성곽과 담장, 벽을 의미한다.카이산이 태어났을 때 증조부 쿠빌라이 카안과 증조모 소예순성황후 차브이, 할아버지 명효태자 친킴이 살아 있었다. 아버지 다르마발라는 카이산이 태어난 직후 잠시 고려 제주도의 원나라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285년 할아버지 친킴 태자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자, 아버지 다르마발라가 황태자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다르마발라는 1292년 병으로 대도에서 사망했고, 황태자위는 카이산의 삼촌 테무르에게 넘어갔다.
카이산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 신자였다.[19] 1286년부터 서하 출신 가타푸지(乞台普济)가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의 교육을 담당했다. 위구르계 출신 아시테무르(阿失帖木兒) 등도 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1289년 카이산은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가 쳐들어오자 몽골 고원에서 교전하다 대패했다. 카이산은 카이두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킵차크 한국 출신 투투그와 그의 아들 엘 테무르의 도움으로 카이두 군대를 격파하고 탈출했다.[19]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고, 테무르가 즉위했다. 원 성종 즉위 직후, 아유르바르와다는 불루간에 의해 어머니 다기와 함께 회맹로(懐孟路)로 추방되었다. 1298년 7월 원 성종의 명으로 고려 왕태자 왕선이 원나라로 소환되었고, 왕선은 카이산, 아유르바르와다 형제와 가깝게 지냈다.
1299년 카이산은 몽골 고원으로 파견되어 킵차크 친위군을 중심으로 하는 원나라 고원 주둔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 1301년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두 군을 패배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1304년 회녕왕(懷寧王)에 봉해졌고, 1306년 알타이 산맥 방면에서 아리크 뵈케[2]의 아들 멜리게 테무르를 항복시키는 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
2. 2. 군사 활동
1299년, 원 성종의 명으로 카이산은 몽골 고원 지역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 등과 여러 차례 교전하며 군사적 역량을 강화했다. 1301년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두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인해 카이두는 사망했다.[19] 1306년에는 알타이 산맥 방면까지 침공하여 멜리크 테무르를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공로로 1304년 회령왕(懐寧王)에 봉해졌다.2. 2. 1. 카이두와의 전쟁
1289년 카이산은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가 쳐들어오자 몽골고원에서 카이두와 교전하다가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으나, 킵차크 한국 출신 투투그에 의해 구출되어 다시 카이두와 교전, 엘 테무르의 도움으로 카이두 군대를 격파했다.[19]1299년 카이산은 원 성종의 명으로 몽골 막북 고원의 군대 총사령관(총병막북)이 되었고, 그해 코코추를 대신하여 기갑부대를 이끌고 북변에서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 등과 교전하였다. 1300년 카이두, 두아, 메리크 테무르 등이 카라코룸을 공격하자, 원 성종의 명으로 군사를 이끌고 카말라를 지원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같은 해 8월 카이두가 카바르(闊別列)를 침공하자 몽골고원에서 교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해 겨울 알타이산맥에서 카이두군과 교전, 알타이산맥 동쪽의 8개 부족장과 12월 안태산(按台山) 지방의 나이만부족이 카이산에게 투항하였다.
1301년 카이두와 두아가 몽골고원 서부를 침공하자, 카이산은 군대를 이끌고 교전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1301년 8월 카이두는 두아와 함께 다시 쳐들어왔다. 테케리크 전투(鐵堅古)의 첫 전투에서 카이산은 카이두에게 패배하였으나, 삼촌 진왕 카말라의 지원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틀 뒤, 카이두가 다시 몽골고원으로 가 카차카르를 공격하자, 카이산은 추격하여 교전했다. 이때 왕사 시리(失利)와 카이산은 직접 카이두에게 시석을 던졌다. 성종의 부마 쾨르키즈가 카이두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됐으나, 다음날 카이산은 왕사 시리와 함께 5개의 부대를 나누어 흩어져서 카이두를 공격, 카이두가 머무르고 있는 막사를 직접 급습, 공격했다. 이때 카이산은 카이두의 뺨을 화살로 맞추었다. 이 전투에서 카이두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카이두는 이때 얻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퇴각하여 그해 9월 혹은 이듬해 8월에 사망한다.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함께 활약한 캉글리 톡토(康里 脫脫)를 비롯한 원나라의 장군들은 후일 카이산의 측근세력을 형성한다.
2. 2. 2. 차파르, 두아와의 전투
1303년 오고타이 칸국의 차파르와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가 교전하자, 카이산은 원 성종의 명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알타이 산맥으로 가 두아를 지원했다.[20] 1304년 겨울, 차파르의 부하 도규(禿曲)의 침공을 격퇴했다.1306년 카이산은 알타이 산맥 방면까지 침공한 아리크 부카의 차남 멜리크 테무르를 사로잡았다.[20] 같은 해 7월, 오고타이 한국의 장군이자 차파르 칸의 동생 오로스(斡羅思)를 추격하여 알타이 산맥의 타쿠사켄(脫忽思圈)에서 그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8월에는 지야릭적실(至也里的失)에서 투만(禿滿), 멜리크 테무르, 아루타이(阿魯灰) 등 왕족 장군들이 카이산에게 투항하였다.
2. 3. 혼란과 즉위
1307년 테무르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황위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성종의 황후 불루간 카툰은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으나, 카이산과 그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는 이에 반대했다.[3] 아유르바르와다는 군대를 이끌고 대도로 진군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불루간과 아난다를 제거했다. 카이산은 3만 군대를 이끌고 상도로 이동, 아유르바르와다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4]아난다는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자신의 영지 내에서 남자아이들에게 할례를 권장했다. 이 일로 몽골 귀족들은 아난다를 싫어하게 되었다. 카이산은 자신이 몽골고원 가까이에서 외부의 침략을 잘 방어한 점을 강조하고 자신이 대칸이 되어야 함을 몽골 귀족들을 상대로 역설하였다.
다르칸 하르가순, 차가타이 칸의 증손자인 투라, 그리고 툴루이의 후손인 야쿠투는 다르마발라의 아들들을 지지하며 그들과 대립했다. 다르마발라 지지 세력은 쿠데타로 아난다와 불루간을 체포하고, 허난에서 아이유르바르와다와 다기 카툰을 소환했다. 그 후 카이산은 그의 증조부 쿠빌라이 칸과 마찬가지로 상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하고 몽골에서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황위를 포기한 아이유르바르와다의 환영을 받았으며, 즉위 전에 아난다와 불루간을 처형한 후 황위에 올랐다. 아리크 뵈케의 아들 멜리크 테무르도 아난다를 지지한 혐의로 처형되었다.[4]
1307년 6월 21일 상도에서 열린 카이산의 즉위는 쿠릴타이에서 정식으로 거행되었다. 그 후 그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삼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교대로 황위를 계승하겠다고 약속했다.
2. 4. 즉위 이후
1307년 6월 21일 대도 대안각(大安閣)에서 황제로 즉위한 카이산은 즉위 과정에서 내분을 겪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어머니 다기 카툰을 황태후로 존숭하는 등 몽골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아버지 다르마발라를 순종 소성연효황제로 추존했다.[21]카이산은 투르크계 군인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이들을 군 요직에 발탁했으며, 킵차크인 친위부대를 비롯한 비몽골계 친위군을 총애했다. 그러나 아유르바르와다의 정변을 도운 옹기라트부 중신들에게는 별다른 보상을 하지 않아 불만을 샀다.
1307년 8월 17일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추가하고,[23] 유학자들에게 명하여 공자의 저서 효경을 몽골어로 번역, 간행하게 했다. 불교를 장려하여 티베트 불교 서적을 한자와 몽골어로 번역하게 하고, 불교 사찰 건립을 지원했다.
1308년 5월 칙령을 내려 백련교를 금지했다.[24]
1308년 우승상 하르하순이 사망한 이후 조정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었다. 잦은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조치로 국고가 탕진되었음에도, 몽골 귀족들에게는 계속해서 많은 돈이 지급되었다.[24]
1309년 9월, 상서성 좌승상 삼보로를 시켜 지대은 또는 지대은초(至大銀鈔)라는 지폐를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4] 1310년에는 몽골 문자로 된 구리 동전 발행을 지시하였으나[26][27][28] 이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310년 옹기라트부 출신 툴라의 아들 코케추가 황제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지만 발각되어 고려로 유배되었다.[11]
2. 4. 1. 즉위 초
1307년 6월 21일 다기 카툰 등의 주관하에 대도 대안각(大安閣)에서 형식적인 쿠릴타이를 열고 카이산이 황제로 즉위했다.[21] 즉위 직후 아난다, 불루간 카툰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였다. 메리크 테무르 역시 아난다를 지원한 혐의로 처형되었다.[21] 카이산은 즉위 기념으로 암말 7마리와 흰 양 7천 마리의 젖을 토지에 바쳤고, 말 40마리와 양 4천 마리를 신에게 제물로 바쳤으며, 즉위 직후 7일간 기념 축제를 열었다.퀼리그 칸 카이산은 즉위 과정에서 내분을 경험하여, 6월 29일 아들들 대신 동생 아유르바르와다(후일의 원 인종)를 황태자로 세우고 어머니 다기를 황태후로 책봉하고 흥성(興聖)의 존호를 올렸다. 또한, 몽골 왕실의 여러 왕과 몽골 귀족들에게 하사은금을 남발하여 왕족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아버지 다르마발라를 순종 소성연효황제로 추서했다. 카이산은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는 대신, 차기 황태자는 카이산의 아들들 중에서 정한다는 조건을 제시했고[22], 아유르바르와다는 이를 수락했다.
6월 29일 무종은 다르하이를 중서우승상으로, 다슈부카를 좌승상으로 임명했다. 이때 모후 다기 카툰은 자신의 측근인 테무데르를 소환해 재상으로 등용하려 하였다. 운남지역에서 근무 중이던 테무데르는 근무를 게을리하여 직무태만으로 처벌받을 위기에 몰렸으나 다기 카툰이 압력을 넣어 처벌하지 못했고, 도리어 테무데르를 발탁해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무종은 투르크계 군인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이들을 군대 내 요직에 발탁하여 자신의 지지 세력 겸 친위세력으로 확보해두었다. 또한 정예부대인 킵차크인 친위부대를 비롯해 아스트부 출신, 캉글리부 출신 군대 등의 비몽고계 친위군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의 정변을 도와준 옹기라트부 중신에게는 별로 보상을 하지 않아, 옹기라트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유학자 이맹(李孟)의 자문을 받았지만, 유교를 신봉하지는 않았다. 즉위 직후 유학자들에게 명하여 공자의 저서 중 효경을 몽골어로 번역, 간행하게 하고, 효, 효심에 대한 주제를 찾아 역시 몽골어로 번역, 간행하게 했다. 카이산은 불교 사찰을 짓는데도 지원, 투자하였다. 카이산은 불교를 장려하여, 티베트 라마 체지오세르에게 티베트 불교 서적을 한자와 몽골어로 번역하게 했다. 또한 친히 명을 내려 소금 판매 권한을 조정에서 독점하고, 1310년 무렵에는 소금 판매액에 세금 35%를 인상했다. 1307년 8월 17일 무종은 공자에게 지성문선왕(至圣文宣王)의 시호를 추가하여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이 되었다.
1307년 가을 당시 20,000톤 이상의 쌀이 수확되어 국고에 저장되었다.[23]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무종은 관리들의 수를 파악하고, 녹봉 지출이 많다고 생각해서 원 성종대에 발탁된 관료들 일부를 해고하려 했지만, 어떤 이유로 실패하였다. 관리들 해고 계획이 실패한 원인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해부터 무종은 친히 명을 내려, 대도와 중도(현 허베이 성 장베이 시)에 있는 궁궐을 개보수, 증축하였다. 그는 중서성에는 행정, 정치 사무를, 상서성에는 재정 업무를 분장하여 전담하게 했다.
카이산 즉위 직후, 공자의 저술 중 하나인 효경이 몽골어로 번역되어 제국 전역에 배포되었다. 그는 즉위식에 참석한 왕족과 관료들에게 이전 황제가 정한 액수에 따라 많은 선물을 하사했다. 또한 다두와 상두에 불교 사원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자금이 사용되었다. 옛 현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새로운 칭호가 내려졌으며, 그의 칭호에 '대청(Da Qing)'이라는 글자가 추가되었다.
2. 4. 2. 치세 중반
1308년 우승상 하르하순이 사망한 이후, 조정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었다. 무종의 치세 기간 동안 지속된 가뭄과 잦은 기근으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쌀 분배와 재난 구호 조치로 국고가 점차 탕진되었다. 그럼에도 몽골 귀족들의 축제는 제한되지 않았고, 수천 금의 돈이 계속해서 지급되었다.[24]무종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서성을 부활시켜 태자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상서령을 겸직하게 했다. 상서성은 재정과 재무를, 중서성은 인사와 행정을 담당하도록 했다. 또한 각 행성의 행중서성을 행상서성으로 고쳐 운영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계획은 적절한 결과를 얻지 못했고, 한족 관료와 평민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5]
무종은 1310년 구리 동전 두 종류를 주조했는데, 여기에는 몽골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부는 '지대 시대의 귀중한 돈', 다른 일부는 '대원 제국의 귀중한 돈'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구리 동전은 세 가지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1리는 1 리, 2리는 10 리, 3리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동전 여러 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다.[10]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종의 궁정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예를 들어, 1307년의 총 정부 지출은 지폐 1천만 팅과 곡물 3백만 단이었다. 1310년까지, 10,603,100 팅이 경상 지출을 위해 준비금에서 빌려졌다.[11] 결국 무종은 과도한 선물 지급과 불교 사원 건립에 많은 재정을 투입하여 재정난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2. 4. 3. 내정 활동
카이산은 즉위 직후 유학자 이맹(李孟)의 자문을 받았지만, 유교를 신봉하지는 않았다. 1307년 8월 17일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추가했다.[23] 그는 티베트 불교를 장려하여 티베트 라마 체지오세르에게 티베트 불교 서적을 한자와 몽골어로 번역하게 했다. 또한 문맹 퇴치를 선언하고, 티베트어와 위구르어로 된 불교 서적을 몽골어와 한자로 번역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초이지 오데세르는 티베트어로 된 불교 서적을 몽골어로 번역하고, 위구르 몽골어 문자를 수정하고 연구, 개선을 추진하였다.1308년 5월 칙령을 내려 백련교를 금지했다.[24]
카이산은 불교 사찰을 짓는 데도 지원, 투자하였다. 많은 돈을 불교 사원 건설에 하사하였다. 카이산 즉위 직후, 공자의 저술 중 하나인 효경이 몽골어로 번역되어 제국 전역에 배포되었다. 그는 즉위식에 참석한 왕족과 관료들에게 많은 선물을 하사했다. 또한 다두와 상두에 불교 사원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자금이 사용되었다.
카이산은 킵차크 한국, 아수드, 캉글리 인사를 영입하였고, 몽골고원에 주둔하며 카이두와 교전했던 장군들과 몽골족, 킵차크족, 알란족, 캉글리족 인사들을 채용하여 배치하였다. 1307년 당시 20,000톤 이상의 쌀이 수확되어 국고에 저장시켰다.[23] 그해 무종은 관리들의 수를 파악하고, 녹봉 지출이 많다고 생각해서 원 성종대에 발탁된 관료들 일부를 해고하려 했지만, 어떤 이유로 실패하였다.
그는 중서성에는 행정, 정치 사무를, 상서성에는 재정 업무를 분장하여 전담하게 했다. 무종은 상서성을 부활시켜 태자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상서령을 겸직하게 했다. 상서성에서는 재정, 재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서성에서는 인사, 행정을 관할하게 했다. 또한 각 행성의 행중서성을 행상서성으로 고쳐서 운영하게 했다.
1308년 우승상 하르하순이 병사하였다. 이후 조정의 재정 상황은 악화된다. 무종의 치세기간 중 계속 가뭄이 발생했고, 잦은 기근이 일어났다. 그는 칙령을 내려 쌀을 분배하고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을 구제했다. 그러나 계속된 가뭄으로 국고는 점차 탕진되었다. 1308년 중서성 우승상에 어머니 다기 카툰의 측근 테무데르를 임명하고, 좌승상에 야르간을 임명했다. 어느 관리가 정부의 지출량이 과다한 것 같다고 진언했다가 무종의 분노를 사서 처형되기도 했다.[24]
그는 재정 악화를 극복하고자 1309년 9월 상서성좌승상 삼보로(三寶奴)를 시켜 지대은 또는 지대은초(至大銀鈔)라는 지폐를 발행, 각 로와 주, 현 등에 지역 상평창을 통해 유통시켰다. 또한 칙령을 내려 중서성에 치중된 정무 권한을 일부 분장하여 상서성에 업무를 분배하였다. 그러나 그의 경기 부양 정책은 별 효력이 없었고, 중국계 장교들과 하급관료, 일반 시민들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그는 새로운 은화를 발행하려 하였으나, 중원 백성들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인플레이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카이산의 행정부는 지역에 곡물 창고를 설치하고 장강에서 곡물의 해상 운송 할당량을 대폭 늘려 1310년 290만시로 늘렸다.[25] 또한 소금 인허가와 소금 상인에게 세금을 35% 인상하여 물렸고, 부유한 농가에는 쌀 생산량에도 2%의 할증 세금을 더 붙였다. 1310년 원 무종은 생각을 바꾸어 몽골어로 된 구리 동전 발행을 지시하였다.[26][27][28]
2. 4. 4. 통치 후반
1309년 9월, 상서성 좌승상 삼보로(三寶奴)를 시켜 지대은 또는 지대은초(至大銀鈔)라는 지폐를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4] 그는 새로운 은화를 발행하려 했으나, 중원 백성들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5]1310년 원 무종은 몽골어 구리 동전 발행을 지시하였다.[26][27][28] 이 구리 동전은 세 가지 크기로 제작되었다. 1리는 1리의 가치, 2리는 10리의 가치, 3리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동전 여러 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다.[10]
옹기라트부 출신 툴라의 아들 코케추는 1310년 고위 궁정 관료 및 불교 승려들과 함께 황제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승려들은 처형되었고, 코케추는 고려로 유배되었다.[11]
2. 5. 질병과 최후
무종은 평소 라마교에 심취하였으며, 종종 과음과 알코올 의존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1311년 1월 27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대도 옥덕전(玉德殿)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29] 사인은 알코올 중독으로 추정되나, 일각에서는 어머니 다기 카툰과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의 암살설을 제기하기도 한다.무종 사후, 동생 황태제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다. 아유르바르와다가 즉위하자마자, 콩기라트 세력은 어머니 다기의 지휘 아래 뭉쳐 친 무종 관료들을 숙청했다. 또한, 아유르바르와다는 무종의 아들을 황태자로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쿠살라와 투그 테무르 형제를 중앙 정부에서 내쫓았다.[14]
3. 사후
1311년 1월 카이산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인혜선효황제(仁惠宣孝皇帝)라는 시호와 무종(武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몽골식 존칭은 쿨룩 황제(曲律皇帝)이다.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황위를 계승했으나, 카이산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아들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로 인해 카이산의 아들들은 황위 계승에서 배제되었고, 훗날 1328년 천력의 난을 통해 카이산의 아들들이 황위에 오르게 된다.
4. 가족 관계
- 조부 : 추존황제 유종
- 조모 : 추존황후 휘인유성황후 콩기라트씨
- 아버지 : 추존황제 순종 다루마바라
- 어머니 : 추존황후 소헌원성황후 콩기라트씨
4. 1. 후비

'''진가'''(真哥중국어)황후 콩기라트씨는 원 무종의 정궁황후로, 1310년부터 1311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계비 차브이 카툰의 아버지 안진의 손자 병불랄(迸不剌)의 딸이며, 1327년 원 태정제가 선자혜성황후(宣慈惠聖皇后)의 시호를 추증했다.[21]
'''速哥失里중국어 황후''' 콩기라트씨는 쿠빌라이 칸의 계비 차브이 카툰의 아버지 안진(按陳)의 손자 또는 질손 하라지(哈兒只 Харжи)의 딸이다. 선자혜성황후 콩기라트 진가와는 4촌 또는 6촌 자매간이다.[22]
'''이키레스 비자'''(亦乞烈妃子중국어)는 명종 코실라의 생모이다. 안서왕 망갈라의 딸 노울륜공주(奴兀倫公主)의 딸이며, 1329년 명종 즉위 후에 인헌장성황후(仁獻莊聖皇后)로 추존되었다.
'''탕구트 비자'''(唐兀妃子중국어)는 문종 투그테무르의 생모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325년에 사망했으며, 1329년 문종 즉위 후에 문헌소성황후(文獻昭聖皇后)로 추존되었다.
『원사』 권106 표1 후비 표에는 3명의 황후와 2명의 측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름 | 출신 부족 | 비고 |
---|---|---|
真哥중국어 | 콩기라트부 | 불블라(迸不剌)의 딸. 1327년 사망. |
速哥失里중국어 | 콩기라트부 | 카르지(哈児只)의 딸. 진게 황후의 사촌. |
올제이테이(完者(歹)중국어) | 출신 부족, 출자 등의 기록 없음 | |
亦乞列思중국어 씨 | 이키레스 부 | 노올룬 공주를 어머니로 둠. |
唐兀중국어 씨 | 탕구트 부 |
4. 2. 자녀
wikitext참조
[1]
웹사이트
元史/卷115
http://zh.wikisource[...]
[2]
서적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3]
서적
Xin Yuanshi
[4]
서적
The Mongols: A History
[5]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6]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7]
뉴스
A lost capital haunted by ghosts and history
https://www.chinadai[...]
China Daily
2020-05-11
[8]
서적
Biran, Grousset
[9]
서적
The Conquest of Ainu Lands
[10]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to the 19th century. Part I. the Mongols Proper and the Kalmyks
https://books.google[...]
Longmans, Green, and co.
[11]
서적
Yuan shi
[12]
서적
Yuan Shi
[13]
서적
Economic structure of the Yuan Dynasty
[1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15]
문서
駿馬のカアン、英雄のカアン
[16]
문서
城壁
[17]
웹사이트
Khayishan, Külüg Khan of Mongol Empire & Emperor Wuzong of Yuan China
https://www.geni.com[...]
[18]
웹사이트
700年前に栄えた村 元代中都遺跡
http://japanese.chin[...]
中国網
2018-01-25
[19]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Cambridge Universitety Press
[20]
서적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21]
서적
The Mongols: A History
[22]
서적
The Mongols : A History
[23]
서적
Монголын Их Юань улсын түүх
[24]
서적
Монголын Их Юань улсын түүх
[25]
서적
Economic structure of the Yuan Dynasty
[26]
서적
История Монголов: от 9-го до 19-го века. Часть I. Монголы и Калмыки
http://books.google.[...]
Longmans, Green, and co.
[27]
서적
Юань ши
[28]
서적
Экономическая структура династии Юань
[29]
서적
Кембриджская история Китая: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