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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2세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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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2세는 1087년부터 1100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노르만 왕조의 왕이다. 윌리엄 1세의 아들로 태어나, 형 로베르 2세와 노르망디를 두고 갈등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 그는 또한 교회와 갈등을 겪었고,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름과의 서임권 다툼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1100년 사냥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사후 왕위는 동생 헨리 1세에게 넘어갔다. 윌리엄 2세는 유능한 군주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인기가 없었고, 동성애 의혹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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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2세 (잉글랜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매튜 파리스의
매튜 파리스의 "히스토리아 앙글로룸"의 미니어처, 1253년경
이름윌리엄 2세
로마자 표기Williame
별칭루푸스
별칭 (영어)the Red
재위1087년 9월 26일 – 1100년 8월 2일
즉위1087년 9월 26일
즉위 장소윈체스터 대성당
선왕윌리엄 1세
후왕헨리 1세
왕가노르망디
아버지윌리엄 1세
어머니마틸다 드 플랑드르
출생1057년경
출생지노르망디 공국
사망일1100년 8월 2일
사망 장소뉴포레스트, 햄프셔, 잉글랜드
매장지윈체스터 대성당
추가 정보
참고윌리엄 롱소드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

2. 초기 활동

윌리엄 2세는 1060년 이전에 윌리엄 정복자와 플랑드르의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다. 1087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지만, 형 로베르는 노르망디를 상속받았다.[7]

윌리엄 2세에게는 아델라, 세실리아, 아가타, 콘스탄스 등 네 명의 누이가 있었다.[8]

윌리엄 1세의 세 아들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르데릭 비탈리스는 1077년이나 1078년 윌리엄과 헨리가 형 로베르에게 장난을 쳐서 싸움이 일어났고, 아버지가 개입하여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고 기록했다.

12세기 윌리엄 말메즈베리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윌리엄 루퍼스는 체격이 좋고, 안색이 좋았으며, 금발이었고, 얼굴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눈 색깔이 달랐고, 키는 크지 않았지만 힘이 셌고, 배가 약간 나왔다고 한다.[9]

2. 1. 출생과 가족 관계

윌리엄 2세는 1056년에서 1060년 사이에 윌리엄 1세와 플랑드르의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다.[52] 형제로는 로베르 2세와 리처드, 동생으로는 헨리 1세가 있었다. 리처드는 1075년경 뉴포레스트에서 사냥 중 사망했다.[7]

윌리엄 2세에게는 다섯이나 여섯 명의 누이가 있었다. 아델라이자와 마틸다의 존재는 확실하지 않지만, 네 명의 누이의 존재는 더 확실하게 증명된다.[8]

  • 아델 드 노르망디: 블루아의 스테판과 결혼했다.
  • 세실 드 노르망디: 수녀가 되었다.
  • : 결혼하지 않고 사망했다.
  • 콘스탄스 드 노르망디: 브르타뉴 공작 알란 4세와 결혼했다.[53]


기록에 따르면 윌리엄 1세의 세 아들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윌리엄의 동시대인이자 역사가인 는 1077년이나 1078년 노르망디의 라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기록했다. 윌리엄과 헨리는 주사위 놀이에 지쳐서 위층에서 형 로베르에게 밤용변기를 비우는 장난을 쳤고, 이로 인해 로베르는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꼈다. 싸움이 일어났고, 아버지가 개입하여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54]

2. 2. 즉위와 초기 통치

윌리엄 1세가 1087년에 사망하자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고, 그의 형 로베르 2세는 노르망디 공작령을 상속받았다.[49] 윌리엄 2세는 1087년 9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하였다.[49]

윌리엄 1세 사후 잉글랜드로 이주해왔던 노르만 영주들은 윌리엄 1세의 이복동생인 바이외의 오도를 중심으로 1088년 로베르 2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10] 그러나 로베르 2세가 잉글랜드에 나타나지 못하자,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인들의 지지를 얻어 이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보했다.[10] 1091년 윌리엄 2세는 노르망디를 침략해 로베르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영토 일부를 할양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화해했다.[10]

잉글랜드와 노르망디가 분할되면서, 영국 해협 양쪽에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두 군주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다.[10] 이들은 1088년 반란을 일으켜 윌리엄 2세에 대항해 로베르 2세를 지지했다.[11]

윌리엄 2세는 서임권 투쟁 시기에도 노르망디의 전통에 따라 임명권을 행사했다.[12] 왕의 행정과 법은 왕국을 통합하여 교황의 비난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만들었다.[12]

3.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통치

윌리엄 정복왕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노르망디 공국잉글랜드 왕국을 분할 상속했는데, 이 때문에 노르망디와 잉글랜드 양쪽에 영토를 가진 귀족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윌리엄 2세와 로베르 쿠르트뇌즈 공작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므로, 양쪽에 아첨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56]

윌리엄 2세는 왕국 통치를 안정시켰다.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주교와 수도원장이 봉건적 의무를 통해 왕과 강하게 결합했고, 노르망디의 전통에 기반한 국왕에 의한 서임 행위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당시 유럽에서는 서임권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별로 문제시되지 않았다.

대외 관계에서 윌리엄 왕의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1091년 스코틀랜드 왕맬컴 3세를 굴복시켰고, 1092년에는 카라일 성을 건설하고 컴벌랜드 지방과 지방을 지배했다.[57] 이후 맬컴 왕은 다시 잉글랜드 왕국을 침공하여 노섬브리아를 약탈했으나, 1093년 11월 13일 알닉 전투에서 패배하여 맬컴 왕과 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는 전사했다. 윌리엄 왕은 맬컴 왕의 아들들을 지원하여 스코틀랜드 왕위를 잇게 했다. 던컨 2세는 즉위 직후 암살당했고, 에드가는 1097년 에드가 애설링이 이끄는 잉글랜드 원정군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 왕에 즉위했다. 에드가는 로디언 지방에서 윌리엄 왕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097년 윌리엄 왕은 두 차례 웨일스를 침공했으나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웨일스 근교에 많은 성을 건설했다.[65]

1096년, 윌리엄 왕의 형제 로베르 쿠르트뇌즈는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노르망디 공국을 담보로 윌리엄 왕에게 1만 마르크를 빌렸다. 윌리엄 왕은 이 자금을 징수하기 위해 새로운 중과세를 부과했고, 로베르 공작의 섭정으로 노르망디를 통치했다. 로베르는 1100년 9월 노르망디에 귀국했지만, 윌리엄 왕은 같은 해 8월 사망했다.[66]

윌리엄 왕은 1097년부터 1099년까지 프랑스에 원정을 갔다. 메인 지방 북부 정복에는 성공했지만, 베크상 지방 정복에는 실패했다. 윌리엄 오브 말메즈베리에 따르면, 윌리엄 왕은 죽기 직전 아키텐 공국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다.[67]

3. 1. 잉글랜드 내 통치 강화

윌리엄 2세는 아버지 윌리엄 1세가 이룩한 잉글랜드 내 중앙집권적 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1088년 바이외의 오도가 주도한 1088년 반란을 진압하고 귀족들의 반란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10][11] 윌리엄 2세는 은과 더 나은 통치를 약속하며 잉글랜드인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반란 진압 후 왕권을 더욱 공고히 했다.[10]

윌리엄 2세는 둠스데이 북을 활용하여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왕실 재정을 강화했다. 1095년에는 왕의 회의 참석을 거부한 로베르 드 모브레 노섬벌랜드 백작을 토벌하여 영토와 작위를 박탈하고 투옥했으며, 반역 혐의를 받은 우 백작기욤 2세에게는 실명과 거세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17] 이러한 강경책은 귀족들의 저항을 억누르고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윌리엄 2세는 효율적인 사무국을 통해 왕의 권력을 지방까지 확대했으며, 왕의 행정과 법으로 왕국을 통합하여 교황의 비난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만들었다.[12] 1097년에는 웨스트민스터 홀을 건설하여 왕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했다.[12]

3. 2. 노르망디와의 관계

윌리엄 정복왕이 죽은 후 그의 영토는 둘로 나뉘었고, 이로 인해 영국 해협 양쪽에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윌리엄 2세와 그의 형 로베르 2세는 경쟁 관계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두 군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어 한쪽 또는 양쪽 모두의 총애를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10] 이들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하나의 통치자 아래 다시 통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1088년, 윌리엄 정복왕의 이복동생인 바이외의 오도의 지휘 아래, 윌리엄 2세에 대항하여 로베르를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11]

로베르가 잉글랜드에 나타나지 못하자, 윌리엄 2세는 은과 더 나은 통치를 약속하며 잉글랜드인들의 지지를 얻어 반란을 진압했다. 1091년, 윌리엄 2세는 노르망디를 침공하여 로베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영토 일부를 할양하도록 강요했다. 두 사람은 화해했고, 윌리엄 2세는 로베르가 프랑스로부터 잃어버린 영토, 특히 망주를 회복하도록 돕기로 합의했다. 이 계획은 나중에 포기되었지만, 윌리엄 2세는 생애 마지막까지 프랑스령과 이익을 맹렬하게 방어했다.[58]

4. 대외 관계 및 군사 활동

윌리엄 2세는 즉위 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복속시키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노르망디와 멘 지방을 합병하는 등 활발한 대외 군사 활동을 펼쳤다.

1089년부터 1096년까지 형인 로베르 2세와 노르망디 공국을 두고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로베르 2세는 1만 마르크[66]를 받고 노르망디 공국을 윌리엄 2세에게 위임했다. 윌리엄 2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멘 지방을 합병했다.[66]

1091년에는 잉글랜드를 공격해 온 스코틀랜드 왕 맬컴 3세를 격퇴하고 잉글랜드에 종속시켰다.[57] 1092년에는 칼라일 성을 건설하고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다.[57]

1097년에는 웨일스를 두 차례 침공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웨일스 접경 지역에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많은 성을 건설했다.[65]

4. 1. 스코틀랜드와의 관계

윌리엄 2세는 스코틀랜드와의 관계에서 군사적 우위를 점하려 했다. 1091년, 스코틀랜드 왕 맬컴 3세의 침입을 격퇴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11] 1092년에는 칼라일 성을 건설하여 이전에 스코틀랜드가 주장했던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를 장악했다.[11] 이후 두 왕은 잉글랜드 내 맬컴의 소유물을 두고 다투었고, 맬컴은 다시 침략하여 노섬벌랜드를 황폐화시켰다. 1093년 11월 13일 알누익 전투에서 맬컴은 로베르 드 모브레가 이끄는 노르만 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아들과 함께 사망했고, 그의 형제인 도널드 3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17] 윌리엄은 맬컴의 아들 던컨 2세와 에드거를 지원하여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 에드거는 1094년 로디언을 정복하고, 1097년 에드거 애설링이 이끄는 원정에서 윌리엄의 지원을 받아 도널드를 축출했다. 새 왕 에드거는 로디언에 대한 윌리엄의 권위를 인정하고 윌리엄의 궁정에 참석하여,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17]

4. 2. 웨일스와의 관계

윌리엄 2세는 웨일스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 1097년 두 차례 웨일스를 침공했으나, 결정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다.[18] 그러나 웨일스 국경 지역에 성들을 건설하여 방어선을 강화했다.[18]

4. 3. 프랑스와의 관계

윌리엄 2세는 프랑스 내 영토와 이익을 방어하는 데 힘썼다. 1096년, 그의 형제인 로베르 쿠르토즈가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면서, 윌리엄 2세는 노르망디 공국을 섭정으로 통치하게 되었고, 그 대가로 1만 마르크[19] ()를 받았다.

노르망디 섭정으로서 윌리엄 2세는 1097년부터 1099년까지 프랑스에서 군사 작전을 벌였다. 그는 메인 북부를 확보했지만, 프랑스가 통제하는 벡생 지역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윌리엄 말메즈베리에 따르면, 그는 사망 당시 아키텐 공국을 침략할 계획이었다.[20]

5. 교회와의 갈등

윌리엄 2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랜프랑크가 사망하자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고 잉글랜드 교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했다. 그러나 중세 시대 교회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는 무리였고, 결국 안셀무스를 임명하게 된다. 안셀무스는 왕권을 교권 위에 두려는 윌리엄 2세의 태도에 반발하여, 캔터베리 영지를 대주교령으로 돌려주고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통치력을 인정하라는 답신을 보냈다.[13]

윌리엄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093년 12월 4일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약속을 어기고 안셀무스에게 많은 세금을 요구했고, 안셀무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후 윌리엄 2세는 안셀무스가 로마에서 교황에게 대주교 승인을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윌리엄 2세가 우르바누스 2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안셀무스는 왕이 성직 임명에 관여할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 1095년 교황의 사절이 팔리움을 캔터베리로 가져왔으나, 안셀무스는 왕에게서 받는 모양새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안셀무스가 캔터베리를 떠나 로마로 가면서 일단락되었고, 윌리엄 2세는 캔터베리 대주교령을 몰수하였다.[14]

윌리엄 2세는 버먼지 수도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버먼지의 영지를 기증했으며, 그의 "일상적인 맹세"는 "루카의 성면으로 맹세한다!"였다고 한다.

5. 1.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불화

1089년 캔터베리 대주교 랑프랑크가 사망하자, 윌리엄 2세는 수년간 새 대주교를 임명하지 않고 대주교좌의 수입을 국고로 착복했다.[61] 1093년 중병에 걸린 윌리엄 2세는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그레고리우스 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윌리엄 2세와 교회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대립했다. 윌리엄 2세는 안셀무스에 대해 "어제 나는 그를 매우 증오했고, 오늘 나는 그를 더욱 증오하며, 내일과 그 이후에도 나는 그를 더욱 사나운 그리고 더욱 격렬한 증오로 계속 증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60]

1095년, 윌리엄 2세는 로킹엄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안셀름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안셀름은 굳건하게 자신의 입장을 지켰다. 결국 1097년 10월, 안셀름은 망명하여 교황의 지원을 받고자 로마로 떠났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4세와의 분쟁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윌리엄 2세와 협약을 맺었다. 윌리엄 2세는 우르바누스 2세를 교황으로 인정했고, 우르바누스 2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현황을 승인했다. 안셀름은 망명 생활을 계속했고, 윌리엄 2세는 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캔터베리 대주교의 수입을 계속 차지할 수 있었다.[61]

이러한 갈등은 중세 영국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윌리엄 2세만의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후 잉글랜드의 헨리 2세 시대에 토마스 베케트의 살해 사건과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나타났다.

5. 2. 서임권 투쟁

1089년,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의 고문이자 절친이었던 이탈리아계 노르만 성직자이자 캔터베리 대주교랑프랑크가 사망했다. 랑프랑크 대주교 사후, 윌리엄 2세는 수년간 새로운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을 미루고, 대주교좌의 수입을 국고로 착복했다. 1093년, 윌리엄 2세는 심한 병에 걸려 정신 상태가 악화되었고, 노르만계 이탈리아인 성직자인 안셀름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안셀름은 당시 가장 위대한 성직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임명은 교회와 왕국 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안셀름은 랑프랑크에 비해 그레고리우스 개혁을 강력히 지지하는 성직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2세와 안셀름은 교회 관련 많은 문제에서 대립했고, 윌리엄 2세는 안셀름 대주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제 나는 그를 매우 증오했고, 오늘 나는 그를 더욱 증오하며, 내일과 그 이후에도 나는 그를 더욱 사나운 그리고 더욱 격렬한 증오로 계속 증오할 것이다.[60]”'''

다른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윌리엄 2세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지위 향상과 생활에 대한 은혜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안셀름을 공개적으로 옹호할 수 없었다. 1095년, 윌리엄 2세는 노샘프턴셔의 로킹엄에서 의회를 열고 안셀름을 왕권에 복종시키려 했다. 그러나 안셀름은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왕과 대립했다. 1097년 10월, 마침내 안셀름은 망명하여 교황의 지원을 얻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당시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외교적으로 뛰어난 교황이었고, 바로 이 무렵 대립교황클레멘스 3세를 지지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그런 우르바누스 2세는 새로운 적을 만들기를 주저하고 윌리엄 2세와 콘코르다트를 체결했다고 한다. 이 협약에 따라 윌리엄 2세는 우르바누스 2세를 정식 교황으로 인정했고, 우르바누스 2세 역시 윌리엄 2세의 잉글랜드 왕국 내 교회 정책을 승인했다. 그 후에도 윌리엄 2세는 안셀름이 없는 동안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좌의 수입을 국고에 편입했다고 한다.[61]

이 분쟁은 윌리엄 2세의 실정으로 여겨지지 않고, 이후 빈번히 발생하는 국왕과 교회의 갈등 사건의 징후 중 하나로 간주된다. (주요 갈등 사건으로 헨리 2세 치세의 토마스 베케트 암살 사건과 헨리 8세 치세의 잉글랜드 국교회 설립 등이 있다.)

5. 3. 갈등의 결과

1097년 10월, 안셀무스는 교황의 지원을 얻기 위해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대립교황클레멘스 3세를 지지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윌리엄 2세와 콘코르다트를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윌리엄 2세는 우르바누스 2세를 정식 교황으로 인정했고, 우르바누스 2세 역시 윌리엄 2세의 잉글랜드 왕국 내 교회 정책을 승인했다. 그 후에도 윌리엄 2세는 안셀름이 없는 동안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좌의 수입을 국고에 편입했다.[14]

이 분쟁은 윌리엄 2세의 실정으로 여겨지지 않고, 이후 빈번히 발생하는 국왕과 교회의 갈등 사건의 징후 중 하나로 간주된다.[15] 주요 갈등 사건으로는 헨리 2세 치세의 토마스 베케트 암살 사건과 헨리 8세 치세의 잉글랜드 국교회 설립 등이 있다.

6. 의문의 죽음과 유산

윌리엄 루푸스의 죽음, Alphonse de Neuville의 석판화 (1895)


윌리엄 2세는 정복 전쟁을 통해 개인적인 영광과 왕국의 영토를 확장했지만, 동시에 많은 정적들을 만들었다. 1100년 8월 2일, 윌리엄 2세는 동생인 헨리 1세와 명사수로 유명했던 퐁티외 남작 월터 티럴이 동행한 뉴포레스트의 사냥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86]

말머스버리의 윌리엄은 그의 죽음에 대해 왕이 죽기 전 피를 흘리는 꿈을 꾸었지만, 월터 티럴만을 곁에 두고 숲속으로 들어갔으며, 사슴을 발견하고 티럴 남작에게 사슴을 쏘라고 몸짓했으나, 남작이 쏜 화살은 사슴을 지나 왕의 가슴에 박혔고, 왕은 가슴에 박힌 화살 날개를 꺾으며 말에서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화살이 가슴 깊숙이 박혀 절명했다고 기록했다.

윌리엄 2세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으며, 그의 사후 왕위는 동생인 헨리 1세가 계승하였다. 윌리엄 2세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1. 사냥 중 의문사



1100년 8월 2일, 윌리엄 2세는 뉴포레스트에서 헨리와 퐁티외 남작 월터 티럴이 동행한 사냥에 나섰다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86] 윌리엄 2세는 뉴포레스트(New Forest), 아마도 브로큰허스트(Brockenhurst)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중 폐에 화살이 꽂혀 사망했다.[21]

말머스버리의 윌리엄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죽기 전 피를 흘리는 꿈을 꾸었지만, 월터 티럴만을 곁에 두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사슴을 발견하고 티럴 남작에게 사슴을 쏘라고 몸짓했으나, 남작이 쏜 화살은 사슴을 지나 왕의 가슴에 박혔다. 왕은 가슴에 박힌 화살 날개를 꺾으며 말에서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화살이 가슴 깊숙이 박혀 절명했다.[86]

몇몇 마을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윈체스터 대성당으로 운반했으며, 운반 도중 피가 계속 흘러 길을 적셨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수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탑에 묻혔다.[86]

왕의 시신은 귀족들에 의해 그가 쓰러진 자리에 버려졌다가 나중에 화살 제작자인 엘리 패랫(Eli Parratt)이 발견했다. 윌리엄의 동생인 헨리 1세는 윈체스터로 서둘러 가서 왕실 금고를 확보하고 런던으로 가서 왕위에 올랐다.[27]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초기 기록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있으며, 왕이 "자신의 신하 중 한 명이 쏜 화살에 맞았다"고 적혀 있다.[21] 후대의 역사가들은 범인으로 월터 티렐이라는 귀족의 이름을 추가했지만, 정확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21]

당시 역사가들은 티렐이 뛰어난 궁수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렇게 충동적인 사격을 했을 가능성이 적다고 지적하며, 형제 간의 라이벌 관계가 이 시대 정치 갈등의 패턴이었다고 말한다.[30] 윌리엄의 형제 헨리는 그날 사냥꾼 중 한 명이었고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암살설을 제기했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사고가 흔했고 살인을 증명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31]

윌리엄의 유해는 윈체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두개골은 없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장골(long bone)이 남아 있을 수 있다.[38]

6. 2. 왕위 계승

윌리엄 2세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기 때문에, 1100년 그가 사망한 후 동생인 헨리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34][35] 헨리 1세는 윌리엄 2세가 뉴포레스트에서 사냥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신속하게 윈체스터로 가서 왕실 금고를 장악했다.[27] 그는 런던으로 이동하여 대주교가 도착하기 전에 왕위에 올랐다.[27] 이러한 헨리 1세의 행동은 왕위를 찬탈한 왕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34][35]

6. 3. 평가와 유산

윌리엄 2세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무자비한 통치자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거의 모든 백성에게 미움받았고 신에게도 혐오스러운 자"였다.[43] 연대기 기록자들은 대개 성직자들이었고, 윌리엄 2세가 교회와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수상은 랜울프 플람바르였는데, 1099년 더럼 주교로 임명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43]

윌리엄 2세의 동시대인들과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방탕한 궁정을 이끌었다고 비난했다. 노르만 지도자들의 전통에 따라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인과 잉글랜드 문화를 경멸했다.[44]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100년 8월 2일, 윌리엄 2세는 뉴포리스트에서 사냥을 하던 중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왕이 "자신의 신하 중 한 명이 쏜 화살에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1] 후대 역사가들은 범인이 월터 티렐이라는 귀족이라고 지목했지만, 사건에 대한 묘사는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세부 사항들이 추가되었다.

말머스버리의 윌리엄은 윌리엄 2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교회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죽음을 "신의 뜻"으로, 악한 왕에게는 정당한 최후라고 여겼다.[29] 일각에서는 윌리엄 2세의 적들 중 한 명이 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역사가들은 티렐이 뛰어난 궁수였기 때문에 그렇게 충동적인 사격을 했을 가능성이 적다고 지적했다. 윌리엄 2세의 동생 헨리 1세는 그날 사냥에 함께 있었고, 이후 왕위를 계승했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암살설이 제기되었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사고가 흔했고 살인을 증명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윌리엄 2세의 유해는 윈체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36]

7. 동시대 평가 및 논란

윌리엄 2세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냉혹한 통치자로,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윌리엄 왕은 거의 모든 국민과 신에게서도 미움을 받았다"고 기록했다.[84] 그러나 연대기 저술자들은 대부분 성직자였고, 윌리엄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성직자들과 심하게 대립했기 때문에 이 기록은 비판적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85]

윌리엄 2세는 더럼 주교이자 수상이었던 Ranulf Flambard|라눌프 플람바르영어를 임명했는데, 이는 종교적 임명이 아닌 정치적 의도를 가진 임명으로 여겨진다.[85] 당시 사람들은 윌리엄 2세에 대해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으며, 윌리엄 2세는 노르만 전통에 따라 잉글랜드인과 그들의 문화를 경시했다고 한다.[85]

7. 1. 동성애 논란

윌리엄 2세와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궁정이 동성애와 여성적인 기질로 가득 차 있다고 우려했다.[45] 이러한 분위기는 사치스러운 의복과 특이한 신발(pigache)에서 잘 드러난다고 여겨졌다.[45]

1140년대 윌턴 수녀원(Wilton Abbey)의 전통을 인용한 기록에 따르면, 투르네의 헤르만(Herman of Tournai)은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의 욕정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공주 에디스(Edith, 후에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아내가 되는 마틸다)를 보호하기 위해 수녀원장이 그녀를 수녀로 만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 일은 에디스의 아버지에게는 그녀의 결혼 가능성에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분노를 샀다.[46]

역사가 엠마 메이슨(Emma Mason)은 윌리엄 재위 기간 동안 그 자신이 공개적으로 동성애 혐의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의 사후 수십 년 동안 많은 중세 작가들이 이에 대해 언급했고, 일부는 그를 "소도미스트"로 묘사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47] 현대 역사가들은 윌리엄이 동성애자였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정부도 두지 않았으며, 자녀도 낳지 않았다. 상속자가 없는 독신 왕이었던 윌리엄은 결혼 압력을 받았을 것이며, 수많은 결혼 제안을 받았을 것이다.[47] 그가 이러한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성과 어떤 관계도 갖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여성에 대한 욕망이 없었거나 정결 서약이나 독신 서약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47]

바로우(Barlow)는 웨일스 연대기가 헨리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형제가 첩(concubines)을 두었기 때문에 자식 없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생아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로우는 또한 윌리엄이 불임이었을 가능성도 인정한다. "측근(favourite)"이 확인되지 않았고, 윌리엄의 "귀족 친구들과 동료들은 대부분 기혼자"였음을 지적하면서, 연대기 기록자들이 "적대적이고 편향된 증인"이라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우는 "그들이 이 특정한 혐의(동성애)를 지어냈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그의 의견으로는 "전반적으로 증거는 왕의 양성애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7. 2. 종교적 태도

윌리엄 2세는 종교적인 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랑프랑크가 사망한 후, 수년간 새 대주교를 임명하지 않고 대주교좌의 수입을 국고로 착복했다.[13] 1093년, 윌리엄 2세는 병에 걸려 안셀름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이는 교회와 국가 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안셀름은 그레고리우스 개혁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윌리엄 2세와 여러 교회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윌리엄 2세는 안셀름에 대해 "나는 어제 그를 매우 증오했고, 오늘은 더욱 증오하며, 내일과 그 이후에도 언제나 더욱 사납고 쓰라린 증오로 그를 증오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라고 말했다.[13]

1095년, 윌리엄 2세는 로킹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안셀름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안셀름은 굳건했다. 1097년, 안셀름은 망명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4세와의 분쟁 때문에 윌리엄 2세와 협약을 맺었다. 윌리엄 2세는 우르바누스 2세를 교황으로 인정했고, 우르바누스 2세는 앵글로-노르만 교회의 현황을 승인했다. 안셀름은 망명한 채로 남았고, 윌리엄 2세는 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캔터베리 대주교의 수입을 계속 차지했다.[14]

이러한 갈등은 중세 영국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 에이드머에 따르면, 윌리엄 2세는 "대주교 안셀름이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동시에 왕의 뜻에 반하여 사도좌에 복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라고 한다.[15]

윌리엄 2세는 버몬지 수도원 설립을 지원하고 영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의 "일상적인 맹세"는 "루카의 성면으로 맹세한다!"였다고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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