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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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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복통은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을 이끈 인물이다. 1351년 한산동과 함께 백련교도와 징용된 민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1355년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옹립하고 스스로 소명왕이 되어 송을 건국했다. 1357년 북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363년 장사성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2. 생애

1351년(지정 11년) 5월, 유복통한산동과 함께 백련교도와 황하 굴착 공사에 징용된 민중을 이끌고 영주에서 원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홍건적의 난). 반란군은 안후이·허난 등을 공격하여 원나라 말기에 최대 규모의 농민 반란으로 발전했다. 1355년(지정 15년),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를 황제로 옹립하고 '''송'''을 건국하여 스스로는 '''소명왕'''이 되어 박주에 도읍을 정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카이펑을 점령하는등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며 홍건적의 고려 침공이 발생하였다.

1363년 (지정 23년) 2월 23일 초봄, 장사성여진을 보내 안풍을 포위 후 공격하여 유복통을 참살하였다. 1359년 9월 원나라 지휘관 차간 테무르가 카이펑을 재탈환했고, 유복통을 여러지역으로 몰아냈다. 이는 북부 홍건적의 확장 단계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이 때 주원장이 구원을 와 여진(呂珍)을 물리친 후 한림아를 구출해내어 저주로 맞아들였으나, 1366년 (지정 26년), 주원장은 한림아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2. 1. 초기 활동 및 홍건적의 난

1351년(지정 11년) 5월, 원나라 순제가 황하 치수공사를 위해 대규모의 양민을 부역시키자, 유복통한산동의 지휘 아래 백련교도들은 영주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붉은 수건(홍건, 紅巾)을 표식으로 삼아 홍건적이라 불렸으며, 미륵불 신앙을 바탕으로 원나라에 대항하여 안휘성, 하남지구를 공격하였다.[1] 이는 원나라 말기 농민 봉기의 시작이었다. 한산동이 원나라 군에 체포되어 처형된 후, 그의 아들 한림아는 유복통과 함께 영주로 탈출하여 그곳에 작전 기지를 설립했다.

1355년(지정 15년)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대한송제국 황제(소명왕 또는 소명제)로 옹립하고, 박주에 도읍을 정하였다. 한림아는 명목상의 황제였지만, 그의 정통성과 유복통의 백련교에 대한 이념적 충성은 북방 홍건군 사이의 결속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지휘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북벌을 개시, 개봉을 점령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유복통의 군대는 1358년 6월 송나라의 첫 번째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유복통은 섬서와 산서를 약탈하고 안휘와 산동의 일부를 점령했으며, 그의 장군 모귀를 원나라 수도 대도로 원정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지지세가 급증했다. 그러나 원나라 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은 좌절되었고, 홍건적의 고려 침공이 발생하였다.

1363년(지정 23년) 2월 23일 초봄, 장사성여진을 보내 안풍을 공격하여 유복통을 살해하였다. 이때 주원장이 구원병을 이끌고 와 여진을 물리치고 한림아를 구출하여 저주로 데려갔으나, 1366년(지정 26년) 주원장은 한림아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2. 2. 대송 정권 수립

1351년(지정 11년) 5월, 원나라 순제가 황하 치수공사를 위해 대규모의 양민을 부역시키자, 유복통한산동의 지휘 아래 백련교도들은 영주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붉은 수건을 표식으로 삼아 홍건적이라 불렸으며, 미륵불을 신봉하며 원군에 대항하여 안휘성, 하남지구를 공격하였다.[1] 명사자치통기는 명나라 연대기로, 1351년 유복통의 반란으로 시작한다.

1355년(지정 15년)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대한송제국 황제, 즉 소명왕(小明王, 또는 소명제(小明帝))으로 옹립하고, 박주(亳州)에 도읍을 정하였다. 한림아는 허수아비 황제였지만, 북방 홍건군 사이의 결속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지휘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북벌을 감행, 카이펑을 점령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북벌은 좌절되었다.

1363년(지정 23년) 2월, 장사성이 보낸 여진(呂珍)의 공격으로 유복통은 안풍에서 전사하였다. 주원장이 구원군을 이끌고 여진을 물리친 후 한림아를 구출하여 저주(滁州)로 맞아들였으나, 1366년(지정 26년) 주원장은 한림아를 강물에 빠뜨려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3. 북벌과 좌절

1351년(지정 11년) 5월, 원나라 순제가 황하 치수공사를 위해 대규모의 양민을 부역시키자, 유복통한산동의 지휘 아래 백련교도들은 영주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홍건(紅巾)을 이름으로 삼고, 미륵불을 신봉하며, 홍건적을 조직해 원군에 대항하였으며, 안휘성 하남지구를 공격하였다. 이에 원말의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다.

1355년(지정 15년)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대한송제국 황제로 세워 소명왕(小明王, 또는 소명제(小明帝))이라 칭하고, 보저우(亳州)에 도읍을 정하였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카이펑을 점령하는등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었다. 1359년 9월 원나라 지휘관 차간 테무르가 카이펑을 재탈환하면서 북부 홍건적의 확장 단계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1363년(지정 23년) 2월 23일 초봄, 장사성여진을 보내 안풍을 포위 후 공격하여 유복통을 참살하였다. 이 때 주원장이 구원을 와 여진(呂珍)을 물리친 후 한림아를 구출해내어 저주(滁州)로 맞아들였으나 1366년(지정 26년), 주원장은 한림아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2. 4. 최후

1351년 (지정 11년) 5월, 유복통한산동과 함께 백련교도와 황하 굴착 공사에 징용된 민중을 이끌고 영주에서 원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홍건적의 난). 반란군은 안후이·허난 등을 공격하여 원나라 말기에 최대 규모의 농민 반란으로 발전했다. 1355년(지정 15년),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를 황제로 옹립하고 '''송'''을 건국하여 스스로는 '''소명왕'''이 되어 박주에 도읍을 정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카이펑을 점령하는등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며 홍건적의 고려 침공이 발생하였다.

1363년 (지정 23년) 2월 23일 초봄, 장사성여진을 보내 안풍을 포위 후 공격하여 유복통을 참살하였다. 1359년 9월 원나라 지휘관 차간 테무르가 카이펑을 재탈환했고, 유복통을 여러지역으로 몰아냈다. 이는 북부 홍건적의 확장 단계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이 때 주원장이 구원을 와 여진(呂珍)을 물리친 후 한림아를 구출해내어 저주(滁州)로 맞아들였으나, 1366년 (지정 26년), 주원장은 한림아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3. 역사적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한국사와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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