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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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건적의 난은 14세기 원나라 말기에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원나라의 멸망과 명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330년대 장시성에서 시작된 홍건적은 백련교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잦은 자연재해와 원나라의 무능한 통치로 인한 사회경제적 혼란 속에서 봉기했다. 홍건적은 동계와 서계로 나뉘어 북벌과 남하를 시도했으나 내부 분열과 원나라 군벌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주원장이 성장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결국 명나라를 건국하여 원나라를 멸망시켰다. 홍건적의 난은 고려에도 영향을 미쳐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받았으며, 고려의 국운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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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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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명 | 후기 원나라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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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351년–1368년 |
장소 | 양쯔강 유역, 원나라 |
결과 | 원나라 멸망, 명나라 건국, 원나라 잔존 세력은 중국 북부와 몽골 고원으로 후퇴 (이후 북원으로 알려짐)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원나라 |
교전국 1 하위 세력 | 양국 (운남) (1372년–1382년) 고려 (1270년–1356년) |
교전국 2 | 북부 홍건군 반란 세력 |
교전국 2 하위 세력 | 송나라 (1351년–1366년) 서오 (1361년–1367년) 명나라 (1368년부터) |
교전국 3 | 남부 홍건군 반란 세력 |
교전국 3 하위 세력 | 천완 왕조 (1351년–1360년) 진한 왕조 (1360년–1363년) 명하 왕조 (1361년–1366년) |
교전국 4 | 주 (1354년–1357년) |
교전국 4 하위 세력 | 오 (1363년–1367년) |
교전국 5 | 기타 남부 군벌 |
교전국 5 하위 세력 | 푸젠 무슬림 반란군 (1357년–1366년) 북부 군벌 |
지휘관 | |
지휘관 1 | 토곤 테무르 |
지휘관 1 하위 지휘관 | 토크토아 차간 테무르 나하추 (항복) 천유딩 (처형) 장위 (항복) |
지휘관 1 추가 지휘관 | 코케 테무르 아유시리다라 토구스 테무르 |
지휘관 1 추가 지휘관 2 | 바살라와르미 단공 |
지휘관 2 | 한산통 (전사) 한린아 (용봉 황제) 유복통 (전사) 마오구이 |
지휘관 2 하위 지휘관 | 곽자흥 주원장 서달 상우춘 부우덕 유백온 호대해 |
지휘관 3 | 팽영옥 (전사) 서수휘 (전사) 니문준 (전사) |
지휘관 3 하위 지휘관 | 천우량 (전사) 천리 (항복) 장정변 (부상) 장필선 (부상) |
지휘관 3 추가 지휘관 | 명옥진 명승 (항복) |
지휘관 4 | 장사성 (처형) |
지휘관 4 하위 지휘관 | 여진 장사덕 |
지휘관 5 | 방국진 (항복) |
지휘관 5 추가 지휘관 | 볼라드 테무르 |
지휘관 5 추가 지휘관 2 | 장량필 장량신 (전사) 이사기 (항복) 토레벡 |
병력 | |
병력 1 | 불명 |
병력 2 | 불명 |
병력 3 | 불명 |
병력 4 | 불명 |
병력 5 | 불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불명 |
사상자 2 | 불명 |
사상자 3 | 불명 |
사상자 4 | 불명 |
사상자 5 | 불명 |
기타 |
2. 역사적 배경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났다. 1351년 황하의 개수 공사를 하던 백련교도인 홍건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한산동은 미륵불이라고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각지를 노략질하였고, 그 군대는 10만에 달하였다.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이라 하였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면서, 군벌에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357년 유복통이 이끄는 홍건적은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원나라 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좌절되었다. 홍건적 일부 세력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관선생과 파두반의 홍건적이 원나라 여름 도읍지였던 상도와 주변 지역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변량을 다시 원나라에 빼앗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원군에게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원장은 절강의 심만삼의 재력을 바탕으로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 1368년 난징을 근거지로 하여 황제로 즉위하고 명나라를 건국, 연호를 홍무라 정하니 홍무제이다. 홍무제는 건국 직후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로 통일되었다. 이로써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하여 한족 왕조를 복원시켰다.
원나라 말기, 화북을 중심으로 백련교가 세력을 확장했다. 백련교는 본래 불교의 한 종파였으나, 사회 혼란과 함께 점차 과격해져 "원나라 타도와 유토피아 실현"을 외치는 반체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338년과 1351년에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소규모였기 때문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말기의 원나라는 권신이 황제를 옹립하고, 그 권신을 다른 권신이 죽이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웠고 통치 능력을 잃어갔다. 이 시기에는 흉년과 기근이 빈발했는데, 이는 천재라기보다는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인재라고 할 수 있다.
1348년 방국진이 절강·복건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나라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당 시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수송 두절은 치명적이었다. 몽골족은 해전에 약했기에, 토벌군 사령관이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원나라의 쇠퇴가 명백해지고, 반란의 기운이 높아졌다.
2. 1. 원나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
원나라 말기에는 권신(權臣)이 황제를 옹립하고, 그 권신을 다른 권신이 죽이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중앙 정부의 통치 능력 상실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잦은 흉작과 기근이 발생했는데, 이는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정부의 부적절한 대처로 인한 인재(人災)에 가까웠다.1348년 방국진(方國珍)이 절강·복건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元)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원나라의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2. 1. 1. 쿠살라 칸과 투그 테무르 칸 시기
1328년 쿠데타로 옹립된 쿠살라 칸(명종)은 한자에 능통하고 한시와 한문 서예에 능했으며, 새로운 학원과 내궁 관청을 설립하여 중국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등 한족 중심의 통치 방식을 지향했다.[1] 메르키트 마자르다이와 그의 아들 토크토아 등도 한족 학자들과 교류하며 중국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1] 그러나 쿠살라 칸은 이복형제 투그 테무르(문종)의 지지자들에게 암살당했다.[1]1332년 투그 테무르 칸이 사망하고, 쿠살라 칸의 여섯 살 된 아들 린친발 칸(닝종)이 즉위했으나 6개월 만에 사망했다.[1] 이후 그의 형인 토곤 테무르(혜종)가 13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으며, 그는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1]
2. 1. 2. 토곤 테무르 칸의 즉위와 권력 투쟁
1300년대 초, 몽골이 이끄는 원나라 황실은 제국 통치 방식을 두고 두 파벌로 나뉘었다. 한 파벌은 몽골과 내아시아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지지했고, 다른 파벌은 한족 중심의 통치 방식에 기울었다. 1328년, 후자는 쿠데타를 일으켜 쿠살라(명종)를 옹립했다. 쿠살라는 한자에 능통했고, 한시를 짓고 한문 서예를 하는 데 힘썼다. 그는 새로운 학원과 내궁의 관청을 설립하여 중국 학문과 예술을 후원했다. 메르키트 마자르다이와 그의 아들 토크토아 등 다른 신하들도 한족 학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가정교사로 고용함으로써 중국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1] 쿠살라는 그의 이복형제 투그 테무르(문종)의 지지자들에게 암살당했다. 투그 테무르는 1332년에 죽었고, 쿠살라의 여섯 살 된 아이인 린친발(닝종)이 뒤를 이었으나, 6개월 만에 죽었다. 그의 형인 토곤 테무르(혜종)가 13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고, 그는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2]2. 2. 원나라의 군사적 쇠퇴
원나라 말기에는 잦은 흉년과 기근이 발생했는데, 이는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정부의 미흡한 대처로 인한 인재(人災)에 가까웠다. 1348년 방국진(方國珍)이 절강성과 복건성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나라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지역은 수·당 시대부터 중국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이곳으로부터의 수송 두절은 원나라에 치명적이었다. 정부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몽골군은 해전에 약해 토벌군 사령관이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를 겪었다.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군벌에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원나라 주둔군은 이미 13세기 말부터 급격히 쇠퇴하여, 1340년까지 반복적으로 지역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4]
이러한 상황에서 1351년 황하 개수 공사에 동원된 백련교도인 홍건적이 봉기하면서, 원나라의 군사적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2. 2. 1. 몽골 군대의 약화
쿠빌라이(원 세조)가 중원을 정복했을 당시, 원나라 군대는 대부분 몽골에 정복당하기 전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한족 군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몽골이나 내아시아 지휘관의 지휘 아래 제국 전역에 주둔하며 원나라 군대의 주축을 이루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특수 몽골 부대가 파견되기도 했지만, 제국을 통치하거나 정기적으로 배치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몽골 주둔군은 수도 칸발릭 주변 북쪽에 위치했다. 그러나 원나라 주둔군은 이미 13세기 말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1340년까지 반복적으로 지역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1]1340년대 화산에서 불과 36명의 산적떼가 도교 사찰을 점거했을 때, 3개 성의 정부군은 3개월 이상 이들을 물리치지 못했다. 결국 항주의 소금밭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산적들을 진압했지만, 이 사건은 백성들이 정부군을 무능하다고 여기고 지역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
원나라는 1343년 반란을 일으킨 여진족과도 싸워야 했다. 여진족은 몽골에 흰발톱수리를 바쳐야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여진족 반란 진압은 실패했고, 1348년까지 최소 두 개의 여진족 집단이 원나라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3]
2. 2. 2. 여진족의 반란
(섹션 제목 '여진족의 반란'은 주어진 원본 소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빈 문자열을 출력합니다.)2. 3. 사회경제적 문제
원말(元末)에는 황하의 잦은 범람과 가뭄, 기근, 전염병 등 여러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러한 자연재해는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1344년에는 여름 메뚜기와 가뭄을 동반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훗날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의 가족도 이때 희생되었다.[4]당시 원나라 조정은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웠고, 이러한 자연재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고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2. 3. 1. 자연재해와 기근
元末|원말중국어에는 황하의 잦은 범람, 가뭄, 기근 등 여러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했다.2. 3. 2. 전염병의 창궐
1344년, 여름 메뚜기와 가뭄을 동반한 전염병으로 인해 주원장의 아버지, 어머니, 형이 사망했다.[4] 살아남은 가족은 주원장을 부양할 형편이 되지 않아 그를 지역 불교 사찰에 잡역부로 보냈다.[4]2. 4. 백련교의 확산과 영향력
원말(元末) 화북(華北)을 중심으로 백련교가 세력을 확장했다. 백련교는 본래 불교의 한 종파였으나, 사회 혼란과 함께 점차 과격해져 원(元) 왕조 타도와 유토피아 실현을 외치는 반(反)체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338년과 1351년에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소규모였기 때문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며 황하 토목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했다.[1]
2. 4. 1. 백련교의 기원과 교리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며, 황하 토목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하였고, 1355년 '''소명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1]두준도는 승상이 되고, 류복통은 평장이 되었다.[1] 안휘의 곽자흥 등이 호응하였으나, 홍건군 본대인 송과는 행동을 달리하여 각각 자신의 세력 확장을 노리고 분열하여, 수령들이 백련교를 믿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1]
한편, 호북에서 승려 팽영옥에 의해 추대된 서수휘는 1351년에 황제를 자칭하였고, 국호를 '''천완''', 연호를 치평으로 정했다.[1] 이 두 세력을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동계 홍건군''', 후자를 '''서계 홍건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 일반적으로 동계 홍건군은 기병 또는 보병에 의한 전투를 잘했고, 서계 홍건군은 수군을 중심으로 한 전투를 잘하는 경향이 있었다.[1]
2. 4. 2. 팽영유의 봉기와 영향
1351년, 승려 팽영옥이 서수휘를 추대하여 황제로 옹립하고, 국호를 '''천완''', 연호를 치평으로 정했다.[3] 이들은 '''서계 홍건군'''이라고 불리며, 수군을 중심으로 한 전투를 잘하는 경향이 있었다.[3]3. 홍건적의 봉기와 전개
1348년 원나라에서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351년 가노에 의해 황하 개수 공사에 동원된 백련교도 홍건당이 봉기했다. 한산동은 미륵불을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했으나, 관군에 붙잡혔다.
한산동의 부하 유복통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각지를 노략질하며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추대하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1354년 토구다가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면서, 군벌에 의존하던 원나라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지휘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북벌을 시작했으나, 원나라 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좌절되었다. 일부 세력은 중앙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였다.[1]
관선생과 파두반의 홍건적이 상도를 함락하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변량(개봉)을 빼앗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했고, 원군에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왔다.[1]
주원장은 심만삼의 재력을 바탕으로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을 격파하고, 난징을 근거지로 삼아 1368년 황제에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했다. 홍무제는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를 몰아내고 만리장성 이남을 통일했다.
3. 1. 봉기 원인과 초기 지도자
원말(元末) 화북(華北) 지역을 중심으로 백련교(白蓮教)가 세력을 확장했다. 백련교는 본래 불교의 한 종파였으나, 세상이 혼란해지면서 점차 "원(元) 왕조 타도와 유토피아 실현"을 외치는 반체제적인 교단으로 변모하였다. 1338년과 1351년에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소규모였기 때문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말기 원(元)은 권신(權臣)들이 황제를 옹립하고, 그 권신을 다른 권신이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일이 반복되는 등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통치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 시기에는 흉작과 기근이 자주 발생했는데, 이는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발생한 인재(人災)에 가까웠다.
1348년에는 방국진(方國珍)이 절강과 복건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元)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隋)·당(唐) 시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전역의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으로부터의 수송이 중단되는 것은 원나라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원나라 정부는 토벌군을 보냈지만, 초원 출신 민족인 몽골은 해전에 약했고, 토벌군 사령관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원나라의 쇠퇴가 명백해졌고, 반란의 기운이 높아지게 되었다.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이 봉기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자,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은 1355년 한림아를 소명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
한편, 호북에서 승려 팽영옥에 의해 추대된 서수휘는 1351년에 황제를 자칭하며 국호를 천완, 연호를 치평으로 정했다. 전자를 동계 홍건군, 후자를 서계 홍건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계 홍건군은 기병 또는 보병에 의한 전투를 잘했고, 서계 홍건군은 수군을 중심으로 한 전투를 잘하는 경향이 있었다.
3. 1. 1. 한산동의 봉기 계획과 처형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 자칭하며, 하남에서 황하 토목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계획했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3. 1. 2. 유복통의 봉기 주도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며, 하남에서 황하 토목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한산동은 처형되었다.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하였고, 1355년에는 소명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두준도를 승상으로, 류복통은 평장이 되었다. 안휘의 곽자흥 등이 호응하였으나, 홍건군 본대인 송과는 행동을 달리하여 각각 자신의 세력 확장을 노리고 분열하였으며, 수령들이 백련교를 믿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3. 2. 홍건적의 분열과 세력 확장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 자칭하며 반란을 기도했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하였고, 1355년 '''소명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두준도는 승상이 되고, 류복통은 평장이 되었다. 안휘의 곽자흥 등이 호응했으나, 홍건군 본대인 송과는 별개로 행동하며 세력 확장을 노려 분열했다.
한편, 호북에서 승려 팽영옥이 추대한 서수휘는 1351년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를 '''천완''', 연호를 치평으로 정했다. 전자를 '''동계 홍건군''', 후자를 '''서계 홍건군'''이라 부르며, 동계 홍건군은 기병 또는 보병 전투에, 서계 홍건군은 수군 전투에 능했다.[3]


3. 2. 1. 동계 홍건적의 북벌과 실패
1357년 유복통의 지휘 아래 홍건적은 3개 군으로 나뉘어 대규모 북벌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원나라 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북벌은 좌절되었다.[1]모귀가 이끄는 동로군은 한때 대도(大都)에 접근했고, 관탁 등이 이끄는 중로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開城)을 일시 점령했으나 이성계 등의 반격을 받아 개경을 버리고 상도(上都)를 점령했다.[1]
이 북벌은 원나라 측의 군사력 약화와 격렬한 내부 항쟁 덕분에 큰 저항 없이 한때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체제를 재정비한 원나라 군대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차간테무르(察罕帖木児)·보로테무르(孛羅帖木児) 등에 의해 북벌군은 대패했고, 수도 개봉(開封)을 잃고 급속도로 약화되어 안휘성 안풍(安豊)에서만 권위를 유지하게 되었다.[1]
3. 2. 2. 서계 홍건적의 남하와 내부 분열
1351년, 호북에서 승려 팽영옥의 추대로 서수휘가 황제를 자칭하며 국호를 '''천완''', 연호를 치평으로 정했다. 이들을 서수휘가 이끌었다고 하여 '''서계 홍건군'''이라고 부른다. 서계 홍건군은 수군을 중심으로 한 전투에 능했다.[3]서계 홍건군은 남쪽과 서쪽으로 진격하여 강남을 장악하고, 중경(重慶)의 명옥진을 회유하여 세력을 확장, 동계 홍건군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1360년에 서수휘는 부하인 진우량에게 살해당했고, 명옥진이 독립하면서 사실상 서계 홍건군은 해체되었다.[7]
3. 2. 3. 주원장의 성장과 한림아 보호
주원장은 곽자흥의 부하였으나 성장하여 장사성에게 공격받던 한림아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한림아는 실권이 없었고 1366년에 암살되었으며, 주원장은 백련교 금교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홍건적의 난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었고, 이후 주원장의 패권 확립 전쟁이 시작된다.3. 3. 주요 군벌들의 활동
진유정(陳友定)은 복주(福州) 출신의 문맹 농부 가정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으나, 군에 입대하여 경찰 부대를 지휘했다.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10년 만에 성 정부의 수장이 되었으나, 강경한 통치로 부하들의 탈영을 야기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에게 사로잡힌 후에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하 진은 고아 출신으로 붓과 칼 모두에 능통한 교육을 받았다. 정부 관직을 역임한 후 지역 방위대를 이끌었고, 산적과 해적으로부터 지역 현청과 광저우를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1366년 성 정부의 수장이 되었고, 1368년 명나라 군대에 항복했다. 주원장과의 면담 후 성 정부에서 영예와 직책을 받았으며, 1387년 은퇴하여 세습 백작이 되었다.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황하 토목공사에 종사하던 하남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하였고, 1355년 '''소명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 두준도를 승상으로, 류복통은 평장이 되었다. 안휘의 곽자흥 등이 호응하였으나, 홍건군 본대인 송과는 행동을 달리하여 각자 세력 확장을 노렸다.
호북에서 승려 팽영옥에 의해 추대된 서수휘는 1351년 황제를 자칭하며 국호를 '''천완''', 연호를 치평으로 정했다. 이 두 세력을 '''동계 홍건군'''과 '''서계 홍건군'''으로 구분하는데, 동계 홍건군은 기병 또는 보병 전투에 능했고, 서계 홍건군은 수군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1357년, 송나라는 3개 방면으로 북벌을 시작했다. 모귀가 이끄는 동로군은 대도(大都)에 접근했고, 관탁 등이 이끄는 중로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을 일시 점령했으나 이성계 등의 반격으로 후퇴, 상도를 점령했다. 이 북벌은 원나라 군사력 약화와 내부 항쟁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두는 듯했으나, 원나라 군대의 반격으로 대패했고, 수도 개봉을 잃고 급속히 약화되었다.
서계 홍건적은 남하, 서진하여 강남을 장악하고, 중경의 명옥진을 선무하여 세력을 확장했지만, 1360년 서수휘가 부하 진우량에게 살해당하고 명옥진이 독립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곽자흥의 부하였던 주원장은 장사성에게 공격받은 한림아를 보호했다. 그러나 한림아는 실권이 없었고 1366년에 암살되었으며, 주원장에 의해 백련교 금교령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홍건적의 난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었고, 이후는 주원장에 의한 패권 확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홍건적은 백련교단을 모체로 했지만, 실제로는 도적과 유민의 집합체였으며, 통솔과 규율이 부족하여 폭도가 되어 도시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는 부대도 많았다. "한족의 부흥과 유토피아 실현"을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정책이 없어 한족 지식인층의 협력을 얻지 못한 것이 쇠퇴의 원인으로 보인다.
3. 3. 1. 장사성의 활동과 최후
張士誠|장사성중국어은 원래 소금 운반선에서 일하던 뱃사공이었다. 그는 소금 밀수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당시 정부의 소금 전매 정책에 대한 반항이었다. 1353년, 장사성은 동료들과 함께 부유한 소금 상인들을 공격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곧 가오유를 점령하고, 스스로를 성왕(誠王)이라 칭하며 대주(大周) 정권을 세웠다.원나라 조정은 장사성의 반란에 처음에는 회유책을 썼다. 장사성에게 고위 관직을 제안하며 반란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장사성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354년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원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1356년, 장사성은 쑤저우를 점령하고 이곳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그는 주원장과의 오랜 대립 관계에 들어갔다. 주원장은 장사성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에 대항하는 반란 세력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1363년, 주원장은 장사성의 근거지인 소주를 포위했다. 장사성은 10개월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장사성은 포로로 잡혔다. 그는 주원장의 근거지인 난징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3. 2. 방국진의 해적 활동과 투항
제시된 소스에는 방국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주어진 요약과 섹션 제목에 맞는 내용을 소스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3. 3. 3. 명옥진의 명하 건국과 멸망
명옥진은 중경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서계 홍건적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1360년에 서수휘가 그의 부하 진우량에게 살해당한 후, 명옥진은 독립하였고, 사실상 서계 홍건적은 해체되었다.[1]4. 원나라 군대의 대응과 진압 노력
토크토아가 파면된 후, 원나라 조정은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3][4] 여러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난립했다. 주요 군벌과 그들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군벌 | 출신 및 배경 | 주요 활동 | 최후 |
---|---|---|---|
차간 테무르 | 나이만(Naimans)족 출신 | 홍건적 상대 승리, 개봉(Kaifeng) 근거지 | 1362년 부하에게 암살[1] |
코케 테무르 | 차간 테무르의 양자 | 산둥성 탈환, 명나라와 전쟁 후 몽골로 후퇴[2] | 1375년 사망[3] |
볼라드 테무르 | 차간 테무르의 라이벌[1] | 코케 테무르 제거 시도 등 권력 다툼[1] | 1365년 암살 |
리쓰치 | 차간 테무르의 친구[1] | 코케 테무르와 대립[1] | 명나라에 항복[5] |
이들 외에도 나하추 등의 군벌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서로 대립하거나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4. 1. 토크토아의 개혁과 좌절
토크토아는 1340년 토곤 테무르 황제의 지지를 받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여 원나라 황제 뒤에서 주요 결정권자 역할을 했다. 재상으로서 그는 유교적 통치 방식을 지지하고 강력한 정부 활동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수도인 대도(Khanbaliq)에 장강 삼각주에서 생산된 곡물을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해 대운하(Grand Canal)를 수리하고 확장하려 했으나, 이 프로젝트의 실패와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해 비판을 받았고 1344년 6월 사임하게 되었다.1344년 여름 황하가 범람하여 회하 유역에 가뭄이 들었다. 토크토아의 후임인 베르케 부카는 이 위기에 대처하지 못했고, 해안에서 방국진의 반란이 일어나 수도로 향하는 대부분의 곡물 수송이 차단되면서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원말(元末)에 접어들면서 화북(華北) 중심으로 백련교가 세력을 확장했다. 백련교는 원래 불교의 한 종파였으나 세상이 혼란해짐에 따라 점차 과격해져 "원(元) 왕조 타도와 유토피아 실현"을 외치는 반체제적인 교단이 되었고, 1338년·1351년에는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나, 이러한 반란들은 소규모에 그쳤고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말기의 원(元)은 권신(權臣)이 황제를 옹립하고, 그 권신을 다른 권신이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일을 반복했기 때문에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통치 능력을 잃어갔다. 이 시기에는 흉작과 기근이 빈발했는데, 천재(天災)라기보다는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의한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다.
1348년, 방국진(方國珍)이 절강·복건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元)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隋)·당(唐) 시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전토의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의 수송이 두절되는 것은 치명상이 될 수 있었다. 정부는 토벌군을 보냈지만, 원래 초원 출신 민족인 몽골은 해전에 약했고, 토벌군 사령관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원(元)나라의 쇠퇴가 명백해지고, 반란에 대한 기운이 높아지게 된다.
4. 1. 1. 토크토아의 재등용과 파면
토크토아는 1349년 8월 토곤 테무르 황제의 지지로 재상에 다시 등용되었다. 1351년 4월, 토크토아는 황하와 대운하를 정비하기 위해 농민들을 대규모로 동원하려 했고, 이는 홍건적의 난으로 이어졌다.[1] 초기 반란군의 승리 이후 원나라 군대는 결집하여 1353년까지 대부분의 홍건적을 진압했다. 1353년 10월, 토크토아는 직접 서주를 탈환하여 반란군 팽달과 조준용을 호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2]그러나 1355년 1월, 토크토아가 장사성을 성공적으로 공격하는 도중에 궁정의 음모로 인해 파면되었다.[3] 그의 파면 이후 장사성에 대한 공격은 와해되었고, 원나라 조정은 자체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3][4]
4. 2. 차간 테무르의 활약과 암살
차간 테무르는 13세기 몽골의 중국 정복을 지원했던 나이만(Naimans) 족 출신으로, 허난성(河南) 동쪽 국경의 신구(沈丘)에 정착한 나이만 족의 4대손이었다. 본래 투르크계였으나, 홍건적의 난 시대에는 몽골과 중국 문화 모두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고, 때때로 이(李)씨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1340년대 후반, 차간 테무르는 반란군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1352년부터 홍건적을 상대로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고, 1358년과 1359년에는 한때 개봉(Kaifeng)을 근거지로 삼았다. 1350년대 말까지 차간 테무르는 몽골에 복무하는 가장 강력한 지역 지도자가 되었다.
4. 2. 1. 차간 테무르의 라이벌과 갈등
차간 테무르는 산시(山西)의 지휘관 볼라드 테무르(Bolad Temür)와 라이벌 관계였다. 볼라드 테무르는 차간 테무르를 돕지 않았고, 그를 타도하고 곽케 테무르(Köke Temür)를 제거하려 했다. 이로 인해 1365년 볼라드 테무르가 사망할 때까지 조정은 마비되었다.[1] 그 결과 차간 테무르는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움직였다.[1]차간 테무르는 1362년 전직 원(元) 장군이었던 천풍(田豐)과 왕석성(王士誠)에게 암살당했는데, 이들은 이후 반란군에 합류했다.[1]
4. 3. 코케 테무르의 등장과 한계
코케 테무르는 왕보보(Wang Baobao)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누이를 통해 차간 테무르의 양자이자 조카가 되었다. 1361년, 수도로 곡물을 운반한 공로를 인정받아 토곤 테무르에게서 코케 테무르라는 이름을 받았다.1362년, 양아버지 차간 테무르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었다. 반란군에게서 산둥성을 탈환하는 임무를 맡아 이두(Yidu)의 반란군 기지를 포위, 몇 달 후 성벽 아래에 터널을 파 함락시켰다. 차간 테무르를 암살한 천풍(Tian Feng)과 왕시청(Wang Shicheng)을 잡아 아버지 영혼에 제물로 바쳤다.
황태자 아이유시리다라를 제거하려는 보라드 테무르(Bolad Temur)의 궁중 암투로 코케 테무르는 궁정에서 소외되었다. 산시성에서 보라드 테무르와 전쟁을 벌여 1363년 승리했다. 보라드 테무르는 수도로 도망쳐 1364년 수도를 장악했으나, 1365년 8월 암살당했다. 코케 테무르는 아이유시리다라를 수도로 호송, 잠시 머물다가 허난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명나라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몽골로 후퇴하였다. 1373년 11월, 대동을 점령하려 시도했으나 서달에게 패배, 1375년 9월 카라코룸 북서쪽 카라 노카이(Khara Nokhai)에서 사망했다.[3]
4. 3. 1. 코케 테무르의 정적들과의 전쟁
코케 테무르는 리쓰치, 장량비(Zhang Liangbi), 토레베그(Törebeg), 공형(Kong Xing)과 전쟁을 벌였다. 이들 중 세 명은 보라드의 이전 동료였다.[1] 황제는 코케 테무르에게 그들을 무시하고 북쪽의 명나라로부터 방어하라고 명령했지만, 코케 테무르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1368년 2월, 코케 테무르는 면직되었고, 다른 군벌들은 그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코케 테무르는 이후 전투에서 승리하여 북쪽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로 남았다. 그러나 코케 테무르는 명나라와 충돌하여 4월 26일에 전투에서 패배했다. 칸발릭은 9월 20일에 명나라에 함락되었다. 원나라 황제는 코케 테무르에게 도망쳤고, 그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몽골로 후퇴했다.[2]5. 명나라의 건국
1348년 원나라에서 방국진이 해상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1351년 황하 개수 공사에 동원된 백련교도 홍건당이 봉기했고, 한산동은 미륵불을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했다.
한산동은 관군에 체포되었으나, 부하 유복통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각지를 노략질했다. 유복통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추대하고 국호를 송(宋)이라 했다.
1354년 토구다가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면서, 칸의 권력 회복에 의존하던 원나라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지휘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북벌을 시작했으나, 원나라 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좌절되었다. 일부 홍건군은 중앙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했다.
관선생과 파두반의 홍건적이 원나라 여름 도읍지 상도를 함락하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개봉을 원나라에 빼앗기고 요동으로 이동, 고려 영토까지 밀려났다.
주원장은 심만삼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을 격파하고, 난징을 근거지로 장강 유역 화남을 통일했다.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홍무라 정하니, 이가 곧 홍무제이다.[1] 홍무제는 즉시 북벌을 개시,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베이징)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은 명나라로 통일되었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원에서 쫓겨나고, 명나라가 한족 왕조를 복원했다.[1]
5. 1. 주원장의 성장과 세력 확장
원말(元末) 화북(華北) 지방을 중심으로 백련교(白蓮教)가 세력을 확장했다. 백련교는 본래 불교의 한 종파였으나, 세상이 혼란해지면서 점차 "원(元) 왕조 타도와 유토피아 실현"을 외치는 반체제적인 교단으로 변모했다. 1338년과 1351년에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 반란들은 소규모였고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원나라는 권신(權臣)들이 황제를 옹립하고, 그 권신을 다른 권신이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고 통치 능력을 잃어갔다. 이 시기에는 흉년과 기근이 자주 발생했는데, 이는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발생한 인재(人災)였다.
1348년에는 방국진(方國珍)이 절강과 복건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나라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수(隋)·당(唐) 시대부터 중국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수송이 끊기는 것은 원나라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원나라는 토벌군을 보냈지만, 몽골군은 해전에 약해 토벌군 사령관이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원나라의 쇠퇴가 명백해졌고, 반란의 기운이 높아졌다.
1357년, 송나라는 전군을 3개 길로 나누어 북벌을 시작했다. 모귀가 이끄는 동로군은 한때 대도(大都)에 접근했고, 관탁 등이 이끄는 중로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을 일시 점령했으나 이성계 등의 반격을 받아 개경을 버리고 전진하여 상도(上都)를 점령했다.
이 북벌은 원나라 측의 군사력 약화와 내부 항쟁 덕분에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지만, 곧 체제를 정비한 원나라 군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차간테무르(察罕帖木児)·보로테무르(孛羅帖木児) 등에 의해 북벌군은 대패했고, 수도 개봉을 잃고 급속도로 약화되어 안휘성 안풍(安豊)에서만 권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서계 홍건적은 남하, 서진하여 강남을 장악하고, 중경(重慶)의 명옥진을 선무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동계 홍건적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지만, 점차 내부 항쟁이 격화되었다. 1360년에 서수휘는 부하인 진우량에게 살해당했고, 명옥진이 독립하면서 사실상 서계 홍건적은 해체되었다.
곽자흥의 부하였던 주원장은 장사성에게 공격받은 한림아를 보호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한림아는 실권이 없었고 1366년에 암살되었으며, 동시에 주원장에 의해 백련교 금교령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홍건적의 난은 종결되었고, 이후는 주원장에 의한 패권 확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홍건적은 백련교단을 모체로 했지만, 실제로는 도적과 유민의 집합체였으며, 통솔과 규율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폭도처럼 도시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는 부대도 많았다. 또한 "한족의 부흥과 유토피아의 실현"을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정책이 없었고 한족 지식인층의 협력을 얻지 못한 것이 홍건적의 쇠퇴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5. 1. 1. 주원장의 홍건적 가담과 초기 활동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하였고, 1355년 '''소명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 두준도를 승상으로, 류복통은 평장으로 삼았다. 안휘의 곽자흥 등이 이에 호응하였으나, 이들은 홍건군 본대인 송과는 별도로 행동하며 각자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고, 심지어 수령들이 백련교를 믿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5. 1. 2. 남경 점령과 통치 기반 마련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며, 황하 토목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한산동은 처형되었다.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옹립하여 봉기하였고, 1355년에는 소명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1]두준도를 승상으로, 류복통은 평장이 되었다. 안휘의 곽자흥 등이 호응하였으나, 홍건군 본대인 송과는 행동을 달리하여 각각 자신의 세력 확장을 노리고 분열하였고, 수령들이 백련교를 믿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1]
이와는 별도로, 호북에서 승려 팽영옥에 의해 추대된 서수휘가 1351년에 일찍이 황제를 자칭하였고, 국호를 천완, 연호를 치평으로 정했다. 두 세력을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동계 홍건군, 후자를 서계 홍건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동계 홍건군은 기병 또는 보병에 의한 전투를 잘했고, 서계 홍건군은 수군을 중심으로 한 전투를 잘하는 경향이 있었다.[1]
5. 2. 명나라 건국과 원나라 멸망
주원장은 절강 출신의 부호 심만삼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 경쟁 세력을 차례로 격파하고 장강 유역의 화남 지역을 통일했다.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홍무라 정하니, 이가 곧 홍무제이다.[1] 홍무제는 건국 직후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수도 대도(베이징)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고, 이로써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로 통일되었다. 이로써 명나라는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한족 왕조를 부흥시켰다.[1]5. 2. 1. 주원장의 황제 즉위와 명나라 건국
1351년,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북송 휘종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며, 하남에서 황하 토목공사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거병 직전 발각되어 한산동은 처형되었다. 류복통 등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얼을 옹립하여 봉기하였고, 1355년에는 '''소명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송''', 연호를 용봉으로 정했다.[1]5. 2. 2. 북벌과 대도 함락
元末|원말중국어에 접어들면서 화북(華北) 중심으로 백련교가 세력을 확장했다. 원래는 불교의 한 종파였으나 세상이 혼란해짐에 따라 점차 과격해져 "원(元) 왕조 타도와 유토피아 실현"을 외치는 반체제적인 교단이 되었고, 1338년·1351년에는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들은 소규모에 그쳤고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말기의 원(元)은 권신(權臣)이 황제를 옹립하고, 그 권신을 다른 권신이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일을 반복했기 때문에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통치 능력을 잃어갔다. 이 시기에는 흉작과 기근이 빈발했는데, 천재(天災)라기보다는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의한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다.
1348년, 방국진(方國珍)이 절강·복건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元)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隋)·당(唐) 시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전토의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의 수송이 두절되는 것은 치명상이 될 수 있었다. 정부는 토벌군을 보냈지만, 원래 초원 출신 민족인 몽골은 해전에 약했고, 토벌군 사령관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원(元)나라의 쇠퇴가 명백해지고, 반란에 대한 기운이 높아지게 된다.
5. 2. 3. 원나라 잔존 세력 소탕
원나라 말기,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백련교가 세력을 확장했다. 백련교는 본래 불교의 한 종파였으나, 혼란한 세상을 틈타 점차 과격해져 "원나라 타도와 유토피아 실현"을 외치는 반체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338년과 1351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소규모에 그쳤고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원나라 말기에는 권신들이 황제를 옹립하고, 그 권신을 다른 권신이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일이 반복되어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고 통치 능력을 상실해 갔다. 이 시기에는 흉년과 기근이 자주 발생했는데, 이는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발생한 인재(人災)에 가까웠다.
1348년, 방국진(方國珍)이 절강과 복건에서 해적 행위를 하며 원나라의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隋)·당(唐) 시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전역의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으로부터의 수송이 막히는 것은 원나라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원나라 정부는 토벌군을 보냈지만, 본래 초원 출신 민족인 몽골족은 해전에 약했고, 토벌군 사령관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원나라의 쇠퇴가 명백해졌고, 반란의 기운이 높아지게 되었다.
6. 홍건적의 고려 침공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지휘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했으나, 원나라 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면서 일부 세력들이 중앙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관선생과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이 원나라 여름 도읍지였던 상도와 주변 지역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개봉을 원나라에 다시 빼앗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결국 원나라 군에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19]
홍건적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범했다. 1차 침입은 1359년 12월에 모거경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서경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군은 1360년 1월에 서경을 탈환했으나, 홍건적은 이후에도 황해도와 평안도 해안 지대를 노략질했다.[19]
1361년 10월, 원나라의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반성, 사류, 관선생, 주원수 등이 이끄는 20만 명의 홍건군은 개경을 함락시켰고, 공민왕은 복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1362년 1월,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한 고려군은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격퇴했다.[19]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났지만, 고려 역시 큰 피해를 입어 국력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6. 1. 1차 침입과 격퇴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0,000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고려군 사상자는 1,000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홍건적은 3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19]6. 1. 1. 홍건적의 침입과 서경 점령
1359년,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입했다.[19] 이들은 파죽지세로 의주, 정주, 인주, 철주 등 4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을 점령했다.[19]6. 1. 2. 고려군의 반격과 홍건적 격퇴
1359년(공민왕 8년), 홍건적이 4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입하여 서경(평양)을 점령하고 이듬해인 1360년까지 점령하였다.[19] 최영, 안우, 이방실 등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은 반격하여 홍건적을 거의 전멸시켰다.[19]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은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에 침입하여 수도 개경을 점령하고 이듬해인 1362년 초까지 점령하였으며, 강원도까지 침입하였다.[19] 이에 공민왕은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로 피난하였다.[19] 최영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고려군은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북쪽으로 격퇴하였다.[19]
6. 2. 2차 침입과 격퇴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0,000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으나,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이후 고려군에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홍건적은 3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이후 홍건적은 수군으로써 황해·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공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끌었으며, 병력은 200,000명이었다.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복주로 피난을 갔다. 고려는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반격을 준비했고,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 등이 이끄는 20만 고려군이 개경을 포위하여 탈환하고 홍건적을 격퇴하였다. 특히 이성계는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앞서 중국의 북서에서 만주 방면으로 진출한 홍건적의 무리들은 고려에서 전멸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 난은 고려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케 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6. 2. 1. 홍건적의 2차 침입과 개경 함락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20만 대군으로 고려를 다시 침략했다.[19]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절령(현재 평안북도 삭주군과 의주군 사이) 방어선을 돌파하고, 빠르게 남하하여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다.[19]고려 조정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으며, 공민왕은 복주(현재 경상북도 안동시)로 피난을 가야 했다.[19] 홍건적은 개경을 점령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362년 초, 최영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고려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북쪽으로 몰아냈다.[19]
6. 2. 2. 공민왕의 피난과 고려군의 반격 준비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강원도까지 침입당하자, 공민왕은 복주(현재 경상북도 안동시)로 피난했다.[19] 왕실과 정신들도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홍건적은 이듬해인 1362년 초까지 개경에 주둔했다.[19] 고려는 전국적으로 병력을 모집하여 반격을 준비했고,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했다. 최영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고려군은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북쪽으로 격퇴했다.[19]
6. 2. 3. 고려군의 개경 탈환과 홍건적 격퇴
1361년 겨울,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 등이 이끄는 20만 고려군은 개경을 포위하였다.[19] 홍건적은 고려군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으로 도망쳤다.[19] 고려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홍건적 지휘관 파두반을 생포하였다.[19]1362년 초, 공민왕은 개경으로 귀환하였다.[19]
6. 2. 4. 이성계의 활약과 두각
이성계는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당시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했다.[19] 그는 선봉에서 적장을 공격하고, 사유와 관선생을 사살하는 등 수도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19]7. 결론 및 역사적 의의
홍건적의 난은 원나라 말기인 1351년부터 1366년까지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의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홍건적은 백련교를 기반으로 한 종교적 색채를 띠었으며, 한산동과 유복통 등의 지도 아래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은 원나라의 부패와 몽골족의 한족 차별에 반발하여 봉기하였고, 초기에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354년 원나라의 대규모 토벌군을 이끌던 토구다가 경질되어 살해당하면서 원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357년 이후 홍건적은 내분과 원나라 군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부 세력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다.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고려 침입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2차 침입 때는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복주(현재의 안동)로 피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고려군은 정세운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특히, 이성계는 수도 탈환 작전에서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홍건적의 난은 고려의 국운을 쇠퇴하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고려 왕조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주원장은 다른 반란 세력들을 제압하고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지역의 복구를 위해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산서성 사람들이 허베이성, 허난성, 산둥성 등지로 강제 이주되었고, 이는 전설과 소설에도 기록되어 전해진다.[10][11][1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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