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청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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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산은 후한의 제후국인 청하의 왕으로, 낙안이왕 유총의 손자이자 청하공왕 유연평의 아들이다. 그는 태위 이고 등 대신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환관들의 미움을 샀다. 144년 청하왕에 봉해졌으며, 충제가 죽자 황손으로 옹립될 뻔했으나 환관들의 반대로 질제가 즉위했다. 이후 유산은 여러 차례 황제로 옹립될 기회를 얻었으나, 환관들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147년에는 유문과 유위가 유산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여, 유산은 위씨후로 강등되고 계양으로 유배되어 자결했다.
후한의 황족으로, 청하공왕 유연평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진중하고 품행에 절도가 있어 태위 이고 등 조정 대신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중상시 조등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 환관 세력의 미움을 샀다.
(내용 없음)
2. 생애
건강 원년(14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하왕에 봉해졌다. 영희 원년(145년), 충제가 붕어하자 태위 이고는 덕망 있는 유산을 다음 황제로 지지하며 대장군 양기를 설득했으나, 양기와 황태후 양납, 조등 등 환관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고 질제가 즉위하였다. 본초 원년(146년), 질제마저 붕어하자 다시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이번에도 조등이 양기를 설득하여 반대하면서 환제가 즉위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건화 원년(147년), 유문(劉文)과 유유(劉鮪) 등이 유산을 황제로 추대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청하국의 상 사고(謝暠)를 살해하는 등 소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은 유산은 결국 위씨후(尉氏侯)로 강등되어 계양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1. 가계와 성품
청하공왕 유연평의 아들이며, 낙안이왕 유총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진중하고 엄격하여 품행과 거동에 절도가 있었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태위 이고를 비롯한 조정의 여러 대신들로부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중상시 조등을 만났을 때 예를 갖추지 않아 환관 세력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
2. 2. 청하왕 즉위와 황제 옹립 논의
건강 원년(144년), 아버지 청하공왕 유연평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청하왕에 봉해졌다. 유산은 사람됨이 진중하고 품행에 절도가 있어 태위 이고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일찍이 중상시 조등을 만났을 때 예를 갖추지 않아 환관 세력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
영희 원년(145년), 충제가 붕어하자 유산은 낙양으로 소환되어 황위 계승 후보로 논의되었다. 태위 이고는 장성하고 덕망 있는 유산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장군 양기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양기와 황태후 양납은 이를 듣지 않았고, 조등을 비롯한 환관들의 반대까지 더해져 결국 질제가 황제로 옹립되었다. 유산은 다시 청하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본초 원년(146년), 질제마저 붕어하자 다시 한번 유산을 황제로 옹립하자는 논의가 공경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환관 조등이 양기를 설득하여 반대하였고, 결국 환제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건화 원년(147년), 감릉현의 유문(劉文)과 위군의 유유(劉鮪, 또는 유위)가 "청하왕 유산이 마땅히 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유산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청하국의 상이었던 사고(謝暠)를 붙잡아 협박했으나, 사고가 이를 거부하고 꾸짖자 그를 살해하였다. 유문과 유유는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어사는 유산을 탄핵하였고, 결국 유산은 위씨후(尉氏侯)로 강등되어 계양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3. 유문, 유유의 난과 죽음
건화 원년(147년), 감릉현 사람 유문(劉文)과 위군 사람 유위(劉鮪)가 결탁하여 유산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청하왕(유산)이 천자를 계승해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발각되었고, 유문 등은 청하국의 상이었던 사고(謝暠)를 붙잡아 왕궁의 사마문으로 끌고 가 협박했다. 그들은 사고에게 유산을 황제로 추대하는 데 협조할 것을 강요하며 "청하왕을 옹립하여 천자로 삼고, 사고를 공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고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들을 꾸짖자, 유문은 격분하여 사고를 찔러 살해하였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유문과 유위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어사는 유산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상소하여 탄핵했고, 결국 유산은 왕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위씨후(尉氏侯)로 강등되었다. 이후 계양으로 유배된 유산은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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