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척기
1. 개요
유척기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21년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후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호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사도세자 보호에 앞장섰으며, 이인좌의 난 진압에 기여하여 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당대의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지수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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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론 -
한원진
한원진은 송시열과 권상하의 제자이자 호론을 이끈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물성동이 논쟁에서 성 삼층설을 주장했으며, 숙종 때 관직에 진출하여 영조 때 소론을 비판하다 삭직된 후 학문에 전념하여 많은 저서를 남기고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호론 -
이간 (1677년)
이이명은 조선 후기 학자이자 문신으로, 권상하의 문인으로서 한원진과의 인물성 논쟁에서 인물동성론을 주장하며 낙론 형성에 기여했고, 숙종 때 익위를 지냈으며,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다. -
1691년 출생 -
박문수
조선 후기 문신 박문수는 소론 가문 출신으로 문과 급제 후 이인좌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암행어사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별견어사로 민생을 살피는 데 힘썼다. -
1691년 출생 -
칼 에밀 레벤하우프트
스웨덴의 귀족이자 군인인 칼 에밀 레벤하우프트는 네덜란드와 스웨덴 군에서 복무하며 소장까지 진급했으나, 러시아-스웨덴 전쟁의 부진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참수형을 당했다. -
1767년 사망 -
찰스 타운젠드
18세기 영국 정치인이자 재무장관이었던 찰스 타운젠드는 미국 독립혁명의 계기가 된 타운젠드 법을 제정하고 해군卿 위원회 위원, 왕실 회계장관, 무역위원회 제1卿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으며, 미국 식민지에 대한 과세 정책으로 식민지 반발을 야기했다. -
1767년 사망 -
계황후
청나라 건륭제의 황후인 계황후는 휘발나랍씨로, 황귀비에서 황후가 되었으나 강남 순행 중 머리를 자른 사건으로 폐위되어 시호도 받지 못했으며, 그녀의 성씨, 생년, 폐위 경위 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2. 생애
1721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경상남도 동래로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권력을 잡자 풀려나와 양주목사·함경도관찰사·강화유수·부제학·도승지·한성부좌윤·동지의금부사·황해도관찰사·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한 뒤에 호조판서·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신임사화로 죽은 김창집과 이이명의 복관을 건의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75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는 당론으로 사도세자의 제거를 세운 노론의 당론에 반대하여, 사도세자의 보호에 앞장섰으며 소론의 이종성과 만나 초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는 숙의 문씨가 임신, 출산하자 왕궁에 머무르며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다. 숙의 문씨가 자녀를 낳았을 때 축하인사 한마디 없었다는 이유로 영조에게 조회에서 심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지수재집>이 있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유척기는 1721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경상남도 동래로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권력을 잡자 풀려나와 양주목사, 함경도관찰사, 강화유수, 부제학, 도승지, 한성부좌윤, 동지의금부사,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이후 호조판서·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신임사화로 죽은 김창집과 이이명의 복관을 건의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론으로 사도세자의 제거를 세운 노론의 당론에 반대하여, 사도세자의 보호에 앞장섰으며 소론의 이종성과 만나 초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는 숙의 문씨가 임신, 출산하자 왕궁에 머무르며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다. 숙의 문씨가 자녀를 낳았을 때 축하인사 한마디 없었다는 이유로 영조에게 조회에서 심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지수재집>이 있다.
2.2. 관직 생활과 정치 활동
1721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경상남도 동래로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권력을 잡자 풀려나와 양주목사, 함경도관찰사,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부제학, 도승지, 한성부좌윤, 동지의금부사,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한 뒤에 호조판서,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신임사화로 죽은 김창집과 이이명의 복관을 건의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75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는 당론으로 사도세자의 제거를 세운 노론의 당론에 반대하여, 사도세자의 보호에 앞장섰으며 소론의 이종성과 만나 초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는 숙의 문씨가 임신, 출산하자 왕궁에 머무르며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다. 숙의 문씨가 자녀를 낳았을 때 축하인사 한마디 없었다는 이유로 영조에게 조회에서 심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2.3. 사도세자 보호 노력과 당론 대립
유척기는 노론의 당론에 반대하여 사도세자 보호에 앞장섰다. 소론의 이종성과 만나 초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는 숙의 문씨가 임신, 출산하자 왕궁에 머무르며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다. 숙의 문씨가 자녀를 낳았을 때 축하인사 한마디 없었다는 이유로 영조에게 조회에서 심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3. 가계
증조부는 유성증(兪省曾)이고, 조부는 유철(兪㯙)이다. 아버지는 유명악(兪命岳)이며, 어머니는 이두악의 딸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이다. 장남은 유언흠(兪彦欽), 차남은 유언현(兪彦鉉)이고, 며느리는 청송 심씨로 이조판서 심택현(沈宅賢)의 딸이다. 삼남은 유언진(兪彦鉁), 사남은 유언수(兪彦銖)이다. 손녀는 기계 유씨이고, 손녀사위는 청송 심씨 심풍지(沈豊之)로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이조판서 심택현(沈宅賢)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