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궁
1. 개요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건립된 사당으로, 숙빈묘로 시작하여 육상묘를 거쳐 육상궁으로 승격되었다. 고종 때 다른 후궁들의 사당이 합설되었으며, 여러 차례 화재를 겪은 후 재건되었다. 1908년 다른 사당들의 신위가 옮겨져 칠궁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는 정빈 이씨의 신궁인 연호궁과 함께 정숙하고 소박한 한국 정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육상궁은 조선시대 묘사 제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왕을 낳았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들의 삶과 사후 추존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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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사적 |
|---|---|
| 지정 번호 | 149 |
| 지정일 | 1966년 3월 22일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2 (궁정동) |
| 시대 | 조선시대 |
| 소유 | 문화재청 |
| 면적 | 26,342m² |
| 문화재청 ID | 13,01490000,11 |
|---|
| 설명 | 육상궁 권역에 조성된 신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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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의 사당 -
종묘
종묘는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왕실의 권위와 유교적 이념을 반영한 건축물이며,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사적 제125호이다. -
서울특별시의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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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때 건립되어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을 기리는 유교 사당으로,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등의 시설을 갖추고 동방 18현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석전대제가 거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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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한국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국의 명청시대까지 존재했으며, 현재는 한국의 사직단 터 일부와 중국 베이징의 사직단이 남아 각 지역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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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왕실의 권위와 유교적 이념을 반영한 건축물이며,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사적 제125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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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
옻칠은 우루시올을 주성분으로 하는 천연 수지로 만든 도료로, 동아시아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마감재이며, 단단하고 견고하며 아름다운 광택을 내는 특징이 있으며, 가구, 그릇, 악기 등 다양한 생활용품과 예술품 제작에 사용되고, 옻칠은 우수한 내구성과 방수성을 지니지만, 자외선에 약하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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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동국대학교는 1906년 명진학교로 시작하여 여러 캠퍼스를 운영하며 불교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하고 특성화된 학과와 부속 기관을 갖춘 대한민국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2. 역사
육상궁의 역사는 크게 건립 초기, 네 궁과의 합설, 칠궁으로의 확장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 건립 초기: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1725년(영조 1년)에 숙빈묘를 건립했다. 이후 1744년(영조 20년) 육상묘로 칭호를 바꾸고, 1753년(영조 29년)에는 육상궁으로 승격시켰다.
* 네 궁과의 합설: 고종 7년(1870)에는 희빈 장씨의 대빈궁, 정빈 이씨의 연호궁, 영빈 이씨의 선희궁, 의빈 성씨의 사우를 옮겨 함께 모셨다. 그러나 1878년과 1881년 두 차례의 화재로 큰 피해를 입고 복구되었다.
* 칠궁으로 확장: 1908년 흩어져 있던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의 신위가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이전되면서 현재의 칠궁이 되었다.
2.1. 건립과 육상궁
영조는 왕이 되기 전 거처인 창의궁에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려 했으나, 왕이 머물던 곳에 신하의 사우(祠宇)를 쓸 수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영조는 곧 북부 순화방에 청릉군(靑陵君) 이모(李模)의 아들 이언형의 집을 사들여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725년(영조 1년)에 숙빈묘(淑嬪廟)를 완공하였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의 지위를 공적 지위로 승격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나갔고, 1744년(영조 20년)에는 칭호를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영조 29년)에는 능과 묘를 각각 소령원과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하였다.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가 사망한 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의 지위를 왕후의 반열에 올렸다.
2.2. 네 궁과의 합설
고종 7년(1870)에는 희빈 장씨의 대빈궁(大嬪宮), 정빈 이씨의 연호궁(延祜宮), 영빈 이씨의 선희궁(宣禧宮), 의빈 성씨의 사우를 옮겨 함께 모셨다. 그런데 8년 후인 고종 15년(1878) 9월에 화재로 123칸이 소실되었다. 육상궁도 피해를 입어 이듬해 67칸 규모로 축소하여 복원하였다.
그러나 재건 3년 뒤인 고종 18년(1881) 8월 1일 다시 발생한 화재로 정전의 신주까지 피해를 보았다. 이번 피해는 재정상의 이유로 한 달 이상 공사가 지연되다가 다음 해에 복원되었다.
2.3. 칠궁이 되다
1907년 순종 1년에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亭祝釐正)에 관한 건(件)’으로 제전 축소와 합사가 이루어졌다. 이듬해 1908년에는 흩어져있던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의 신위가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다. 1929년에는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귀비의 덕안궁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서 육상궁은 칠궁이 된다.
3. 건축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인 연호궁은 육상궁 건물에 숙빈 최씨와 함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된 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은 저경궁이다.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은 대빈궁이다.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된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은 선희궁이고,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은 경우궁이며, 이 두 신위는 한 건물에 모셔져 있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신위를 모신 신궁은 덕안궁이다.
육상궁 등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3.1. 건물 구성
육상궁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사당이며 연호궁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있다. 육상궁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을 두고 나지막한 곡담이 둘러싸고 있으며, 왼쪽으로 네 채의 사당이 앞뒤로 각기 독립하여 서로 접하여 서 있다. 이들 건물 앞쪽에 재실(齋室)과 정문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연호궁, 육상궁, 덕안궁, 경우궁, 선희궁, 대빈궁, 저경궁이 각각 대략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 있는 냉천과 냉천정(冷泉亭), 그리고 주변의 뜰은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전통적인 한국 정원의 일면을 보여주며 주위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3.2. 조경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쪽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연호궁, 육상궁, 덕안궁, 경우궁, 선희궁, 대빈궁, 저경궁이 각각 대략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 있는 냉천과 냉천정 주변의 뜰은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전통적인 한국 정원의 일면을 보여주며 주위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3.3. 위치와 접근성
이곳은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지만, 부근에 청와대가 들어서면서 경복궁 권역이 축소되어 경복궁 담장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34년간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어 오다가, 2001년 11월 말부터 부분적으로 공개되고 있다.
4. 의의
육상궁은 종묘와 함께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왕을 낳았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들의 삶과 사후 추존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