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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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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빈 성씨는 조선 정조의 후궁으로, 1753년에 태어나 1786년에 사망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효의왕후를 배려하여 승은을 거절하기도 했다. 1782년 아들 문효세자를 낳아 소용이 되었고, 이듬해 의빈으로 진봉되었다. 문효세자는 요절했고, 의빈 역시 1786년 임신 중 사망했다. 정조는 그녀의 묘비명을 직접 짓고, 사당을 세워 애도했다. 의빈 성씨는 칠궁에 신위가 모셔졌으며, 여러 드라마, 소설, 웹툰 등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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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의빈 성씨
한글 이름의빈 성씨
한자 이름宜嬪 成氏
로마자 표기Uibin Seongssi
한국어 표기 (한글)의빈 성씨
한국어 표기 (한자)宜嬪 成氏
일본어 표기 (히라가나)ぎひん せいし
일본어 표기 (가타카나)위빈 ソンシ
영어 표기Royal Noble Consort Ui-bin of the Seong Clan
본명성덕임
한자 본명成德任
로마자 본명Seong Deokim
출생일1753년 8월 6일
출생지조선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사망일1786년 11월 4일
사망지조선 한성 창덕궁 중희당
매장지의빈묘, 서삼릉, 고양시, 경기도
종교한국 불교
가문창녕 성씨
혼인 가문전주 이씨
배우자정조
자녀이순, 문효세자, 옹주
아버지성윤우
어머니부안 임씨
작위 정보
지위조선 정조의 후궁
작위 변천상의 (미상 ~ 1782년)
소용 (1782년 ~ 1783년)
의빈 (1783년 ~ 1786년)
사당의빈궁
안현궁
재위 기간1782년 ~ 1786년 11월 4일
봉호정1품 빈
묘 정보
묘소 명칭의빈창녕성씨지묘
이전 위치효창원 왼쪽 언덕
현재 위치서삼릉 빈·귀인 묘역

2. 생애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성덕임(成德任)이다.[12] 1753년 음력 7월 8일 태어나 아버지 성윤우(成胤祐)와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의 인연으로 영조 때 궁녀로 입궁하여 혜경궁 홍씨를 모셨다. 1773년에는 정조의 누이 청연공주, 청선공주 등과 함께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을 국문으로 필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1][2]

1766년경부터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비 효의왕후를 의식하여 두 차례 승은을 거절하였다. 이후 1782년(정조 6년) 음력 9월 7일, 궁녀 신분으로 문효세자를 출산하고 같은 날 내명부 종3품 소용(昭容)에 봉해져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 되었다.[12] 이듬해인 1783년 2월에는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승격되었고, 정조는 직접 '의(宜)' 자를 써서 의빈(宜嬪)이라는 빈호를 내렸다.[1]

1784년(정조 8년)에는 옹주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아들 문효세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86년(정조 10년) 음력 5월 11일 문효세자홍역으로 요절하였고,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세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는 같은 해 음력 9월 14일 간경화로 사망하였다.[3] 정조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애도했다.[3]

사후 의빈의 소망에 따라 묘소는 아들 문효세자의 묘가 있는 효창원(현재의 효창공원) 인근에 마련되었으나,[12] 1944년 일제강점기경기도 고양시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강제 이장되었다.[4] 신위는 칠궁(七宮) 내 의빈궁(宜嬪宮)에 모셔졌으며,[12] 1908년 제사 제도 개정으로 칠궁에서 공식 제외되었으나 명칭은 유지되고 제사는 이어졌다.

2. 1. 초년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여 생활했다. 1773년에는 정조의 누이인 청연공주, 청선공주 등과 함께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을 한글로 필사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1][2] 기록에 따르면 1766년경부터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으나, 정식 왕비인 효의왕후를 의식하여 정조의 승은을 사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 1. 1. 출생 및 집안 배경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13]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다.[13] 아버지는 성윤우(成胤祐)이며, 어머니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부안 임씨(扶安 林氏)이다.[13] 의빈 성씨가 4살이 되던 1756년(영조 32년)에 어머니 부안 임씨는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6]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의빈의 집안은 한미했다. 고조부 성경(成景)은 군자감 정(정3품)을 지냈으나, 증조부 성근립(成謹立)과 조부 성수산(成壽山)은 생전에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들은 훗날 각각 이조참판(종2품)과 이조판서(정2품)로 추증되었다.[14]

아버지 성윤우[15]는 젊은 시절 정조의 외조부인 영풍부원군 홍봉한(洪鳳漢)[16]과 승지 한준증(韓俊增)의 청지기(개인 집사)를 지냈으며, 미포아문의 하급 관리로 있기도 했다.[17] 의빈이 태어날 무렵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홍봉한의 가신으로 일하고 있었다.[1] 이후 1753년(영조 29년) 교련관으로 무관직에 올라[18] 1754년(영조 30년) 경복궁 가위장,[19] 1755년(영조 31년) 절충장군(정3품),[20] 가선대부(종2품)를 거쳐[21] 1761년(영조 37년) 첨절제사(종3품)에 이르렀으나,[22] 같은 해 횡령 혐의로 사직하였다.[1] 성윤우는 1769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성윤우는 세 번 혼인했다. 첫 부인 장흥 마씨(長興 馬氏)는 1769년 성윤우와 합장되었고,[24] 두 번째 부인인 부안 임씨(扶安 林氏)는 의빈의 생모이다. 세 번째 부인은 단양 지씨(丹陽 池氏)였다.

의빈에게는 4명의 오빠와 1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첫째 오빠 성담(成湛)은 무과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오르기 전에 사망했고,[27] 둘째 오빠 성협(成浹)은 절충장군(정3품),[28] 셋째 오빠 성완(成浣)은 부사용(종9품)에 올랐다.[29] 넷째 오빠 성숙(成淑)은 무과에 합격하지 못했다. 막냇동생 성흡(成洽)은 만호(종4품)를 지냈다.[30] 외조부 임종주(林宗胄)는 통례원 인의(종6품)를 지냈고 사후 통덕랑(정5품)으로 증직되었다.[25]

2. 1. 2. 궁녀 입궁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이름은 성덕임(成德任)이다.[12] 1753년 음력 7월 8일 아버지 성윤우(成胤祐)와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아버지 성윤우는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집안의 청지기(廳直)였으며, 이 인연으로 1762년(영조 38년) 10세의 나이에 궁녀로 입궁하여[34]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시녀가 되었다고 한다. 혜경궁이 직접 덕임을 아꼈다고 전해진다.[34] 다른 기록에는 아버지 성윤우가 재정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혜경궁 홍씨가 덕임을 거두었다는 설도 있으나,[35]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입궁 후 1773년에는 정조의 누이동생인 청연공주(淸衍公主)와 청선공주(淸璿公主) 등과 함께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 10권 10책을 한글로 필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1][2]

2. 2. 궁녀 생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아버지는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 집안의 일을 도왔는데, 이 인연으로 혜경궁 홍씨(정조의 생모)의 도움을 받아 10세 때인 1762년 궁녀로 입궁하여 혜경궁 홍씨의 시녀가 되었다.[12]

1773년에는 정조의 누이인 청연공주, 청선공주 등과 함께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을 국문으로 필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1][2] 이는 그녀가 궁녀로서 활동한 기록 중 하나이다.

1766년경부터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으나, 정비인 효의왕후가 아직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승은을 사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어느 시점에 정조의 총애를 받아 내명부 정5품 상의(尙儀)로 승진하였으며, 1780년에서 1782년 사이에 두 번의 임신과 유산을 겪었다는 기록이 있다.

1782년(정조 6년) 음력 9월 7일(양력 10월 13일), 마침내 궁녀의 신분으로 첫 아들인 이순(문효세자)을 낳았다. 같은 날 정조는 성씨를 내명부 종3품 소용(昭容)으로 책봉하여 정식 후궁으로 삼았다. 아들 이순은 그해 12월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이듬해인 1783년, 성소용은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승격되었고, 정조는 직접 '의(宜)'(마땅하다, 알맞다)라는 글자를 넣어 '의빈(宜嬪)'이라는 빈호를 내렸다.[1]

1784년 음력 3월 20일에는 딸(옹주)을 낳았으나, 이듬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음력 7월 2일에는 아들 이순이 왕세자로 정식 책봉되었다. 그러나 1786년(정조 10년) 음력 5월 11일, 문효세자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세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는 같은 해 음력 9월 14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며, 생전 의빈의 소망에 따라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문효세자의 묘 (효창원) 근처에 묻어주었다.[12]

2. 2. 1. 첫 번째 승은 거절

1766년(영조 42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궁녀였던 성덕임에게 승은(承恩)을 내리고자 했다.[38] 이는 정조가 1765년(영조 41년) 11월부터 감기, 복통, 피부질환, 담증 등 여러 병증으로 고생하다가 1766년 6월에야 겨우 건강을 회복한 직후였다.[37]

그러나 성덕임은 당시 세손빈이었던 효의왕후가 아직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울면서 거절했다.[38] 그녀는 "세손빈(효의왕후)께서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명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사양했다.[38] 정조는 성덕임의 뜻을 존중하여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38] 다른 기록에 따르면, 성덕임은 1766년경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지만 정비인 효의왕후를 배려하여 사양했다고도 전해진다.

2. 2. 2. 《곽장양문록》 필사

1773년 (영조 49년), 당시 궁녀 신분이었던 성덕임은 정조의 누이인 청연공주, 청선공주 및 다른 궁녀들(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국문으로 필사하였다.[41][1][2] 이 필사본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필사 시기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국문 필사 소설로 평가받는다. 특히, 성덕임이 직접 필사한 부분의 아래쪽에는 '의빈 글시'라는 표시가 남아 있어 그녀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41]

2. 3. 후궁 생활

1762년 10세의 나이로 궁녀로 입궁하여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시녀가 되었다. 이는 아버지 성윤우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 집안의 사람이었던 인연 덕분이었다. 1773년에는 정조의 누이인 청선공주, 청연공주 등과 함께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 10권 10책을 한글로 필사하기도 했다.[1][2]

1766년경부터 정조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으나, 정비 효의왕후를 의식하여 두 번이나 승은을 거절하였다. 이후 1781년 세 번째 권유 끝에 승은을 받아들여 후궁이 되었다. 승은을 입기 전인 1782년 8월 26일 이전에는 이미 정5품 상의(尙儀)에 봉해져 있었다.[46]이재난고》의 기록에 따르면 1780년1781년에 임신했으나 유산한 것으로 추정된다.[42][43]

1782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 아들 문효세자를 낳았고[47] 같은 날 정3품 소용(昭容)에 봉해지며 정식 후궁이 되었다.[47] 이듬해인 1783년 2월(음력)에는 정1품 빈(嬪)으로 승격되었으며, 정조는 여러 후보 빈호(嬪號) 대신 직접 '의(宜)' 자를 선택하여 의빈(宜嬪)이라 칭하게 하였다.[45][1] 1784년 3월 20일(음력 윤 3월 20일)에는 옹주를 낳았으나,[59] 이 옹주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은 해 5월 12일(음력)에 경기(驚氣)로 요절하였다.[64][12][1] 아들 문효세자1784년 7월 2일(음력)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61]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 홍역으로 다섯 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71]

아들 문효세자가 죽은 지 불과 4개월 뒤인 1786년 9월 14일(음력), 의빈 성씨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3] 정조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을 지어 애도의 마음을 표현했다.[3] 의빈의 묘는 처음 효창원(현재의 효창공원) 내 문효세자 묘 근처에 마련되었으나,[12] 1944년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강제 이장되었다.[4] 신위는 칠궁 내 의빈궁(宜嬪宮)에 모셔졌으며,[12] 1908년 제사 제도 개정으로 칠궁에서 공식 제외되었으나 명칭은 유지되고 제사는 이어졌다.

2. 3. 1. 두 번째 승은 거절 후 승낙

1766년경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으나, 정비인 효의왕후를 배려하여 사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원빈 홍씨화빈 윤씨가 후궁으로 간택되고 난 후인 1781년(정조 5년), 정조는 다시 성덕임에게 승은을 내렸으나 그녀는 거듭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는 방법을 사용했고, 결국 성덕임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다.[44]

한편,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1780년(정조 4년) 12월에 이미 성덕임으로 추정되는 나인이 임신한 지 여러 달 되었고[42], 1781년(정조 5년) 7월에도 임신 중이었다는 기록이 있다.[43] 이는 정조가 《어제의빈묘지명》에서 합궁한 달에 바로 문효세자를 임신했다고 기록한 것[44]과는 차이가 있다.

2. 3. 2. 후궁 봉작

정조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의빈 성씨는 두 번이나 이를 거절했다. 1781년(정조 5년) 원빈 홍씨화빈 윤씨가 간택된 후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하였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결국 승은을 받아들였다.[44] 승은을 입기 전인 1782년 8월 26일 이전에 이미 정5품 상의(尙儀)에 봉해져 있었다.[46]

1782년(정조 6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 아들 문효세자를 낳았다.[47] 같은 날 정조는 성씨를 정3품 소용(昭容)에 봉하며 정식 후궁으로 삼았다.[47] 그해 12월(음력) 작호(爵號)를 올리는 논의가 도목정사에서 이루어졌고,[48] 이듬해인 1783년(정조 7년) 2월(음력) 정1품 빈(嬪)으로 승격되었다.

정조는 좌의정 이복원과 우의정 김익에게 빈호(嬪號)를 의논하게 하였다.[49] 이들은 철(哲), 태(泰), 유(裕), 흥(興), 수(綏) 등의 글자를 제안했으나, 정조는 직접 '의(宜)' 자로 결정하였다.[45][1]

2. 3. 3. 문효세자와 옹주 출생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은 1766년경으로 추정되나[1], 정비인 효의왕후를 배려하여 승은을 사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780년에서 1782년 사이 두 번의 유산을 겪기도 했다.

1782년(정조 6년) 8월 26일 이전에 이미 정5품 상의(尙儀)의 지위에 있었다.[46] 같은 해 9월 7일 인시(새벽 3시~5시), 창덕궁의 연화당(蓮花堂)에서 첫 아들인 이순(李㝄)을 낳았다.[52][1] 연화당은 인경궁의 전각을 옮겨 지은 건물 중 하나로 당시 매우 화려했다고 전해진다.[53][54] 출산 당일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보내 해산을 도왔다.[55] 정조는 "궁인 성씨가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50],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56] 라고 기쁨을 표현했다.

문효세자 출생 당일, 성씨는 정3품 소용(昭容)으로 봉해지며 정식 후궁이 되었다.[47][50] 1783년(정조 7년)에는 정1품 의빈(宜嬪)으로 진봉되었다. 빈(嬪)의 호칭을 정할 때 정조는 좌의정 이복원(李福源)과 우의정 김익(金熤)에게 의논하여 정하라고 했으나[49] 직접 '의(宜)'라는 글자를 선택했다.[45][1]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 묘시(새벽 5시~아침 7시)에는 옹주를 낳았다.[59] 정조는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59] 라고 말했다. 출산이 임박해서야 호산청이 설치되었으며, 이 옹주는 이름 없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절했다.[12][1]

문효세자 출생을 위해 설치되었던 호산청(護産廳)은 9월 7일에 설치되어[52] 9월 13일에 철수했으며[58], 해산을 도운 의관 강명길(康命吉), 변관해(卞觀海), 탕약서원 신정희(申正希), 범경문(范慶文), 의녀 설매(雪梅), 일애(日愛) 등에게는 관직이 내려졌다.[57]

2. 3. 4. 문효세자 책봉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새벽, 당시 궁인이었던 의빈 성씨는 창덕궁 연화당에서 아들 문효세자(이름: 이순)를 낳았다.[52] 이는 정조의 첫 아들이었다. 정조는 문효세자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같은 날 성씨를 정3품 소용(昭容)으로 봉하고,[50]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심경을 밝혔다.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50]

또한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56], "많고 많은 일 중에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라고 기쁨을 표현했다.[56]

출산을 위해 8월 26일에는 공조판서 서유경(徐有慶)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고,[51] 9월 7일에는 호산청이 설치되어 출산을 도왔다.[52] 혜경궁 홍씨도 자신의 본가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보내 해산을 지원했다.[55] 출산 후 호산청 의관 강명길(康命吉), 변관해(卞觀海) 등 관련자들에게 벼슬이 내려졌고,[57] 9월 13일에 호산청은 철수했다.[58]

문효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이 채 되지 않은 1782년 11월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60] 이후 1784년(정조 8년) 7월 2일에는 왕세자로 정식 책봉되었고,[61] 같은 해 8월에는 정조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에 지은 중희당에서 왕세자 책봉 예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62][63]

2. 3. 5. 자녀 요절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 의빈 성씨는 둘째 아이인 옹주를 낳았다.[59] 정조는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59] 라며 기쁨을 표했다. 그러나 이 옹주는 태어난 지 약 2개월 만인 1784년 5월 12일, 궁궐 밖 피우(避寓)하던 곳에서 경기(驚氣)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64] 정조는 옹주를 잃은 슬픔에 다음 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66] "나는 잊겠다.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없겠는가. 다만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께 슬픔을 끼친 것이 매우 걱정스럽다."[65] 라고 말하며 혜경궁 홍씨의 슬픔을 염려하기도 했다. 옹주의 장례는 당시 정조의 신임을 받던 무관 임율(任嵂)이 주관했다.[67]

2년 뒤인 1786년(정조 10년)에는 첫째 아들 문효세자마저 홍역에 걸렸다. 5월 3일 발병하여 의약청이 설치되었고,[68] 5월 6일에는 증상이 잠시 호전되어 의약청을 철수하고 정조종묘에 고유제를 지내고 사면령을 내리는 등 기뻐했으나,[69][70] 5월 10일부터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결국 다음 날인 5월 11일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71]

2. 3. 6. 사망

옹주는 1784년(정조 8년) 5월 12일 신시(오후 3~5시)에 경기(驚氣)로 갑자기 사망했다.[64] 혜경궁 홍씨는 손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며[65], 정조 역시 슬픔으로 인해 다음 날인 5월 13일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66] 옹주의 장례는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던 무관 임율(任嵂)이 주관했다.[67]

문효세자는 1786년(정조 10년) 5월 3일에 홍역을 앓기 시작하여 의약청이 설치되었으나[68], 증세가 악화되어 5월 11일 미시(오후 1~3시)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1]

아들 문효세자의 상(喪)을 당한 지 불과 4개월 만인 1786년(정조 10년) 음력 9월 14일, 의빈 성씨는 임신 중인 상태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3] 당시 임신 마지막 달이었으며, 태중의 아이도 함께 사망했다. 정조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을 지어 애도의 마음과 각별했던 사랑을 표현했다.[3]

의빈 성씨의 묘소는 처음에는 아들 문효세자의 묘소인 효창묘(孝昌墓)에서 약 100보 떨어진 곳에 마련되었다.[12] 이 묘역은 고종 7년에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되었으며,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 자리에 해당한다. 정조는 이곳에 2만 6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4년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는 묘소를 경기도 고양시서삼릉으로 강제로 이장하였다.[4] 이 과정에서 문효세자는 숙부 의소세자 옆에 안장되었고, 의빈 성씨는 약 2km 떨어진 후궁 묘역에 안장되어 현재 '의빈묘(宜嬪墓)'로 불리고 있다.[4]

의빈 성씨의 신주는 칠궁(七宮, 사적 제149호) 내 의빈궁(宜嬪宮)에 봉안되었다. 순종 2년(1908년) 제사 제도 개정으로 의빈궁은 폐쇄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제사는 계속 이어졌다.

3. 사후

의빈 성씨가 사망한 후,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그녀의 가족에 대한 추증 논의가 있었다. 1784년(정조 8년) 형조 판서 조시준(趙時俊)[88]과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은 문효세자의 사친(私親, 생모)인 의빈 성씨의 본가를 증직(贈職, 사후 관직을 추증하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속대전》에 왕세자의 사친 3대를 추증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1785년(정조 9년) 좌의정 홍낙성이 다시 증직을 추진했지만, 정조는 여러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자 사친의 부친을 추증할 만한 명확한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고, 과거 선조(先祖)의 하교는 일시적인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89] 또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추증 사례와 비교하며 어디에 추증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 문효세자가 이미 효의왕후의 아들로 입적되었으므로 사친 집안의 추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90] 그해 12월 홍낙성이 재차 아뢰었으나, 정조는 급한 일이 아니니 다음 해 봄을 기다리자며 또다시 미루었다.[91]

결국 문효세자가 사망한 후인 1786년(정조 10년),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 왕세자 사친 본가의 증직은 법전에 규정되어 있고, 곧 《선원보략》(璿源譜略, 왕실 족보)을 수정할 예정이니 문효세자 사친 본가를 추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조는 마침내 이를 승낙했다.[92]

이에 따라 의빈 성씨의 증조부 성근립(成謹立)은 이조참판(종2품), 증조모 충주 유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조부 성수산(成壽山)은 이조판서(정2품), 조모 김해 김씨창원 황씨는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좌찬성(종1품), 어머니 부안 임씨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다만 의빈의 전어머니(前母)인 장흥 마씨와 새어머니(繼母)인 단양 지씨가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3. 1. 예장

아들 문효세자의 상(喪)을 치른 지 4개월 만인 음력 1786년 9월 14일, 다섯 번째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는 임신 마지막 달에 병으로 사망하였다.[3] 태어나지 못한 아이도 함께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직접 그녀의 묘비명을 지어 깊은 슬픔과 애정을 표현했으며, 그녀는 정조의 여러 후궁 중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으로 전해진다.

묘소는 안현궁(安顯宮) 터에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아들 문효세자의 묘소인 효창묘(孝昌墓)에서 약 100보 떨어진 곳에 안장되었다. 고종 7년에 문효세자의 묘가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되었다. 정조는 묘역 주변에 나무 2만 6천여 그루를 심었는데, 이 자리가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효창공원이다.[4]

1944년 일제강점기문효세자의 효창원과 의빈 성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조선왕릉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었다.[4] 이때 문효세자는 숙부인 의소세자 곁에 묻혔고, 성의빈은 약 2km 떨어진 후궁 묘역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녀의 묘소는 의빈묘(宜嬪墓)로 불린다.[4]

성의빈의 신주는 칠궁(七宮, 사적 제149호) 내의 의빈궁(宜嬪宮)에 봉안되었다. 순종 2년(1908년) 제사 제도가 개정되면서 의빈궁은 칠궁에서 제외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제례는 계속 이어졌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의빈 성씨가 아들 옆에 묻힌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 매장 당시에는 효창원 경내였지만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드라마 방영 당시 묘소 방문 문의가 많아, 방영 종료 후 "현재 서삼릉 후궁 묘역에 다른 후궁들과 함께 있으며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는 안내가 공지되었다. 또한 드라마에서 의빈 성씨를 도화서 궁녀 출신으로 설정한 것은 허구이다.

3. 2. 묘소

1786년(정조 10년) 9월 14일, 문효세자를 잃은 지 4개월 만에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사망하였다.[3] 정조는 의빈 성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묘비명을 지어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의빈 성씨의 묘소는 생전 그녀의 소망에 따라 아들 문효세자의 묘(당시 효창묘, 이후 고종 대에 효창원으로 격상)가 있는 효창원 왼쪽 산등성이, 약 100보 떨어진 곳에 마련되었다.[12] 이 지역은 안현궁(安顯宮) 터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해당한다. 정조는 묘역 주변에 나무 2만 6천여 그루를 심으며 정성껏 가꾸었다.

그러나 1944년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는 효창원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를 강제로 이장하였다.[4] 문효세자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서삼릉 경내 의소세자 묘 옆으로 옮겨졌고, 의빈 성씨의 묘는 그곳에서 약 2km 떨어진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어 다른 후궁들과 함께 안장되었다.[4] 현재 의빈 성씨의 묘소는 '의빈묘(宜嬪墓)'로 불리며, 서삼릉 후궁 묘역 내에 위치하여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한편, 의빈 성씨의 신위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한 칠궁(七宮, 사적 제149호) 내 의빈궁(宜嬪宮)에 봉안되었다. 대한제국 순종 2년(1908년) 제사 제도가 개정되면서 의빈궁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칠궁 내 전각의 명칭으로 남아 제사는 계속 이어졌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의빈 성씨가 아들 문효세자 바로 옆에 묻힌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묘소가 조성되었다. 드라마 방영 이후 묘소 위치에 대한 문의가 많아지자, 현재 서삼릉 후궁 묘역에 비공개로 안장되어 있다는 내용이 알려지기도 했다.

3. 3. 사당

1786년(정조 10년) 창덕궁과 가까운 한성부 북부 안국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 의빈 성씨의 사당인 '''의빈묘'''(宜嬪廟)가 세워졌다.[127] 정조는 사도세자(장조)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 있던 아들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文禧廟)를 의빈묘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겨, 1789년(정조 13년) 어머니와 아들의 사당이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127] 이후 1870년(고종 7년), 문희묘는 대수가 다 되어 정조의 동복형 의소세손의 사당인 의소묘(懿昭廟) 자리로 옮겨 합쳐졌다.[127]

1786년(정조 10년) 의빈 성씨의 궁(宮)과 묘(墓) 제사는 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르도록 정해졌다.[128] 정조가 공식적으로 의빈에게 궁호를 내린 기록은 없으나, 1787년(정조 11년) 정조가 '''의빈궁'''(宜嬪宮)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으며, 당시 유우량(劉佑良)이 의빈궁의 청지기였다는 기록으로 보아[129] 이때부터 의빈의 제사를 지내는 제궁(祭宮)은 의빈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의빈의 궁에 대한 호칭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는지, 의빈방(宜嬪房), 의빈묘(宜嬪廟), 의빈궁(宜嬪宮) 등의 명칭이 혼용되었다. 1790년(정조 14년)에 간행된 《문희묘영건청등록》의 <정당이하제처 도설(正堂以下諸處 圖說)>에는 의빈의 사당을 의빈묘(宜嬪廟)로 기록하면서도 간혹 의빈궁(宜嬪宮)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130]

의빈궁(宜嬪宮)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문서는 1797년(정조 21년) 이후 완성된 《제물등록》이다. 의빈궁은 명절이나 국경일 등(명일, 名日)에 육상궁(숙빈 최씨)과 선희궁(영빈 이씨)과 같은 예법으로 작헌례(酌獻禮, 사당이나 능원에 술잔을 올리는 예식)를 지냈다. 숙빈 최씨영조사친이고 영빈 이씨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친이었으나,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생모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유빈 박씨가 낳은 순조가 원자로 있었으므로, 의빈은 후사 없이 사망한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세 궁(三宮)에 속해 제사를 지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131] 1799년(정조 23년) 편찬된 《사전사례편고》에는 의빈궁묘가 덕흥대원군덕흥궁묘, 희빈 장씨의 대빈궁묘, 영빈 이씨의 선희궁묘와 함께 사궁(私宮)에 속한다고 기록되었다. 이후 1816년(순조 16년)의 《평안도내각읍소재각궁방각사전답급이생환기사결성책》, 1865년(고종 2년) 편찬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대전회통》, 1867년(고종 4년) 완성된 《육전조례》 등에도 의빈궁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1787년(정조 11년)에 '의빈(宜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 이름을 의빈궁(宜嬪宮)으로 정하고,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공식적으로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조 이후에도 의빈궁(宜嬪宮), 의빈묘(宜嬪廟), 의빈방(宜嬪房)이라는 명칭은 계속 혼용되었다. 이는 희빈 장씨(옥산부대빈)의 사당을 대빈(大嬪)이라는 호칭을 따 대빈궁(大嬪宮)으로 정했지만, 희빈궁(禧嬪宮), 희빈묘(禧嬪廟), 대빈방(大嬪房) 등으로도 불렀던 것과 비슷한 사례이다.[132]

한편, 1786년(정조 10년) 의빈의 빈소를 안현(安峴)에 있는 본궁(本宮)에 차렸기 때문에 '''안현궁'''(安峴宮)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한성부 남부 회현방 송현(松峴)의 집을 송현궁(松峴宮)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예이다.[133] 1793년(정조 17년) 황해도 은율현에 있던 안현궁의 궁방[134], 1807년(순조 7년) 정순왕후국장 과정을 기록한 《효안전일기》[135], 1832년(순조 32년) 안현궁 하인 관련 기록[136], 1879년(고종 16년) 작성된 《지각관청일기》[137], 1894년(고종 31년) 간행된 《의판》[138], 1904년(광무 8년) 수정된 순조의 국장 기록 《효성전일기》[139] 등 여러 문헌에서 안현궁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안현궁은 의빈궁의 다른 이름 격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고종 때 의빈 성씨의 신주칠궁(七宮, 사적 제149호) 내의 의빈궁(宜嬪宮)에 모셔졌다.[12] 그러나 1908년(순종 2년) 제사 제도가 개정되면서 칠궁에서 의빈궁의 제사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의빈궁'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12]

3. 4. 칠궁(七宮)

정조 때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은 기록은 없으나, '의빈궁(宜嬪宮)'이라는 칭호를 받았고[12] 이후 고종 때 칠궁(七宮)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1870년(고종 7년), 제사를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되자 의빈 성씨의 신주는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숙빈 최씨)의 별묘에 봉안되었다. 이때 의빈의 사당과 가까이 있던 아들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는 백부인 의소세손의 사당 의소묘(懿昭廟)에 합쳐 봉안되었다.

1873년(고종 10년)에는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육상궁(숙빈 최씨), 연호궁(정빈 이씨), 경우궁(유빈 박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의빈 성씨) 등 일곱 후궁의 사당을 '궁(宮)'으로 명명하였다.[140] 그리고 1898년(광무 2년)에는 이 일곱 궁(宮)을 칠궁(七宮)으로 확립했다.[141]

그러나 1908년(융희 2년) 대한제국 시기 제사 제도가 개정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국왕의 사친(私親, 생모)을 모신 사당이 아니라는 이유로 의빈궁은 칠궁에서 제외되었고, 신주는 무덤 앞에 묻혔다(매안, 埋安). 다만 '의빈궁'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고,[143] 효창원(문효세자)과 의령원(의소세자)의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개정된 제사 제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정한 제사 제도〔享祀釐正〕〉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안에 각별히 신주의 방을 만들어 합사하고, 폐궁(廢宮)의 경우 연호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다만 의빈궁과 경수궁의 묘소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원소(園所)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매안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142]

4. 정조 어제문(正祖 御製文)

의빈 성씨가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슬픔 속에서 직접 그녀의 묘표(墓表)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이 글에는 의빈 성씨의 삶과 인품, 그리고 그녀를 향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묘표 전면의 큰 글씨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썼고, 비석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는 서용보(徐龍輔)가 작성했으며, 비석은 1786년(정조 10년) 11월에 세워졌다.[144]

정조는 어제문에서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의 어머니임을 밝히고,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여섯 달 만인 1786년 9월 14일에 의빈 성씨 또한 뒤따라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문효세자를 잃은 후 늘 죽기를 바랐으며, 마침내 그 소원대로 문효세자의 묘(효창묘) 곁인 고양군 율목동 언덕에 묻혔다. 정조는 이를 통해 의빈 성씨가 한을 풀고 문효세자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정조는 의빈 성씨가 태어날 때부터 총명했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곧고 깨끗했다고 회고했다. 열 살이 넘어 궁궐에 들어온 후에도 늘 겸손하고 검소했으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았다. 처음 정조가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가 아직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각오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이에 감동하여 15년 동안 그녀를 가까이하지 못했다. 이후 후궁 간택 때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또다시 고사하자, 정조는 그녀의 하인을 벌하고 나서야 명을 따르게 할 수 있었다. 승은을 입은 지 한 달 만에 임신하여 1782년 문효세자를 낳았고, 이로 인해 소용(정3품)에서 의빈(정1품)으로 봉해졌다.

의빈이 된 후에도 그녀는 더욱 스스로를 낮추고 효의왕후를 정성껏 섬겼다. 정조가 침소에 들려 할 때면 "위에 내전(효의왕후)이 계시고 또 빈어(화빈 윤씨)가 계십니다"라며 사양하기도 했다. 문효세자를 양육할 때도 오직 효의왕후의 뜻을 따랐으며, 5년 동안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면서도 세자를 공경하고 자신을 낮추었다. 누군가 지나치다고 지적하면 "저군(왕세자)이고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이니 어찌 감히 내가 낳은 자식이라 하여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녀의 거처는 검소했고 의복과 음식도 사치하지 않았다. 스스로 분수에 넘치는 지위에 있음을 항상 경계하며 "제가 오늘날 지체가 높고 귀한 것은 분수에 넘치는데 더욱 스스로를 자랑하고 제멋대로 군다면 어찌 제 몸에 재앙이 들지 않을 것이며, 동궁(문효세자)을 위해 복을 아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정조는 기록했다. 그녀의 검소함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드러났는데, 염습할 때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 시장에서 옷감을 가져와야 했고, 생전에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 반함(염습 시 입에 구슬과 쌀을 물리는 의식) 때 버드나무 수저를 사용했다고 한다.

1786년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의빈 성씨는 임신 중이었기에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려 애썼다. 주변에서 걱정하자 "몸은 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라의 위태함이 매우 큽니다. 다행히 제가 임신을 했지만 만약 제가 삼가지 않고 방자하게 마음대로 슬퍼한다면 마땅히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 역시 병을 얻어 해산달에 이르러 기력이 쇠진했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임종 전날, 정조가 직접 찾아갔을 때 의빈 성씨는 눈물을 흘리며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을 낳는 경사가 있기를 살아있는 내내 기원해왔습니다. 종사를 위해 천신(賤身,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 다시 임신한 것은 다행이지만 제 마음은 견디지 못할 만큼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복이 분수에 넘쳐 병이 들고 심해졌습니다.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바라건대 정전에 나아가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신다면 죽어서도 즐거울 것입니다."라고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정조는 이에 크게 감동했으며, 효의왕후 역시 의빈 성씨가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고 평가하며 그녀의 죽음을 자매를 잃은 듯 슬퍼했다. 온 궁궐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했다고 정조는 적었다.

정조는 자신이 의빈 성씨를 엄격하게 단속했음에도 그녀가 늘 기쁘게 따랐으며, 혹여 은혜를 입을 만한 일이 생기면 오히려 두려워하며 겸손했다고 회고했다. 친정의 선산 이장 문제에서도 관청 비용 사용을 반대하며 자신의 의복을 팔아 비용에 보태겠다고 했고, 아버지에게 증직(贈職, 죽은 뒤 품계나 관직을 올려줌)이 내려졌을 때도 분황(의식)을 간소하게 하도록 청했다. 친정 오라비들이 곤궁했지만 사사로이 재물을 주지 않았으며, 사친과의 만남도 임금의 허락 없이는 하지 않을 정도로 공사를 엄격히 구분했다. 정조는 의빈 성씨가 궁궐에서 20여 년을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남을 흘겨보거나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길쌈과 요리 솜씨가 뛰어나고 글과 학문에도 능통했다고 칭찬했다.

정조는 의빈 성씨가 비록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아는 총명함과 덕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특히 효의왕후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존경심은 쇠와 돌도 뚫을 만큼 진실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나라와 왕실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짊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정조는 그녀가 마땅히 복을 누려야 했으나 문효세자에 이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요절한 비극적인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그녀의 뛰어난 행실과 덕행이 잊히지 않도록 직접 글을 남긴다고 밝혔다.

'''의빈 성씨 가계 정보'''
항목내용
본관창녕 성씨
생몰년1753년 (영조 29년) 7월 8일 ~ 1786년 (정조 10년) 9월 14일 (향년 34세)
부모아버지: 성윤우 (成胤祐, 증 찬성)
어머니: 임씨 (林氏,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 통례원 인의 임종주(林宗胄)의 딸)
자녀아들: 문효세자
딸: 옹주 (1784년 조졸)
시조성인보 (成仁輔, 고려 중윤)
주요 조상성송국 (成松國, 문하시중)
성여완 (成汝完, 검교정승 문정공)
성석린 (成石璘)
성석용 (成石瑢)
성석인 (成石因, 예조판서 대제학 정평공, 의빈의 직계 선조)
성만종 (成萬種, 제릉 참봉, 7대조)
성경 (成景, 군자감정, 고조부)



정조는 묘지명 말미에 "저 여항(백성들이 사는 마을이나 거리)의 비천한 땅에서 뛰어나고 현명한 사람이 나서 왕세자를 낳고 은총을 받아 빈의 작위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였다. 문효세자의 묘에 흙이 채 마르기 전에 빈 또한 뱃속의 아이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나의 마음이 애통하고 마음이 아픈 것은 빈의 한 몸 만을 위해서는 아니다."라고 적으며,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가적인 손실임을 암시했다. 또한 그녀의 묘가 문효세자의 묘에서 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마련된 것은 그녀의 소원을 따른 것이며, 죽어서나마 가까이서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정조는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통해 어진 의빈 성씨를 애석하게 여기고 그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게 되기를 바랐다.[145]

5. 가족 관계

본관은 창녕(昌寧)이다.[13]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이다.[13]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의빈의 집안은 한미한 편이었다. 고조부 성경(成景)은 군자감 정(정3품)을 지냈으나, 증조부 성근립(成謹立)과 조부 성수산(成壽山)은 생전에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가 사후에 각각 이조참판(종2품)과 이조판서(정2품)로 추증되었다.[14] 아버지 성윤우는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洪鳳漢)의 청지기를 지냈으며[16][17], 이후 무관직에 올라 교련관[18], 경복궁 가위장[19], 절충장군(정3품)[20], 가선대부(종2품)[21]를 거쳐 첨절제사(종3품)에 이르렀다.[22] 성윤우는 장흥 마씨(長興 馬氏)와 초혼, 의빈의 생모인 부안 임씨(扶安 林氏)와 재혼, 단양 지씨(丹陽 池氏)와 삼혼하였다.[23][24]

어머니 부안 임씨는 의빈 성씨가 4살 때인 1756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6] 외조부 임종주(林宗胄)는 통례원 인의(종6품)였으며 사후 통덕랑(정5품)으로 증직되었다.[25]

'''가족 관계'''
구분관계이름생몰년비고
친가조부성수산(成壽山)1668 ~ 1749증 이조판서[152]
조모김해 김씨(金海 金氏)1674 ~ 1698성수산의 초배, 통덕랑 김몽설(金夢說)의 딸
조모창원 황씨(昌原 黄氏)1677 ~ 1747성수산의 계배, 현감 황상(黃晌)의 딸
아버지성윤우(成胤祐)1709 ~ 1769증 찬성[15]
전어머니장흥 마씨(長興 馬氏)1715 ~ ?아버지 성윤우의 초배, 직장 마시행(馬時行)의 딸[153]
친어머니부안 임씨(扶安 林氏)1722 ~ 1756증 정경부인, 통덕랑 임종주(林宗胄)의 딸[26]
새어머니단양 지씨(丹陽 池氏)1725 ~ ?아버지 성윤우의 삼배
백부성윤조(成胤祚)? ~ ?
숙부성연지(成淵祉)? ~ ?
고모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정희규(鄭熙揆), 임성징(林聖徴)
형제자매오빠성담(成湛)1741 ~ 1783무과 급제[27]
오빠성협(成浹)1742 ~ 1810절충장군(정3품)[28]
오빠성완(成浣)1743 ~ 1806부사용(종9품)[29] (개명 전 이름 성식(成湜))
오빠성숙(成淑)1746 ~ ?
언니창녕 성씨(昌寧 成氏)1750 ~ ?형부: 강덕순(康德淳)
언니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윤귀영(尹貴永)[154]
본인의빈 성씨(宜嬪 成氏)1753 ~ 1786정조의 후궁
이복 남동생성흡(成洽)1762 ~ ?만호(종4품)[30]
조카성국민(成國民)1766 ~ 1809성담의 아들, 현감(종6품)[31]
조카성도민(成道民)? ~ ?성협의 아들, 선략장군(종4품)[32]
조카성순민(成舜民)1763 ~ 1849성완의 아들, 첨정(종4품)[33]
조카윤인석(尹仁錫)? ~ ?둘째 언니의 아들
왕가 (전주 이씨)시조부영조이금(李昑)1694 ~ 1776조선 제21대 국왕
생시조모영빈 이씨이씨(李氏)1696 ~ 1764영조의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
생시부장조(사도세자)이선(李愃)1735 ~ 1762추존 왕, 정조의 생부
생시모헌경왕후 홍씨(혜경궁 홍씨)홍씨(洪氏)1735 ~ 1815추존 왕후, 정조의 생모
남편정조이산(李祘)1752 ~ 1800조선 제22대 국왕
(유산)--1780년
(유산)--1781년
장남문효세자이순(李㬀)1782 ~ 1786요절[12]
장녀옹주이름 미상1784 ~ 1784요절[12]
(사산)--1786년임신 중 의빈 사망으로 태중 사망[111][159]


6. 의빈 성씨가 등장하는 작품



연도제목역할
2005년비단속옷성연
2005년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강건희
2007년~2008년이산 정조대왕성송연
2017년우아한 환생의빈 성씨
2020년궐에서 사랑을 찾다성화리
2021년옷소매 붉은 끝동성덕임





연도방송사제목역할작가배우방송횟수시청률
1989년MBC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의빈 성씨신봉승정은숙28부작
2007년~2008년MBC이산성송연김이영이한나(아역) → 한지민(성인)77부작+스페셜 3회35.5%
2021년MBC옷소매 붉은 끝동성덕임정해리이설아(아역) → 이세영(성인)[6][5]17부작17.4%





방송일방송사제목역할배우
2017년 1월 1일MBC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46회
(언빌리버블 스토리 왕이 사랑한 여자)
성덕임구민주(아역) → 김하영(성인)
2018년 1월 25일JTBC차이나는 클라스》 46회의빈 성씨
2019년채널A천일야사성덕임송도원





연도주최주관제목역할배우
2016년수원시수원시립공연단정조-만천명월주인옹성선우홍민아
2017년수원시수원문화재단정조가성덕임신유진





날짜장르제목소제목작가역할
2018년 5월 26일네이버 웹툰조선왕조실톡311. 너같은 여자 처음이다무적핑크(변지민)성덕임


7. 평가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성덕임(成德任)이다. 정조가 사랑했던 여인으로, 영조 때 입궁하여 청선공주, 청연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함께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을 국문으로 필사하는 활동을 했다.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었으며,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번 거절한 후에야 후궁이 되었다. 이후 1782년 10월에 문효세자를 낳았고, 1784년 5월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옹주를 낳았다. 사후에는 의빈 성씨의 소망대로 효창원 왼쪽 산등성이에 묘소가 마련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강제 이장되기 전까지는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나란히 있었다.[12]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은 기록은 없으나, 정조 재위 시기에 의빈궁(宜嬪宮)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고종 때 칠궁(七宮)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순종 때 제사 제도가 개정되면서 칠궁에서 제사 대상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의빈궁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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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서적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창녕성씨 문헌지
[151] 서적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152] 서적 창녕성씨 상곡공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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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158] 서적 이재난고 황윤석 178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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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서적 서울지명사전 - 거둥고개
[161] 서적 서울지명사전 - 홍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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