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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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빈 박씨는 1770년에 태어나 1822년에 사망한 조선의 후궁이다. 1787년 정순왕후에 의해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가순궁의 궁호를 받았으며, 1790년에 순조를, 1793년에 숙선옹주를 낳았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수빈 박씨는 왕의 어머니가 되었고, 아들이 어렸기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22년 사망 후 현목수비의 시호를 받았고, 고종 때 정조가 선황제로 추존됨에 따라 현목유비로 추존되었다. 수빈 박씨는 순조의 즉위를 지켜본 유일한 후궁이며, 검소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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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 박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현목수비 (顯穆綏妃) |
본관 | 반남 박씨 |
출생 | 1770년 음력 5월 8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 | 1823년 1월 31일 (1822년 음력 12월 26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
묻힌 곳 | 경기도 남양주시 휘경원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박준원 |
어머니 | 원주 원씨 |
배우자 | 정조 |
자녀 | 1남 1녀 (순조, 숙선옹주) |
경력 | |
봉작 | 수빈 (綏嬪) |
종교 | 한국 불교 |
2. 생애
반남 출신으로, 정조의 후궁이다. 1787년 왕비 효의왕후에게 소생이 없자 정순왕후의 주도로 이루어진 후궁 간택에서 선발되어 입궁하였고,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1790년 아들 순조를 낳았고, 1793년에는 딸 숙선옹주를 낳았다. 1800년 남편 정조가 승하하고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수빈 박씨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생전에 자신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직접 본 후궁이 되었다.[5]
1822년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향년 54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고종 때 현목수비(顯穆綏妃)로 추증되었다.[5]
2. 1. 탄생과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이다.[5] 1770년(영조 46년) 5월 8일, 박준원(朴準源)과 원주 원씨(原州 元氏)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6]영조의 부마인 박명원(朴明源)과 정조 시대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아버지 박준원과 같은 항렬의 친척이다. 어머니 원주 원씨는 효종의 여섯째 딸인 숙경공주의 손자 원경유(元景遊)의 딸이며, 윤두수의 7대손인 윤형동(尹亨東)의 외손녀이다.[6]
관계 | 이름 | 생몰년 |
---|---|---|
아버지 | 박준원(朴俊元) | 1739년–1807년 |
어머니 | 원주 원씨 | 1740년–1783년 |
친형 | 박종보(朴宗輔) | 1760년–1807년 |
친형 | 박종경(朴宗慶) | 1765년–1817년 |
친언니 | 반남 박씨 | |
친동생 | 박종익(朴宗翊) | 1773년–1791년 |
친동생 | 박종희(朴宗喜) | 1775년–1849년 |
친여동생 | 반남 박씨 | |
친여동생 | 반남 박씨 | |
친여동생 | 반남 박씨 | |
이복동생 | 박종염(朴宗琰) | 1797년–1857년 |
이복동생 | 박종영(朴宗永) | 1804년–? |
남편 | 정조(正祖) | 1752년–1800년 |
아들 | 순조(純祖) | 1790년–1834년 |
딸 | 숙선옹주(淑善翁主) | 1793년–1836년 |
2. 2. 후궁 간택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요절하고,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마저 사망하자, 후사를 근심하던 정순왕후(예순왕대비)는 새로운 후궁 간택을 명하였다. 당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와 후궁인 화빈 윤씨에게 소생이 없었기 때문이다.1787년(정조 11년) 2월 8일, 삼간택을 통해 당시 16세였던 박씨가 정조의 후궁으로 최종 간택되었다.[7] 사흘 뒤인 2월 11일, 박씨는 '곧고 평화롭다'는 의미의 '수(綏)' 자를 받아 '''수빈'''(綏嬪)으로 책봉되었다.[8] 다음 날인 2월 12일, 수빈 박씨는 궁궐에 입궁하여 정조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삼간택을 거쳐 정식 후궁이 된 수빈의 가례는 왕비의 가례에 준할 만큼 그 의장과 예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9] 이 무렵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를 받았으며, 이후 빈호인 수빈보다 궁호인 가순궁으로 더 많이 칭해졌다.
2. 3. 후궁 시절

수빈 박씨의 아들인 순조의 19세 때 모습을 그린 어진.
1787년,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에게 소생이 없자 정순왕대비의 주도로 후궁 간택이 이루어졌고, 박씨가 2월 8일 16세의 나이로 간택되었다. 사흘 뒤인 2월 11일, '수(綏, 편안하다는 의미)'라는 호를 받아 빈으로 책봉되었으며, 다음 날 입궁하였다. 이때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도 함께 받았다.
1790년(정조 14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순조(이름은 공(玜))를 낳았다.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던 정조는 아들이 태어나자 크게 기뻐하였다.[10] 이날은 순조의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생일이기도 하였다.[11] 1793년(정조 17년) 3월 1일에는 숙선옹주를 낳았다.[12]
정조는 수빈의 백부 박윤원 및 큰오빠인 박종보(朴宗輔) 등과 교류하며 이들을 신임하고 총애하였다. 특히 박종보와는 격식 없이 대하고 많은 선물을 하사하는 등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다. 정조가 박종보에게 보낸 편지는 어찰첩에 수록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 아들 순조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13]
수빈 박씨는 성품이 온화하고 행실이 단정하며 예의 바르다고 묘사된다. 또한 평소 말수가 적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어진 후궁'(賢嬪)으로 칭송받았다.[2] 조선 역사상 후궁의 신분으로 생존 시에 자신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직접 본 유일한 인물이다.[5]
2. 4. 순조의 즉위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1주일 후인 7월 4일 아들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순조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즉위와 함께 왕의 법적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14] 수빈 박씨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후궁의 신분으로 생전에 아들이 국왕이 되는 것을 직접 본 인물이 되었다.[5]대왕대비 김씨는 수렴청정을 시작하며 수빈의 아버지 박준원을 어영대장으로 삼고, 수빈의 오빠인 박종보와 박종경(朴宗慶)을 각각 경모궁령과 종척의 집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박준원의 벼슬은 공조판서와 판돈녕부사에 임명되었고, 박종보는 승지에 임명되었다. 박준원은 아들 박종경에게 내려진 과분한 특전을 거두어 달라고 상소하기도 하였으나,[15] 이는 세도정치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다.
박준원이 사망한 후, 수빈의 친정 가문인 반남 박씨는 박종경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와 더불어 세도정치 시기의 주요 세도가문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순조는 김조순과 안동 김씨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고자 의도적으로 외숙부인 박종경의 지위를 높이고 외가인 반남 박씨 인물들을 중용하였다. 순조 중기에는 안동 김씨가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반남 박씨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박종경과 수빈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2. 5. 사망
1822년(순조 22년)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향년 54세로 사망하였다.[16]사후 '''현목유빈'''(顯穆綏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행실이 중외에 드러남'을 '현(顯)'이라 하고 '덕을 베풀고 의로움을 간직함'을 '목(穆)'이라 한다. 처음 묘소는 휘경원(徽慶園)이라 하여 양주 배봉산 기슭에 마련되었으나, 1855년(철종 6년)에 선조의 능인 일릉의 위치가 변경됨에 따라 수정원(綏靖園)으로 이장되었다.[5] 이후 철종 14년(1863년)에는 수정원의 위치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시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겨졌다. 첫 매장지였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徽慶洞)의 지명은 수빈의 묘인 휘경원에서 유래되었다.
1823년(순조 23년), 창경궁 내의 전각에 신위를 봉안하고 현사궁(顯思宮)이라 불렀다. 3년상이 끝난 후에는 사당을 새로 지어 경우궁(景祐宮)으로 명명하고 신위를 옮겨 봉안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가 이곳 경우궁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경우궁은 국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인 칠궁(七宮) 중 하나이다.
1901년(고종 38년 · 광무 5년), 고종이 정조를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면서 유빈 박씨도 '''유비'''(綏妃)로 추존되었다.[17] 이에 따라 최종 시호는 '''현목유비'''(顯穆綏妃)가 되었다. 1902년(고종 39년 · 광무 6년), 특진관 이주영 등이 유비를 황후로 추존할 것을 청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8]
3. '綏'의 발음에 관하여
한자 '綏'의 발음과 관련하여 수빈이 아니라 유빈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서적은 수빈(綏嬪)으로 발음하여 적고 있다. 하지만 綏에는 '수' 뿐만이 아니라 '유'라는 발음이 존재해 왔으며, 수빈 박씨 사망 당시에 한글로 쓰여진 진향문[21]과 애책문, 상시문에는 모두 수빈이 아니라 유빈으로 기록하고 있다.[22][23]
4. 평가
수빈 박씨는 아들 순조를 낳아 왕실 계승에 기여했으며, 윗사람에게 예를 다하고 온화하며 검소한 성품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정조 사후 친정인 반남 박씨 가문이 안동 김씨와 함께 세도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본인의 직접적인 관여는 없었더라도 결과적으로 왕권 약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4. 1. 긍정적 평가
아들 순조를 낳아 조선 왕실의 대를 잇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어머니인 정순왕후, 시숙모인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정실인 효의왕후에게 예를 다하였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였다. 또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진다.4. 2. 부정적 평가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14] 이 과정에서 대왕대비는 수빈 박씨의 아버지 박준원과 오빠 박종보, 박종경 등 친정 식구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하였다. 박준원은 어영대장을 거쳐 공조판서와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박종보는 승지에 임명되었다. 박준원 스스로 아들 박종경에게 내려진 과분한 특전을 거두어 달라고 상소하기도 했으나[15], 이는 결과적으로 반남 박씨 가문이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박준원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 박종경을 중심으로 반남 박씨 세력이 형성되어,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와 함께 세도정치 시기의 주요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순조가 장인 김조순과 안동 김씨의 세력 독주를 견제하고자 의도적으로 외가인 반남 박씨를 중용한 측면도 있었다. 순조 중기에는 안동 김씨 주도 하에 반남 박씨가 공존하는 구도가 형성되었으나, 이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 정치의 폐해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수빈 박씨 본인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더라도, 그의 친정 가문이 세도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왕권 약화와 정국 혼란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후 박종경과 수빈 박씨가 사망하면서 반남 박씨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버지 | 박준원(朴準源) | 1739년 ~ 1807년 | |
어머니 | 원주 원씨(原州 元氏) | 1740년 ~ 1783년 | 숙경공주의 증손녀[6] |
남편 | 정조(正祖) |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 조선 제22대 국왕 |
아들 | 순조(純祖) | 1790년 7월 29일 ~ 1834년 12월 13일 | 조선 제23대 국왕, 효의왕후의 양자 |
딸 | 숙선옹주(淑善翁主) | 1793년 3월 1일 ~ 1836년 6월 7일 |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에게 하가, 여류 다인(茶人)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친오빠 | 박종보(朴宗輔) | 1760년 ~ 1807년 | |
친오빠 | 박종경(朴宗慶) | 1765년 ~ 1817년 | |
친언니 | 반남 박씨 부인(朴氏夫人) | 신광회(申光晦)의 정실 | |
친언니 | 반남 박씨 부인(朴氏夫人) | 이요헌(李堯憲)의 정실 | |
친남동생 | 박종익(朴宗翊) | 1773년 ~ 1791년 | |
친남동생 | 박종희(朴宗喜) | 1775년 ~ 1849년 | |
친여동생 | 반남 박씨 부인(朴氏夫人) | ||
친여동생 | 반남 박씨 부인(朴氏夫人) | ||
친여동생 | 반남 박씨 부인(朴氏夫人) | ||
이복 남동생 | 박종염(朴宗琰) | 1797년 ~ 1857년 | 계모 소생 |
이복 남동생 | 박종영(朴宗永) | 1804년 ~ ? | 계모 소생 |
'''기타 친족'''
6. 기타
조선 역사상 후궁의 신분으로 생존 시에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본 유일한 인물이다.[5]
시증조모인 숙빈 최씨와는 약 100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태어났으나 여러 면에서 유사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모두 노론 집안 출신이었으며,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또한, 숙빈 최씨가 영조를 낳았던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수빈 박씨 역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 홍씨가 손자인 순조에게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과 친정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집필한 《한중록》의 마지막 부분(3부)은 며느리인 수빈 박씨의 권유로 작성되었다고 전해진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수빈 박씨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수빈 박씨는 후궁으로서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근신했으며, 윗전인 정순왕후,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를 정성껏 모셔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영조와 정조 시대의 학자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는 정조가 수빈 박씨의 임신 사실을 일부러 늦게 알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4]
7. 수빈 박씨가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Hwigyeongwon
http://www.nyj.go.kr[...]
[2]
웹사이트
Cultural Heritage
http://jikimi.cha.go[...]
[3]
웹사이트
유빈 박씨 진향문 한글본
http://dh.aks.ac.kr/[...]
2021-05-10
[3]
웹사이트
유빈 박씨 애책문과 상시문 한글본
https://blog.daum.ne[...]
2021-05-10
[4]
문서
유빈 박씨 지문
[5]
문서
후궁 소생 왕들
[6]
문서
증 정경부인 원씨 묘갈명
[7]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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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02-0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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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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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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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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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03-01
[13]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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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01-01
[14]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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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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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801-11-16
[16]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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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822-12-26
[17]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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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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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0-24
[19]
문서
원경유의 가계
[20]
문서
효종-정경부인 원씨 가계도
[21]
웹인용
유빈 박씨 진향문 한글본
http://blog.daum.net[...]
2016-09-30
[22]
웹사이트
유빈 박씨 진향문 한글본
http://blog.daum.net[...]
2016-10-02
[22]
웹사이트
유빈 박씨 애책문과 상시문(한글)
https://blog.daum.ne[...]
2021-05-10
[23]
웹인용
유빈 박씨 애책문과 상시문
https://blog.daum.ne[...]
2021-05-10
[24]
간행물
박빈(朴嬪, 유빈 박씨)의 임신 소식
이재난고
179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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