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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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은진군은 1418년 덕은현에서 개칭되어 조선시대 공주목에 속했던 지역으로, 19세기 강경포가 전국 15대 장시로 성장하는 등 상업이 발달했다. 1895년 군으로 개편되었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논산군에 통합되었고, 현재는 은진면으로 그 이름이 남아있다. 은진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14개 면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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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마면, 연산면, 부적면, 양촌면 등이 통합되어 현재 논산시의 행정구역 체계의 기반이 되었다. - 1895년 설치 - 서빙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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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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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한자 표기 | 恩津郡 |
로마자 표기 | Eunjin-gun |
행정 구역 변천사 | |
1895년 5월 26일 | 23부제 시행으로 개성부 은진군으로 개편 |
1896년 8월 4일 | 13도제 시행으로 경기도 은진군으로 개편 |
1914년 4월 1일 | 연기군, 전의군, 직산군과 함께 대통령령 제111호에 따라 충청남도 논산군에 통합, 은진군은 폐지됨.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논산시, 강경읍 |
2. 역사
1418년(태종 18년) 지역민의 요청으로 덕은현에서 은진현으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506호 1,717명이었던 인구가 18세기에는 4,811호 17,92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는 은진 지역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한다. 은진은 공주목 내에서 공주 다음으로 큰 인구 규모와 경제적 중요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19세기 은진현 강경은 전국 15대 장시 중 하나로 성장했으며,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쌀, 콩, 어류, 소금을 비롯하여 면포, 철물, 담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거래되는 상업 중심지였다.
조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창손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농장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충훈부 등 권력 기관과 왕실 소유의 토지가 존재했다.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전국의 현이 군으로 통일되어 은진군이 되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노성군, 연산군, 석성군 일부와 함께 논산군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 대조곡면이 은진면으로 개칭된 이후 은진면이 그 이름에 남아 있다.
2. 1. 조선시대
1418년(태종 18년) 지역민의 요청으로 덕은현에서 은진현으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506호 1,717명이었던 인구가 18세기에는 4,811호 17,92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는 은진 지역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한다. 은진은 공주목 내에서 공주 다음으로 큰 인구 규모와 경제적 중요성을 가진 지역이었다.19세기 은진현 강경은 전국 15대 장시 중 하나로 성장했으며,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쌀, 콩, 어류, 소금을 비롯하여 면포, 철물, 담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거래되는 상업 중심지였다.
조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창손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농장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충훈부 등 권력 기관과 왕실 소유의 토지가 존재했다.
2. 2. 일제강점기 및 근현대
1418년 태종 때에 덕은현을 지역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은진이라고 고쳐 불렀다. 세종실록과 여지도에 따르면 15세기 5백 6호에 인구가 1천 717명이었으나, 18세기에는 4천 811호에 1만 7,920명으로 증가하였다. 은진은 공주목 안에서도 공주 다음으로 큰 인구 규모와 경제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19세기 은진현 강경은 포구에 가까운 대도회(大都會)로 인식되었으며, 전국 15대 장시로 성장했다. 임원경제지 에 의하면 은진 강경장은 충청도 다른 지역에 비해 쌀, 콩, 어류, 소금을 비롯 면포, 철물, 담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물품이 거래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은진현은 세조때 좌의정(左議政) 정창손을 비롯한 권력자의 농장이 있었고, 조선후기에도 충훈부를 비롯하여 권력아문과 궁방 소유의 토지가 있었다.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전국의 현이 군으로 통일되어 은진군이 되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노성군, 연산군, 석성군 일부와 함께 논산군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 대조곡면이 은진면으로 개칭된 이후 은진면이 그 이름에 남아 있다.
3. 경제
은진현은 은진과 강경포의 시장세 일부를 왕족이 가져갈 정도로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특히 강경포는 19세기 큰 도시로 성장했으며, 강창(江倉)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는 조세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8세기 은진 강경포를 통해 상납되는 충청도 전세곡은 충청도 전체의 27.7%에 달했다.
18세기 은진 강경포를 거쳐 상납되는 충청도 각 읍의 전세곡(田稅穀)을 살피면, 공주 3,599석, 정산 579석, 석성 524석, 연산 1,068석, 이산 931석, 은진 1,310석으로 도합 8,011석이었다. 이는 충청도 상납 전세곡 전체 28,938석의 27.7%에 달하는 것이었다.
논산은 수로를 이용하여 강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은진현에는 세 군데에 장시가 있었는데, 은진관아(현재 은진초등학교) 앞, 논산포 부근, 김포면 은진세창 옆(강경포)였다. 때로는 강경포와 논산포가 경쟁을 보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1799년 대홍수로 논산항의 수심이 깊어지자 강경까지만 들어오던 상선(商船)들이 논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강경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원래부터 선박에 대해 주인권을 갖고 국가에 일정한 세를 바치고 있었다고 상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논산의 상인은 배란 어느 곳이든지 드나들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3. 1. 강경포와 상업
은진현은 은진과 강경포의 시장세 일부를 왕족이 가져갈 정도로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특히 강경포는 19세기 큰 도시로 성장했으며, 강창(江倉)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는 조세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8세기 은진 강경포를 통해 상납되는 충청도 전세곡은 충청도 전체의 27.7%에 달했다.은진현에는 은진관아 앞, 논산포 부근, 김포면 은진세창 옆(강경포) 세 곳에 장시가 있었다. 강경포와 논산포는 때때로 상권을 두고 경쟁하기도 했다. 1799년 대홍수로 논산항의 수심이 깊어지자 강경 상인들이 상권을 주장하며 논산 상인들과 갈등을 빚은 사례가 있다.
3. 2. 임원경제지에 나타난 강경장
강경포는 19세기 큰 도시로 주목되었고, 강창(江倉)을 거쳐 서울로 운송되는 조세 수송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18세기 은진 강경포를 거쳐 상납되는 충청도 각 읍의 전세곡(田稅穀)은 공주 3,599석, 정산 579석, 석성 524석, 연산 1,068석, 이산 931석, 은진 1,310석으로 도합 8,011석이었다. 이는 충청도 상납 전세곡 전체 28,938석의 27.7%에 달하는 것이었다.논산은 수로를 이용하여 강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은진현에는 세 군데에 장시가 있었는데, 은진관아(현재 은진초등학교) 앞, 논산포 부근, 김포면 은진세창 옆(강경포)였다. 때로는 강경포와 논산포가 경쟁을 보이기도 했는데, 1799년 대홍수로 논산항의 수심이 깊어지자 강경까지만 들어오던 상선(商船)들이 논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강경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원래부터 선박에 대해 주인권을 갖고 국가에 일정한 세를 바치고 있었다고 상권을 주장하였고, 논산의 상인은 배란 어느 곳이든지 드나들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은진 강경장은 충청도 다른 지역에 비해 쌀, 콩, 어류, 소금, 면포, 철물, 담배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이는 강경이 단순한 포구를 넘어선 상업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4. 교통
은진은 육지 교통상으로도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은진현에서 사방으로 난 도로를 통해 공주와 연산, 여산과 전주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포천로(布川路)는 삼남을 왕래하는 큰길이었으며, 신교로(新橋路)를 통해 여산 황하정에 이르렀고, 동지원로(東之院路)를 통해 전주 인천장(仁川場)과 연결되었다. 논산로(論山路)를 통해서는 이산과 석성으로 연결되어 공주로 이어졌다.
따라서 전쟁 때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병참상 중요한 지역으로 정유재란(1597년;선조 30) 당시 은진 지역을 중심으로 왜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5. 관할 지역
은진 현감은 가야곡을 비롯한 14개 면, 56개 리를 관할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은진현 관할 14개 면과 인구는 다음과 같다.
면 이름 | 인구 |
---|---|
가야곡 | 1450명 |
갈마동 | 991명 |
두상면 | 1105명 |
두하면 | 820명 |
대조곡면 | 1392명 |
죽본면 | 991명 |
구자곡면 | 1287명 |
도곡면 | 1752명 |
채운면 | 1056명 |
김포면 | 2529명 |
화산면 | 1014명 |
성본면 | 1334명 |
화지산면 | 1851명 |
송산면 | 903명 |
이를 모두 합하면 17920명이다. 인구는 강경포가 있는 김포면과 연산세창이 있던 화지산면이 가장 많았다.
5. 1. 조선시대 행정구역
은진 현감은 가야곡을 비롯한 14개 면, 56개 리를 관할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은진현 관할 14개 면과 인구는 다음과 같다.면 이름 | 인구 |
---|---|
가야곡 | 1450명 |
갈마동 | 991명 |
두상면 | 1105명 |
두하면 | 820명 |
대조곡면 | 1392명 |
죽본면 | 991명 |
구자곡면 | 1287명 |
도곡면 | 1752명 |
채운면 | 1056명 |
김포면 | 2529명 |
화산면 | 1014명 |
성본면 | 1334명 |
화지산면 | 1851명 |
송산면 | 903명 |
이를 모두 합하면 17920명이다. 인구는 강경포가 있는 김포면과 연산세창이 있던 화지산면이 가장 많았다.
5. 2. 1914년 이후 행정구역 변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은진군은 논산군에 통합되었으며, 기존의 면들은 통폐합되어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었다.구 행정구역 | 신 행정구역 |
---|---|
은진군 김포면(金浦面) | 강경면 |
은진군 화지산면(花枝山面) | 논산면 |
은진군 성본면(城本面), 대조곡면(大鳥谷面), 송산면(松山面) | 대조곡면 |
은진군 도곡면(道谷面) | 채운면 |
은진군 화산면(花山面), 채운면(彩雲面) | 채운면 |
은진군 구자곡면(九子谷面), 죽본면(竹本面), 하두면(下豆面) | 구자곡면 |
은진군 상두면(上豆面), 갈마면(葛麻面), 가야곡면(可也谷面) | 가야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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