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정 (15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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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정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고 정유재란 시 군량 조달을 담당했다. 1590년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며, 호성공신 2등과 위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연루되어 비난을 받았으며,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에 있으며, 파주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이광정 (15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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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590년(선조 23)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모셨고, 1593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조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파격적인 승진이었기에 외람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 정유재란 때는 군량미를 담당하였고, 1598년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사헌부사간원에서 여러 차례 과분하다고 건의했으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중에는 명나라에서 온 마귀의 접반사로 수행하기도 했다. 1601년 지중추부사, 1602년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원군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보국숭록대부 연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청렴한 인물이었으나 인목대비 폐비 사건 당시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폐비론에 동조한 이후로 비난을 받았다.

1623년 이조판서, 같은 해 공조판서를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여기서 얻은 수토병이 악화되어 1629년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590년(선조 23)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모셨다. 1593년 임금을 모신 공을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 조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 때문에 외람된 관직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 정유재란 때는 군량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고, 1598년에는 공을 인정받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 인사에 대해서도 사헌부사간원에서 여러 차례 과분하다고 건의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중에는 명나라에서 원정을 온 마귀의 접반사로 그를 수행하기도 했다.

2.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활동

1590년(선조23)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보필했다. 1593년 호종의 공을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 조정에 출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외람된 관직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군량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고, 1598년에는 공을 인정받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가자되었다. 이 인사에 대해서도 사헌부사간원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과분한 가자라고 간했으나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중에는 명나라에서 원정을 온 마귀의 접반사로 그를 수행하기도 했다.

2.3. 관직 생활과 호성공신 책록

1590년(선조23)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보필했다. 1593년 호종의 공을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 조정에 출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외람된 관직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군량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고, 1598년에는 공을 인정받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되었다. 이 인사에 대해서도 사헌부사간원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과분한 가자라고 간했으나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중에는 명나라에서 원정을 온 마귀의 접반사로 그를 수행하기도 했다. 1601년 지중추부사, 1602년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

2.4. 인목대비 폐비 논란과 말년

1614년 (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으나 인목대비 폐비 사건 당시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폐비론에 동조한 이후로 비난을 받았다.

1623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같은 해 공조판서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를 보필해 강화로 피신했는데 여기서 전염된 수토병이 악화되어 1629년 죽었다.

3. 묘소

이주·이광정 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에 있다. 2001년 12월 21일 파주시의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4. 기타

이광정에 대한 다른 기록이나 정보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4.1. 이광정을 연기한 배우

* 김창봉 - 서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