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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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묘호란은 1627년, 후금이 광해군 폐위와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으로 전환한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이괄의 난 잔당의 후금 투항, 모문룡의 가도 주둔, 후금의 내부 사정 등이 배경이 되었다. 후금은 3만 명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하여 의주, 평양 등을 점령하고 강화도로 인조가 피난하는 등 조선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이후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고, 후금에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정묘호란은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9년 뒤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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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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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이름 | 정묘호란 |
다른 이름 | 정묘호란(丁卯胡亂), 후금의 조선 침입 |
날짜 | 1627년 1월 – 3월 |
장소 |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
원인 | 홍타이지의 조선에 대한 주전론 조선의 친명배금 외교 |
결과 | 후금의 승리, 조선과 후금 간의 강화, 정묘화약 체결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후금 |
교전국 2 | 조선, 명 |
군대 1 | 후금군 |
군대 2 | 조선군 |
지휘관 | |
지휘관 1 | 숭덕제 아이신기오로 아민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 아이신기오로 아지거 요토 쇼토 강홍립 |
지휘관 2 | [[파일: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17px]] 인조 정봉수 정충신 이완 남이흥 이립 장만 김상용 모문룡 장린 김종민 이광립 |
병력 및 사상자 | |
병력 1 | 30,000명 |
병력 2 | 50,000명 이상 |
사상자 1 | 약 3,000명 |
사상자 2 | 10,000명 이상 |
주요 전투 | |
주요 전투 | 의주성 전투 능안산성 전투 안주성 전투 용골산성 전투 |
관련 사건 | |
관련 사건 | 강화도 몽진 정묘화약 |
2. 배경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외교 정책을 펼쳐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려 노력했다.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할 때 강홍립에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게 했으나, 형세를 보아 판단하라는 밀지를 내려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 후 후금에 항복하게 했다. 이를 통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 했다.[1]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폐기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이 채택되었다. 이는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난이 진압된 후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괄은 인조반정 공신이었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1]
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다. 특히 모문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조선의 지원을 받으며 후금을 압박하고 있었기에, 조선을 먼저 공격하여 모문룡을 고립시키려 했다.[1] 1626년 제1차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1]
홍타이지는 닝위안 전투 패배와 누르하치 사망 이후,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자원 확보를 위해 조선 침략을 통해 빠른 승리를 원했다.[2]
이와 같이 조선의 외교 정책 변화, 내부 혼란, 후금의 전략적 필요성이 맞물리면서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2. 1. 조선의 대외 정책 변화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외교 정책을 펼쳐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려 노력했다.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할 때 강홍립에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게 했으나, 형세를 보아 판단하라는 밀지를 내려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 후 후금에 항복하게 했다. 이를 통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 했다.[1]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폐기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이 채택되었다. 이는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난이 진압된 후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괄은 인조반정 공신이었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1]
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다. 특히 모문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조선의 지원을 받으며 후금을 압박하고 있었기에, 조선을 먼저 공격하여 모문룡을 고립시키려 했다.[1] 1626년 제1차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1]
이와 같이 조선의 외교 정책 변화, 내부 혼란, 후금의 전략적 필요성이 맞물리면서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2. 2. 이괄의 난과 후금의 개입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1616년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의 부상에 맞서 뛰어난 외교 정책을 펼쳤다. 1619년 명나라의 후금 공격 요청에 강홍립을 파견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명이 대패하고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여 양국 간 큰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주장했으나, 광해군 재위 기간에는 조선의 소극적인 태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하며 후금을 자극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폐기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이 강화되었다. 이는 후금을 자극했고, 1624년 이괄의 난 진압 후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가 침략의 명분을 제공했다.
후금은 명나라 공격에 앞서 배후 위협을 제거하고, 1626년 제1차 영원성 전투 패배와 누르하치 사망 이후 후방 안정을 위해 조선 침공을 결정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군이 명나라를 지원했으나, 강홍립은 후금에 적대감이 없음을 주장하며 항복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친명반금 정책을 펼치며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모문룡의 군대가 의주에 주둔하는 것을 지원하며 후금을 더욱 자극했다. 닝위안 전투 패배와 누르하치 사망 이후, 홍타이지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자원 확보를 위해 조선 침략을 통해 빠른 승리를 원했다.[1]
1619년 정묘호란에서 명나라에 원군을 파병했으나,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며 조선은 후금과 싸울 의지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다이샨도 조선 침공에 관심이 없어 누르하치 사후까지 침공은 없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며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폐기되고, 반후금 친명 정책이 강화되어 후금을 자극했다. 모문룡은 조선에서 후금에 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발생했고, 진압 후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 등이 후금으로 도망쳐 홍타이지에게 조선 공격을 건의하며 침략의 명분을 제공했다.[2]
2. 3. 모문룡의 가도 주둔과 후금의 위협 인식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어 1만여 명의 군대를 보냈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고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는데, 이 때문에 후금은 조선에 대한 보복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1]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한 화평 방침에 반대했지만, 광해군이 재위하는 동안은 조선에 전의가 없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광해군의 권유로 평안북도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며 후금을 자극하였다.[1]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내세우자 후금은 신경을 곤두세웠다.[1] 1624년 이괄의 난 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1]
1626년 제1차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느낀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모문룡을 원조하며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칠 필요를 느꼈다.[1]
서인은 명나라에 친화적이고 후금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인조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명나라 장군 모문룡의 2만 6천 명의 군대는 한반도 연안의 섬을 거점으로 후금을 공격했고, 서인은 모문룡이 의주에 군대를 주둔하게 함으로써 그를 지원했다.
2. 4. 후금의 내부 사정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사고 정비, 서적 간행, 호패 실시 등 내정을 정비하고, 1616년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며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에 맞춰 뛰어난 외교 정책을 펼쳐 전란을 피하려 노력했다.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의 군대를 주어 파병했지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사르후 전투와 아부달리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고, 부차 전투에서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면서 양국 간 큰 충돌은 없었다.
홍타이지는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주전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남진 정책에 대한 배후의 우려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광해군 재위 기간에는 조선에 전의가 없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하며 후금을 자극했다.
광해군은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나,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 등 왕족 숙청과 인목대비 폐위로 도덕적 결함을 드러냈다.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내세워 후금을 자극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진압되었지만,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을 제공했다.[1]
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모문룡을 지원하며 후방을 위협하는 조선을 칠 필요를 느꼈다. 또한 1626년 제1차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닝위안 전투에서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한 후, 홍타이지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빠른 승리를 원했다. 조선 침략을 통해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고통받는 군대와 백성에게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2]
3. 과정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 침략을 종용하고, 1627년 후금이 침입하여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어 형제 관계를 맺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순서 | 날짜 | 사건 | 비고 |
---|---|---|---|
1 | 이괄의 난 잔당 한명련의 아들 한윤, 한택 등이 후금으로 도망 | 광해군 폐위 및 인조 즉위 부당성 호소, 조선 침략 종용 | |
2 | 1627년 3월 1일 | 후금, 버일러 아민(Amin)에게 3만 군사 주어 조선 침략 | 광해군 보복 명분, 일부는 가도 모문룡 공격 |
3 | 1627년 3월 4일 | 의주 점령[4] | |
4 | 3월 5일 | 정주성 함락 | |
5 | 3월 11일 | 안주성 함락[5] | 남이흥, 전상의,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 전사 |
6 | 3월 13일 | 평양성 도착 | 소현세자는 전주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 |
7 | 조선 각지에서 의병 봉기 | 철산 정봉수, 용천 이립 의병 승리 | |
8 | 1627년 4월 | 조선과 후금 강화 성립 | 형제 관계 맺음, 후금군 철수 |
이러한 상황에서 후금은 조선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홍타이지가 자국의 방어가 허술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조선 측에서는 반후금파의 항전론도 있었지만, 결국 화의를 수용하였다.
3. 1. 후금의 침공과 조선의 대응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조선의 약한 병력과 모문룡 군사의 오합지졸(烏合) 상태를 알리며 조선 침공을 종용하였다.[4]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후금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이는 조선 침입 결심을 굳히게 했다.1627년(인조 5년) 3월 1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조선을 침략하게 했다.[4]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했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3월 4일 의주를 점령하고[4], 3월 5일엔 정주성을 함락시켰으며, 3월 11일 안주성에서 남이흥등의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함락시켰고, 3월 13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인조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5]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평안북도 철산의 정봉수와 용천의 이립이 이끄는 의병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에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후금은 조선의 배후 공격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했다. 1627년 4월 조선과 후금은 강화 조약을 맺고 형제 관계를 맺었다.[5]

1627년, 홍타이지는 강홍립과 이용방의 안내를 받아 아민, 직갈랑, 아지게 그리고 요토를 3만 명의 군사와 함께 조선에 파병했다. 여진족은 국경 도시에서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조선의 국경 수비대는 빠르게 패퇴했다. 1월 14일, 여진군은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던 의주로 진격했고, 모문룡은 부하들과 함께 보해로 급히 도망쳤다.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이 함락되었다. 다음으로 여진족은 안주를 공격했고, 안주 수비대는 화약고를 폭파하여 자결했다. 평양은 무혈 입성했고, 여진군은 대동강을 건넜다.
이때, 침략 소식이 명나라 조정에 전해졌고, 명나라는 즉시 조선에 구원군을 파병하여 여진의 황주 진격을 늦추었다.
인조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맺으려 했지만, 사신이 돌아올 때 인조는 이미 한성( 서울)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신했다.
여진의 침략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민은 화의를 맺으려 했다. 강화도에서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 조선은 명나라 연호인 천계(天啓)를 버린다.
- 조선은 왕족 대신 이괄을 인질로 제공한다.
- (이후) 여진과 조선은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평양은 여진족의 약탈을 며칠 동안 겪었다. 그 후 홍타이지의 명령으로 아민은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여진군은 심양(Mukden)으로 철수하여 3개월간의 침략을 끝맺었다.
3. 2. 조선 의병의 항쟁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일부는 후금으로 도망하여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1627년 3월 1일, 후금은 버일러(beile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4]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는 의주, 정주성을 함락시켰고, 안주성에서 남이흥 등을 죽였다.[5]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평안북도 철산의 정봉수와 용천의 이립이 이끄는 의병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와 전쟁 중이었던 후금은 조선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하였다.
3. 3. 강화 협상과 형제 관계 맹약
1627년 4월,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후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다.[4]조선 곳곳에서 정봉수와 이립을 비롯한 의병이 일어나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후금은 조선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하였다.[5]
홍타이지는 자국의 방어가 허술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조선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고, 조선 측에서는 반후금파의 항전론도 있었지만, 결국 화의를 수용하였다.
강화도에서 이루어진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서 | 내용 |
---|---|
1 | 후금을 형, 조선을 아우로 하는 형제국으로서 맹약을 맺는다. |
2 |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를 사용하지 않는다. |
3 | 조선은 왕자 대신 왕족인 이구(李玖)를 인질로 보낸다. |
4 | 후금과 조선은 앞으로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
협상 중에 홍타이지가 아민에게 화의에 서명하라고 명령하기 전, 아민의 군대는 평양에서 수일간 약탈을 자행했다. 이 화의는 후금에게 유리한 내용이었고, 침공 개시 4개월 만에 후금군은 심양으로 철군했다.
4.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 음력 1월 17일: 금군이 의주를 포위하고 접전하였고, 평양에는 아병(牙兵) 2천 8백 명과 삼수병(三手兵)·정초병(精抄兵) 3천여 명이 있어 군대를 나누어 성첩(城堞)을 수비하도록 하였다.[6][7] 장만은 어영군에서 정포(精砲) 1백 명을 선발하고 개성부(開城府)와 장단(長湍)의 군병을 조발하여 파주산성에 들어가 수비할 것을 건의했다.[8]
- 음력 1월 18일: 내전의 강화도 대피와 임진강, 남한산성 수비에 대해 논의했다.[11]
- 음력 1월 20일: 청군 70여 기가 가산(嘉山)으로 출발했다는 보고가 있었다.[14]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金搢) 등은 금군이 선천군 뒷고개에 주둔하여 다섯 갈래 병마로 세 겹으로 포위하고, 일곱 갈래 병마로 각각 일곱 면(面)을 노략하였다고 보고했다.[15]
- 음력 1월 21일: 능한산성이 함락되어 분조할 준비를 했다.[16]
- 음력 1월 22일: 윤훤은 정주 목사 김진, 곽산 군수 박유건은 포로가 되었고 선천 부사 기협은 굴복하지 않고 죽었으며, 세 고을 군병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도망하여 목숨을 건진 자는 단 수십여 명뿐이며, 의주(義州)·용골(龍骨) 두 성은 모두 함락되었고 정주(定州)에 주둔하고 있는 적은 현재 진격하거나 퇴각할 의사가 없으며 우리 백성들 중 붙잡혀간 자들은 모두 머리를 깎였다고 보고하였다.[17]
- 음력 1월 24일: 윤훤은 금군이 이미 숙천(肅川)에 이르렀는데 본성 군병들은 모두 놀라서 도망가 버렸다고 보고하였다.[18]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19]
- 음력 1월 25일: 장만 등은 황주가 무너졌고 병사 정호서(丁好恕)는 많은 군병을 인솔하고 산산(蒜山)에 주둔하고 있는데 적진의 유기(遊騎; 유격하는 기병)가 이미 산산까지 들어 왔다고 보고했다.[20] 김류는 경기의 수변과 해서 연해의 각 고을 창고에 있는 곡물을 모두 강도에 수송해 보내도록 하고 경기도 양천(陽川)·김포(金浦)·통진(通津)·풍덕(豐德)·인천(仁川)·부평(富平) 등 여러 고을의 속오군을 강화도 방어에 쓸 것을 장계하였다.[22]
- 음력 1월 26일: 인조는 융복(戎服;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노량에 행차하였다. 선박이 모자라 건너가기가 어렵자, 인조는 말에서 내려 모래 위에 앉았다.[23] 장만(張晩)은 금군 본대는 그대로 평양에 머물고 있고 선봉대만 황주(黃州)에 도착하였고 신경원(申景瑗)의 군대는 밤에 놀라서 무너져 흩어졌다고 보고하였다.[24]
- 음력 1월 27일: 인조는 양천(陽川)에서 출발하여 김포(金浦)를 경유하면서 육경원을 참배하고 저녁에 통진에 도착했다.
- 음력 1월 28일: 경성의 한강에 있는 배들을 불태우게 하였다.[25]
- 음력 1월 29일: 청 사신을 만났다.[26]
- 음력 2월 2일: 청 사신이 서신을 보내 화친하자고 하였다.[27]
- 음력 2월 3일: 장만과 김기종 등은 강홍립이 스스로 오도 원수(五道元帥)라 칭하며 박난영을 소모장(召募將)으로 삼아 흩어진 백성들을 초유(招諭; 불러서 타이름)하여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유격병으로 상원(祥原) 등지를 노략질한다고 보고하였다.[28]
- 음력 2월 6일: 청 측은 화친하려면 빨리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했다.[29]
- 음력 2월 7일: 청 측은 "우리가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원래 명나라 때문이며, 일이 완결되면 바로 떠나가겠지만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왕경(王京)으로 가 주둔하여 1년 동안 농사하면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라며 화친하기 어렵다는 서신을 보냈다.[31]
- 음력 2월 8일: 임진강 방어와 화친에 대해 논의했다.[32]
- 음력 2월 10일: 양사가 강홍립을 참수할 것을 청하다.[33]
- 음력 2월 11일: 중국 사신 유해(劉海)가 화친할 것을 요청하다.[34]
- 음력 2월 14일: 청 진영 중 한 사람이 반드시 명나라와 단절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35]
- 음력 2월 17일: 평안도 자산군(慈山郡) 진사(進士) 임표변(林豹變)이 의병을 모집하였다.[36]
- 음력 2월 23일: 평산(平山)의 청군 일부는 서봉(西峯)으로, 일부는 독부(禿阜)로, 일부는 우암(牛巖)으로 출발하였다.[37]
- 음력 2월 26일: 청군이 물러간 후 의주 부윤을 부임시켰다.[38] 청군의 일부가 배천(白川)·강음(江陰) 두 고을을 약탈하였다.[39]
- 음력 2월 28일: 비변사는 청군이 아직도 평산과 봉산 사이에 주둔하고 있는데 유격 기병(遊擊騎兵)이 사방으로 나와 약탈하였고 그중 10여 기(騎)가 또 개성부에 이르러 여염의 사람과 말을 약탈하였다는 보고하고 이들을 섬멸할 것을 청하였다.[40]
- 음력 3월 3일: 청 사신과 맹약을 맺고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 그 피와 뼈를 마시는 의식을 치렀다.[41] 비변사는 청군이 조선에 깊숙이 들어왔을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조선에서는 한 명의 적도 죽이지 못했으니 기회를 보아 청군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42]
- 음력 3월 4일: 자모장(自募將) 민람(閔灠)이 모라산(毛羅山)에서 복병(伏兵)을 하고 있었는데 좌위장(左衞將) 조광필(趙光弼) 등이 1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3급을 베었으며 호마(胡馬) 6필과 활·칼 등의 물건을 탈취하여 군문에 바쳤다.[43]
- 음력 3월 7일: 장만은 해주시를 침략하였다고 보고하였고,[44] 정충신(鄭忠信) 등은 청 기마병의 침입과 퇴각을 보고하였다.[45]
- 음력 3월 9일: 비변사는 해서(황해도)에 청군이 그대로 머물고 있으면서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보고하고 군사를 보내 협공할 것을 요청했다.[46]
- 음력 3월 10일: 약탈하는 청 군사를 공격해야 한다고 합계하였다.[48]
- 음력 3월 12일: 청 기병 50여 기가 상원군(祥原)에 쳐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였다.[49]
- 음력 3월 13일: 청 장수가 해주, 황주 등지에서 공격을 당했다고 글을 보내자, "귀국(청)의 유기(游騎)가 곳곳에 다니며 노략질을 하여 남의 부모를 해치고 남의 처자를 빼앗아가므로 촌민들이 그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모여 단속을 하고 제각기 원수를 갚은 것이니, 이것 역시 인정상 필연적인 것"이라며 빨리 철수하라고 답서를 보냈다.[50] 강홍립은 편지를 보내 맹서문을 가지고 심양으로 가는 낭차를 조선 병사가 대동강에서 죽이려 한다고 하였다.[51] 장만은 평산(平山)·서흥(瑞興)·봉산(鳳山)·우봉(牛峯)·신계(新溪)·수안(遂安)·재령(載寧)·해주(海州)·신천(信川)·문화(文化) 등의 읍이 혹독하게 적의 침해를 받아 온통 텅 비었다고 보고하였다.[52]
- 음력 4월 1일: 명나라에 청과 화친하기까지의 사정을 보고하였다.[53]
- 음력 4월 10일~12일: 인조가 강화도를 출발해 경덕궁으로 돌아왔다.[54]
5. 결과 및 영향
정묘호란의 전후 협상에서 후금은 명과의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조선에 국경 근처 시장 개방을 강요했다. 또한 100필의 말, 100장의 호랑이와 표범 가죽, 400필의 면포, 그리고 15,000필의 옷감을 후금 칸에게 공물로 바쳐야 했다.[1] 그러나 이후 홍타이지는 조선이 협정 조건을 준수하지 않고 명과 계속 무역하며 지원하는 것을 비난했다.[1]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불편하고 암울하게 지속되었다. 조선의 정치가와 유학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지원을 언급하며 후금과의 화친을 배신으로 여겼다. 이러한 분노는 1636년 만주가 외교 관계 변경을 요구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1636년 청나라의 조선 침입(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1]
명나라 장군 원숭환은 후금과의 평화 협상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탄핵되었고, 이는 명이 여진과 공개적으로 평화 협상을 벌인 마지막 사건이었다.[1] 모문룡은 1629년 원숭환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원숭환은 "황제의 위엄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처형했다고 조선 조정에 보고했다.[1]
5. 1. 조선에 미친 영향
전후 협상에서 후금은 명과의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조선에 의주와 회령에서 국경 시장 개방을 강요했다. 조선은 또한 왈카부(瓦爾喀部)의 야인여직(野人女直) 종주권을 후금에 넘겨야 했다.[1]이처럼 후금은 조선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국에 유리한 요구를 강요했으므로, 양국 관계는 좋지 않았다. 비록 정묘호란은 9년 후의 병자호란만큼 파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지원해 준 명을 무시하는 듯한 화의를 후금과 맺은 것은 배신 행위라는 비난 여론이 당시 유학자와 유교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감정은 1636년에 홍타이지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인정하도록 요구했을 때 폭발했다. 이때, 반후금파로 채워져 있던 조선 정권은 이 요구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같은 해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다.[1]
5. 2. 후금에 미친 영향
후금은 명나라와의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조선에 국경 근처 의주와 회령에 시장을 열 것을 요구했다.[1] 조선은 왈카부(瓦爾喀部)의 야인여직(野人女直)을 후금에 반환해야 했다.[1] 또한 후금은 100필의 말, 100장의 호랑이와 표범 가죽, 400필의 면포, 그리고 15,000필의 옷감을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이처럼 후금은 조선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국에 유리한 요구를 강요했으므로, 양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정묘호란은 조선에게 9년 후의 병자호란만큼 파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지원해 준 명을 무시하는 듯한 화의를 후금과 맺은 것은 배신 행위라는 비난 여론이 당시 유학자와 유교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1]
이러한 감정은 1636년에 홍타이지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인정하도록 요구했을 때 폭발했다. 이때, 반후금파로 채워져 있던 조선 정권은 이 요구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1]
5. 3.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
후금은 명나라와의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조선에 국경 근처 시장 개방을 강요했다. 조선은 또한 왈카부(瓦爾喀部)의 야인여직(野人女直) 종주권을 후금에 넘겨야 했다.[1]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불편하고 암울하게 남았다. 침략은 과거 일본과의 싸움에서 명이 제공한 지원을 고려할 때 조선이 명나라를 버린 것은 배신이자 불효라고 믿었던 조선의 정치가와 유학자들에 의해 격렬하게 분개되었다. 이러한 분노는 1636년 만주가 외교 관계의 조건을 평등에서 종주-번신 관계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반만주 매파가 지배하던 조선 조정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이는 1636년 청나라의 조선 침입(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1]
명나라 장군 원숭환은 후금에게 속아 평화 협상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탄핵되었고, 조정 신료들은 그에게 주체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이는 명이 여진과 공개적으로 평화 협상을 벌인 마지막 사건이었다.[1]
모문룡은 조선에 의해 명나라 당국에 비겁함과 배신으로 고발되었다. 모문룡은 1628년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주화를 주조했고, 명나라 법을 위반하여 불법 무역을 했다. 그는 1629년 원숭환에게 체포되어 1629년 7월 24일 밀수죄로 처형되었다. 원숭환은 "황제의 위엄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처형했다고 조선 조정에 보고했다.[1]
전후 협상은 양국에서 진행되었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장기간의 전투로 인해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조선에 국경 부근의 의주와 회령에 시장을 열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후금은 조선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국에 유리한 요구를 강요했으므로, 양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정묘호란은 조선에게 9년 후의 병자호란만큼 파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지원해 준 명나라를 무시하는 듯한 화의를 후금과 맺은 것은 배신 행위다”라는 비난 여론이 당시 유학자와 유교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감정은 1636년에 홍타이지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인정하도록 요구했을 때 폭발한다. 이때, 반후금파로 채워져 있던 조선 정권은 이 요구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같은 해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다.
6. 평가 및 논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국에 유리한 요구를 강요했으므로, 양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후금은 명과의 장기간의 전투로 인해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조선에 국경 부근의 의주와 회령에 시장을 열 것을 요구했다. 조선은 왈카부(瓦爾喀部)의 야인여직(野人女直)을 후금에 반환했다.[1]
6. 1. 인조 정권에 대한 비판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국에 유리한 요구를 강요했으므로, 양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임진왜란에서 지원해 준 명을 무시하는 듯한 후금과의 화의는 배신 행위라는 비난 여론이 당시 유학자와 유교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1] 이러한 비판 여론은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에 즉위한 것을 인정하도록 요구했을 때 폭발하게 된다.[1]6. 2. 의병 활동에 대한 재조명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의 강화는 조선에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이는 당시 유학자와 유교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임진왜란에서 지원해 준 명을 무시하는 듯한 화의를 후금과 맺은 것은 배신 행위다"라는 비난 여론을 일으켰다.[1] 이러한 감정은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 즉위를 인정하라는 요구에 조선 정권이 반발하면서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1]6.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후금 측의 일방적인 요구로 인해 원만하지 못했다. 후금은 명과의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조선에 국경 지역인 의주와 회령에서의 무역을 요구했고, 조선은 왈카부(瓦爾喀部)의 야인여직(野人女直)을 후금에 돌려보냈다.당시 조선의 유학자와 유교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명을 무시하고 후금과 화친을 맺은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다. 이는 배신 행위로 간주되었다.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 즉위를 선포하고 조선에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하자, 반후금파로 가득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된다.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Korea, 2nd Edition
https://books.google[...]
Abc-Clio
2014-05-30
[2]
서적
『清太宗実録』巻2, 天聡元年正月丙子条 「命大貝勒阿敏、貝勒済爾哈朗、阿済格、杜度、岳託、碩託、統大軍往征朝鮮」
[3]
웹사이트
『朝鮮仁祖実録』五年(1627)三月三日
http://sillok.histor[...]
[4]
웹사이트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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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1-17
[5]
웹사이트
융복으로 갈아입고 노량에 행차하다
http://sillok.histor[...]
1627-01-26
[6]
웹인용
금나라가 침입하자 대책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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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7]
웹인용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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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8]
웹인용
장만이 개성부와 장단의 군병을 조발하고 파주 산성에서 수비할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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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9]
웹인용
수원 방어사 이시백이 군마를 이끌고 와서 도성 방위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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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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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신경진으로 하여금 임진강을 지키게 하고 이시백은 경성을 지키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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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1]
웹인용
대신 등을 인견하고 내전의 강도 대피와 임진강·남한 산성 수비에 대해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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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2]
웹인용
능한 산성 대장 김진 등이 금나라 군대의 동태를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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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3]
웹인용
보덕 윤지경이 임진강을 지킬 군사를 청하고 피난하지 말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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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4]
웹인용
청나라 군이 출발했다는 장계를 보고 그 대책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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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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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 목사 김진 등이 능한 산성에서 금나라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고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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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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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한 산성이 함락되자 분조할 준비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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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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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훤이 함락된 능한 산성을 정탐하여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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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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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훤이 중화로 퇴각하였다고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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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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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함락되었음을 듣고 김기종을 새로이 감사에 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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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장만 등이 황주가 무너지고 병사 정호서는 산산에 주둔하였다고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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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 감사 윤훤을 효시하도록 합사하여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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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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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비국이 정충신을 등용하고 경기도의 속오군을 강도에서 쓸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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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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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융복으로 갈아입고 노량에 행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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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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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이 청의 선봉대가 황주에 도착하였다고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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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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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수원 군병에게 쌀을 지급했는가 묻고 경성의 강에 있는 배들을 불태우게 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6]
웹인용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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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7]
웹인용
청 사신이 갑곶에 이르렀는데 서신은 화친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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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8]
웹인용
장만·김기종 등이 백성들을 초유하고 노략질도 하는 강홍립에 대해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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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9]
웹인용
화친하려거든 빨리 사신을 보내라는 청의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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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30]
웹인용
체찰 부사 김류가 한강 지역의 방어를 청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31]
웹인용
강숙·박립이 화친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청나라 서신을 가지고 오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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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연미정에 행차하여 나룻터 기찰·방패선·군량·임진강 방어·화친 등에 대해 논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33]
웹인용
양사가 강홍립을 참수하고 청 사신을 접대하지 말 것을 청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34]
웹인용
화친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유해의 계첩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35]
웹인용
접대 대신이, 반드시 명나라와 단절할 필요는 없다는 호인의 말을 아뢰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36]
웹인용
평안도 자산군 진사 임표변이 의병을 모집하였으므로 논상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17일 갑인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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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평산의 청 군대가 서봉·독부·우암으로 나누어 출발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23일 경신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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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청군이 물러간 후 의주 부윤을 부임시키고 강령 현감 이상절·신계 병사 이익을 벌주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26일 계해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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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청 군사의 일부가 배천·강음을 노략질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26일 계해 6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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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비국이 약탈하는 청 군사를 섬멸할 것을 청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28일 을축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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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와 함께 회맹을 하고 화친을 하는 맹세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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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3일 경오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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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국이 기회를 보아 청 군대를 공격할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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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3일 경오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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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벤 좌위장 조광필 등에게 상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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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4일 신미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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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이 청군의 해주 침략을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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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7일 갑술 2번째기사
[45]
웹인용
정충신이 청 기마병의 침입과 퇴각을 치계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7일 갑술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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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국이 화친 뒤에도 청군이 약탈하고 있으므로 협공하기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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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9일 병자 2번째기사
[47]
웹인용
선전관을 파견하여, 침략하지 말고 포로도 보내줄 것을 국서에 써서 보내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9일 병자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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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약탈하는 청 군사를 공격할 것을 합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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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10일 정축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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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기병이 상원에 쳐들어와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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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12일 기묘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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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청 장수가 조선 군사의 공격을 받았다고 글을 보내니, 속히 철수하라는 뜻으로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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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13일 경진 4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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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맹서문을 가지고 심양으로 가는 낭차를 조선 병사가 죽이려 한다고 강홍립이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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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13일 경진 6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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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장만이 평산·서흥·봉산·우봉·신계 등의 읍이 혹독한 침입을 받았다고 치계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13일 경진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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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명나라에 청과 화친하기까지의 사정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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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4월 1일 정유 6번째기사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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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을 출발하여 종로로 가서 위안제를 지내고 경덕궁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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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4월 12일 무신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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