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서
1. 개요
이금서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로, 중원태수를 역임하고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함께 입조하여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이금서의 가계와 관련된 논란으로는 아버지 이금현과의 형제 관계 추정, 아들들의 분적 및 시조 논란, 그리고 이제현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과 연대 상의 모순 등이 있다. 또한, 증손자 이주좌의 가문에 대한 기록의 진위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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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 -
윤곤
윤곤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건국 후 완산부윤, 대장군 등을 지냈고,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명나라 사신, 의정부 참찬, 이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무신, 정치인, 외교관이다. -
고려의 문신 -
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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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
경주 이씨 -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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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2. 생애
신라 말 고려 초에 중원태수(中原太守)를 역임하였다. 935년(경순왕 8) 11월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함께 입조하였고,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었다.
3. 논란과 의혹
이금서와 관련된 여러 기록에서는 그의 가계, 활동 연대, 후손의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의문점과 모순이 제기된다.
주요 논란으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오해, 아들들의 분적(分籍) 기록 오류, 부인으로 알려진 신란궁부인 김씨와의 혼인 및 자녀 출생 기록과 관련된 문제 등이 있다. 특히 고려 태조 시기 활동 기록과 경순왕의 귀부 및 신란궁부인 김씨와의 혼인 시점 사이에 연대적 불일치가 존재하며, 이는 아들들의 활동 시기 기록과도 충돌하여 혼란을 야기한다. 또한 증손자인 이주좌(李周佐)가 고려사 등 정사(正史) 기록에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묘사된 점 역시 그의 가문 배경과 상충되어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논란들은 주로 족보 기록과 이제현 묘지명 등 서로 다른 자료 간의 불일치에서 비롯되며, 각 기록의 신뢰도 문제와 해석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다.
3.1. 가계도 논란
일설에는 아버지로 알려진 이금현(李金現)과 형제 관계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이금현과 이금서(李金書) 부자의 이름에 '금(金)'자가 공통으로 들어간 점에서 비롯된 오해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아들의 이름에 아버지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아들 인행(仁幸), 연산 공씨 시조 공직(龔直, ?~939)의 아들 직달(直達) 등이 있다.
경주 이씨 대동보에 따르면 이금서의 아들은 이윤홍(李潤弘), 이윤원(李潤遠), 이윤장(李潤張) 세 명이다. 이 중 둘째 아들 이윤원(李潤遠)은 가평 이씨(加平李氏)로, 셋째 아들 이윤장(李潤張)은 평창 이씨(平昌李氏)로 분적(分籍, 본관을 달리하여 갈라져 나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가문이 아니라고 밝혀져 분적종에서 제외되었으며, 가평 이씨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로 경주 이씨와는 관련이 없다. 평창 이씨 내부에서는 숙종 대에 만들어진 족보를 근거로 이윤장(李潤張)을 시조로 보는 분파와 이광(李匡)을 시조로 보는 분파 간의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해당 족보가 위작으로 판명되면서 이광(李匡)을 시조로 확정하고 이윤장과의 관련성을 부정하였다.
한편,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신라왕 김부(金溥, 경순왕)가 나라를 바치고 고려 조정에 들어와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고, 그 딸이 금서(이금서)의 아내가 되어 윤홍(潤弘)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윤홍이 '신라말'에 병정(兵正) 벼슬을 했다는 기록 때문에 연대상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신라말'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혼란기, 즉 '나말여초(羅末麗初)'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에는 '고려가 병부령(兵部令) 및 병정(兵正)을 그대로 두었고 그 직급은 재상(宰相)과 견준다(高麗仍置兵部令及兵正秩視宰相)'는 설명이 있다. 이는 신라 말에 존재했던 병부령과 병정 관직이 고려 초기에도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병부령과 병정은 고려 초기에 난립했던 지방 호족 세력이 독자적으로 설치한 지방 행정 기구 소속의 향직(鄕職, 지방 관직)으로, 병부(兵部)의 장관이 병부령(兵部令), 차관급이 병정(兵正)이었다. 따라서 묘지명의 '신라말'은 '나말여초'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이거나 '고려초'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3.2. 연대상 모순
경주 이씨 세보에 따르면 이금서는 고려 조정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으로 책록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고 고려 태조의 맏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혼인한 사실을 고려하면, 경순왕의 둘째 딸이자 낙랑공주의 첫째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가 이금서와 혼인할 나이가 되려면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이후 최소 1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결혼에서 태어난 이금서의 아들들이 활동할 나이가 되려면 추가로 최소 15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이금서의 아들들이 경순왕의 고려 귀부 이전에 활동했다는 기록은 이러한 시간 계산과 비교했을 때 3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셋째 아들 이윤장은 고려의 대사마 대장군으로 후백제의 견훤을 토평하고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위에서 살펴본 연대 계산에 따르면 이윤장의 생모는 신란궁부인 김씨일 수 없다.
첫째 아들 이윤홍이 신라 말에 병정(兵正)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 역시 신란궁부인 김씨의 활동 시기와 맞지 않을 뿐더러, 이윤홍이 이금서와 신란궁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한 이제현 묘지명의 내용과도 모순이 발생한다.
대학자인 이색의 인품과 그가 이제현의 묘지명을 작성한 시기를 고려할 때, 후대에 기록되고 위조나 오류가 발생하기 쉬운 족보 기록보다는 이색이 쓴 이제현 묘지명의 신뢰도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이 묘지명 기록을 바탕으로 모순점들을 살펴보면, 경순왕의 딸이자 고려 태조의 외손녀라는 신란궁부인 김씨의 높은 신분을 고려하여 그의 아들인 이윤홍을 이복형들인 이윤장, 이윤원보다 앞서 첫째 아들(1남)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윤홍이 '신라 말'에 병정을 역임했다는 부분은 '고려 초'의 오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