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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시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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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 시슈만은 1371년부터 1395년까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였다. 그는 아버지 이반 알렉산데르가 사망한 후 즉위했으며, 이스커르 강, 소피아 계곡, 로도피 산맥 일부를 다스렸다. 오스만 제국의 압박 속에서 그는 1373년 오스만의 봉신이 되었고, 1385년 소피아가 함락되는 등 영토를 잃었다. 1393년 수도 터르노보가 함락된 후 그의 영토는 니코폴과 다뉴브 강 주변으로 축소되었고, 1395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불가리아 민속에서 영웅적인 통치자로 묘사되며, 많은 전설과 노래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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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시슈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반 알렉산더르의 사복음서에 나오는 어린 시절의 이반 시슈만 판화
이반 알렉산더르의 사복음서에 나오는 어린 시절의 이반 시슈만 판화
칭호불가리아 차르
재위 기간1371년 2월 17일 – 1395년 6월 3일
즉위식알 수 없음
이전 군주이반 알렉산더르
다음 군주이반 스라치미르
배우자키라 마리아
드라가나
자녀아래 참조
왕가스라치미르 왕조
부친이반 알렉산더르
모친사라-테오도라
출생일1350년/1351년
출생 장소알 수 없음
사망일1395년 6월 3일
사망 장소니코폴, 불가리아
매장지알 수 없음
가문
왕조시슈만 왕가 (스라치미르 분가)
이름
불가리아어Иван Шишман (이반 시슈만)
가족
자녀이반 므스티슬라프
알렉산더르
아센
다른 이름 미상의 딸 (미르차 1세의 아내)

2. 생애

이반 시슈만은 1350년 또는 1351년에 황제 이반 알렉산드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사라-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출신인 사라-테오도라는 동방 정교회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이반 시슈만의 출생으로 인해 불가리아 왕위 계승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반 알렉산드르의 첫 번째 부인인 왈라키아의 테오도라에게서 태어난 두 명의 형, 미하일 아센과 이반 스트라치미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하일 아센은 일찍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나 135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장자 상속제에 따르면 이반 스트라치미르가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지만, 사라-테오도라는 자신의 아들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만들고자 했다. 이반 시슈만은 아버지의 대관식 이후에 태어나 왕위 계승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결국 이반 시슈만이 왕위 계승자로 선택되었다.[1] 1355년 말, 이반 시슈만은 왕위 계승자이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이반 스트라치미르와의 갈등을 초래했고, 이반 스트라치미르는 보상으로 비딘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반 스트라치미르가 황제의 가족 초상화에서 제외된 것도 이러한 갈등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2] 1356년, 이반 스트라치미르는 스스로를 비딘의 황제로 선포하며 독립했다.[3] 이후 이반 시슈만은 아버지, 동생 이반 아센 5세와 함께 1360년대 후반 타르노보 교회 회의를 주재했다.[4]

2. 1. 초기 생애와 즉위

1350년 또는 1351년에 이반 알렉산드르 황제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사라-테오도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라-테오도라는 유대인 출신으로 동방 정교회로 개종한 인물이다. 이반 시슈만의 출생은 불가리아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했다. 이반 시슈만에게는 이반 알렉산드르의 첫 번째 부인인 왈라키아의 테오도라 소생의 두 명의 형이 있었다. 장남인 미하일 아센은 이반 알렉산드르가 즉위한 직후 왕위 계승자로 선포되었고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135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일찍 사망하여 왕위 계승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장자 상속제에 따르면 이반 스트라치미르가 다음 계승자였으나, 사라-테오도라가 이반 알렉산드르에게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하도록 압력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반 시슈만은 아버지의 대관식 이후 태어나 왕위 계승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반 시슈만의 손을 들어 결정되었다.[1] 1355년 말, 이반 시슈만은 왕위 계승자이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반 스트라치미르와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이반 스트라치미르는 보상으로 추정되는 비딘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 분쟁에 대한 또 다른 간접적인 증거는 황제의 온 가족이 묘사된 이반 알렉산드르의 사복음서에 이반 스트라치미르의 초상화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2] 1356년 이반 스트라치미르는 스스로를 비딘의 황제로 선포했다.[3] 이반 시슈만은 아버지와 동생 이반 아센 5세와 함께 1360년대 후반 타르노보의 교회 시노드를 주재했다.[4]

2. 2.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이반 시슈만은 1371년 아버지 이반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20대 초반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영토 일부만을 상속받았는데, 이스커르 강과 실리스트라 사이의 땅, 소피아 계곡, 로도피 산맥 일부와 북부 트라키아 지역을 다스렸다.[5] 그의 형제 이반 스라치미르는 서쪽의 비딘 지역을, 데스포트 도브로티차는 동쪽 해안 지역을 차지하여 사실상 불가리아는 분열된 상태였다.[6][7]

14세기 말 분열된 불가리아 제국의 지도
이반 시슈만의 즉위 이후의 제2차 불가리아 제국. 그의 형제 이반 스라치미르는 북서쪽의 비딘을, 데스포트 도브로티차는 동쪽 해안을 지배했다.


이반 시슈만의 모노그램


1371년, 즉위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오스만 제국은 체르노멘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대를 격파하고 불가리아로 진격했다.[10] 오스만 술탄 무라드 1세는 이반 시슈만을 발칸 산맥 북쪽으로 몰아냈고, 북부 트라키아, 로도페, 코스테네츠, 이흐티만, 사모코프 등을 정복했다. 결국 이반 시슈만은 1373년 오스만과 협상하여 봉신이 되었고, 누이 케라 타마라를 무라드 1세에게 보내야 했다.[11] 이 협정으로 불가리아는 일부 영토를 되찾고 약 10년간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했다.[12]

그러나 1380년대 초 오스만의 침략이 재개되었고, 1385년에는 소피아 포위전으로 소피아가 함락되었다. 한편, 이반 시슈만은 1384년에서 1386년 사이에 왈라키아보이보드 왈라키아의 단 1세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은 이반 시슈만과 이반 스라치미르 형제 간의 갈등과 관련이 있었다.

1387년, 세르비아 공국과 보스니아 왕국 연합군이 플로치니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자, 이반 시슈만은 봉신 관계를 무효화하고 오스만의 지원군 파병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1388년 대재상 찬다를리즈데 알리 파샤가 이끄는 30,000명의 군대를 보내 불가리아를 공격했다.[13][14] 이반 시슈만은 니코폴로 피신하여 포위당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에 실리스트라를 넘겨주고 봉신 관계를 다시 맺어야 했다.[15][16]

A silver coin
이반 시슈만의 은화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패배한 후, 이반 시슈만은 헝가리 왕 지그문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1393년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수도 터르노보를 함락시켰다.[20] 이후 이반 시슈만의 영토는 니코폴과 다뉴브 강 주변의 몇몇 도시로 축소되었다.

결국 1395년 바예지드 1세는 니코폴을 점령하고 이반 시슈만을 살해했다. 『익명의 불가리아 연대기』는 이반 시슈만이 1395년 6월 3일에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비잔틴 연대기는 10월 29일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반 시슈만이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도 한다.[22]

3. 문화와 종교

테오도시우스 오브 타르노보의 제자인 에브티미 파트리아르크 (재위 1375–1393)는 이반 시슈만 시대에 불가리아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는 1371년에 성 삼위일체 수도원을 건립하고, 타르노보 문학 학파의 주요 거점으로 만들었다. 에브티미는 성인전, 찬송가, 편지를 포함한 많은 종교 작품을 썼으며, 불가리아어의 철자 개혁과 표준화로 가장 유명하다. 그는 그리스어 텍스트를 지역 방언으로 번역하면 원본을 잘못 해석하고 이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철자법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전성기의 고대 교회 슬라브어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개혁에는 구문 변경과 어휘를 풍부하게 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모든 텍스트는 출판 전에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이반 시슈만이 지지한 조치였다.

성 이반 시슈만의 아이콘


헤시즘은 이반 시슈만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 정교회의 주요 운동으로 남아 있었고, 에브티미 파트리아르크는 그 지지자였다. 불가리아는 비잔틴 제국과 함께 헤시스트 사상의 주요 중심지였다. 에브티미는 이단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보고밀파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바를라암파와 같은 다른 종파들도 박해를 받았다. 에브티미는 도덕에 대한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과부와 홀아비의 이혼과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결혼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불가리아 제국이 붕괴된 후 많은 학자들이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러시아 공국으로 이주했고, 불가리아 문화, 서적, 헤시스트 사상을 전파했다.[24] 이 영향은 매우 커서 "러시아에 대한 두 번째 남슬라브의 영향"이라고 불린다.

4. 평가와 유산

이반 시슈만의 통치는 16세기에 여전히 기억되었다. 1519년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와 헝가리의 루이 2세 사이에 서명된 조약에서 문제의 일부 영토는 ''terra cesaris Sysman'', 즉 "황제 시슈만의 땅"으로 언급되었다.[29]

오스만 제국 통치 초기 수세기 동안 이반 시슈만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었다. 1598년 제1차 터르노보 봉기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반군 지도자 중 한 명은 자신이 이반 시슈만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시슈만 3세라는 이름으로 황제로 선포되었다.[30] 거의 한 세기 후인 1686년, 제2차 터르노보 봉기는 시슈만 왕조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불가리아 공작이라고 칭한 로스티슬라프 스트라티미로비치가 이끌었다.[31]

이반 시슈만은 현재 제3차 불가리아 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고 잘 알려진 통치자 중 한 명이다. 유리 아르나우도프가 제작한 1969년 영화 ''차르 이반 시슈만''과 헤비 메탈 밴드 에피조드의 2004년 앨범 "성 파트리아르크 에프티미"에 수록된 "차르 이반 시슈만"을 포함하여 그 또는 그의 통치에 헌정된 여러 작품이 있다. 남극 사우스셰틀랜드 제도리빙스턴섬에 있는 시슈만 봉우리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1. 부정적 평가

불가리아 역사가들은 이반 시슈만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27] 그는 종종 어머니의 음모로 왕위에 올랐고, 정당한 후계자인 형 이반 스라치미르를 대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오스만 제국의 침략 직전에 국가 분열을 초래했다. 이반 시슈만이 투르크족에 맞서 싸우려는 중대한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직접적인 역사적 자료는 없다. 이반 시슈만의 일관성 없는 정책은 그의 약점과 상황 대처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28]

4. 2. 민간 전승

이반 시슈만은 불가리아 민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중세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이름은 많은 전설, 신화, 이야기, 노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압도적인 적군에 맞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영웅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 불가리아 전역에는 성, 폐허에서 바위, 동굴,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딴 장소가 많이 있다. 그 전설적인 "지리"는 주로 소피아, 이흐티만, 사모코프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만, 로도페 산맥, 스레드나 고라, 브라차, 플레벤, 프릴레프, 바르나 등으로도 뻗어 있다.[32]

어린 통치자의 중세 미니어처
이반 알렉산더의 테트라에반겔리아에 있는 어린 이반 시슈만의 미니어처


사모코프 근처에는 황제의 우물이 있는 "시슈만의 요새" 폐허가 있는데, 이 우물은 통치자의 일곱 상처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이스카르 협곡의 절벽과 고지대에는 오스만 제국에 7년 동안 맞서 싸우면서 숨었던 동굴인 "시슈만의 구멍"이 있다. 황제의 최후의 저항과 관련된 다른 지명으로는 코칼랴네(''코칼''에서 유래, "뼈"를 의미), 체레피쉬(''체레프''에서 유래, "두개골"), 류티브로드("격렬한 여울")가 있으며, 이들 모두 멸망한 불가리아 군대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33]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는 시슈만의 마지막 전투에 관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마리차 강의 기원 근처인 코스테네츠에 야영했고, 불가리아군은 언덕 위의 사모코프 근처에 있었다. 치열한 전투 후 이반 시슈만은 일곱 번이나 부상을 입고 요새로 후퇴하여 사망했다. 전투 현장에는 황제의 상처마다 일곱 개의 샘이 나타났다. 그는 또한 발칸 산맥의 ''시시킨 그라드'' ("시슈만의 마을")에서 슬리벤과 카잔락 사이에서 싸웠으며, 그곳에서 그는 거대한 전투에서 10,000명의 예니체리를 죽였다고 한다.

18세기 불가리아 계몽가 힐렌다르의 파이시는 그의 ''슬라브-불가리아 역사''에서 타르노보 포위 동안 이반 시슈만이 그의 보야르들과 함께 소피아에 도착했다고 썼다. 그는 이스카르 협곡에 보물을 숨기고 터키에 맞서 7년 동안 싸우다가 전투에서 사망했다. 어떤 버전에서는 코칼랸스키 우르비치가 마지막으로 함락된 요새였으며, 시슈만은 죽기 전에 성 아래에 보물을 묻고 산을 뚫고 탈출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보물이라는 반복되는 모티프는 불가리아 국가의 신성한 상징이며, 황실 보석의 일반적인 위치는 수도원, 호수 또는 강 아래 은신처이다. 침략자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보물은 불가리아 제국의 주권과 권력, 그리고 그 불가피한 부활을 상징한다.

이반 시슈만에 관한 전설과 릴라의 요한을 비롯한 성인들의 전기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황제의 경로는 타르노보-소피아-사모코프-릴라였으며, 15세기에 릴라의 성 요한 유물이 릴라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경로(타르노보-소피아-릴라)와 거의 동일하다. 또한 국가의 부활을 예견하는 불멸의 통치자라는 모티프도 유사하다.



밀라디노프 형제가 수집한 민속 노래의 발췌문.

이반 시슈만은 불가리아 민속 노래에 언급된 몇 안 되는 통치자 중 한 명이며, 전설과 마찬가지로 신비화의 대상이다. 그의 모습은 크리스마스 캐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는 보호자 역할의 성인 또는 슬라브 용과 압제자(일반적으로 타르타로스와의 유사성 때문에 타타르로 묘사됨)와 싸우는 영웅으로 나타난다. 이반 시슈만에 관한 노래에는 불가리아 민속에서 전형적인 자연과 연어에 대한 많은 유사점이 있다. 슬리벤 지역의 한 노래에서 황제의 죽음은 자연에 혼돈을 가져오고 "검은 피"의 강(전형적인 민속 연어)이 흐르기 시작한다.

불가리아 전설과 민속에서 이반 시슈만의 위치는 그가 타르노보의 마지막 불가리아 황제였다는 사실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지만, 훗날 불가리아 민속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된 프릴레프의 통치자 마르코 왕자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오스만 지배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힘, 즉 실제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이상적인 황제"의 이미지, 즉 옹호자이자 보호자를 운율에 맞추고 싶어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비화가 깊어졌고 전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실제 사건과 더욱 멀어졌다.[34] 불가리아 민족 부흥 동안 이반 시슈만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더 애국적인 요소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4. 3. 현대의 재조명

이반 시슈만은 불가리아 민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중세 통치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은 수많은 전설, 신화, 이야기, 노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압도적인 적군에 맞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영웅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 불가리아 전역에는 성, 폐허, 바위, 동굴, 지역 등 그의 이름을 딴 장소가 많이 있다. 그 전설적인 "지리"는 주로 소피아, 이흐티만, 사모코프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만, 로도페 산맥, 스레드나 고라, 브라차, 플레벤, 프릴레프, 바르나 등으로도 뻗어 있다.[32]

사모코프 근처에는 황제의 우물이 있는 "시슈만의 요새" 유적이 있는데, 이 우물은 통치자의 일곱 상처에서 솟아났다고 전해진다. 더 북쪽으로, 이스카르 협곡의 절벽과 고지대에는 오스만 제국에 7년 동안 맞서 싸우면서 숨었던 동굴인 "시슈만의 구멍"이 있다. 황제의 최후의 저항과 관련된 다른 지명으로는 코칼랴네 (''코칼''에서 유래, "뼈"를 의미), 체레피쉬 (''체레프''에서 유래, "두개골"), 류티브로드 ("격렬한 여울")가 있으며, 이들 모두 멸망한 불가리아 군대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33]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는 시슈만의 마지막 전투에 관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마리차강 기원 근처인 코스테네츠에 야영했고, 불가리아군은 언덕 위 사모코프 근처에 있었다. 치열한 전투 후 이반 시슈만은 일곱 번이나 부상을 입고 요새로 후퇴하여 사망했다. 전투 현장에는 황제의 상처마다 일곱 개의 샘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또한 발칸산맥의 ''시시킨 그라드'' ("시슈만의 마을")에서 슬리벤과 카잔러크 사이에서 싸웠으며, 그곳에서 그는 거대한 전투에서 10,000명의 예니체리를 죽였다고 한다.

18세기 불가리아 계몽가 힐렌다르의 파이시는 그의 ''슬라브-불가리아 역사''에서 타르노보 포위 동안 이반 시슈만이 그의 보야르들과 함께 소피아에 도착했다고 썼다. 그는 이스카르 협곡에 보물을 숨기고 터키에 맞서 7년 동안 싸우다가 전투에서 사망했다. 어떤 버전에서는 코칼랸스키 우르비치가 마지막으로 함락된 요새였으며, 시슈만은 죽기 전에 성 아래에 보물을 묻고 산을 뚫고 탈출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보물이라는 반복되는 모티프는 불가리아 국가의 신성한 상징이며, 황실 보석의 일반적인 위치는 수도원, 호수 또는 강 아래 은신처이다. 침략자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보물은 불가리아 제국의 주권과 권력, 그리고 그 불가피한 부활을 상징한다.

또한 이반 시슈만에 관한 전설과 성인들의 전기 사이에는, 특히 릴라의 요한과 관련하여 많은 유사점이 있다. 황제의 경로는 타르노보-소피아-사모코프-릴라로 이어지는데, 이는 15세기에 릴라의 성 요한 유물이 릴라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경로인 타르노보-소피아-릴라와 거의 동일하다. 또한 국가의 부활을 예견하는 불멸의 통치자라는 모티프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밀라디노프 형제가 수집한 민속 노래의 발췌문.

이반 시슈만은 불가리아 민속 노래에 언급된 몇 안 되는 통치자 중 한 명이며, 전설과 마찬가지로 신비화의 대상이다. 그의 모습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는 보호자 역할의 성인 또는 슬라브 용과 압제자(일반적으로 타르타로스와의 유사성 때문에 타타르로 묘사됨)에 맞서는 영웅으로 나타난다. 이반 시슈만에 관한 노래에는 불가리아 민속에서 전형적인 자연과 연어에 대한 많은 유사점이 있다. 슬리벤 지역의 한 노래에서 황제의 죽음은 자연에 혼돈을 가져오고 "검은 피"의 강 (전형적인 민속 연어)이 흐르기 시작한다.

불가리아 전설과 민속에서 이반 시슈만의 위치는 그가 타르노보의 마지막 불가리아 황제였다는 사실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지만, 훗날 불가리아 민속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된 프릴레프의 통치자 마르코 왕자와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사람들은 오스만 지배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힘, 즉 실제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이상적인 황제"의 이미지, 즉 옹호자이자 보호자를 원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비화가 깊어졌고 전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실제 사건과 더욱 멀어졌다.[34] 불가리아 민족 부흥 동안 이반 시슈만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더 애국적인 요소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5.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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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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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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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Кой кой е в средновековна България https://www.scribd.c[...]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1996
[37] 서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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