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예지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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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예지드 1세는 1389년부터 1402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코소보 전투에서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암살된 후 즉위했다. 그는 발칸 반도 대부분을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으나,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이듬해 사망했다. 그의 통치는 오스만 제국 영토의 확장을 가져왔지만, 앙카라 전투 패배로 제국은 쇠퇴하고, 오스만 공위 시대가 시작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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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예지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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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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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오스만 튀르크어) | بايزيد اول |
이름 (튀르키예어) | I. Bayezid |
별칭 (오스만 튀르크어) | ییلدیرم بايزيد |
별칭 (튀르키예어) | Yıldırım Bayezid |
출생 | 1360년 경 |
출생 장소 | 오스만 베이국 |
사망일 | 1403년 3월 8일 |
사망 장소 | 아크셰히르, 당시 티무르 점령 하 |
매장지 | 바예지드 1세 모스크, 부르사 |
종교 | 수니 이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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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정보 | |
칭호 | 룸 술탄 가지와 성전 전사의 술탄 칸 |
통치 시작 | 1389년 6월 16일 |
통치 종료 | 1402년 7월 20일 |
선임자 | 무라트 1세 |
계승자 | 공위 시대 (1402–1413) 쉴레이만 첼레비 (1402–1411) 이사 첼레비 (1403) 무사 첼레비 (1411–1413) 메흐메트 1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데블레트샤 술탄 하툰 데블레트 하툰 올리베라 데스피나 라자레비치 하프사 하툰 마리아 파드리케 기타 |
자녀 | 파트마 훈디 하툰 쉴레이만 첼레비 이사 첼레비 무사 첼레비 무스타파 첼레비 메흐메트 1세 외 |
왕조 | |
가문 | 오스만 가문 |
아버지 | 무라트 1세 |
어머니 | 귈치첵 하툰 |
2. 생애
1360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와[5] 그리스 출신 후궁 귈치체크 하툰[6]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자 시절 퀴타히야 총독을 지냈고,[7] '번개'(Yıldırım)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용맹한 군인이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 직후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암살당하자,[60] 즉시 술탄으로 즉위하며 동생 야쿠브를 제거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60][62] 이후 세르비아를 속국으로 삼고, 1390년에는 전사한 세르비아 공 라자르의 딸 올리베라 데스피나와 결혼했다.[8]
즉위 후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여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양쪽에서 영토를 크게 넓혔다. 발칸에서는 세르비아, 왈라키아, 보스니아 등을 복속시키고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했다(1393년, 1396년). 아나톨리아에서는 1390년부터 여러 튀르크계 제후국(베일릭)들을 차례로 병합하며 통일을 추진했다.[9][10]
1394년부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기간 포위했으며,[4] 이를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에 아나돌루히사르 요새를 건설했다. 1396년에는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이끈 서유럽 십자군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여 위세를 떨쳤고, 이집트 맘루크 칼리프로부터 술탄 칭호를 공식 인정받았다.[79]
그러나 아나톨리아에서의 급격한 팽창은 동쪽의 티무르와의 충돌을 불렀다. 바예지드에게 멸망한 아나톨리아 제후국들이 티무르에게 의탁하고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 군대에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다.[16]
포로 생활 중 대우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하며,[18][20][21] 1403년 3월 8일 악셰히르(Akşehir)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병사로 추정되나[62] 자살설[22][23] 또는 독살설도 있다.[22]
바예지드의 패배와 죽음은 오스만 제국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발칸 속국들이 이탈하고 아나톨리아 제후국들이 부활했으며, 아들들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져 약 11년간의 오스만 왕조 간극기가 이어졌다.[19] 이 혼란은 1413년 메흐메트 1세가 제국을 재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연도 | 내용 |
---|---|
1360년 | 출생 |
1389년 | 아버지 무라트 1세 암살 후 즉위, 동생 야쿠브 제거 |
1390년 | 아나톨리아 서부 베일릭 정복 시작 |
1391년 | 콘스탄티노폴리스 첫 포위 시도 |
1393년 | 제2 불가리아 제국 수도 타르노보 함락 |
1394년 | 콘스탄티노폴리스 장기 포위 시작, 왈라키아 원정 (로비네 전투) |
1396년 9월 25일 |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 격파, 불가리아 완전 정복 |
1398년 | 카라만 왕국 병합 |
1400년 | 티무르의 시바스 침공, 티무르와의 갈등 심화 |
1402년 7월 20일 |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대패, 포로가 됨 |
1403년 3월 8일 | 포로 상태에서 악셰히르에서 사망 |
2. 1. 초기 생애와 즉위
1360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Murad I)[5]와 그리스 출신 후궁 귈치체크 하툰(Gülçiçek Hatun)[6]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부르사(Bursa)에 있는 궁정에서 보냈다.왕자 시절부터 전장에서 활약했으며, 카라만(Karamanids)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번개'라는 의미의 '이을드름'(Yıldırım)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왕자 시절에는 퀴타히야(Kütahya) 총독을 지냈는데, 이 지역은 1378년 게르미얀(Germiyanids)의 공주 데블레트샤흐 하툰(Devletşah Hatun)[7]과 결혼하며 혼수로 받은 영토의 일부였다.[61] 한편, 동로마 제국의 황태자 안드로니코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V Palaiologos)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형 사브지(Savcı)가 아버지 무라트 1세에 의해 처형되면서, 바예지드는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했다.
1389년 6월 15일 코소보 전투(Battle of Kosovo) 중 또는 직후(6월 16일),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세르비아 기사 밀로시 오빌리치(Miloš Obilić)에게 암살당하자[60] 바예지드는 즉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 직후, 그는 잠재적인 왕위 계승 경쟁을 막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동생 야쿠브 첼레비(Yakub Çelebi)를 교살했다.[60][62] 이는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 즉위 시 형제를 살해하는 관습의 선례가 되었다.[63][64]
코소보 전투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바예지드는 혼란을 수습하고 오스만 군대를 지휘하여 세르비아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포로로 잡힌 세르비아 공 라자르(Lazar Hrebeljanović) 등 귀족들을 처형했다.[65] 이 전투에서 바예지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66] 1390년, 바예지드는 코소보 전투에서 사망한 라자르 공의 딸인 올리베라 데스피나(Olivera Despina)[8] 공주와 결혼했다. 또한 라자르의 아들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를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세르비아의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하며 세르비아를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2. 2.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정복
1389년 코소보 전투 직후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암살당하자, 바예지드 1세는 즉시 동행했던 동생들을 제거하고 술탄으로 즉위했다. 즉위 직후, 무라트 1세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아나톨리아의 여러 영주들이 반(反) 오스만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카라만 베일리크의 군주이자 바예지드의 처남이기도 한 알라에딘 알리 베이(Alâeddin Ali Bey)는 사르한 베일리크, 아이둔 베일리크, 멘테셰 베일리크와 연합하여 오스만 영토를 침범했다. 바예지드의 의형제인 게르미얀의 군주 야쿠브 2세(II. Yakub Bey) 역시 오스만에 할양했던 도시를 되찾으려 했다.[68]이에 바예지드는 먼저 세르비아와 평화 조약을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킨 뒤, 아나톨리아로 군대를 돌렸다. 그는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1390년부터 아나톨리아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에는 비잔티움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발칸 반도의 속국 군대도 참여했으며, 아나톨리아에 마지막으로 남은 비잔티움 영토였던 필라델피아를 공략할 때는 비잔티움의 황태자 마누엘도 함께했다.[67] 바예지드는 이슬람 지역으로의 강제 확장이 기존의 지지 기반이었던 가지(gāzī, 이슬람 전사)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슬람 학자들로부터 파트와(fatwā, 종교적 법률 판결)를 받아 무슬림 국가들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투르크계 추종자들의 충성심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와 비잔티움 등 봉신국의 군대에 크게 의존했다.[9]
1390년 여름과 가을에 걸친 단 한 번의 원정으로 바예지드는 아이딘, 사루한, 멘테셰를 정복했다. 이후 하미드, 테케, 게르미얀 등 나머지 베일리크들도 압도했으며, 게르미얀의 야쿠브 2세를 체포하여 입살라(İpsala)로 추방했다. 또한 카라만 베일리크의 수도 코냐를 포함한 아크셰히르, 니그데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1391년에는 카라만과 평화 조약을 맺어 점령한 도시들의 할양을 인정받았다.[68]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타모누와 시노프를 정복했으나,[10] 시바스의 통치자 카디 부르한 알딘(Kadi Burhan al-Din)과의 퀴르크딜림 전투(Battle of Kırkdilim)에서는 패배하여 진격이 저지되었다.[10]
아나톨리아를 어느 정도 정리한 바예지드는 다시 발칸 반도로 관심을 돌렸다. 1391년 비잔티움 황제 요하네스 5세가 사망하자, 아나톨리아 원정에 참여했던 마누엘이 바예지드 몰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마누엘 2세로 즉위했다. 바예지드는 이에 분노하여 7개월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헝가리의 군사적 움직임 때문에 공납을 받는 조건으로 마누엘 2세의 즉위를 인정하고 포위를 풀었다.[68][69]
그러나 1393년 말, 모레아 데스포타트의 테오도로스 1세가 오스만의 속국을 공격하며 영토를 확장하자, 바예지드는 마누엘 형제의 행동을 반역으로 간주하고 발칸 반도의 속국 군주들을 소환하여 처벌하려 했다.[70] 마누엘과 테오도로스가 신종 맹세를 거부하자, 1394년 여름부터 바예지드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 포위는 1402년까지 7년간 이어졌다. 포위를 위해 1393년과 1394년 사이에 보스포루스 해협에 아나돌루히사르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다.[4]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와 동시에 바예지드는 발칸 반도에서의 지배력 강화에도 힘썼다. 1389년부터 1395년까지 불가리아와 북부 그리스를 정복했다. 특히 1393년, 오스만의 속국이었던 불가리아가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71] 즉시 토벌군을 파견했다. 3개월간의 포위 끝에 같은 해 7월 17일 불가리아의 수도 타르노보를 함락시켰고,[72] 니코폴리스로 도망친 불가리아 황제 이반 시슈만은 잠시 지위를 유지하게 했다.
1394년에는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를 공격했다. 당시 왈라키아 대공은 미르체아 1세였다. 오스만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1395년 5월 17일(또는 1394년 10월 10일) 벌어진 로비네 전투에서 숲과 습지가 많은 지형을 활용한 왈라키아군에게 패배하여 다뉴브 강 이남으로 후퇴해야 했다.[11][73] 하지만 왈라키아 원정 과정에서 불가리아 내에 남아있던 여러 세력들을 병합했으며,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반 시슈만을 처형하여 불가리아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이로써 불가리아에서 독립을 유지한 세력은 오스만에 신종을 맹세한 비딘 왕국뿐이었다.[72] 한편, 세르비아 공 스테판 라자레비치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북부 세르비아의 영유권을 인정해주었고, 세르비아는 공납과 병력 제공을 성실히 이행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74]
바예지드의 급격한 팽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는 서유럽 세계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2세의 요청에 따라, 1396년 헝가리의 왕이자 훗날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지기스문트를 중심으로 프랑스, 왈라키아 등이 참여한 대규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연합군은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드가 이끄는 오스만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바예지드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수도 부르사에 웅장한 울루 자미를 건설했다. 니코폴리스에서의 승리로 바예지드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는 계속되었다. 포위는 1402년 동쪽에서 티무르 제국의 위협이 가시화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12][13]
2. 3. 니코폴리스 전투 (1396)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했다. 발칸 반도 국가들뿐 아니라 서유럽도 불안감을 느껴,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는 교황청에 십자군 파병을 요청했다.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아비뇽의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프랑스, 잉글랜드, 사보이아 등 서유럽 여러 국가에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고, 서유럽의 왕족, 귀족, 기사들이 참가를 표명했다. 1396년 7월 하순부터 8월 상순에 걸쳐 십자군은 부다에 집결하여, 왈라키아 군대와 함께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헝가리군에 합류했다. 비딘 역시 오스만에 대한 복종을 버리고 십자군에 참가했다.
십자군은 불가리아에 침공하여 영내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모두를 살해했고, 9월 10일에는 Doğan Bey|도안 베이영어가 수비하는 니코폴리스에 다가가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75]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바예지드 1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니코폴리스 구원에 나섰다. 9월 24일 바예지드 1세는 니코폴리스에 도착했고, 다음 날인 9월 25일 오스만군과 십자군이 충돌했다(니코폴리스 전투). 군공을 갈망하여 지기스문트의 충고를 무시하고 개별적으로 돌격을 감행한 서유럽 기사들에 대해, 바예지드 1세는 집단 전투 방식으로 그들을 격파했다. 바예지드 1세 자신도 칼을 들고 싸우다 부상을 입었지만 용감하게 싸웠다.[76] 전투는 오스만군의 완승으로 끝났다.[77]
전투 후 바예지드 1세는 부르고뉴의 공작 장 1세와 프랑스 육군 원수 Jean Le Maingre|부시코영어 등을 포로로 잡고, 그들의 석방 대가로 막대한 몸값을 얻었다.[78] 또한 비딘을 병합하여 불가리아 정복을 완료했으며,[72] 왈라키아에게 다시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압바스 가문의 칼리프 Al-Mutawakkil I|무타와킬 1세영어는 니코폴리스에서의 승리를 칭찬하며 바예지드 1세에게 술탄의 칭호를 수여했다. 그 이전의 오스만 제국 지도자인 오르한, 무라트 1세도 비문과 화폐에서 술탄의 칭호를 사용했지만, 후세 오스만 제국 역사가들은 오스만 제국 군주가 술탄을 칭한 유래를 칼리프로부터의 칭호 수여에 연결시켰다.[79]
니코폴리스 전투 이후 오스만군은 미트로비차를 공략하고, 그리스로 진격하여 1397년 라리사, 파트라, 아테네를 점령하고 페로포네소스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다.[80] 1398년에는 내란으로 분열된 보스니아에 처음으로 침입하여, 이후 보스니아는 오스만군의 내정 간섭과 노예 사냥에 시달리게 된다.[81]
2. 4.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와 티무르의 등장
1391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하네스 5세가 사망하자, 당시 아나톨리아 원정에 종군 중이던 황태자 마누엘(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은 바예지드 몰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황제 마누엘 2세로 즉위했다. 이에 바예지드는 7개월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헝가리의 군사적 움직임으로 인해 공납을 받는 조건으로 마누엘 2세의 즉위를 인정하고 포위를 풀었다.[68][69]그러나 1393년 말, 모레아 데스포타트의 테오도로스 1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오스만의 속국을 공격하며 영토를 확장하자, 바예지드는 마누엘 2세와 테오도로스 1세 형제의 행동에 분노하여 1394년 여름부터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70][4] 이 포위는 1402년까지 약 7년간 지속되었다.[12] 포위를 강화하기 위해 바예지드는 1393년에서 1394년 사이에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에 아나돌루히사르 요새를 건설하여 도시로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했다.[84]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중에도 바예지드는 발칸 반도에서의 군사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396년에는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이 주도한 서유럽 십자군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대파하며 발칸 반도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니코폴리스 전투 승리 이후, 1397년부터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가 강화되었고,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 투르크인 거주구와 모스크를 설치하고, 이슬람 법정과 판사(카디)를 두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82][83] 1400년 마누엘 2세가 서유럽 국가들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자 바예지드는 다시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견고한 성벽과 도시 방어 능력 덕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지 않았고, 농성전에 잘 견뎌냈다.[84] 결국 동쪽에서 티무르 제국의 위협이 커지면서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13] 바예지드 1세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의 증손자인 메흐메트 2세는 훗날 아나돌루히사르를 활용하는 등 철저한 준비 끝에 단기 결전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84][85]
한편, 바예지드 1세가 아나톨리아의 여러 베일리크(튀르크계 제후국)들을 차례로 병합하자(1398년 카라만 왕국 멸망, 1402년 게르미얀 왕국 재정복 등[76][87]), 멸망당한 베일릭의 군주들은 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티무르에게 의지하게 되었다.[91][92] 1393년경부터 오스만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접촉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티무르가 양국 간의 영토 경계를 설정하자는 비교적 공손한 제안을 했으나[89] 바예지드는 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90] 티무르는 바예지드에게 정복한 아나톨리아 제후국들의 영토를 원래 군주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반면, 바예지드는 티무르에게 쫓겨난 카라 코윤루의 군주 카라 유수프를 보호해주고 있었다.[93] 이러한 요구 거절과 망명자 보호 문제 등이 겹치면서 두 제국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충돌하게 된다.
2. 5. 앙카라 전투 (1402)와 몰락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제후국들을 차례로 병합해 나가던 바예지드 1세의 확장은 동쪽으로 진출한 티무르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나톨리아의 제후국들은 티무르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1400년 티무르는 바예지드에게 정복한 제후국들의 영지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바예지드가 이를 거절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대립은 본격화되었다.[94]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었던 투르크계 아나톨리아 베일릭들을 선동하여 바예지드 공격에 합류시켰고, 두 통치자는 수년간 서로를 모욕하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갈등을 키웠다.[14][15] 티무르는 1400년 8월, 오스만 영토인 시바스를 함락시키며 군사 행동을 개시했고,[91] 1402년 다시 아나톨리아로 진격하며 바예지드에게 여러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여기에는 티무르에게 적대적인 자라이르 왕조의 아흐마드와 카라 유수프의 인도, 티무르의 종주권 인정(그의 이름이 새겨진 화폐 주조 등), 왕자 1명을 인질로 보낼 것, 그리고 병합한 다른 베일릭 영토의 반환 등이 포함되었다.[94]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있던 바예지드는 티무르의 침공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급히 아나톨리아로 회군했으나, 전투 준비는 미흡한 상태였다.[95][96] 티무르는 과거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던 베일릭의 군주들을 전투에 참여시켜 오스만 군대에 복무 중인 해당 베일릭 출신 기사들의 이탈을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핵심 상비군인 예니체리조차 계속된 원정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96]
1402년 7월 20일, 앙카라 근교의 츤붑 평원에서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양군은 격돌했다. 전투 중 오스만 군대에 속해 있던 아나톨리아 베일릭 출신 기사들이 옛 주군이었던 티무르 측으로 돌아서면서,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오스만 군대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92] 예니체리와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병사 등 유럽 출신 병력은 용감히 싸웠으나,[97] 전세가 기울자 왕조의 명맥을 잇기 위해 왕자들과 대재상(대비지르)은 전장을 이탈했다.[92] 바예지드 1세는 자신을 지키던 예니체리 대부분이 전사하는 와중에 왕비 올리베라 데스피나와 아들 무사 첼레비와 함께 티무르에게 생포되었다.[16] 그의 또 다른 아들 무스타파 첼레비 역시 포로가 되어 1405년까지 사마르칸트에 억류되었다.

바예지드의 포로 생활에 대한 기록은 상반된다. 티무르 궁정 측의 기록이나 당시 페르시아 역사가들은 바예지드가 정중한 대우를 받았으며, 티무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한다.[18][92] 역사가 샤라프 알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in Ali Yazdi)는 그의 저서 『자파르나마(Zafar-nama)』에서 바예지드가 존중받았으며, 그의 요청에 따라 티무르가 포로 중이던 그의 아들을 찾아주었고, 아내와 딸들도 돌려보내 주었다고 기록했다.[25] 역사가들은 티무르와 바예지드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티무르가 바예지드 1세를 보자 웃었다. 바예지드 1세는 이 웃음에 기분이 상하여 티무르에게 불행을 비웃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티무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운명이 만약 그것을 불구자들에게 분배한다면, 즉 당신과 같은 굽은 사람과 나와 같은 절름발이에게 권력과 광활한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17]


그러나 특히 유럽에서는 바예지드가 포로 생활 중 극심한 굴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그가 쇠사슬에 묶인 채, 그의 아내 올리베라 데스피나가 티무르의 연회에서 반라 상태로 시중드는 것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다는 이야기,[20] 티무르가 바예지드를 발 받침대로 사용하거나, 쇠창살이 달린 우리(가마)에 가두어 끌고 다니며 모욕했다는 등의 내용이다.[21] 이러한 학대설은 아랍 역사가 이븐 아랍샤(Ibn Arabshah), 세르비아 출신 콘스탄틴 오스트로비카(Constantine of Ostrovica), 교황 비오 2세, 베네치아 출신 테오도르 스판두네스(Theodore Spandounes) 등의 기록을 통해 확산되고 구체화되었다.[26][27][29][30][31] 이븐 아랍샤는 바예지드가 "새장 속의 새처럼 감금되었다"고 묘사했으며,[27] 아내가 연회에서 시중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다"고 기록했다.[26] 하지만 이러한 묘사가 실제 감금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수사적 표현인지는 불분명하다.[28] 실제로 바예지드의 포로 생활을 목격한 독일인 요한 실트베르거(Johann Schiltberger)나 프랑스 기사 장 르 메잉르(Jean II Le Maingre), 티무르 궁정을 방문했던 스페인 사절 클라비호(Clavijo) 등 동시대 인물들의 기록이나 15세기 초의 그리스 측 자료에서는 우리나 학대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24] 다만, 바예지드가 탈출을 시도한 후 감시가 강화되어 야간에는 족쇄를 차고, 이동 시에는 격자가 달린 가마에 태워졌다는 기록은 존재한다.[98][99][100]
바예지드 1세는 포로가 된 지 8개월 만인 1403년 3월 8일, 사마르칸트로 이송되던 중 악셰히르(Akşehir)에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석방을 위한 몸값 협상이 진행 중이던 시점이었다.[98]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앙카라 전투 이전부터 앓고 있던[101] 통풍으로 인한 병사설,[62] 절망감에 감옥 창살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반지 속에 숨겨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설,[22][23][102] 혹은 티무르의 명령에 의한 독살설[22] 등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앙카라 전투에서의 참패와 술탄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발칸 반도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했던 제후들이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아나톨리아에서는 바예지드에게 정복당했던 여러 베일릭들이 티무르의 지원 하에 부활했다.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의 남은 영토마저 바예지드의 세 아들에게 분할시켜 버렸다. 장남 술레이만 첼레비는 유럽 영토인 루멜리아를, 메흐메트 첼레비(훗날 메흐메트 1세)는 아마시아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동부를, 이사 첼레비는 부르사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서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장에서 탈출했던 이 세 아들과,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막내아들 무사 첼레비는 곧 왕위를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약 11년간의 내전기, 즉 오스만 왕조 간극기(Ottoman Interregnum)에 접어들게 되었다.[19] 이 혼란은 1413년 메흐메트 1세가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압하고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종식되었다.
3. 통치 및 정책
1389년 코소보 전투 중 또는 직후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암살되자, 바예지드 1세는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5] 그는 즉위 직후 잠재적 경쟁자인 동생 야쿠브(Yakub)를 교살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코소보 전투의 결과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며, 바예지드는 1390년 세르비아 공작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딸인 올리베라 데스피나(Olivera Despina) 공주와 결혼하여 양국 관계를 공고히 했다.[8] 그는 라자르의 아들 스테판 라자레비치를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세르비아의 지도자로 인정했다.
바예지드 1세는 '번개'(Yıldırım|이을드름tr)라는 별명처럼 매우 빠르고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통해 제국의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계 베일리크들을 통합하고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넓히는 데 주력했다. 특히 무슬림 공국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파트와(종교적 법률 해석)를 받아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자신의 투르크 추종자들보다는 세르비아나 비잔티움 제국과 같은 봉신국의 군대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9]
그는 1390년의 단일 원정으로 아나톨리아 서부의 아이딘, 사루한, 멘테셰 베일리크를 정복했으며, 이후 하미드, 테케, 게르미얀 베일리크 등을 복속시키고 카라만 베일리크의 수도 코냐를 점령하는 등 아나톨리아 통일에 박차를 가했다.[9][68] 발칸 반도에서는 1389년부터 1395년까지 불가리아와 북부 그리스를 정복했으며,[11] 1394년에는 왈라키아를 공격하기도 했다.
1394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시작했으며,[4] 이를 위해 아나돌루히사르 요새를 건설했다. 이에 대응하여 결성된 유럽 십자군을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며 위세를 떨쳤고, 승리를 기념하여 부르사에 울루 자미(대모스크)를 건설했다.[4]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는 1402년 티무르 제국의 침공으로 중단될 때까지 계속되었다.[12][13] 바예지드 1세의 통치 말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발칸 반도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게 되었다.[13]
3. 1. 중앙 집권화

바예지드 1세는 성급하고 충동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정 운영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총독들에게 많은 부분을 위임했다.[51] 그는 종종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과 연회, 음주 등 쾌락을 즐겼다고 전해진다.[52] 이러한 개인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으며,[51] 부르사의 모스크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슬람 신학자들을 가까이 두는 등 종교적인 면모도 보였다.[53]
그러나 바예지드 1세 시대의 오스만 제국 지배는 아직 기반이 탄탄하지 못했고, 정복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행정 제도는 미비한 상태였다.[103][104] 급격히 팽창한 영토와 다양한 배경의 백성들을 중앙 정부가 완전히 통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104]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예지드 1세는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군사력 강화와 중앙 관료 충원을 위해 예니체리 제도를 정비하고 확대했다. 초기 예니체리는 전쟁 포로 중 5분의 1을 술탄이 차지하는 Pençik|펜치크tr 제도를 통해 충원되었으나,[106] 바예지드 1세 시기에 새로운 인재 등용 방식인 Devşirme|데브시르메tr 제도가 도입되었다.[107] 이는 제국 내 기독교도 신민의 자녀들 중에서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발하여 강제로 징집하는 제도였다.[108] '데브시르메'는 튀르키예어로 '모은다'는 뜻의 devşirme|데우쉴메크tr에서 유래했다.[108] 이 제도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395년에 시행된 징발 기록이 가장 오래된 사료로 확인된다.[109] 데브시르메를 통해 선발된 인원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에게 충성하는 군인(예니체리)이나 관료로 양성되어 중앙 정부의 핵심 인력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360년대에 약 1,000명이었던 예니체리 군단은 바예지드 1세 시대에 5,000명 규모로 크게 늘어났다.[110]
이러한 중앙 집권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예지드 1세 시대의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불안정한 요소들을 안고 있었다.[103] 하지만 예니체리 확대와 데브시르메 제도 도입 등은 이후 오스만 제국이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05]
3. 2. 영토 확장
바예지드 1세는 즉위 직후 아버지 무라트 1세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일어난 아나톨리아 영주들의 반 오스만 움직임에 직면했다.[68] 그는 아나톨리아를 자신의 통치 아래 통일하고자 했으며, 무슬림 지역으로의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 학자들로부터 파트와(종교적 법률 판결)를 확보하는 관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투르크 추종자들의 충성심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여, 아나톨리아 정복 과정에서 세르비아와 비잔티움의 봉신 군대에 크게 의존했다.[9]=== 아나톨리아 정복 ===
1390년 여름과 가을, 바예지드는 단 한 번의 원정으로 서부 아나톨리아의 아이딘 베일리크, 사루한 베일리크, 멘테셰 베일리크를 정복했다.[9] 이 원정에는 비잔티움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발칸 반도의 속국들도 참여했으며, 아나톨리아에 남은 마지막 비잔티움 영토인 알라셰히르(필라델피아) 공략에는 당시 비잔티움 황태자였던 마누엘도 종군했다.[67] 그의 주요 경쟁자인 카라만 베일리크의 군주 알라에딘 알리 베이(Alâeddin Ali Bey)는 시바스의 통치자 카디 부르한 알딘 및 다른 투르크 베일리크들과 동맹을 맺고 저항했다.[9][68]
그럼에도 바예지드는 공세를 계속하여 하미드 베일리크, 테케 베일리크, 게르미얀 베일리크를 차례로 정복했다. 게르미얀의 군주 야쿠브 2세(II. Yakub Bey)는 체포되어 입살라로 보내졌고, 게르미얀 지역은 오스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68] 또한 카라만 베일리크의 영토였던 아크셰히르, 니그데와 수도 코냐까지 점령했다.[9] 1391년, 바예지드는 콘야를 포위한 후, 더 이상의 진격이 투르크멘 추종자들을 자극하여 카디 부르한 알딘과 동맹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카라만 측의 평화 제안을 받아들였다.[10] 이 조약으로 카라만은 아크셰히르, 니그데, 악사라이의 할양을 인정해야 했다.[68]
카라만과의 평화 이후, 바예지드는 북쪽으로 군대를 돌려 카스타모누와 시노프를 정복했다.[10] 그러나 이후 퀴르크딜림 전투에서 카디 부르한 알딘에게 패배하여 아나톨리아 완전 통일에는 실패했다.[10]
니코폴리스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 정복 활동은 계속되었다. 1395년에는 이스펜디야르 왕조가 다스리던 아마시아와 카스타모누를 점령했고,[86] 1398년에는 에르테나 왕조를 병합했다.[86] 같은 해, 니코폴리스 전투 중 오스만 영토를 공격했던 카라만의 알라앗딘을 응징하기 위해 다시 콘야로 진군했다. 11일간의 공성전 끝에 콘야를 함락시키고 항복을 거부한 알라앗딘을 처형했으며, 그의 두 아들을 부르사로 보내 카라만 왕국을 사실상 멸망시켰다.[76] 1400년에는 에르진잔을 함락시켰고, 1402년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탈출했던 야쿠브 2세가 재건한 게르미얀 왕국을 다시 정복하여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87]
=== 발칸 반도 확장 ===
바예지드는 1389년부터 1395년까지 불가리아와 북부 그리스를 정복하며 발칸 반도에서도 영토를 확장했다.[11]
1393년, 오스만의 속국이었던 불가리아가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71] 토벌군을 파견했다. 3개월간의 포위 끝에 같은 해 7월 17일, 불가리아의 수도 터르노보를 함락시켰다.[72] 니코폴리스로 도망친 불가리아 황제 이반 시슈만은 잠시 황위를 유지하도록 허락받았다.[72]
1394년, 바예지드는 다뉴브 강을 건너 미르체아 1세가 통치하던 왈라키아를 공격했다.[11] 오스만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1395년 5월 17일(또는 1394년 10월 10일)[11][73] 숲과 습지가 많은 지형에서 벌어진 로비네 전투에서 왈라키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패배하고 다뉴브 강 이남으로 물러나야 했다.[11][73] 왈라키아 원정 과정에서 불가리아 내에 남아있던 소규모 세력들을 병합했으며,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반 시슈만을 처형하고 불가리아 대부분을 오스만 영토로 편입했다. 당시 불가리아 내에서 독립을 유지한 세력은 오스만에 신종을 맹세한 비딘 왕국뿐이었다.[72]
한편, 세르비아의 군주 스테판 라자레비치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바예지드는 스테판의 북세르비아 영유권을 인정했고, 스테판은 충실히 공물을 바치고 군대를 제공했다. 덕분에 양국 간에는 비교적 긴 평화가 유지되었고 세르비아는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74]
=== 콘스탄티노플 포위와 니코폴리스 전투 ===
1391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하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사망하자, 아나톨리아 원정에 참여 중이던 아들 마누엘(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이 바예지드 몰래 부르사를 빠져나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황제에 즉위했다. 바예지드는 잠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헝가리의 군사적 움직임 때문에[68]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마누엘의 즉위를 인정하고 포위를 풀었다.[69]
그러나 1393년 말, 모레아 전제공국의 통치자이자 마누엘의 동생인 테오도로스 1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오스만의 속국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자, 바예지드는 이를 반역 행위로 간주했다.[70] 1394년 여름,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대규모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4][70] 이 포위 공격을 위해 1393년에서 1394년 사이에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에 아나돌루히사르 요새를 건설하여 해상 보급로 차단을 시도했다.[4]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되자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2세는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여 헝가리의 왕이자 미래의 신성 로마 황제가 될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드는 십자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4] 바예지드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부르사에 웅장한 울루 자미(대모스크)를 건설했다.[4]
니코폴리스에서의 승리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플 포위는 계속되었다. 1397년부터 시작된 세 번째 포위 공격에서는 비잔티움 측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 투르크인 거주 구역과 모스크 설치, 카디(이슬람 법관)가 재판하는 이슬람 법정 설치를 허용하는 등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82][83] 1400년, 마누엘 2세가 직접 서유럽 국가들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자 바예지드는 네 번째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84] 이 포위는 1402년 동쪽에서 티무르 제국의 위협이 현실화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12][13] 도시의 견고한 방어와 넓은 면적 덕분에 함락에는 실패했다.[84]
=== 확장 결과 ===
바예지드 1세의 적극적인 정복 활동 결과,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그의 치세 말기 제국의 영토는 유럽에서는 트라키아(콘스탄티노폴리스 제외),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일부를 포함했고, 아시아에서는 타우루스 산맥까지 이르렀다.[13] 그의 군대는 당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13], 제국의 영향력은 다뉴브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미쳤다.[16]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팽창은 내부적인 통합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으며, 정복지를 제국 체제에 완전히 편입시키는 제도는 아직 미비한 상태였다.[103][104]
4. 유산
바예지드 1세의 통치는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팽창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제국을 존폐 위기로 몰아넣은 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의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발칸 반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며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했지만,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참패하면서 그가 이룬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이 패배는 바예지드 1세 개인의 비극적인 종말뿐만 아니라, 이후 10년간 지속된 오스만 공위 시대라는 혼란기를 초래하여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16][19]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힌 후 겪은 일들과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는 그의 유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오랫동안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낳았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가 쇠사슬에 묶이고 우리에 갇히는 등 온갖 굴욕을 당했으며, 그의 아내 올리베라 데스피나가 티무르의 연회에서 반라 상태로 시중드는 것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20][21] 이러한 이야기는 이븐 아랍샤나 콘스탄틴 오스트로비카, 후대의 교황 비오 2세, 테오도르 스판두네스 등의 기록을 통해 확산되었다.[26][29][31] 이븐 아랍샤는 바예지드가 "먹잇감이 되어 새장 속 새처럼 감금되었다"고 묘사하기도 했으나[27], 이는 실제 감금보다는 수사적 표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28]
그러나 티무르 궁정의 기록이나 당시 사건을 목격한 요한 실트베르거, 장 르 메잉르, 클라비호 등의 기록에는 이러한 학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24] 티무르 측 역사가인 샤라프 알딘 알리 야즈디는 오히려 바예지드가 존중받는 대우를 받았으며, 티무르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기록했다.[18][25] 바예지드의 죽음에 대해서도 지병 악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설[22][23], 티무르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하지만 명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22] 티무르가 바예지드를 처음 만났을 때 웃으며 "운명이 만약 그것을 불구자들에게 분배한다면, 즉 당신과 같은 굽은 사람과 나와 같은 절름발이에게 권력과 광활한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17] 당시 상황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바예지드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제국의 위상을 높였지만, 그의 성급한 중앙 집권화 시도와 무리한 확장 정책은 내부적인 반발과 외부의 강력한 적을 불러왔다. 앙카라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모든 업적을 뒤덮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을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그의 포로 생활과 죽음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들은 후대에 그의 비극적인 말년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강하게 남게 되었다. 그의 아들들이 벌인 내전 끝에 메흐메드 1세가 제국을 재건했지만, 바예지드 1세의 유산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우고 있다.
4. 1. 긍정적 유산
바예지드 1세는 군사적 재능과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제국의 위상을 높였다. 즉위 직후 아버지 무라트 1세의 정복 사업을 계승하여 아나톨리아 통일에 착수했다.[68] 1390년 단 한 번의 원정으로 아이딘 베일리크, 사루한 베일리크, 멘테셰 베일리크 등 서부 아나톨리아의 베이리크들을 정복했으며,[10] 이후 게르미얀, 하미드, 테케 등 다른 베이리크들도 복속시켰다. 주요 경쟁자였던 카라만으로부터 코냐, 아크셰히르, 니그데 등 주요 도시를 빼앗고[10], 1398년에는 수도 코냐를 함락시키고 카라만 왕국을 사실상 멸망시켰다.[76] 또한 1395년에는 이스펜디야르 왕국의 아마시아와 카스타모누를 점령하고[86], 1400년에는 에르진잔을 함락시키는 등[87], 그의 치세에 아나톨리아 대부분 지역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두었다.발칸 반도에서도 공세를 이어가 1389년부터 1395년까지 불가리아와 북부 그리스 지역을 정복했다.[11] 1393년에는 불가리아의 수도 타르노보를 함락시켰고[72], 왈라키아 원정 이후 불가리아 황제 이반 시슈만을 처형하며 불가리아 대부분을 병합했다.[72]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은 서유럽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국왕이 주도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는 이 십자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77] 이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서유럽에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부르사에 울루 자미를 건설하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압바스 칼리프로부터 술탄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아[79] 오스만 군주의 권위를 한층 더 높였다. 니코폴리스 전투 이후 오스만군은 그리스로 진격하여 1397년 아테네까지 점령하는 등[80] 발칸 반도에서의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통치 방식에서도 중앙 집권화를 위한 노력을 보였다. 아나톨리아의 다른 튀르크계 무슬림 국가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슬람 율법학자들로부터 파트와(종교적 법률 해석)를 받는 관행을 시작했는데[9], 이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1394년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감행했으며[4], 이때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에 아나돌루히사르 요새를 건설하여[84] 해협 통제력을 강화하고 도시를 압박했다. 비록 그의 생전에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의지와 군사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아나돌루히사르 요새는 후일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기여하게 된다.[85]
비록 말년에 티무르와의 앙카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제국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바예지드 1세의 적극적인 정복 활동과 통치 체제 정비 노력은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아우르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105] 그의 시대는 오스만 제국 발전의 제1단계로 여겨지기도 한다.[105]
4. 2. 부정적 유산
1389년 코소보 전투 중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암살되자 즉위한 바예지드 1세는 즉시 인망이 두터웠던 동생 야쿠브를 포함한 다른 형제들을 처형하여 술탄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60][62] 이러한 형제 살해는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 계승 과정에서 반복되는 비극적인 관행의 선례가 되었다.[63][64]바예지드 1세는 아나톨리아 통일을 추진하며 이슬람 베이릭들을 강제적으로 복속시키려 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가지( غازي|가지ar )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정책이었다. 그는 무슬림 국가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 율법학자들로부터 파트와( فتوى|파트와ar )를 받는 관행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투르크계 추종자들의 충성심을 온전히 믿지 못해 세르비아나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 군대에 크게 의존했다.[9] 이러한 급격한 영토 확장에도 불구하고, 정복지를 제국 체제에 완전히 통합하는 제도는 미비했으며, 지배 조직 역시 빠르게 늘어난 영토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103][104] 바예지드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은 군주 개인의 역량에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한 구조였던 것이다.[103]
결정적으로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참패하면서 그의 통치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에 복무하던 다른 베이릭 출신 기사들이 옛 주군에게 투항했고, 예니체리와 세르비아 병사들이 분전했으나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다.[92][97] 바예지드 1세는 왕비 올리베라 데스피나 및 아들 무사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92] 전승에는 그가 금 격자 우리에 갇히는 등 학대받았다고 전해지나[69], 실제로는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92] 그러나 탈출 시도 후 감시가 삼엄해졌으며, 이동 시에는 격자 달린 가마에 태워졌다고 한다.[98][99][100] 결국 그는 포로가 된 지 8개월 만인 1403년 3월, 사마르칸트로 이송되던 중 악셰히르에서 사망했다.[98] 사인으로는 지병이었던 통풍[62][101] 혹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102]
앙카라 전투의 패배는 오스만 제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의 영토는 오르한 1세 시대의 소규모 베이릭 수준으로 축소되었고, 바예지드 1세가 멸망시켰던 많은 아나톨리아 베이릭들이 티무르에 의해 복원되어 독립을 되찾았다.[16] 또한, 그의 아들들(술레이만 첼레비, 메흐메트, 이사, 무사)이 분할된 영토를 놓고 10년간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는 오스만 공위 시대가 시작되었다.[16]
5. 평가
영국의 동양학자 키너스 경에 따르면, 바예지드 1세는 성급하고 충동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경솔한 성격을 지녔다.[51] 그는 국정 운영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총독들에게 많은 부분을 맡겼으며, 전투가 없는 시기에는 폭식, 음주, 방탕과 같은 쾌락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의 궁정은 당대 비잔티움 제국 궁정에 필적할 만큼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52]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재능 있는 지휘관으로 평가되기도 한다.[51] 세속적인 쾌락을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인물로서 부르사에 있는 자신의 모스크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이슬람 신학자들을 가까이 두기도 했다.[53]
당대의 그리스 역사가 두카스는 바예지드 1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54]
:''[바예지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전쟁 행위에 있어서는 성급했으며, 주변의 다른 누구보다도 기독교인들을 박해했고, 아랍인들의 종교에서는 무함마드의 가장 열렬한 제자였으며, 그의 불법적인 계명들을 최대한 준수했고, 결코 잠을 자지 않고, 밤을 그리스도의 합리적인 무리를 향한 음모와 책략을 꾸미는 데 보냈다.... 그의 목적은 예언자의 민족을 증가시키고 로마인들의 민족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많은 도시와 주를 무슬림의 지배하에 추가했다.''[54]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용맹한 성격과 함께 신경질적이고 고집이 센 면모도 지녔다.[102] 또한 이슬람교도였지만 음주를 즐겼는데, 이는 세르비아 출신 왕비 데스피나에게서 와인 맛을 배웠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02][111] 외모에 대해서는 독안(외눈)이거나 사나운 눈매였다고 전해진다.[74]
종합적으로 바예지드 1세는 다뉴브 강과 유프라테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16], 앙카라 전투에서의 참패로 제국이 크게 축소되고 10년간의 오스만 공백기를 초래하는 등[16] 극적인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한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성급하고 독단적인 성격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말년을 맞게 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6. 대중문화
바예지드 1세의 패배와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힌 이야기는 후대 서유럽의 작가, 작곡가,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가 되었다.[56] 특히 티무르가 바예지드를 쇠사슬에 묶거나, 우리에 가두고 발 받침대로 사용했으며, 그의 아내 올리베라 데스피나가 티무르의 연회에서 모욕적인 시중을 들도록 강요받았다는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는[20][21] 극적인 소재로 많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븐 아랍샤(Ibn Arabshah), 오스트로비카의 콘스탄틴(Constantine of Ostrovica), 교황 비오 2세(Pope Pius II), 테오도르 스판두네스(Theodore Spandounes) 등의 기록을 통해 퍼져나갔으나[26][29][30][31], 요한 실트베르거(Johann Schiltberger), 장 르 메잉르(Jean II Le Maingre), 클라비호(Clavijo), 샤라프 알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in Ali Yazdi) 등 동시대의 기록이나 초기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24][25]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탐벨레인 대왕(1587년 런던 초연)은 이러한 이야기를 다룬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1648년에는 장 마농의 희곡 Le Gran Tamerlan et Bejezet|르 그랑 타메를랑 에 베제제트fra이 런던에서 공연되었고[55], 헨델의 오페라 타메를라노(1725년 초연)와 비발디의 오페라 바예지드(1735년 작곡) 역시 바예지드와 티무르의 이야기를 극화했으며, 종종 허구적인 인물과 로맨스 요소를 가미했다.[55] 오스트리아 그라츠 인근 에겐베르크 성의 회화 연작(1670년대 완성)이나 안드레아 첼레스티(Andrea Celesti)의 그림(1700년경) 등 회화 작품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었다.[56]
현대의 역사 소설에서도 바예지드 1세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해롤드 램의 소설 The Grand Cham|더 그랜드 참eng(1921)[57], 로버트 E. 하워드의 단편 Lord of Samarcand|로드 오브 사마르칸드eng[58], 제임스 헤니지의 소설 The Walls of Byzantium|더 월스 오브 비잔티움eng(2013)[59] 등이 그 예이다.
영화에서는 세르비아의 1989년 역사 드라마 영화 《코소보 전투》에서 배우 브라니슬라브 레치치(Branislav Lečić)가 코소보 전투에 참전한 바예지드 1세를 연기했으며, 루마니아 역사 드라마 《미르체아》(Mircea)에서 이온 리티우(Ion Ritiu)가 로비네 전투, 니코폴리스 전투, 앙카라 전투에 참전한 젊은 술탄으로서 바예지드 1세를 연기했다.
또한 미국 북부 프리메이슨 관할구 스코틀랜드 의식 29도에서는 바예지드 1세가 등장하는 역사 소설적인 드라마를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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