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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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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으로, 일본에서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1616년 아리타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하고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워 아리타 자기의 시초가 되었으며, 그의 사후 도산신사에 도공신으로 모셔졌다. 이삼평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실존 여부와 아리타 자기 창업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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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일본어 표기 (추정 한국어 이름)李参平/李三平
일본어 가나 표기り さんぺい
일본어 로마자 표기Ri Sanpei
일본 귀화 후 이름金ヶ江三兵衛
일본어 가나 표기 (귀화 후)かながえ さんべえ
일본어 로마자 표기 (귀화 후)Kanagae Sanbee
한국어 표기 (추정 한국어 이름)이삼평
한자 표기 (추정 한국어 이름)李參平/李三平
로마자 표기I Sam-pyeong
매큔-라이샤워 표기I Samp'yŏng
기본 정보
국적조선일본
직업공예가, 도예가
출생지 추정조선 충청도
사망지일본
사망일1655년

2. 생애

이삼평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중 한 명이다. 일본에서 가네가에 산베에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가신 다쿠 야스토시에게 의탁하여 다쿠에서 살았다.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삼평은 자기 원료인 고령토를 찾기 위해 사가번 내를 돌아다녔고, 1616년 아리타 동부의 泉山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하여 덴구다니에 가마를 지어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웠다. 이를 통해 아리타 자기가 시작되었다.

아리타의 류센지(龍泉寺) 장부에는 1655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계명은 월창정심거사(月窓浄心居士)였다. 이삼평의 묘소는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1959년 덴구다니 가마 부근에서 계명이 새겨진 묘석 하부가 발견되어 시로카와 묘지에 옮겨졌다. 묘석 상부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묘석은 아리타 정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충청도 금강(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출신으로, 김가강의 성은 여기서 유래한다. 생년은 불명확하나, 사망 연도는 확인되었으며, 20대 중반에 일본에 와서 약 63년을 장수하였다.[6]

사후 3년 후인 1658년에 도산신사를 건립하여 이삼평을 도공신으로 모셨다. 1917년에는 유토정 언덕에 「도조 이삼평비」를 세웠다. 조선일보는 그가 조선에 그대로 있었다면 일본으로 올 수 없었던 조선 도공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며, 이삼평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 가능성은 전무했을 것이라고 전한다.[6]

2. 1. 조선에서의 삶과 임진왜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중 한 명이다. 이후 가네가에 산베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2]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가신 다쿠 야스토시에게 의탁하여 오기군 다쿠에 살았다.

임진왜란(1592~1598)은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기술 발전을 촉진하면서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삼평은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다.[3]

1592년 (분로쿠 원년)부터 1598년 (게이초 3년) 임진왜란 말기에 히젠국의 실질적인 영주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왔다.[6] 나베시마는 조선에서 도공으로 일했던 이삼평을 알고 중신 다쿠 안준(다쿠) 휘하에서 1599년 (게이초 4년)부터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 처음에는 다쿠 영내의 서고려곡에 살면서, 후에 서다쿠, 후지노가와나이로 옮겨가며 도자기를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중국 경덕진 요의 백자에는 미치지 못했고, 생산에 적합한 백자토를 찾아 나베시마 영내의 다카쓰키야키를 굽는 가마를 찾아다녔다.

2. 2. 일본에서의 초기 정착

1592년 임진왜란일본군 중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에 잡혀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중 한 명이다. 이후 가네가에 산베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가신 다쿠 야스토시에 의탁하면서 오기군 다쿠에 살았으며, 1599년부터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6] 처음에는 다쿠가 영내의 서고려곡에 살면서, 후에 서다쿠, 후지노가와나이로 옮겨가며 도자기 생산을 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임진왜란 말기에 비젠국의 실질적인 영주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왔다. 이후, 도공들을 데리고 돌아온 나베시마가 이삼평이 조선에서 요업에 종사했던 것을 알고, 중신 다쿠 안준 휘하에서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6] 그러나 당시 일본 국내에서 수요가 높았던 중국 경덕진 요의 백자에는 미치지 못하여, 생산에 적합한 백자토를 찾아 나베시마 영내의 다카쓰키야키를 굽는 가마를 전전하였다.

2. 3. 아리타 자기의 탄생과 발전

1592년 임진왜란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에 잡혀 일본에 끌려온 도공 중 한 명인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 동부의 泉山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하고 덴구다니에 가마를 지어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웠다. 이를 통해 아리타 자기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2] 이삼평은 자기 원료인 고령토를 찾아 사가번 내를 돌아다녔고, 마침내 이즈미산에서 카올린 광산을 발견하여 일본 자기 산업을 시작하게 되었다.[3]

이삼평은 1599년부터 다쿠 야스토시의 휘하에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당시 일본에서 수요가 높았던 중국 경덕진시의 백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생산에 적합한 백자토를 찾아 나베시마 영내를 전전했다. 마침내 유토 서부 지역의 란교(현 삼대교)에 도착하여 가마를 짓고 도자기와 자기를 동시에 굽는 연구를 거듭했다. 그 후, 양질의 백자토인 센잔 자석을 발견하고, 1616년 덴구다니가마(시라카와) 지역에서 일본 최초의 백자기를 산업으로 창업하였다. 이것이 아리타 자기의 시작이라고 한다.

3. 사후

도잔 신사에 있는 도조 이삼평 비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에서 도자기의 시조라는 의미로 도조(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1917년 도잔 신사에 '도조 이삼평 비'가 건립되었고, 매년 5월 4일 도조 축제가 열린다.[10] 1990년에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합동 기념비가 세워졌다.[10]

조선일보의 한 기사에 따르면, 조선이 도공을 포함한 모든 산업을 천시하고 권력 투쟁에 몰두하여 이삼평이라는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고 비판했다.[6] 또한, 이삼평을 도조로 칭송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일본에 감사해야 하며, 대한민국에서도 이삼평과 같은 인재가 묻혀 있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3. 1. 도조 이삼평 비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서 도자기의 시조라는 의미로 '도조'(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아리타의 도잔 신사는 오진 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이삼평을 제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17년 아리타 자기 창업 300년을 기념하여 도잔 신사에 '도조 이삼평 비'가 건립됐다. 매년 5월 4일 도조 축제가 열린다. 1990년에는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합동 기념비가 세워졌다.[10]

3. 2. 도조 축제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서 도자기의 시조라는 의미에서 도조(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아리타의 도잔 신사는 오진 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이삼평을 제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17년 아리타 자기 창업 300년을 기념하여 도잔 신사에 〈도조 이삼평 비〉가 건립됐다. 매년 5월 4일 도조 축제가 열린다.[10] 1990년에는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합동 기념비가 세워졌다.[10]

1658년(이삼평 사후 3년째)에 건립된 도산신사에서는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모시고 있으며,[6] 유다의 총진수(總鎮守)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응신천황과 “번조(藩祖)”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함께 “도조(陶祖)” 이삼평을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다. 1917년에는 유다야키(有田焼) 창업 300주년을 기념하여 도산신사에 “도조 이삼평비(陶祖李参平碑)”도 건립되었다.[6] 도자기 시장 개최에 맞춰 매년 5월 4일에는 “도조제(陶祖祭)”가 열리며,[6] 일반석도 일부 마련되어 있다.

유다야키의 발상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1610년대 전반부터 유다 서부에서 자기(磁器) 시작(試作)·작도(作陶)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다야키의 생산과 그 발전에는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출신 도공들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천구곡가마(天狗谷窯)에서 산업으로서의 창업이 시작된 1616년을 기점으로 2016년에는 ‘일본 자기 탄생·유다야키 창업 400주년’이 개최되었다.

4. 이삼평에 대한 논란과 진실

이삼평에 대한 논란은 주로 그의 역사적 기록과 관련된 부분에서 발생한다. 이삼평이라는 이름은 가네가에 가문의 문서에 본래 성이 이씨라는 기록과 '산베에'라는 이름이 '삼평(參平)' 혹은 '삼평(三平)'으로 기록된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그러나 1610년대 전반부터 아리타 서부에서 이미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삼평이 아리타 자기의 원조라는 데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타 자기의 탄생과 발전에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출신 도공들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삼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해 일본으로 끌려온 수많은 조선 도공 중 한 명으로, 일본 도자기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3]

이삼평은 유다의 “도조(陶祖)”로 불린다. 그의 사후 3년째인 1658년에 건립된 도산신사에서는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모시고 있으며,[6] 유다의 총진수(總鎮守)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응신천황과 “번조(藩祖)”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도조(陶祖)” 이삼평을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다. 1917년에는 유다야키(有田焼) 창업 300주년을 기념하여 도산신사에 “도조 이삼평비(陶祖李参平碑)”도 건립되었다.[6]

2022년 조선일보는 이씨조선이 도공을 포함한 모든 산업을 “말업(末業)”으로 멸시하고 권력 투쟁에 몰두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이삼평과 같은 인재를 키우지 못한 책임을 언급했다. 또한, 이삼평을 도조로 칭송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4. 1. 이삼평의 실존 여부와 초기 기록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삼평이라 불리는 이름은 가네가에 가문의 문서에 기록된 본래 성이 이씨라는 점과, '산베에'라는 이름이 '삼평(參平)' 혹은 '삼평(三平)'으로 기록된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2]

1610년년대 전반부터 아리타 서부에서 이미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삼평이 아리타 자기의 원조라는 것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그러나 아리타 자기의 탄생과 발전에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출신 도공들의 역할이 컸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삼평의 존재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당대 기록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오늘날 알려진 이삼평 이야기는 19세기 후반, 여러 집단에 의해 각기 다른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2] 예를 들어 이삼평의 후손인 가나가에 산베 14대가 제시한 버전은 그러한 맥락을 보여준다.[3]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해 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는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삼평은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다. 가나가에 가문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삼평은 사가 현을 건설한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다스리던 사가시에 잠시 거주했다. 이후 다쿠의 지배자 다쿠 야스토시에게 보내져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카올린을 찾아 헤매던 중 1616년 아리타정 이즈미산에서 카올린 광산을 발견하여 일본 자기 산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고향 금강(Geumgang)을 따서 가나가에 산베(Kanagae Sanbee)라는 일본식 이름을 받았다.[3]

1992년 일본 역사가 나카무라 다다시(中村忠志)는 이삼평을 포함한 조선 초기 도자기 창업자들의 이야기가 당시 기록에는 확인되지 않고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4] 역사가 코미야 기요라(小宮清良)는 이러한 이야기의 기원을 더 자세히 분석하여 대부분 부정했다.[1]

당시 한국 기록에는 이삼평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일본어로 된 역사적 자료에서도 이 이름으로 그를 지칭하는 경우는 없다. 이삼평이라는 한국식 이름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당시 기록 어디에도 그가 임진왜란 당시 재능 때문에 쫓겨났다거나, 조선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없다.[1] 1843년경 사가번(佐賀藩) 공식 문서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일본의 살아있는 보물"인 재능 있는 도공 6, 7명을 데려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기록은 아리타(有田)를 포함한 사가 서부 지역 지방 관리의 전기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 전기는 그의 아들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가 1707년에 썼다. 하지만 장인들이 도자기를 시작했다는 산에는 가마 흔적이 없어 역사적 정확성은 의문이다. 이 기록에는 가나가에 산베(金ヶ江三兵衛)나 다른 도공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2]

가나가에 산베(金ヶ江三兵衛)를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가 일본에 도착한 지 반세기가 넘은 1653년경, 사망 몇 년 전의 기록이다.[5] 다쿠(多久) 지역 지배 가문인 다쿠 가문에 전해진 이 기록에서 그는 일본에 도착한 후 다쿠 야스토시(多久康利) 밑에서 "몇 년간" 일한 후, 1616년에 주로 아이들 18명 정도와 함께 다쿠에서 아리타로 이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직이 끝난 후 1616년 이주 때까지 약 20년 동안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도착 전에 도공이었거나 재능 때문에 일본으로 데려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1616년 이주 당시 가마 수레를 운반했으며, 그의 무리에는 신원이 불분명한 "다쿠의 원래 도공(多久本皿屋)"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적었다.[1]

역사가 코미야 기요라(小宮清良)는 1592~98년 임진왜란 이전에도 도자기가 존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상당수의 조선 도공들이 사가 북부 가라쓰(唐津)의 하타(波多) 씨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하타 씨의 영지에 있던 가마들은 사라졌고, 도공들은 전쟁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난민이 되었을 것이다. 코미야는 "다쿠의 원래 도공(多久本皿屋)"이 이러한 난민 집단 중 하나였고, 가나가에 산베(金ヶ江三兵衛)가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서 도자기를 배웠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

코미야는 아리타의 카올린 매장량 발견과 그 주장되는 1616년이라는 연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아리타에서 가장 오래된 자기는 1630년대와 40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번의 금은 광산 개발 시도가 광석 탐사 중 우연히 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1]

코미야는 1616년 가나가에 산베(金ヶ江三兵衛)가 다쿠에서 "추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당국은 도자기 생산으로 인한 환경적 영향, 즉 삼림 파괴와 농업 이익과의 충돌로 인한 분쟁으로 인해 도공들을 자주 추방했다. 초기 도자기는 충분한 이윤을 창출하지 못했고 상당한 예술적 가치도 없어서 당국의 보호를 받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도공들이 중국풍을 모방한 더 수익성 있는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1630년대경부터였으며, 이로 인해 추방에서 면제되었다.[1]

고미야는 역사적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분석하여 이삼평(Yi Sam-pyeong)을 둘러싼 이야기의 발전 과정을 추적했다.[2]

1770년 가나가에(Kanagae) 가문이 타쿠(Taku) 가문에 제출한 상소문은 건립 신화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이 상소문은 타쿠 가문이 가나가에 가문에 지급하던 적은 봉록을 중단한 결정을 번복시키려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조상의 업적을 강조하고 타쿠 가문과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했다. 상소문에 따르면, 가나가에 산베(Kanagae Sanbee)는 나베시마 나오시게(Nabeshima Naoshige)에 의해 일본으로 데려와 처음에는 이야기꾼으로 일했다.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힌 그는 나중에 타쿠 야스토시(Taku Yasutoshi)의 가신이 되어 아리타로 거처를 옮겨 자기 생산을 시작했다. 이 상소문은 가나가에 산베를 아리타 자기의 유일한 창시자로 묘사했지만, 당시 아리타의 아무도 그의 업적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도 인정했다. 이 상소문은 가나가에 산베의 본래 성이 이(李, Yi)였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나타난 기록이기도 하다.[2]

1784년 또는 1796년의 각서에는 가나가에 산베의 업적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이 추가되었다. 즉,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임진왜란(Korean campaign) 동안 그는 나베시마 군을 안내하며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1807년경 타쿠 가문에 제출된 또 다른 상소문에서 이 이야기는 더욱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가나가에 산베는 임진왜란 당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항해사로 일했고,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다른 조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그를 일본으로 데려왔다. 이때 그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자신의 가문의 도자기 사업을 알렸고,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그가 일본에서 사업을 계속하도록 허락했다. 이 수정된 이야기에서는 그가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위해 이야기꾼으로 일했다는 이전의 주장은 생략되었지만, 처음에는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기 전에 개발이 덜 된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삼평(三平, Sam-pyeong)이라는 이름의 사용은 주목할 만하지만, 그의 원래 이름을 반영하는 것인지, 그의 일본식 이름 산베(三兵衛)의 "한국식 이름"인지는 불확실하다.[2]

이삼평 기념비


위의 문서들은 가나가에 가문이 제출한 것이다. 역사적 자료들을 보면 아리타 주변의 다른 여러 가문들도 비슷하지만 서로 상충되는 건립 신화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건립 신화들이 가나가에 산베의 신화로 통합된 것은 메이지 시대(Meiji era), 즉 19세기 후반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 아리타 사람들은 아리타 자기의 역사, 특히 기원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이 신화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출판물은 1877년에 나온 것으로, 가나가에 가문의 이야기를 그대로 베꼈지만 이삼평(Yi Sam-pyeong)이라는 추정되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1880년대 아리타에서는 통일된 견해를 만들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제는 이삼평(Yi Sam-pyeong)이 된 가나가에 산베의 이야기가 가장 영향력 있는 이야기로 부상했다. 이 이야기의 지배력은 1917년 아리타의 도산신사(Tōzan Shrine, Sueyama Shrine)에 "자기의 아버지 이삼평(Yi Sam-pyeong)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2]

4. 2. 아리타 자기 창업 시기와 이삼평의 역할

1610년대 전반부터 아리타 서부에서 이미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삼평이 아리타 자기의 원조라는 데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아리타 자기의 탄생과 발전에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출신 도공들의 역할이 컸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왔고, 이는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삼평은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다.[3] 가나가에 가문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삼평은 사가 현을 건설한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다스리던 사가시에 잠시 거주했다. 이후 다쿠의 지배자 다쿠 야스토시에게 보내져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카올린을 찾아 헤매던 중, 1616년 아리타정 이즈미산에서 카올린 광산을 발견하여 일본 자기 산업을 시작하게 되었다.[3]

그러나 1992년 일본 역사가 나카무라 다다시(中村忠志)는 이삼평을 포함한 조선 초기 도자기 창업자들의 이야기가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며, 널리 퍼진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했다.[4] 역사가 코미야 기요라(小宮清良)는 이러한 이야기의 기원을 더 자세히 분석하여 대부분 부정했다.[1] 당시 한국 기록에는 이삼평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일본어로 된 역사적 자료에서도 이 이름으로 그를 지칭하는 경우는 없다. 당시 기록에는 그가 임진왜란 당시 재능 때문에 쫓겨났다거나, 조선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없다.[1]

가나가에 산베(金ヶ江三兵衛)를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53년경의 기록으로, 이삼평이 일본에 도착한 지 반세기가 넘은 시점이었다.[5]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본에 도착한 후 다쿠 야스토시(多久康利) 밑에서 "몇 년간" 일한 후, 1616년에 주로 아이들 18명 정도와 함께 다쿠에서 아리타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지는 불분명하며, 도공이었는지, 재능 때문에 일본으로 왔는지도 명확하지 않다.[1]

역사가 코미야 기요라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도자기가 존재했으며, 상당수의 조선 도공들이 가라쓰(唐津)의 하타(波多) 씨의 후원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코미야는 "다쿠의 원래 도공(多久本皿屋)"이 이러한 난민 집단 중 하나였고, 가나가에 산베(金ヶ江三兵衛)가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서 도자기를 배웠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

코미야는 아리타의 카올린 매장량 발견과 그 주장되는 1616년이라는 연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아리타에서 가장 오래된 자기는 1630년대와 40년대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사가번의 금은 광산 개발 시도가 광석 탐사 중 우연히 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1] 그는 1616년 가나가에 산베(金ヶ江三兵衛)가 다쿠에서 "추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당국은 도자기 생산으로 인한 환경 문제와 농업 이익과의 충돌로 인해 도공들을 자주 추방했다. 초기 도자기는 충분한 이윤을 창출하지 못했고, 예술적 가치도 낮아 당국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도공들이 중국풍을 모방한 더 수익성 있는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1630년대경부터였다.[1]

이삼평을 둘러싼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집단에 의해 각기 다른 의도로 만들어졌다. 1770년 가나가에 가문이 타쿠 가문에 제출한 상소문에는 이삼평이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일본으로 와서 처음에는 이야기꾼으로 일했으며, 이후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혀 아리타로 거처를 옮겨 자기 생산을 시작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상소문은 이삼평을 아리타 자기의 유일한 창시자로 묘사했지만, 당시 아리타의 아무도 그의 업적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도 인정했다.[2] 1784년 또는 1796년의 각서에는 이삼평이 임진왜란 동안 나베시마 군을 안내하며 목숨을 걸었다는 주장이 추가되었다. 1807년경 타쿠 가문에 제출된 또 다른 상소문에서 이 이야기는 더욱 자세하게 묘사되었다.[2]

이러한 건립 신화들이 가나가에 산베의 신화로 통합된 것은 메이지 시대(19세기 후반)였다. 1880년대 아리타에서는 통일된 견해를 만들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삼평의 이야기가 가장 영향력 있는 이야기로 부상했다. 이 이야기의 지배력은 1917년 아리타의 도산신사에 "자기의 아버지 이삼평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2]

4. 3. 역사 왜곡 시도에 대한 비판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삼평이라 불리는 이름은 가네가에 가문의 문서에 본래 성이 이씨라는 기록과 산베에라는 이름이 삼평(參平) 혹은 삼평(三平)으로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유추한 것이다.[1]

1992년 일본 역사가 나카무라 다다시(中村忠志)는 이삼평을 포함한 조선 초기 도자기 창업자들의 이야기가 당시 기록에는 확인되지 않고 18세기 후반에 와서야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며, 널리 퍼진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했다.[4] 역사가 고미야 기요라(小宮清良)는 이러한 이야기의 기원을 더 자세히 분석하여 대부분 부정했다.[1]

당시 한국 기록 어디에도 이삼평에 대한 언급은 없다. 실제로 일본어로 된 모든 역사적 자료에서 이 이름으로 그를 지칭하는 경우는 없다. 주장되는 한국식 이름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당시 기록 어디에도 그가 임진왜란 당시 재능 때문에 쫓겨났다거나, 심지어 조선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없다.[1]

고미야 기요라는 역사적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분석하여 이삼평을 둘러싼 이야기의 발전 과정을 추적했다.[2]

  • 1770년 가나가에(Kanagae) 가문이 타쿠(Taku) 가문에 제출한 상소문은 건립 신화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이 상소문은 타쿠 가문이 가나가에 가문에 지급하던 적은 봉록을 중단한 결정을 번복시키려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조상의 업적을 강조하고 타쿠 가문과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했다. 상소문에 따르면, 가나가에 산베(Kanagae Sanbee)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해 일본으로 데려와 처음에는 이야기꾼으로 일했다.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힌 그는 나중에 타쿠 야스토시(Taku Yasutoshi)의 가신이 되어 아리타로 거처를 옮겨 자기 생산을 시작했다. 이 상소문은 가나가에 산베를 아리타 자기의 유일한 창시자로 묘사했지만, 당시 아리타의 아무도 그의 업적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도 인정했다. 이 상소문은 가나가에 산베의 본래 성이 이(李, Yi)였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나타난 기록이기도 하다.[2]
  • 1784년 또는 1796년의 각서에는 가나가에 산베의 업적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이 추가되었다. 즉,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임진왜란 동안 그는 나베시마 군을 안내하며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 1807년경 타쿠 가문에 제출된 또 다른 상소문에서 이 이야기는 더욱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가나가에 산베는 임진왜란 당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항해사로 일했고,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다른 조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그를 일본으로 데려왔다. 이때 그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자신의 가문의 도자기 사업을 알렸고,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그가 일본에서 사업을 계속하도록 허락했다. 이 수정된 이야기에서는 그가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위해 이야기꾼으로 일했다는 이전의 주장은 생략되었지만, 처음에는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기 전에 개발이 덜 된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삼평(三平, Sam-pyeong)이라는 이름의 사용은 주목할 만하지만, 그의 원래 이름을 반영하는 것인지, 그의 일본식 이름 산베(三兵衛)의 "한국식 이름"인지는 불확실하다.[2]


위의 문서들은 가나가에 가문이 제출한 것이다. 역사적 자료들을 보면 아리타 주변의 다른 여러 가문들도 비슷하지만 서로 상충되는 건립 신화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건립 신화들이 가나가에 산베의 신화로 통합된 것은 메이지 시대, 즉 19세기 후반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 아리타 사람들은 아리타 자기의 역사, 특히 기원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이 신화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출판물은 1877년에 나온 것으로, 가나가에 가문의 이야기를 그대로 베꼈지만 이삼평이라는 추정되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1880년대 아리타에서는 통일된 견해를 만들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제는 이삼평이 된 가나가에 산베의 이야기가 가장 영향력 있는 이야기로 부상했다. 이 이야기의 지배력은 1917년 아리타의 도산신사에 "자기의 아버지 이삼평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2]

2022년 조선일보는 이씨조선이 도공을 포함한 모든 산업을 “말업(末業)”으로 멸시하고 권력 투쟁에 몰두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씨조선에는 이삼평이라는 인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씨조선이 그를 키우지 못한 책임이 있으며, 조선의 한 도공이었던 이삼평을 도조로 명명하고 그의 업적과 작품을 기리고 있는 일본에 감사할 필요성을 전하고 있다.[6] 나아가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정치투쟁에 몰두한 나머지 존재가 무시되고 있는 이삼평과 같은 인재가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정쟁에 몰두하여 자신의 재능을 평가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삼평이 고향인 조선반도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6]

5. 한국의 관점: 이삼평과 한일 관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삼평은 아리타정에서 카올린 광산을 발견하고 일본 자기 산업을 일으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삼평의 이야기는 19세기 후반 여러 집단에 의해 각기 다른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지만,[2] 그의 존재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1592~1598)은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기술 발전을 촉진하면서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삼평은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다.[3]

1610년대 전반 아리타정 서부에서 자기(磁器) 제작이 시작되었지만, 아리타야키의 생산과 발전에는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출신 도공들이 큰 역할을 했다. 2016년에는 ‘일본 자기 탄생·유다야키 창업 400주년’이 개최되었다.

2022년 조선일보는 이씨조선이 도공을 포함한 모든 산업을 “말업(末業)”으로 멸시하고 권력 투쟁에 몰두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이삼평이라는 인재가 있었음에도 그를 키우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조선의 도공이었던 이삼평을 도조로 칭송하고 그의 업적과 작품을 기리는 일본에 감사할 필요성을 언급하며,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정치투쟁에 몰두하여 이삼평과 같은 인재가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6]

5. 1. 이삼평의 고향과 기념 사업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서 도자기의 시조라는 의미로 도조(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아리타의 도잔 신사는 오진 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이삼평을 제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10] 1917년 아리타 자기 창업 300년을 기념하여 도잔 신사에 〈도조 이삼평 비〉가 건립됐다.[10] 매년 5월 4일 도조 축제가 열린다.[10] 1990년에는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합동 기념비가 세워졌다.[10]

5. 2. 한일 문화 교류와 협력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서 도자기의 시조인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아리타의 도잔 신사는 오진 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이삼평을 제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17년 아리타 자기 창업 300년을 기념하여 도잔 신사에 〈도조 이삼평 비〉가 건립되었고, 매년 5월 4일 도조 축제가 열린다. 1990년에는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합동 기념비가 세워졌다.[10]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1592~1598) 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삼평은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으로,[3] 카올린을 찾아 헤매다 1616년 아리타정 이즈미산에서 카올린 광산을 발견하여 일본 자기 산업을 시작하게 되었다.[3]

1610년대 전반부터 아리타 서부에서 자기(磁器) 제작이 시작되었지만, 아리타야키의 생산과 발전에는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출신 도공들이 큰 역할을 했다. 2016년에는 '일본 자기 탄생·아리타야키 창업 400주년'이 개최되었다.

2022년 조선일보는 조선이 이삼평과 같은 인재를 키우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삼평을 도조로 기리는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대 한국에서도 정치 투쟁에 몰두하여 이삼평과 같은 인재가 무시되고 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6]

참조

[1] 서적 Nitchō kōryū to sōkoku no rekisi Azekura Shobo 2009
[2] 학술지 "Tōso" gensetsu no seiritsu to tenkai 2009
[3] 웹사이트 http://toso-lesanpei[...] 陶祖 李参平窯 2011-05-29
[4] 서적 Kinsei taigai kōshōshi ron Yoshikawa Kōbunkan 2000
[5] 간행물 Taku-ke monjo no naka no Kanagae Sanbee 1995
[6] 웹사이트 【コラム】もし陶工が朝鮮に残っていたら https://www.chosunon[...] 2018-06-03
[7] 문서 여성, 이씨조선의 도자기가마 출입금지
[8] 웹사이트 【噴水台】倭乱当時に連行された陶工・李参平を祭る日本 https://s.japanese.j[...] 2022-12-19
[9] 웹사이트 韓経:【コラム】日本の朝鮮女性陶工 https://s.japanese.j[...] 2022-12-19
[10] 백과사전 이삼평 http://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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