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타 히데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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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키타 히데이에(1572–1655)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무장, 다이묘이다. 1581년 아버지 우키타 나오이에가 사망한 후 가독을 상속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 고다이로에 임명되었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공을 세웠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패배한 후 하치조 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50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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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타 나오에는 센고쿠 시대 비젠국의 호족으로, 뛰어난 지략과 모략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주군을 배신하며 강대 세력 사이에서 이익을 추구한 인물로, 에도 시대에는 악인으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그의 행적을 다룬 창작 작품이 있다.
우키타 히데이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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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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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 秀家) |
가명 | 하치로 (八郎), 비젠사이쇼 (備前宰相) |
호 | 세이겐 (成元), 규후쿠/히사후쿠 (休復/久福) |
계명 | 존코인덴 슈게츠 규후쿠 코지 (尊光院殿秀月久福居士) |
출생 | 1572년 |
사망 | 1655년 12월 17일 |
사망 장소 | 일본 하치조 섬 |
묘소 | 도쿄도 하치조정 오가고 이나바 묘지 단센잔 야쿠오주인 도코 사 (도쿄도 이타바시구 이타바시 4초메) 호치산 고도쿠인 다이렌 사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마치) |
신분 | |
직책 | 다이묘 |
가문 | 우키타 씨 |
관위 | 종3위 지주, 참의, 좌근위권중장, 권중납언 |
주군 | 오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
영지 | 오카야마 성 |
소속 부대 | 우키타 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우키타 나오이에 |
어머니 | 엔유인 (円融院) |
형제 | 미우라 모모주마루 (이복형), 요코인, 히데이에, 모토이에 |
배우자 | 고히메 |
자녀 | 히데타카, 히데쓰구, 리쇼인 |
친척 | 마에다 도시이에 (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양아버지, 장인), 우키타 다다이에 (숙부) |
군사 활동 | |
소속 | 도요토미 씨, 서군 |
주요 전투 | 규슈 정벌 (1587년)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 (1592년~1598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
기타 정보 | |
후계자 | 우키타 히데타카 |
2. 생애
1572년 오카야마성에서 우키타 나오이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1년 나오이에가 병으로 죽자,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뜻에 따라 영지를 보장받고 가독을 물려받았다.[2]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 고히메(Gōhime)와 결혼했다. 고히메는 마에다 토시이에에게서 히데요시에게 입양된 딸이었다.[4]
1592년 히데요시는 히데이에를 임진왜란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히데이에는 "예비 사단"을 지휘했다.[2] 1593년 1월 벽제관 전투에서 명 군을 격파했으나, 2월 행주산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화살에 맞았다.[15]
1597년 정유재란에서 "좌익 총사령관"을 맡았고, 1598년 귀국하여 히데요시의 오봉회 일원으로 마에다 토시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모리 테루모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봉직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뒤를 이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와 가까웠기에 이시다 미쓰나리 휘하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1만 7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싸웠으나, 동맹군의 배신으로 패배했다.[1] 특히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은 도쿠가와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히데이에는 결투를 신청하려 했으나 참모들이 만류했다.[1]
1603년 시마즈 다다쓰네가 히데이에의 위치를 도쿠가와 막부에 알렸다. 다다쓰네와 마에다 도시나가의 협상으로 사형은 면하고 스루가 국 구노산에 유폐되었다가 하치조섬으로 유배되었다.[18]
히데이에는 아내와 사나다 노부유키를 제외한 센고쿠 시대 무사들보다 오래 살았다. 이에야스 사후 조건부 사면을 거절하고 본토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도요토미 가문은 패배했으며, 돌아갈 곳도 없었다. 아들들은 하치조섬에서 자녀를 낳았고, 막부는 도쿠가와 가문이 계승할 예정이었다.
에도 시대 말기 완전 사면 후, 아들들의 후손 다수가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
2. 1. 가독 상속
1581년 아버지 우키타 나오이에가 병으로 사망하자,[2] 1582년 11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다.[2]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숙부인 우키타 다다이에(宇喜多忠家)가 대신하여 부대를 지휘했다.[2] 1582년 1월 21일, 우키타 가문의 중신들은 하시바 히데요시와 함께 안토 성의 오다 노부나가를 방문하여 히데이에의 가독 계승 허락을 받았다.[2]
가독 상속 후,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주고쿠 지방 원정을 맡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에 편입되어 빗추 가마쓰성 공략을 도왔다.[2]
2. 2. 도요토미 정권 시대
히데이에의 아버지 우키타 나오이에는 비젠국의 다이묘였으며,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에 섰다.[2] 1581년 나오이에가 죽자 히데이에가 우키타 씨의 당주가 되었다. 히데이에는 아직 어렸기에(10세), 히데이에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의 삼촌인 우키타 타다이에가 우키타 군의 지휘를 맡았다. 타다이에는 여러 전투에서(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히데이에를 대신하여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1582년 비추 다카마쓰 성 포위 공격 중에 노부나가가 암살되었지만, 성은 이틀 후 함락될 때까지 포위 공격이 계속되었다. 히데요시는 교토로 서둘러 돌아갔고, 우키타 씨에게 비젠 국, 미마사카, 그리고 새롭게 점령한 비추 국의 일부를 맡겼다. 우키타 씨는 또한 서쪽의 모리 테루모토를 감시해야 했다.
1585년, 우키타 타다이에가 이끄는 히데이에의 군대는 시코쿠 정벌에서 쵸소카베 모토치카에 대항하여 도요토미군 2만 3천 명을 이끌었다.[3]
1586년,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양녀인 고히메(Gōhime)와 결혼했다. (그녀는 마에다 토시이에에게서 히데요시에게 입양되었다).[4] 이후 1587년 규슈 정벌에 참가했다.
1590년, 히데이에는 오다와라 공방전에서 호조 우지마사에 대항하는 히데요시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원복할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秀" 자를 받아 '''히데이에'''라고 이름을 지었다. 1588년 이전에 히데요시의 양녀인 고히메를 정실로 맞이하였다.[11][12] 이 때문에 외양이었지만, 히데요시 일문 중 하나로 대우받게 되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처음에 모리 테루모토와 나가소카베 모토치카에 대한 방비로 영국에서 방비를 굳히도록 되었으나, 네고로지・사이카슈가 기시와다성을 공격했기 때문에 오사카 근교 방비를 위해 파병을 실시했다.
1585년 3월, 기슈 정벌에 참가한 것이 히데이에의 초진으로 보인다. 이어서, 시코쿠 공략에서는 사누키 국에 상륙한 후, 아와 전선에 참가했다. 같은 해 10월, 종오위하 시종에 서임되었다.[13]
1586년, 규슈 정벌에도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에서 모리 테루모토 등과 함께 히우가 전선에 참가했다.
1587년,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본성)과 하시바씨(이름)를 받았다.[14] 11월 22일, 정사위하 참의에 서임되었다.
1588년 4월 8일, 종삼위로 승계되었고, 그 직후 주라쿠다이 행행에 따라 청화성을 이루었다. 같은 해에 가신인 하나부사 히데나리가 서간에서 오카야마에서의 공사를 위한 큰 돌 확보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이 무렵에는 오카야마성 성벽의 공사 등 대규모 개수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90년 2월 30일, 오다와라 정벌에 교토에서 출진했고, 『오유도노우에 일기』와 『하루토요기』에 따르면 우키타 군세의 진용은 실로 훌륭했다고 한다. 8500의 군세를 이끌고 오다와라성 포위에 참가했지만, 특필할 만한 무공은 남기지 않았다.
1592년부터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1594년, 영국에서 소국 검지를 실시했고, 그 당시 책임자였던 나가후네 기이노카미・나카무라 지로베에・우키타 타로자에몬이 후술하는 우키타 소동의 원인이 되었다고 『토가와케푸』는 기록하고 있다.[16] 10월 22일, 히데이에는 권중납언에 임관했다(쿠가 문서).[17]
1598년 4월, 일본에 귀국했다. 죽음이 다가온 히데요시는 7월 15일에 유품을 나누었고, 히데이에는 과거 노부나가가 소지했던 적도 있는 명물인 하쓰하나 어깨걸이를 받았다. 같은 날 여러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 두 사람에게 기청문을 제출했고, 이 시기에 오대로가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히데이에는 그 일원이 되었다. 8월 18일,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에서 사망했다.
2. 2. 1.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 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대장으로 참전하여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2] 그러나 행주대첩에서는 권율에 맞서 싸워 대패하였고,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2] 《간양록》에는 임진왜란 때 히데이에가 능성(綾城)ㆍ화순(和順)을 치고 한양의 남별궁까지 들어온 일이 있으며,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약탈하는 일을 엄하게 금하면서도 조선 사람들을 많이 포로로 잡아갔고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실책이 많아서 휘하 군졸들의 신망을 잃었다고 적었다.[2]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이에를 임진왜란의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그는 "예비 사단"을 지휘했다.[2] 분로쿠의 역(文禄の役)에 출진하여 5월에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의 수도인 한성(漢城)에 들어가 한성(漢城)의 평정・통치를 담당했다.[15] 한성(漢城) 함락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명(明)을 정복한 후 히데이에를 일본의 관백(関白) 또는 고려의 지배자로 하는 정권 구상을 보였다.[15] 동시에 명(明)의 관백은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 규슈(九州)에는 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라고 말했다. 히데이에는 하나부사 히데나리(花房秀成)를 사자로 히데요시에게 파견하여 명(明)국 진출의 최전선에 스스로 나서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6월 13일 자 주인장(朱印状)으로 이를 인정받았다.[15] 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의 병사, 모리 데루모토의 병고 등의 영향을 받았는지 10월에는 히데이에가 조선(朝鮮)에서 병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
1593년 1월, 리루송(李如松)이 이끄는 명(明) 군이 한성(漢城)에 압박하자, 벽제관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과 함께 이를 격파했다.[15] 2월 12일, 행주산성 전투를 공격했지만 대패했고, 히데이에 자신도 화살에 맞았다.[15] 같은 달 18일에 히데요시는 히데이에에게 주인장(朱印状)을 발행했고, 그 안에서 여러 장수들에게 그 사본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듯이, 히데이에는 조선(朝鮮)에 있는 일본군 총대장으로 대우받게 되었다.[15] 동시에 히데요시는 가토 미쓰야스・마에노 나가야스에게 히데이에에게 다른 의견(충고・훈계)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었고, 경험이 부족하고 사기가 충천한 히데이에의 경솔한 행동을 억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15] 한성(漢城)을 철수한 히데이에는 6월에 진주성 공략(晋州城攻略)이라는 전과를 올렸고, 10월에 귀국했다.[15]
1597년, 게이쵸의 역(慶長の役)에서는 모리 히데모토 등과 함께 재도해하여 좌군(左軍)의 지휘를 맡아 8월에는 남원성(南原城) 공략을 달성했다.[15] 전선 축소 방침에 따라 순천왜성의 축성 등에 종사했다.[15]
1598년 4월, 일본에 귀국했다.[15]
2. 2. 2. 우키타 가문 소동
1599년,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도가와 다쓰야스[5], 오카 사다쓰나[6] 등 여러 가신이 히데이에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히데이에가 나카무라 지로베를 편애했기 때문이었다.[6] 이 문제는 히데이에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무장 봉기로까지 확대되었다.[6]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오타니 요시쓰구가 사건 중재를 위해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 결국 야스마사가 사건을 성공적으로 조정하여 무혈로 무장 봉기가 해결되었다.[7]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로 히데이에의 많은 가신이 우키타 가문을 떠났다.[6] 사카자키 나오모리 등 일부 가신은 야스마사의 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러한 이탈은 우키타 가문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크게 약화시키는 동시에 도쿠가와 가문을 강화시켰다.[7]

1599년 말부터 이듬해인 1600년에 걸쳐 여러 중신이 우키타 가문을 떠나는 결과를 낳은 이른바 '''우키타 소동'''이 발생했다. 당시 기록인 『록원일록』 게이쵸 5년 정월 8일조에는 5일 밤에 나카무라 지로베에가 우키타 가문 내에서 전횡을 부렸기 때문에 살해되었고, 70명 정도의 가신이 우키타 가문에서 흩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우키타 가문을 떠난 도가와 다쓰야스의 아들이 후에 기록한 『토가와가보』에는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이 책에서는 나카무라 지로베에, 나가후네 키이모리, 우키타 타로자에몬이 단행한 총국검지에 의해 영내가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사카자키 나오모리(우키타 사쿄료), 도가와 다쓰야스, 오카 에치젠노카미, 하나부사 마사나리(하나부사 히데나리) 등의 중신이 나카무라 지로베에의 습격을 계획했지만 미연에 발각되어 나카무라는 탈출에 성공한다. 이에 분노한 히데이에는 도가와를 오타니 요시쓰구의 저택으로 불러 살해하려고 했지만, 사쿄료에 의해 도가와는 구출된다. 도가와는 오사카 타마즈쿠리의 사쿄료의 저택으로 이동하여, 오카, 하나부사 등과 함께 모두 출가하여 농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가와가보』는 우키타 가문을 출분(出奔)한 도가와 씨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에, 히데이에나 나카무라 지로베에의 비행을 즉시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나카무라 지로베에는 실제로는 사망하지 않았고 후에 가가번에 출사하게 되지만, 가가번에서 쓰여진 『오쓰야노쇼모츠』에서는, 다쓰야스 등 중신이 성에 가까운 땅을 자기 것으로 해 버린 것 때문에 궁핍해진 소신 가신의 호소를 받은 나카무라가 지행지의 할당을 바꾼 것이 대립의 원인이라고 하여, 나카무라에게 이치가 있었다고 하고 있다.
처음에 오타니 요시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츠다 히데마사가 소동의 조정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게이쵸 5년 정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판했다고 한다. 도가와는 무사시국 이와츠키(사이타마시)로 옮겨지고, 사쿄료, 오카, 하나부사는 우키타 가문의 영국 비젠으로 내려갔다. 한때 우키타 가문에 복귀한 오카, 하나부사였지만, 같은 해 5월에는 우키타 가문을 떠났다고 여겨진다.
이 소동으로 히데이에와 대립한 중신들뿐만 아니라, 히데이에가 능력을 보고 중용했던 나카무라까지 우키타 가문을 떠나게 되어 우키타 가문의 군사적, 정치적 쇠퇴로 이어졌다. 참고로 도가와, 오카, 하나부사 3명은 이후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다.
우키타 소동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우키타 가신단의 내부 항쟁이 전제로 제기된다. 그러나 그것이 이 시기에 현저해진 요인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압도적인 후원자가 죽고 히데이에의 주군으로서의 구심력이 저하된 것에 더해, 히데이에의 영국 지배를 돕고 있던 푸대의 중신 나가후네 키이모리가 사망한 것도 히데이에에 반발하는 가신의 제어가 되지 않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중신을 잃은 히데이에가 가문의 재건을 맡긴 것은, 가신 중 최대의 지행을 가지고, 우키타 소동에서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그때까지 영국 경영에 관여해 온 적이 없었던 히데이에의 매부 아카시 다케노리였다. 그러나 아카시에 의한 시중 등용 등의 시책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전에 세키가하라 전투를 맞이하게 된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서군에 가담하여 1만 7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전투 초기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대를 격파하는 등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의 실책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서군 측의 배신,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로의 독자 행동으로 인해 서군 전체가 와해되면서 패배했다.[1]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장악하려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서, 히데이에는 자연스럽게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 가문 충신 측에 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격렬하게 싸웠으나, 동맹군의 배신으로 인해 전세가 기울었다. 특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은 도쿠가와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히데이에는 이에 분노하여 결투를 신청하려 했으나 참모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1]
1599년 장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도요토미 가문 내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지원했다. 1600년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을 위해 출병하자, 미쓰나리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에야스 타도를 위한 거병을 일으켰다.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대장으로서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등과 함께 이에야스 단죄의 격문을 발표하고 서군의 주력이 되었다.[1]
후시미 성 전투에서 총대장으로 참전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나가시마 성을 공격한 후 오가키 성에서 서군 본대와 합류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최대 규모인 1만 7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서군이 궤멸되면서 패배했다.[1]
일설에 따르면 히데이에가 서군 결의를 발안했다고 한다. 도요쿠니 신사에서 출진식을 빠르게 치른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1]

2. 4. 유배와 죽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 서군 내부 배신으로 전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패배하였고,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에 숨었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이 히데이에를 숨겨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요시히로의 아들인 다다쓰네에 의해 1603년에 이에야스에게 넘겨졌다. 이후 다다쓰네와 처남인 마에다 도시나가의 탄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구노산토죠구에 유폐되었다가 1606년에 하치조섬으로 유배된다.[18]하치조섬에서는 50년 동안 살았는데, 처가인 마에다 가문 등의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높은 신분 출신에 맞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풍랑으로 인해 하치조섬에 잠시 상륙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에게 술을 얻어마셨다는 일화나 하치조섬의 대관(대관)에게 주먹밥을 얻어 먹었다는 일화 등, 궁핍하게 살았다는 설도 있다. 사실 하치조섬은 일본 본토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가 상당히 어려우며, 특히 풍랑이 심할 경우 완전히 고립되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키타 히데이에가 궁핍할 경우,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 풍랑이 심하면 마에다 가문 측에서는 풍랑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이때 한정으로 궁핍했을 가능성은 있다.[20]
1655년 11월 20일에 83세로 사망했다. 이에야스 사후 조건부 사면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본토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도요토미는 패배했으며, 돌아갈 곳도 없었다. 아들들은 하치조섬에서 자녀를 낳았고, 막부는 도쿠가와 가문이 계승할 예정이었다.
히데이에가 그 후 더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에도 시대 말기에 완전 사면이 내려지자 그의 아들들의 후손 중 많은 수가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
3. 평가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어떠한 내용도 생성할 수 없습니다.)
3. 1. 후대의 평가 (우스갯소리)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토벌하러 갔을 때, 일각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도우러 가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이 때문에 우키타 히데이에가 자신의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구하기 위해 하치조섬에서 오사카까지 헤엄쳐서 건너왔다는 우스갯소리가 퍼졌다. 인터넷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라는 말만 나오면 수영의 달인이라며 칭송하는 반응이 나타났다.하치조섬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287km나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다. 거의 300km에 육박하는 먼 거리를 생각하지 않고, 주군을 도우러 오사카까지 간다는 논리를 편 네티즌의 무식함을 비꼬기 위해 이러한 우스갯소리가 유행어가 되었다.
4. 세키가하라 전투 관련 일화
미쓰나리가 나오에 가네쓰구와 밀약을 맺고 거병했다는 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와 관련된 통설로 알려져 있으나, 우키타 히데이에가 미쓰나리에 앞서 이에야스 타도를 기치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이 있다.
- 음력 7월 1일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정식을 가졌던 점
- 미쓰나리와 친밀했던 쓰가루 다메노부나 사타케 요시노부 등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점
-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대해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는 문서가 전해지고 있는 점
- 미쓰나리의 친우인 요시쓰구 역시 미쓰나리의 계획을 모른 채 도쿠가와를 도우러 가는 도중 서군에 편입되었다는 점
- 세키가하라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함께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믿을 수 없다며 창을 잡았다는 설 등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인물됨[1]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5세 아들 히데요리가 후계자가 되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와 매우 가까웠기에 자연스럽게 이시다 미쓰나리(서군) 휘하의 도요토미 충신 측에 섰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1만 7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싸웠는데,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장 격렬한 접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전투 초반 우키타의 군대는 승기를 잡고 마사노리의 군대를 몰아붙였으나, 근처에 주둔한 동맹군이 적과 비밀리에 내통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동맹군과 배신자들의 공격으로 인해 그 기세가 꺾였다. 이후 마사노리의 군대가 우세를 점하며 동군이 승리했다.[1]
배신자 중 한 명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도쿠가와로부터 배신의 대가로 오카야마 성과 주변 우키타 영지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도쿠가와의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히데이에는 배신에 분노하여 처음에는 고바야카와를 일대일 결투로 처단하려 했으나, 참모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전투에서 도망친 그는 사쓰마 국으로 피신하여 몇 년 동안 전 동맹들의 보호를 받았다.[1]
5. 간양록
간양록일본어에는 평소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기 5개월 전인 1600년 4월에 히데이에의 부하들이 반란을 시도했다가 오타니 요시쓰구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반란 주모자는 자살하거나 달아났을 때, 이에야스는 히데이에의 진영에 생긴 분란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해서 자살한 반란 주동자들의 죄를 묻지 않았고 당시 일본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이에야스를 소인배 취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6. 관련 작품
高山友禅일본어 『전국의 우키타 일족』(산요신문사, 1992년) - 우키타 동족회 사무국장 저술.
- 모리모토 시게루 『상처 입은 비젠 까마귀 비젠 재상 히데이에의 어머니』(산요신문사, 1988년)
- 노무라 토시오 『우키타 히데이에 히데요시가 꿈을 맡긴 남자』(PHP연구소 PHP문고, 1996년)
- 츠모토 아키라 『우키타 히데이에 비젠 이야기』(문예춘추, 1997년)
- 후지노 마치오 『환상의 성-오사카 여름 전투 이문』(쇼덴샤문고, 2009년)
- 시마다 나나에 『우키타 히데이에의 소나무』(론소샤, 2014년)
- 키노시타 마사키 『우키타의 낙토』(문예춘추)
- 사쿠라유키 『반사광』(작사: 오구리 사쿠라, 작곡: 타나카 슌스케)
- 아마츠키-아마츠키- 『별 달밤』(작사: 하세가와 레이나·아마츠키-아마츠키-, 작곡: KoTa·하라다 유이치, 2016년) - 무대 「환상의 성~전국의 아름다운 광기~」 테마송
- 와타나베 다이몬 『우키타 나오이에·히데이에 부자의 허상과 실상』DVD(재팬라임, 2012년)
- 만화: 풍운아들(미나모토 타로 작)
6. 1. 일본
- 軍師官兵衛일본어 (NHK, 2014년, 배우: 타케다 고헤이)
- 関ヶ原일본어 (1981년, TBS, 연기: 미우라 유와)
- 女太閤記일본어 (1981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카쿠타 에이스케→사카모토 료스케)
- 徳川家康일본어 (1983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하마다 미쓰오)
- 秀吉일본어 (1996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아사리 요스케→니시데 타케시)
- 葵 徳川三代일본어 (2000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카가와 테루유키)
- 利家とまつ〜加賀百万石物語〜일본어 (2002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아시다 쇼타로)
- 功名が辻일본어 (2006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야스다 아키라)
- 天地人일본어 (2009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스가 타카마사)
- 江〜姫たちの戦国〜일본어 (2011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사이토 유)
- 軍師官兵衛일본어 (2014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타케다 코헤이)
- 真田丸일본어 (2016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타카하시 카즈야)
- どうする家康일본어 (2023년, NHK 대하 드라마, 연기: 야나기 슌타로)
- 무대 幻の城~戦国の美しき狂気~일본어-더 역사를 깊이 알고 싶어지는 시리즈- (2015년 10월 9일-10월 18일, EX 씨어터, 원작: 후지노 마치오 幻の城-大坂夏の陣異聞일본어, 연기: 스즈키 히로키)
- 関ヶ原일본어 (2017년, 도호, 연기: 나기시마 쇼)
- ねこねこ日本史일본어 (목소리: 고바야시 유)
6. 2. 한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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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豪姫の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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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卿補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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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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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喜多秀家
学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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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戸川家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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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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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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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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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八丈島で宇喜多秀家鎮魂祭 豪姫の菩提寺住職ら参加
東京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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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板橋区立美術館所蔵 狩野派以外全図録
板橋区立美術館
2013-02
[23]
서적
おふり様と豪姬 宇喜多秀家の隠された息女と内室豪姫
真宗大谷派善福寺
2011
[24]
문서
系図纂要
[25]
문서
宇喜多秀家年譜
[26]
뉴스
隠された「宇喜多」姓
読売新聞
201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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