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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쉬메-다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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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쉬메-다간 1세는 샴시-아다드 1세의 아들로, 기원전 1780년 아시리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지시 아래 에칼라툼의 왕으로 봉해졌으며, 뛰어난 장군으로서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즉위 후 아시리아는 세력이 쇠퇴했다. 즉위와 함께 반란과 투르크족의 침입에 시달렸고, 에슈눈나의 공격으로 마리를 잃었으며, 바빌론의 함무라비에게 신종할 의사를 표명해야 했다. 결국 함무라비의 공격으로 아시리아가 바빌론 제1왕조의 지배 하에 놓이면서 그의 소식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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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쉬메-다간 1세
기본 정보
칭호이쉬쉬아크 아슈르
로마자 표기Išme-Dagān I
칸지체イシュメ・ダガン1世
통치
재위 기간기원전 1775년경 – 1765년경
이전 통치자샴시-아다드 1세
다음 통치자무트-아슈쿠르
가계
아버지샴시-아다드 1세
자녀무트-아슈쿠르, 아시눔

2. 생애

샴시-아다드 1세의 아들로 태어난 이쉬메-다간 1세는 아버지에 의해 에칼라툼의 왕으로 봉해져 그 지역을 감독했다. 그러나 마리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동생 야스마흐-아다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 여러 지시를 받았으며, 측근에 의해 행동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1] 아버지 샴시-아다드 1세가 사망하면서 기원전 1780년에 왕위에 올랐다.[1]

이쉬메-다간 1세는 즉위 후 아시리아 각지에서 발생한 반란과 산악 민족 투르크족의 침입에 대응해야 했다.[1] 아들 무트-아슈쿠르와 함께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영토는 계속 축소되었다.[1] 기원전 1777년경 에슈눈나 왕 이발-피-엘 2세의 공격을 받아 마리를 잃었고, 기원전 1771년에는 에슈눈나의 새 왕 시리-신의 공격을 받아 아시리아의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1] 결국 바빌론 제1왕조의 왕 함무라비에게 신종할 의사를 표명해야 했다.[1]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국가들을 차례로 병합했으며, 기원전 1764년경부터 아시리아 방면으로도 확장을 시도했다. 기원전 1755년까지 함무라비 왕의 공격을 받아 아시리아는 바빌론 제1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쉬메-다간 1세의 소식은 불분명하다.[1]

2. 1. 가족 관계

이쉬메-다간 1세는 아모리인 왕 샴시-아다드 1세의 아들이었다.[1] 샴시-아다드 1세는 장남 이쉬메-다간 1세를 에칼라툼의 왕위에 앉히고, 막내 아들 야스마-아다드를 마리의 왕위에 앉혔다.[2] 샴시-아다드 1세와 그의 두 아들 사이의 가족 관계에 관한 많은 편지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편지들은 이 통치자 가족의 긴장감을 보여준다.[2] 이쉬메-다간 1세는 아버지의 꾸짖음을 받아들여 동생을 비난하기도 했다. 한 편지에서 이쉬메-다간 1세는 그의 동생에게 "왜 이런 일로 울부짖고 있느냐? 그것은 훌륭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묻고, 또 다른 편지에서는 야스마-아다드에게 "정신을 차려라"라고 명령한다.[2] 이쉬메-다간 1세는 아들 무트-아슈쿠르와 함께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2. 2. 즉위 전 군사 활동

샴시-아다드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샴시-아다드 1세 생전에 쓰여진 보고서 등에 따르면, 이쉬메-다간 1세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뛰어난 장군이었다. 아버지 왕에 의해 Ekallatum|에칼라툼영어의 왕으로 봉해져 그 지역 주변을 감독했다.

2. 3. 아시리아 왕 즉위와 통치

샴시-아다드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 의해 Ekallatum|에칼라툼영어의 왕으로 봉해져 그 지역 주변을 감독했지만, 마리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야스마흐-아다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 다양한 지시를 받았으며, 아버지 측근에 의해 행동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이쉬메-다간 1세와 야스마흐-아다드가 샴시-아다드 1세와 주고받은 서한이 발견되었으며, 그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그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1]

기원전 1780년 샴시-아다드 1세가 사망하면서 이쉬메-다간 1세는 아시리아의 왕위에 즉위했다. 샴시-아다드 1세 생전에 쓰여진 보고서 등으로부터, 이쉬메-다간 1세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뛰어난 장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아시리아 왕이 된 후 아시리아의 세력은 오리엔트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샴시-아다드 1세 시대에 비해 확연히 쇠퇴했다.[1] 그의 즉위에 즈음하여 아시리아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왕위를 안정시킨 후에도 산악 민족 투르크족의 침입을 받아 대응에 쫓겼다.[1] 아들 무트-아슈쿠르와 함께 각지에서 전전했지만, 영토는 후퇴했고, 기원전 1777년경에는 에슈눈나 왕 이발-피-엘 2세의 공격을 받은 전후로 마리를 잃었고, 동생 야스마흐-아다드는 소식이 끊겼다. 이후 마리는 이전 왕자 짐리-림이 왕좌를 획득했다.[1]

기원전 1771년에는 에슈눈나의 새 왕 시리-신의 공격을 받아 아시리아의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아버지 시대에는 격하된 상대였던 바빌론 제1왕조의 왕 함무라비에게 신종할 의사를 표명하기까지 해야 했다.[1]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국가들을 차례로 병탄해갔으며, 마침내 기원전 1764년경부터 아시리아 방면으로도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755년까지 함무라비 왕의 공격을 받아 아시리아는 바빌론 제1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쉬메-다간 1세의 소식은 불분명하다.[1]

  • 바빌론이 지배한 범위와 그 정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분명하지 않다.[1]

2. 4. 몰락과 최후

이쉬메-다간 1세는 아버지 샴시-아다드 1세로부터 정치적 감각과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아버지 사후 제국을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는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윗 하부르 지역을 되찾기 위한 여러 차례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아슈르에칼라툼만을 소유하게 되었다.[2] 이발피엘 2세의 통치 5년째 연호는 에쉬눈나가 에칼라툼에 복종했음을 보여준다.[2]

이쉬메-다간 1세는 아버지의 전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아슈르와 에칼라툼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이발피엘 왕의 통치 8년과 9년의 연호는 에쉬눈나가 아슈르와 마리의 군대를 공격하여 파괴했음을 나타낸다.[2]

샴시-아다드 1세가 사망하면서 기원전 1780년에 이쉬메-다간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아시리아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왕위를 안정시킨 후에도 산악 민족 투르크족의 침입을 받아 대응에 쫓겼다. 아들 무트-아슈쿠르와 함께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영토는 계속 축소되었다. 기원전 1777년경에는 에슈눈나 왕 이발-피-엘 2세의 공격을 받아 마리를 잃었고, 동생 야스마흐-아다드는 소식이 끊겼다. 마리는 그 후 이전 왕자 짐리-림이 왕위를 되찾았다.

기원전 1771년에는 에슈눈나의 새 왕 시리-신의 공격을 받아 아시리아의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버지 시대에는 격하된 상대였던 바빌론 제1왕조의 왕 함무라비에게 신종할 의사를 표명하기까지 했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국가들을 차례로 병합했으며, 기원전 1764년경부터 아시리아 방면으로도 확장을 시도했다. 기원전 1755년까지 함무라비 왕의 공격을 받아 아시리아는 바빌론 제1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쉬메-다간 1세의 소식은 불분명하다. 바빌론이 지배한 범위와 그 정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명확하지 않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the Ancient Near East ca. 3000-323 BC Blackwell Publishing 2004
[2]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II, Part I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05-03
[3] 간행물 "Kill Them All!" Some Remarks on the Annihilation of the Ya'ilanum Tribe 2013
[4] 간행물 Albright as an Orientalist 1993
[5] 서적 King Hammurabi of Babylon https://archive.org/[...] Blackwell 2005
[6] 문서 아ッシリア王名表に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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