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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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바시 내각은 1956년 12월 23일부터 1957년 2월 25일까지 65일간 존속한 일본의 내각으로, 이시바시 단잔이 내각총리대신을 맡았다. 이시바시 내각은 1956년 12월 23일, 이시바시 단잔이 모든 각료 직책을 겸임하는 1인 내각으로 시작하여, 이후 국무대신을 임명했다. 이시바시 단잔은 취임 직후 병으로 인해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일본국 헌법 하에서 내각총리대신이 국회에서 한 번도 답변이나 연설을 하지 않은 유일한 내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시바시 내각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경제 성장과 자주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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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일본 - 제1차 기시 내각
기시 노부스케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출범한 제1차 기시 내각은 고도경제성장 기반 마련, 미일안보조약 개정 추진,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 제도 확대 등 경제 성장, 안보 외교, 사회복지 정책에 중점을 두었으나, 강압적인 정치 스타일과 미일안보조약 개정 과정에서의 독단적인 태도, 빈부격차 심화 등으로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 1957년 일본 - 제1차 기시 내각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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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명칭 | 이시바시 내각 |
내각 번호 | 55대 |
관할 | 일본 |
수상 | 이시바시 단잔 |
성립일 | 1956년 12월 23일 |
해산일 | 1957년 2월 25일 |
정부 수반 직함 | 총리 |
국가 원수 직함 | 천황 |
국가 원수 | 쇼와 |
정치 정당 | 자유민주당 |
국회 현황 | 중의원: 다수당 참의원: 소수당 |
주요 야당 |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노농당 녹풍회 |
국회 회기 | 제26회 국회 |
이전 내각 |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
다음 내각 | 제1차 기시 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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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각 구성
1956년 12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결과, 당선된 이시바시 단잔이 수반 지명을 받아 조각했다. 쇼와 천황으로부터 총리 임명과 각료 인가를 받아 이시바시 내각이 발족했다.[1] 각료 인선이 늦어져 임명 전까지 이시바시 총리가 모든 각료직을 겸임하는 '1인 내각' 형태로 운영되었다.[1]
2. 1. 국무대신
1956년 12월 23일에 임명된 이시바시 내각의 국무대신 명단은 다음과 같다.[1]직책 | 이름 | 취임일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이시바시 단잔 | 1956년 12월 23일 | 자유민주당 총재 |
법무대신 | 나카무라 우메키치 | 1956년 12월 23일 | |
외무대신 | 기시 노부스케 | 1956년 12월 23일 | |
대장대신 | 이케다 하야토 | 1956년 12월 23일 | |
문부대신 | 나다오 히로키치 | 1956년 12월 23일 | |
후생대신 | 간다 히로시 | 1956년 12월 23일 | |
농림대신 | 이데 이치타로 | 1956년 12월 23일 | |
통상산업대신 | 미즈타 미키오 | 1956년 12월 23일 | |
운수대신 | 미야자와 다네오 | 1956년 12월 23일 | |
우정대신 | 히라이 다로 | 1956년 12월 27일 | 이시바시 단잔 총리 겸임 (1956년 12월 23일 ~ 12월 27일) |
노동대신 | 마쓰우라 슈타로 | 1956년 12월 23일 | |
건설대신,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 난조 도쿠오 | 1956년 12월 23일 | |
행정관리청 장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오쿠보 도메지로 | 1956년 12월 23일 | |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가와무라 마쓰스케 | 1956년 12월 27일 | 이시바시 단잔 총리 겸임 (1956년 12월 23일 ~ 12월 27일) |
자치청 장관 | 다나카 이사지 | 1956년 12월 23일 | |
방위청 장관 | 고다키 아키라 | 1957년 2월 2일 | 이시바시 단잔 총리 겸임 (1956년 12월 23일 ~ 12월 31일), 기시 노부스케 외무대신 겸임 (1956년 12월 31일 ~ 1957년 2월 2일) |
경제기획청 장관, 과학기술청 장관 | 우다 고이치 | 1956년 12월 23일 | |
내각관방장관 | 이시다 히로히데 | 1956년 12월 23일 | |
내각법제국 장관 | 하야시 슈조 | 1956년 12월 23일 | |
내각관방부장관(정무) | 기타자와 나오키치 | 1956년 12월 23일 | |
내각관방부장관(사무) | 다나카 에이이치 | 1956년 12월 23일 |
이시바시 내각은 각료 임명 전까지 이시바시 단잔 총리가 모든 직책을 임시 대리 또는 사무 취급으로 겸임하는 '1인 내각' 형태였다. 이후 각료들이 임명되면서 내각이 정상적으로 구성되었다.
2. 1. 1. 1인 내각 (1956년 12월 23일)
이시바시 단잔일본어 내각은 1956년 12월 23일에 출범하면서, 각료가 임명되기 전까지 이시바시 단잔 총리가 모든 직책을 임시 대리 또는 사무 취급으로 겸임하였다.[1] 이는 내각 구성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특수한 상황이었다.직책 | 성명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자유민주당 총재 |
법무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외무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대장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문부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후생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농림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통상산업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운수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우정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노동대신 | 이시바시 단잔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건설대신,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 이시바시 단잔 | 건설대신 임시 대리, 위원장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행정관리청 장관 | 이시바시 단잔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이시바시 단잔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자치청 장관 | 이시바시 단잔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방위청 장관 | 이시바시 단잔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경제기획청 장관, 과학기술청 장관 | 이시바시 단잔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2. 1. 2. 국무대신 임명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직책 | 이름 | 취임일 | 퇴임일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이시바시 단잔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자유민주당 총재 |
법무대신 | 나카무라 우메키치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외무대신 | 기시 노부스케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대장대신 | 이케다 하야토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문부대신 | 나다오 히로키치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후생대신 | 간다 히로시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농림대신 | 이데 이치타로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통상산업대신 | 미즈타 미키오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운수대신 | 미야자와 다네오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우정대신 | 히라이 다로 | 1956년 12월 27일 | 1957년 2월 25일 | 이시바시 단잔 총리 겸임 (1956년 12월 23일 ~ 12월 27일) |
노동대신 | 마쓰우라 슈타로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건설대신,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 난조 도쿠오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행정관리청 장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오쿠보 도메지로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가와무라 마쓰스케 | 1956년 12월 27일 | 1957년 2월 25일 | 이시바시 단잔 총리 겸임 (1956년 12월 23일 ~ 12월 27일) |
자치청 장관 | 다나카 이사지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방위청 장관 | 고다키 아키라 | 1957년 2월 2일 | 1957년 2월 25일 | 이시바시 단잔 총리 겸임 (1956년 12월 23일 ~ 12월 31일), 기시 노부스케 외무대신 겸임 (1956년 12월 31일 ~ 1957년 2월 2일) |
경제기획청 장관, 과학기술청 장관 | 우다 고이치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내각관방장관 | 이시다 히로히데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내각법제국 장관 | 하야시 슈조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내각관방부장관(정무) | 기타자와 나오키치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
내각관방부장관(사무) | 다나카 에이이치 | 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
2. 2. 내각관방장관, 법제국 장관, 내각관방부장관
1956년 12월 23일, 이시다 히로히데가 내각관방장관에, 하야시 슈조가 내각법제국 장관에, 기타자와 나오키치가 정무 담당 내각관방부장관에, 다나카 에이이치가 사무 담당 내각관방부장관에 각각 임명되었다.[1]직책 | 이름 | 사진 | 출신 등 | 비고 |
---|---|---|---|---|
내각관방장관 | 이시다 히로히데 | ![]() | 중의원 자유민주당 | |
내각법제국 장관 | 하야시 슈조 | ![]() | 대장성 관료 | 유임 |
내각관방부장관 | 기타자와 나오키치 | 중의원 자유민주당 | 정무 담당 | |
다나카 에이이치 | 경찰 관료 | 사무 담당 |
2. 3. 정무 차관
직책 | 이름 | 비고 |
---|---|---|
법무 정무 차관 | 마쓰다이라 이사오 | 1957년 1월 30일 임명 |
외무 정무 차관 | 이노우에 세이이치 | 1957년 1월 30일 임명 |
대장 정무 차관 | 아다치 도쿠로 | 1957년 1월 30일 임명 |
문부 정무 차관 | 이나바 오사무 | 1957년 1월 30일 임명 |
후생 정무 차관 | 나카가키 구니오 | 1957년 1월 30일 임명 |
농림 정무 차관 | 야기 이치로 | 1957년 1월 30일 임명 |
통상 산업 정무 차관 | 하세가와 시로 | 1957년 1월 30일 임명 |
운수 정무 차관 | 후쿠나가 가즈오미 | 1957년 1월 30일 임명 |
우정 정무 차관 | 이토 이와오 | 1957년 1월 30일 임명 |
노동 정무 차관 | 이요쿠 요시오 | 1957년 1월 30일 임명 |
건설 정무 차관 | 오자와 규타로 | 1957년 1월 30일 임명 |
행정 관리 정무 차관 | 구스미 세이고 | 1957년 1월 30일 임명 |
홋카이도 개발 정무 차관 | 나카야마 에이이치 | 1957년 1월 30일 임명 |
자치 정무 차관 | 가토 세이조 | 1957년 1월 30일 임명 |
방위 정무 차관 | 다카하시 히토시 | 1957년 1월 30일 임명 |
경제 기획 정무 차관 | 이무라 도쿠지 | 1957년 1월 30일 임명 |
과학 기술 정무 차관 | 아키타 다이스케 | 1957년 1월 30일 임명 |
1956년 12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당선된 이시바시 단잔이 수반 지명을 받아 조각한 이시바시 내각은 쇼와 천황의 임명을 받아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내각 발족 한 달 만에 이시바시 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직무 불능 상태가 되면서, 외무 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게 되었고, 결국 이시바시 총리는 총리직을 사임하였다.[3]
3. 이시바시 내각의 특징과 한계
이시바시 내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이시바시 내각은 이시바시 총리의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2개월(65일) 만에 막을 내리는 단명 내각이 되었다. 이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제3차 가쓰라 내각, 하타 내각에 이어 역대 네 번째로 짧은 기록이다. (2021년 출범하여 40여 일 만에 막을 내린 제1차 기시다 내각으로 인해 현재는 다섯 번째로 짧은 기록이다.)
4. 평가
이시바시 내각은 재임 기간이 65일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제3차 가쓰라 내각, 하타 내각에 이어 역대 네 번째로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한 내각이었다. 이시바시 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외무 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고, 결국 이시바시 총리는 사임하였다.[3]
일본국 헌법 하에서 내각총리대신이 국회에서 한 번도 연설이나 답변을 하지 않은 유일한 내각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2]
참조
[1]
웹사이트
Ishibashi Cabinet
http://www.kantei.go[...]
[2]
문서
第26回国会での内閣総理大臣施政方針演説は、岸信介外務大臣が代行した。
[3]
문서
제26회 국회에서의 내각총리대신 시정 방침 연설은 기시 노부스케 외무대신이 대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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