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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단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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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바시 단잔은 일본의 언론인, 경제학자, 정치가로, 제55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1884년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마이니치 신문과 도요케이자이신보에서 활동하며 사회 자유주의적 시각을 발전시켰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개인주의와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소일본주의'를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장대신을 지냈으며, 1956년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어 총리가 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2개월 만에 사임했다. 퇴임 후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며, 1973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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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단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6년 공식 초상화
이름이시바시 단잔
본명스기타 세이조
출생일1884년 9월 25일
출생지도쿄
사망일1973년 4월 25일
사망지오사카
서명IshibashiT kao.png
정치 경력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1955–1973)
수상 경력
직책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56년 12월 23일 – 1957년 2월 25일
국왕히로히토
이전 수상하토야마 이치로
다음 수상기시 노부스케
당 대표 경력
직책자유민주당 총재
부총재오노 반보쿠
간사장미키 다케오
재임 기간1956년 12월 14일 – 1957년 3월 21일
이전 대표하토야마 이치로
다음 대표기시 노부스케
국무 대신 경력
직책방위청 장관
수상본인
재임 기간1956년 12월 23일 – 1957년 1월 31일
이전 장관후나다 나카
다음 장관기시 노부스케
직책우정 대신
재임 기간1956년 12월 23일 – 1956년 12월 27일
수상본인
이전 장관무라카미 이사무
다음 장관히라이 타로
직책통상산업대신
수상하토야마 이치로
재임 기간1954년 12월 10일 – 1956년 12월 23일
이전 장관아이치 기이치
다음 장관미즈타 미키오
직책대장대신
수상요시다 시게루
재임 기간1946년 5월 22일 – 1947년 5월 24일
이전 장관시부사와 게이조
다음 장관가타야마 데쓰 (대리)
의원 경력
직책중의원 의원 (시즈오카 2구)
재임 기간1952년 10월 1일 – 1967년 1월 29일
재임 기간1947년 4월 26일 – 1947년 5월 17일
기타 정보
출생명스기타 세이조
학력와세다 대학 졸업
아버지스기타 닛푸
배우자이시바시 우메
자녀장남: 이시바시 단이치, 장녀: 지바 우타코, 차남: 이시바시 가즈히코
최종 계급종2위
훈장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명예 박사와세다 대학 (1957년)
권대승정일련종 (1957년)
군 복무대일본제국 육군 소위

2. 생애

1884년 9월 25일 도쿄도에서 일련종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시바시(石橋)가 되었으며, 일련종에 입적하며 단잔(湛山)으로 개명했다.[42] 유년기는 야마나시현에서 보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 주필과 사장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사회당에서 총선거 출마를 제의했지만 거절했다. 1946년 총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대신(제1차 요시다 내각)을 역임했다. 미군 주둔 경비 분담액 삭감을 요구하다가 경질되었다. 1954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으로 취임하여 1955년 11월중화인민공화국과 ‘중일수출입조합’을 결성하여 중국과의 무역을 궤도에 올렸다.

보수합동 이후 자유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근소한 표차로 승리하여 자유민주당 총재 겸 제55대 총리가 되었으나, 1957년 2월경 재임 2개월 만에 뇌경색으로 퇴임하였다(공식 발표는 노인성 급성 폐렴). 1963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했다.

2. 1. 초기 생애

1884년 9월 25일 도쿄도에서 일련종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성인 이시바시(石橋)를 따랐으며, 일련종에 입적하며 단잔(湛山)으로 개명했다.[42] 유년기는 야마나시현에서 보냈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철학을 전공했다.[4] 졸업 후 마이니치 신문 기자로 잠시 일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도요 경제 신보(東洋経済新報)에 입사하여 편집장을 거쳐 1941년에는 사장이 되었다.

2. 2. 언론인 시절

이시바시는 마이니치 신문에서 잠시 일한 후, 도요 경제 신보(동양 경제 저널)에 입사하여 편집장, 사장을 역임했다.[5] 도요케이자이신보에서 일본의 재정 정책에 대해 글을 쓰며 사회 자유주의적 시각을 발전시켰다.[5]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 기간 동안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페미니즘적 시각을 옹호하며 여성의 "법적, 정치적, 교육적,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다.[6]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만주와 식민지를 포기하고 경제 및 문화 발전에 집중하는 소일본주의(小日本主義) 정책을 옹호했다.[5][7] 다나카 오도와 함께 자유 무역과 국제 협력을 주장했다.[6]

1924년(다이쇼 13년) 12월에 도요 경제 신보사 제5대 주간이 되었고, 이듬해 1월에는 대표이사 전무 (사장제가 되는 것은 1941년 이후)에 취임한다. 또한 같은 해부터 1936년 (쇼와 11년)까지 가마쿠라정 의회의원을 역임했다.

1931년 (쇼와 6년)에는 도요 경제 신보사를 중심으로 한 경제구락부가 창설된다.[19] 1933년 (쇼와 8년)에는 경제구락부의 회원에 의해 야마나시현 미나미쓰루군야마나카호 마을 아사히오카에 "경제구락부 야마나카호반 산장 동인회 (경제촌)"이 만들어져, 이시바시 단잔도 야마나카호반에 산장을 짓고, 하계에는 그곳에서 집필 활동을 했다.

금 해금에 즈음하여 1엔=금 2푼 (1/5냥·0.75g. 구 평가)으로의 금본위제 복귀에 반대하여, 실체 경제에 맞춰 통화 가치를 낮춘 후 복귀 (신평가 해금)를 가쓰다 사다지 등과 함께 주장했고, 구 평가로의 복귀나 재계 정리를 주장하는 이케다 세이아키나 호리에 키이치, 대장 대신으로서 금 해금을 구평가로 실시하는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논쟁했다. 행정에서는, 중앙 집권·획일주의·관료주의와의 결별을 주장했다.

중일 전쟁 발발부터 패전에 이르기까지 『도요 경제 신보』 지상에서 장기전화를 경계하는 논진을 펼쳤다. 이 잡지는 서명 기사를 쓰는 것이 어려웠던 많은 리버럴리스트 (기요자와 레쓰 등)에게도 익명으로 논설을 게재할 장을 제공했다.

2. 3. 정계 입문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사회당이 총선거 출마를 제의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1946년 총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21]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역임하며 미군 주둔 경비 분담액 삭감을 요구하다가 경질됐다.

1947년 일본 총선거에서 시즈오카현 제2선거구에서 당선되었으나, 미국 점령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추방되어 사임했다. 1951년 추방 해제 후, 하토야마 이치로와 동맹을 맺고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954년 제1차 하토야마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으로 취임하여 1955년 11월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중일수출입조합’의 결성을 지원해 중국과의 무역을 궤도에 올렸다.[22]

2. 4. 총리 재임

1956년 10월 19일에 일본과 소련이 일소 공동 선언으로 국교를 정상화했으나, 같은 해 11월 2일,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가 사임을 표명했다. 이를 받아들여 같은 해 12월 14일에 자민당 총재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시바시는 더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 등 다른 공산권과도 국교를 정상화할 것을 주장하며, 하토야마 파의 일부를 이시바시파로 이끌고 입후보했다. 이시바시 외에도 미국 추종을 주장하는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이시이 미쓰지로가 입후보했다. 처음에는 기시가 우세하여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이시이 미쓰지로와 2위·3위 연합을 맺은 결선 투표에서는 이시바시파 참모 이시다 히로에의 공헌도 있어, 기시에게 7표 차로 승리하여 총재에 당선, 12월 23일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

총재 선거에서 기시 지지파와의 앙금이 남았고, 이시바시 지지파 내부에서도 각료나 당 간부 자리를 남발하여 조각이 난항을 겪었다. 이 때문에 이시바시 본인이 일시적으로 많은 각료의 임시 대리·사무 취급을 겸임하여 내각을 발족했다(1인 내각). 친중파이기도 한 이시바시 정권의 수립으로, 일본을 반공의 요새로 만들기를 원했던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당황했다고 한다. "당내 융화를 위해 결선 투표에서 대립했던 기시를 이시바시 내각의 부총리로 대우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기 때문에, 이시바시 내각 성립의 주역이었던 이시이의 부총리 임명은 무산되고, 부총리에는 기시가 취임했다.

내각 발족 직후 이시바시는 "전 국민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의료 보장"을 연설한 하토야마의 노선을 계승하여, 같은 해 1월 8일에 국민 개보험을 목표로 하는 것을 각의 결정[23][24]하는 등 복지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더 나아가 대미 자주 외교에서는 중일 무역을 촉진하여 세계 평화의 확립 등을 기본으로 하는 "다섯 가지 맹세"를 내걸었다. 구체적으로는 경제 정책에서 이케다 하야토를 대장대신으로 발탁하여 "1000억 엔 시책, 1000억 엔 감세"를 내걸었다. 이는 당시 예산 규모로 보면 매우 적극적인 예산이었으며, 소득 감세와 함께, 시책은 도로(수송)·주택에 중점을 둔 것으로, 성장 과정의 장애 제거로 더욱 성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순환 작용을 의도한, 고도 성장기 재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예산이었다고 평가된다. 한편, 단기적으로는 과도한 경기 과열을 불러일으켜 경기 조기 침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5].

이시바시는 전국 10곳을 9일간 도는 유세 행각을 감행,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유권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청취했다. 같은 해 1월 25일, 귀경 직후 자택 욕실에서 쓰러졌다. 가벼운 뇌경색이었지만, 보도에는 "유세 중에 감기에 걸려 폐렴을 일으킨 데다, 뇌경색의 조짐도 있다"고 발표했다. 부총리급의 외상으로 내각에 들어와 있던 기시 노부스케가 즉시 총리 임시대리가 되었지만, 2개월의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이시바시는 "나의 정치적 양심에 따른다"며 퇴진했다. 1957년도 예산 심의라는 중대 안건 속에서 행정부 최고 책임자인 총리가 병 치료를 이유로 스스로 국회에 출석[26]하여 답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사임 표명에는, 야당조차 호의적이었다[27]. 기시의 대독에 의한 이시바시의 퇴진 표명을 들은 일본 사회당의 아사누마 이네지로 서기장은 이시바시의 깨끗함에 감명을 받아, "정치가는 이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시바시의 총리 재임 기간은 65일로, 히가시쿠니노미야·하타 쓰토무에 이어 역대 3번째로 짧다. 일본국 헌법 하에서, 국회에서 한 번도 연설[28]이나 답변을 하지 않은 채 퇴임한 유일한 총리가 되었다. 후임 총리에는 기시가 임명되어, 기존 내각으로서 제1차 기시 내각이 탄생했다.

2. 5. 총리 퇴임 이후

1959년 9월과 1963년에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며, 1964년에는 소련을 방문하는 등 중국과 소련의 국교 회복에 앞장섰다.[1]

1959년 (쇼와 34년) 9월, 기시에 의해 "동맹국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이며, 일본 정부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며 견제를 받으면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전 총리이자 중의원 의원이지만 정부의 일원은 아니었던 이시바시는, 방문 후 며칠 동안은 좀처럼 수뇌와 만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교섭 끝에 같은 달 17일 저우언라이총리와의 회담이 성사되었다. 이시바시는 냉전 구조를 타파하고 일본이 그 가교가 되는 '''중일미소 평화 동맹'''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아직 유엔의 대표권을 갖지 못한 공산당 정권에게 국제 사회로의 발판이 되는 것으로 매력적이었고, 저우는 이 제안에 동의했다. 저우는 타이완 (중화민국)에 무력 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이시바시에게 약속했다. "일본과 중국은 양 국민이 손을 잡고 극동과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시바시·저우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1960년 (쇼와 35년), 중국 대륙과의 무역이 재개되었다. 이 성명이 후에 중일 공동 성명으로 이어진 것이라고도 한다.[30]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했다.[1]

1966년 2월, 팔다리에 마비를 느껴 세인트 루카 병원에 입원, 주치의는 히노하라 시게아키가 맡았다. 같은 해 11월 자민당 간부 오쿠보 류지로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외출 기록은 없다. 1968년 3월에는 릿쇼 대학 학장을 퇴임하고, 일체의 사회적 활동에서 은퇴했다. 1970년 2월에도 다시 폐렴으로 세인트 루카 병원에 입원했고, 그 후에는 가마쿠라의 딸 집이나 신주쿠구 나카오치아이의 자택에서 요양하게 된다.

1967년 10월 20일에 요시다 시게루가 사망하여, 당시 생존 중인 내각 총리대신 경험자 중 최고령이 되었다.

1971년 7월에는 미국 대통령 특사 헨리 키신저가 방중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갖고, 미중 대화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듬해 1972년 7월에는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이 성립하여 중일 국교 정상화의 기운이 높아졌지만, 다나카는 방중 3일 전인 9월 22일에 나카오치아이의 이시바시 자택을 방문하여 이시바시로부터 저우언라이 앞으로의 서한을 받았다. 다나카 방중 결과, 중일 국교 정상화가 성립되자, 이시바시는 이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 후에는 병세가 악화되어, 1973년 4월 24일 오전 5시에 뇌경색으로[30] 도쿄도내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0세 (만). 사망 당시 내각 총리대신 경험자 중 최고령이었다 (이시바시 사망과 함께 최고령은 카타야마 테츠가 된다. 최연장자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상태로 유지).

3. 사상과 정책

이시바시 단잔은 전쟁 전부터 일관되게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가공 무역 입국론을 주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중·일·미·소 평화 동맹'을 주장하며 일본 정계에서 활약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정치관을 가진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 기간 동안 가장 일관된 개인주의 옹호자 중 한 명이었다.[6]

페미니즘적 시각을 옹호하며, 여성들이 경쟁적인 현대 사회에서 더 잘 번창할 수 있도록 포괄적인 "법적, 정치적, 교육적,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다.[6]

그의 사상은 휴머니즘과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와세다 대학 재학 중 다나카 오도에게서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받았다. "진리란 항상 인류의 생활 변화와 함께 변화하는, 결코 천고불변한 것이 아니다"라는 어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절대적인 주의에 빠짐으로써 발생하는 파멸에 대해 경고했다.

전쟁 전, 전시에는 제국주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비판하고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며 시민 중심의 철저한 민주주의와 리버럴리즘을 관철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보기 드문 인물 중 한 명으로, 만주를 포함한 일본 식민지를 포기하고 일본 자체의 경제 및 문화 발전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소일본주의"(小日本主義, ''shō-Nihon-shugi'')를 주장했다.[5][7]

릿쇼 대학 총장을 역임(1952년~1968년) 하기도 했다.[11]

다음은 이시바시 단잔의 주요 어록이다.

3. 1. 소일본주의

이시바시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만주와 일본 식민지를 포기하고 일본 자체의 경제 및 문화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小日本主義|소일본주의일본어 정책을 옹호했다.[5][7] 그는 다나카 오도와 함께 군국주의와 식민주의 대신 자유 무역과 국제 협력을 주장했다.[6]

전쟁 전에는 『주간 동양경제(東洋経済新報)』 등에서 제국주의가 일본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국제 협력을 바탕으로 한 무역과 과학을 통한 경제 안정을 제시했다.

전후에는 "일중미소 평화 동맹"을 주장하며 정치계에서 활약했다. 그는 보수합동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 총재가 되었지만, 재임 2개월 만에 병으로 퇴진했다. 퇴진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힘썼다.

경제학자 다나카 히데오미는 이시바시 단잔의 소국주의가 일본의 잠재 성장을 지원하는 리플레 정책을 기반으로 했다고 지적했다.[32] 다나카는 "'리플레의 경제학'은 소국주의적이며, 자국의 정책으로 국내 경제·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타국을 간섭하지 않으면서 주변 국가와 우호 관계를 맺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32]

3. 2.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시바시는 자유주의적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 기간 동안 가장 일관된 개인주의 옹호자 중 한 명이었다.[6] 휴머니즘,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재학 중 다나카 오도의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진리란 항상 인류의 생활 변화와 함께 변화하는, 결코 천고불변한 것이 아니다"라는 어록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절대적인 주의에 빠짐으로써 발생하는 파멸에 경종을 울렸다. 전전, 전시, 제국주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비판하고, 언론의 자유를 표방하며 시민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민주주의와 리버럴리즘을 관철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3. 3. 평화주의와 국제 협력

이시바시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보기 드문 인물 중 한 명이었다.[6] 그는 만주와 일본 식민지를 포기하고 일본 자체의 경제 및 문화 발전에 노력을 집중하는 것을 옹호하는 "소일본주의"(小日本主義, ''shō-Nihon-shugi'') 정책을 옹호했다.[5][7] 또한, 다나카 오도와 손을 잡고 군국주의와 식민주의보다 자유 무역과 국제 협력을 주장했다.[6]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갖고, 냉전 구조를 타파하고 일본이 그 가교가 되는 '''중일미소 평화 동맹'''을 주장했다.[30] 이 주장은 아직 유엔의 대표권을 갖지 못한 공산당 정권에게 국제 사회로의 발판이 되는 것으로 매력적이었고, 저우언라이는 이 제안에 동의했다. 저우언라이는 타이완 (중화민국)에 무력 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이시바시에게 약속했다. "일본과 중국은 양 국민이 손을 잡고 극동과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시바시·저우언라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1960년 (쇼와 35년), 중국 대륙과의 무역이 재개되었다. 이 성명이 후에 중일 공동 성명으로 이어진 것이라고도 한다.[30] 각국의 군비가 아닌 국제 경찰군에 의해 평화를 지키는 '세계 연방' 실현을 위한 노력을 설파했다.

3. 4. 헌법과 군대

1946년 3월, 이시바시 단잔은 "헌법 개정 초안을 평하다"에서 헌법 9조에 해당하는 초안 제2장의 전쟁 포기를 "이제 일본은 패전국도, 4등, 5등도 아닌, 영예롭게 빛나는 세계 평화의 1등 국가"라고 평가했다.[13]

그러나 1950년 무렵부터 이시바시는 자위군 설치를 주장하고 헌법 개정 및 재군비론자로서 활동했다.[33] 1953년 총선에서는 하토야마 자유당의 정책 위원장으로서 "헌법을 국정에 적합하도록 개정", "자위군을 조직한다" 등을 명기했다.[13]

1957년, 총리 취임 후에는 "국련에 의무를 진다는 것은, 군비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33]

4. 유산과 평가

이시바시 단잔은 전후 일본의 경제 발전과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소일본주의는 일본이 군사 대국이 아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굳게 신봉하였으며, 이는 그의 언론 활동과 정치 활동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그의 사상은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12]

이시바시가 총리에서 물러났을 때, 많은 국민들이 그의 결정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마사키 히로시는 "(사적인 감정으로) 공무(총리의 지위)를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1위였던 기시 노부스케에 대항하기 위해, 2위였던 이시바시는 이시이 미쓰지로와 연합하여 1위로 당선되어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인해 이시바시는 내각에 참여시키지 않았던 이시이를 제쳐두고, 외무대신으로 내각에 참여했던 기시 노부스케를 총리 임시대리로 임명하고 총재직을 물려주었다. 마사키는 이시바시가 자신의 부주의로 병을 얻어 국회에서 한 번도 연설이나 답변을 하지 못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것은 무책임하며, 총재 선거에서 기시 총리 저지를 내세웠던 이념마저 헛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도요케이자이 신보사에서 이시바시의 『전집』을 제작할 때, 편집자는 전집의 월보 집필을 마사키에게 의뢰했다. 이시바시의 부하였던 편집자는 이시바시에 대한 칭찬 일색의 기사만 싣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이시바시의 신념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사키가 쓴 이시바시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게재되었다.

와세다 대학은 2001년에 이시바시 탄잔을 기념하는 와세다 저널리즘상을 제정했다.[12]

야마나시현 고후시에는 "야마나시 평화 뮤지엄·이시바시 탄잔 기념관"이 있다.

릿쇼 대학에서는 1952년 12월 1일부터 1968년 3월 31일까지 총장을 역임했다.

스즈키 유키오의 저서 『결족 결혼으로 굳혀지는 일본의 지배자 집단』(1965년)에 따르면, 이시바시 단잔은 아들 단잔이 자산가 아카보시 키스케의 딸과 결혼하면서, 그의 일족들과 어느 정도 혈연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시바시 정권과 혈연관계는 관련이 없으며, 그의 경제 사상과 학식, 능력을 인정받아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5. 연보


  • 1884년(메이지 17년)
  • * 9월 25일 - 도쿄시 시바구 다카나와(현재의 미나토구)에서 니치렌종 승려 스기타 탄세이의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세이조(省三).[1]
  • 1885년 (메이지 18년)
  • * 3월 - 아버지가 야마나시현 미나미코마군 마스호무라(현재의 후지카와정)에 있는 쇼후쿠지의 주지로 전임함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고후시 도몬으로 이주.
  • 1894년 (메이지 27년)
  • * 9월 - 아버지가 도요타무라(현재의 시즈오카시 스루가구) 혼가쿠지 주지 취임을 위해 야마나시현 나카코마군 가게나카조무라(와카쿠사촌 → 와카쿠사정을 거쳐 현재의 미나미알프스시) 초엔지 주지 모치즈키 닛켄에게 맡겨짐.
  • 1895년 (메이지 28년)
  • * 4월 - 야마나시현립 심상중학교에 입학.
  • 1902년 (메이지 35년)
  • * 3월 - '''탄잔'''으로 개명. 야마나시현립 제1중학교 졸업.
  • 1903년 (메이지 36년)
  • * 9월 -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
  • 1904년 (메이지 37년)
  • * 9월 - 와세다대학 대학부 문학과 철학과로 진급(당시 학교장은 하토야마 가즈오).
  • 1907년 (메이지 40년)
  • * 7월 - 와세다 대학 문학부 수석 졸업, 철학 전공.[4] 특대생으로 종교연구과 진학.
  • 1908년 (메이지 41년)
  • * 7월 - 종교연구과 수료, 시마무라 호게츠 소개로 마이니치 신문사(『도쿄 마이니치 신문』 발행) 입사.
  • 1909년 (메이지 42년)
  • * 8월 - 마이니치 신문사 퇴사.
  • * 12월 - 도쿄 아자부 보병 제3연대 입영.
  • 1910년 (메이지 43년)
  • * 11월 - 군조로 승진, 제대.
  • 1911년 (메이지 44년)
  • * 1월 - 도요 경제 신보사 입사.[5]
  • * 9월 - 견습 사관으로 3개월 소집.
  • 1912년 (다이쇼 원년)
  • * 11월 - 후쿠시마현 다테군 호바라마치(현재의 다테시) 출신 이와이 우메와 결혼.
  • 1913년 (다이쇼 2년)
  • * - 육군 보병 소위가 됨.
  • 1916년 (다이쇼 5년)
  • * 11월 - 도요 경제 신보사 합명사원 선출.
  • 1917년 (다이쇼 6년)
  • * 6월 - 와세다 소동에서 아마노 타메유키 파 리더로 활약(~9월).
  • 1924년 (다이쇼 13년)
  • * 9월 - 가마쿠라정 정의원 당선(- 1928년 8월).
  • * 12월 - 도요 경제 신보사 제5대 주간 취임.
  • 1925년 (다이쇼 14년)
  • * 1월 - 도요 경제 신보사 대표이사・전무이사 취임.
  • 1935년 (쇼와 10년)
  • * 9월 - 내각조사국 위원 임명.
  • 1940년 (쇼와 15년)
  • * 11월 - 도요 경제연구소 설립, 소장 및 이사 취임.
  • 1941년 (쇼와 16년)
  • * 2월 - 도요 경제 신보사 사장제 신설, 대표이사 사장 취임.[5]
  • 1945년 (쇼와 20년)
  • * 3월 - 도쿄 대공습으로 시바 자택 소실.
  • 1946년 (쇼와 21년)
  • * 3월 - 야마카와 히토시 제창 민주인민연맹 간사회 참가.
  • * 4월 - 전후 첫 중의원 의원 총선거 입후보, 낙선.
  • * 5월 - 제1차 요시다 내각 대장대신 취임.
  • 1947년 (쇼와 22년)
  • * 4월 - 시즈오카현 제2구 총선거 입후보, 첫 당선.
  • * 5월 - GHQ에 의해 공직 추방.
  • 1951년 (쇼와 26년)
  • * 6월 - 공직 추방 해제, 자유당 복당.
  • 1952년 (쇼와 27년)
  • * 12월 - 릿쇼대학 학장 취임.
  • 1953년 (쇼와 28년)
  • * 3월 - 정책심의회 회장 취임.
  • 1954년 (쇼와 29년)
  • * 11월 -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자유당 제명 처분.
  • * 12월 - 제1차 하토야마 내각 통상산업대신 취임.
  • 1956년 (쇼와 31년)
  • * 12월 - 자유민주당 제2대 총재 당선, 수반 지명을 받아 내각총리대신 임명.[31]
  • 1957년 (쇼와 32년)
  • * 1월 - 닛켄종 권대승정 승계 수여. 같은 달 뇌경색 발병(노인성 급성 폐렴으로 공식 발표), 세이로카 국제병원 입원.
  • * 2월 - 자유민주당 총재, 총리대신 사임.
  • * 10월 - 와세다대학 명예 박사 학위 수여.
  • 1959년 (쇼와 34년)
  • * 9월 -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저우언라이 회담.
  • 1963년 (쇼와 38년)
  • * 9월 - 일본 공업 박람회 총재로 중국 방문.
  • * 11월 - 총선거 낙선, 정계 은퇴.
  • 1964년 (쇼와 39년)
  • * 9월 - 소비에트 연방 방문.
  • 1968년 (쇼와 43년)
  • * 3월 - 릿쇼대학 학장 퇴임.
  • 1973년 (쇼와 48년)
  • * 4월 25일 - 88세로 사망.
  • * 4월 28일 - 이케가미 혼몬지 밀장.
  • * 5월 12일 - 쓰키지 혼간지 자민당장. 계명은 겸덕원전자광탄산일성대거사. 유골은 분골, 일부는 니포리 젠쇼지, 미노부산 구온지에 묻힘.
  • 1964년 (쇼와 39년) 4월 29일: 훈1등 욱일대수장[35]
  • 1973년 (쇼와 48년) 4월 25일: 서위(종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추증[36]

참조

[1] 웹사이트 Sugita Nippu https://m.wikidata.o[...]
[2] 웹사이트 石橋湛山は得度しているが、僧籍はあるか.あるとしたら日蓮宗の僧階は何か. https://crd.ndl.go.j[...] National Diet Library 2019-11-02
[3] 학술지 The Leprosy Relief Work of Tsunawaki Ryūmyō https://www.jstor.or[...] 2004
[4] 웹사이트 Portraits of Modern Japanese Historical Figures — Ishibashi Tanzan https://www.ndl.go.j[...] 2013
[5] 웹사이트 Ishibashi Tanzan's World Economic Theory: The War Resistance of an Economist in the 1930's http://www.princeton[...] 2006
[6] 학술지 Individualism in Taishō Japan https://www.jstor.or[...] 1984-08
[7] 웹사이트 The wisdom of Tanzan Ishibashi https://www.japantim[...] 2017-10-20
[8] 학술지 Fear of World War III: Social Politics of Japan's Rearmament and Peace Movements, 1950—3 https://www.jstor.or[...] 2012-07
[9] 웹사이트 Period of President Ishibashi's Leadership https://www.jimin.jp[...]
[10] 웹사이트 Chairman Mao Meets with Former Japanese PM http://www.china.org[...] China Internet Information Center 2021-10-22
[11] 뉴스 Tanzan Ishibashi Dies at 88; Was Former Premier of Japan https://www.nytimes.[...] 1973-04-25
[12] 웹사이트 In Pursuit of Excellent Journalism -The Course of the Waseda Journalism Award https://www.asiarese[...]
[13] 문서 1956年4月自由民主党総裁選挙
[14] 문서 私の履歴書
[15]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三省堂 2009-01
[16] 문서 私の履歴書
[17] 문서 湛山回想
[18] 문서 陸軍後備役将校同相当官服役停年名簿. 大正15年4月1日調
[19] 웹사이트 理事長挨拶 https://www.keizaicl[...] 社団法人 経済倶楽部
[20] 서적 石橋湛山評論選集 東洋経済新報社 1990-06
[21] 웹사이트 5-5 総選挙 史料にみる日本の近代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0-08-14
[22] 웹사이트 「過度経済力集中排除法等を廃止する法律(昭和30年7月25日法律第87号)」審議経過 https://hourei.ndl.g[...] 国立国会図書館
[23] PDF 昭和32年 - 日本医師会 https://www.med.or.j[...]
[24] 뉴스 国民皆保険・皆年金(12)国民皆保険の達成 https://yomidr.yomiu[...] 読売新聞 2013-08-09
[25] 서적 高度成長の時代 日本評論社 1981-04
[26] 문서 日本国憲法第63条
[27] 문서 施政方針演説
[28] 문서 施政方針演説
[29] 서적 総理大臣 全62人の評価と功績 アントレックス 2020-09-08
[30]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吉川弘文館 2010-04-28
[31] 서적 21世紀 地政学入門 文藝春秋 2016-02
[32] 서적 経済政策を歴史に学ぶ ソフトバンククリエイティブ 2006-08
[33] 잡지 石橋湛山大いに語る 1957-01-05
[34] 문서 社論 東洋経済 1951-03-16
[35] 뉴스 復活第1回生存者叙勲201人発表 1964-04-28
[36] 뉴스 故石橋氏に桐花大綬章 読売新聞 1974-04-26
[37] 서적 人事興信録 人事興信所
[38] 서적 「家系図」と「お屋敷」で読み解く歴代総理大臣 実業之日本社 2017-07
[39] 서적 豪閥 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立風書房 2001-07
[40] 웹사이트 https://www.waseda.j[...]
[41] 웹사이트 https://www.ifsa.jp/[...]
[42] 웹인용 石橋湛山は得度しているが、僧籍はあるか。あるとしたら日蓮宗の僧階は何か。 https://crd.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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