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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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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항구는 한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기 관직에 진출하여 일본공사관 참서관, 비서감승 등을 역임했다. 한일 병합 이후에는 이왕직 사무관, 의식과장, 차관, 장관을 차례로 지내며 일제에 협력했고,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역사 왜곡에 가담했다. 1935년에는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 아버지 이완용과 함께 수록되었으며,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그의 아들 이병길은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습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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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항구
이완용 가족 사진
이완용 가족 사진. 뒷줄 가운데 사람이 이항구이다.
별칭이항구
출생일1881년 8월 21일
사망일1945년 3월 6일 (향년 63세)
작위 정보
작위조선귀족 남작
후임자이병주
기타

2. 생애

한성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1899년 4월 14일 관직에 올라 사직참봉(任社稷參奉) 판임관 팔등(判任官八等)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의원면직하였다. 1905년 6월 15일 일본공사관 3등 참서관이 되었다가 1906년 1월 19일 6품으로 승진, 안릉비각의 영건 표석을 세울 때 참여하였고, 1월 23일 정3품으로 승진했다. 9월 6일 비서감승(祕書監丞) 주임관3등 6급(奏任三等六級)에 임명되었으나 곧 의원면직하였다.

1907년 3월 20일 봉상사부제조(奉常司副提調) 주임관 3등(奏任三等) 4월 20일 종2품으로 승진, 태조고황제수식비를 고칠 때 별단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7월 23일 다시 비서감승이 되었다가 9월 16일 겸임 장례원 장예(兼任掌禮院掌禮)에 임명되고, 그해 가의대부로 승진했다. 1913년 한국 최초로 인명 상해 교통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1] 1911년 이왕직 사무관이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에도 1918년 이왕직 의식과장 등을 지냈고[2], 1932년 이왕직 차관으로 승격되었다가 장관까지 역임했다. 《고종실록》을 편찬할 때는 일본인 편찬위원장 밑에서 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아버지 이완용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3][4] 1940년 3월 10일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아버지 이완용은 현금 부자로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익을 얻으며 부를 축적했으며, 아들 이항구도 조선에서 현금으로는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5] 젊었을 때부터 놀기 좋아하고 술 잘 먹는 호방한 성격이었다는 인물평이 남아 있다.[6] 1932년 7월 1일 이왕직 차관을 역임했으며 그의 작위는 차남 이병주가 습작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선정되었다. 세 명단에는 아버지 이완용과 일찍 사망한 형 이승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이병길이 포함되어 있다.

2. 1. 출생과 초기 관직 생활

이항구는 한성부에서 태어나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1] 1899년 4월 14일 사직참봉(任社稷參奉) 판임관 팔등(判任官八等)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의원면직하였다.[1] 1905년 6월 15일 일본공사관 3등 참서관으로 다시 관직에 진출하였다.[1] 1906년 1월 19일 6품으로 승진, 안릉비각의 영건 표석을 세울 때 참여하였고, 1월 23일 정3품으로 승진했다.[1] 9월 6일 비서감승(祕書監丞) 주임관3등 6급(奏任三等六級)에 임명되었으나 곧 의원면직하였다.[1]

1907년 3월 20일 봉상사부제조(奉常司副提調) 주임관 3등(奏任三等) 4월 20일 종2품으로 승진, 태조고황제수식비를 고칠 때 별단으로 참여하였다.[1] 그해 7월 23일 다시 비서감승이 되었다가 9월 16일 겸임 장례원 장예(兼任掌禮院掌禮)에 임명되고, 그해 가의대부로 승진했다.[1]

2. 2. 일제 강점기 활동과 친일 행적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항구는 이왕직 사무관(1911년)을 시작으로, 의식과장(1918년)[2], 차관(1932년)을 거쳐 장관(1940년)까지 역임하며 일제에 협력했다.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일본인 편찬위원장 밑에서 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역사 왜곡에 가담했다.[3][4]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아버지 이완용과 함께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3][4] 아버지 이완용은 현금 부자로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익을 얻으며 부를 축적했으며, 아들 이항구도 조선에서 현금으로는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5]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선정되었다. 세 명단에는 아버지 이완용과,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이병길이 포함되어 있다.

2. 3. 재산과 성격

2. 4. 사망 이후 평가

이항구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1][2][3][4][5][6] 세 명단에는 아버지 이완용과 이승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이병길이 포함되어 있다.

3. 가족 관계

아버지: 이완용

어머니: 조씨


  • 형: 이승구(李升九)
  • 형수: 임걸귀
  • 부인: 안동 김씨 김진구(金鎭九, 金文圭의 딸, ? - 1933년)
  • * 장남: 이병길(李丙吉, 형 이승구의 양자가 됨, 일본 궁내성 식부직(宮內省 式部職)을 역임)
  • * 며느리: 이병전(李丙田,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인영(李仁榮)의 장녀)
  • * 차남: 이병주(李丙周, 東京 學習院高等科 졸업, 종5위(從5位)를 수여받음)
  • * 3남: 이병철(李丙喆, 東京 學習院中等科 졸업)
  • * 장녀: 이병오(李丙吾, 東京女子實踐學校)

3. 1. 아버지와 형

이항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항구와 함께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다. 형 이승구는 일찍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이병길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습작하였다.

3. 2. 부인과 자녀들

이항구는 부인 안동 김씨 김진구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김진구는 김문규의 딸로, 1933년에 사망했다. 차남 이병주는 이항구의 작위를 습작하였고, 장남 이병길은 이승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 외에도 3남 이병철, 장녀 이병오 등의 자녀를 두었다.

4. 논란 및 비판

4. 1. 1913년 교통사고 논란

4. 2.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참조

[1] 뉴스 사고 이야기 - 국내 첫 인명피해 http://www.dongailbo[...] 동아일보 2008-08-25
[2]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3]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8-03-06
[4]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8-03-06
[5] 뉴스 "매국노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8-07-13
[6] 간행물 新李王職長官 李恒九 人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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