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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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매국노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그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유일한 인물이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나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인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성장했다. 육영공원에서 신학, 영어를 배우고 미국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 창립 멤버로 개혁을 지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고,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하여 일본의 한국 병합에 기여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지만, 192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훼손되었으며, 친일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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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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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완용 |
한글 | 이완용 |
한자 | 李完用 |
로마자 표기 | I Wanyong |
출생일 | 1858년 7월 17일 |
출생지 | 광주, 경기도, 조선 |
사망일 | 1926년 2월 12일 |
사망지 | 경성, 일제강점기 조선 |
본관 | 우봉 이씨 |
자 | 경덕 |
호 | 일당 |
관직 | |
직위 | 내각총리대신 |
재임 시작 | 1910년 8월 11일 |
재임 종료 | 1910년 8월 29일 |
전임자 | 박제순 |
후임자 | 직위 폐지 |
군주 | 순종 |
작위 정보 | |
작위 | 후작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호석(생부), 이호준(양부) |
어머니 | 영산 신씨(친모), 여흥 민씨(양모) |
배우자 | 양주 조씨 부인 |
자녀 | 이승구 이항구 |
형제 | 이윤용(이복 서형) 이면용(친형) |
친인척 | 이병길(손자) 이병희(손자) 이병주(손자) 이병각(손자) 이병윤(손녀) 이병철(손자) 이명구(조카) 조성하(자형) 이봉구(족질) 이병도(족척) |
기타 정보 | |
종교 | 유교(성리학) |
서훈 | 대훈위 금척대수장 수훈 대훈위 이화대수장 수훈 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 |
2. 출생과 가계 배경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태어났다.[29][30][31] 그의 부친은 이석준(본명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는 신씨(辛氏)였다. 친형제로는 15살 위의 형 이면용(李冕用)과 누이 3명이 있었다.[30][32]
1858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박현리(현 성남시 분당구)의 몰락한 양반 가문인 우봉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9] 어린 시절,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인척이었던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되어[2]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 양아버지의 지원 아래 신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며 근대 교육을 받았다.[2] 1882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아래 문단 참조), 1887년부터는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국제 경험을 쌓았다(아래 문단 참조).
그의 가문인 우봉 이씨는 본래 명문가였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어 이완용 대에는 몰락한 양반 상태였다. 먼 직계 조상들은 고관을 지냈는데[31], 16대조 이교는 판서, 15대조 이방년은 밀직부사, 14대조 이순은 감사를 역임했으며 성종 때의 청백리로 이름났다. 11대조 이세명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고, 10대조 이한(李僴)은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그러나 9대조 이의원과 8대조 이우가 명예직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그친 이후로는 문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완용은 10살 때인 1867년에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다. 양아버지 이호준은 정실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서자와 딸만 두었기에 후사를 잇기 위해 입양을 결정했다. 이호준은 당시 이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한성부판윤 등을 지낸 고위 관료이자 흥선대원군의 친구였으며, 그의 사위 조성하 역시 대원군의 측근이었다. 또한 서자인 이윤용을 대원군의 서녀(庶女)와 혼인시켜 왕실과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호준의 집안은 대대로 노론 가문으로, 인조반정 이후 조선 정계와 유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6대조 이만성(이조판서 역임)은 우의정 이숙의 차남이자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만성은 숙부 이영(李翎)에게 입양되었는데, 이영 역시 예학의 대가 김집의 문인이었고, 이영의 친조카는 당대 노론 영수 이재였다. 특이하게도 이호준의 가계는 약 350년 전 이승녕(李承寧)의 손자 때부터 후사 문제로 입양을 거듭하여 이완용 이전까지 8번이나 양자를 들였으며, 이호준 자신도 양자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이완용은 총명하여 일찍 문리를 깨쳐 집안의 주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가난한 집안의 늦둥이 막내였기에 생부모로서도 유력 가문으로의 입양 결정이 비교적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아버지 이호준은 생부 이석준과 족보상 32촌으로 매우 먼 친척이었는데, 입양을 허락한 대가로 이석준에게 선공감(繕工監) 감역관(監役官, 정9품)이라는 미관말직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이석준은 이미 나이가 많아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했다.
이완용이 입양되던 1867년은 병인양요 직후로 외세의 위협 속에 민심이 불안정한 시기였다. 삼정의 문란이 여전했고, 안동 김씨 세도 가문과 흥선대원군 사이의 권력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 세력도 점차 부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한 정국 속에서 대원군의 측근이었던 이호준(당시 우승지)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더 이상 적통 후계자 문제를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3. 청년기
3. 1.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청소년기의 이완용은 양아버지이자 당대 정치 거물인 이호준의 후계자로 주목받으며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 비교되곤 했다. 양어머니 여흥 민씨와 의붓 형제들의 눈치를 보며 신중하게 행동하는 편이었고, 평소 목소리가 작고 숫기가 없어 이호준으로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31]
그는 친아버지 이석준에게 소학을 배웠고, 입양 후에는 서울의 노론계 서당에서 학문을 이어갔다. 이후 본격적인 과거 준비를 위해 이호준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전의군의 선비 정익호에게 대학, 논어 등 4서를 배웠다. 1870년 13세의 나이에 한 살 연상인 홍문관 부수찬 조병익(趙秉翼)의 딸 양주 조씨와 혼인했으며,[31] 16세 무렵에는 명필 이용희에게 서예를 익혔다.[31] 이 시기 이호준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스승들과 함께 전주까지 문안을 가기도 했다.[31] 21세 때는 평안북도 태천군의 선비 박세익에게 시경, 서경, 주역 등 3경을 수년간 배웠다.[31] 여전히 말수가 적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목표를 세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려 했으며 꼼꼼한 성격 덕분에 학업 성취도가 빨랐다고 전해진다. 이 기간 동안 친아버지 이석준과 양어머니 여흥 민씨가 세상을 떠나 몇 년간 시묘살이를 하기도 했다.[31]
1882년, 25세의 나이로 증광문과 별시에 병과(丙科) 18위(전체 28위)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증광시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특별 과거 시험이었는데, 당시의 경사는 청나라의 도움으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충주로 피난 갔던 명성황후가 무사히 환궁한 것과, 반대로 흥선대원군이 톈진으로 압송되면서 고종 부부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된 일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과거 시험에서 갑과(甲科)나 을과(乙科)가 아닌 병과(丙科) 하위권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정7품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33] 이는 양아버지 이호준이 이미 흥선대원군과 관계를 정리하고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정권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34] 이후 이완용은 이호준과 함께 수구파로 활동하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기 전까지 청나라의 양무 운동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다.
관직 초기에는 젊은 엘리트 관료의 필수 코스로 여겨지던 규장각 대교(待敎, 정7품)를 겸직했고, 이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정6품), 의정부 검상(檢詳, 정5품) 등 주요 관직을 차례로 거쳤다. 이후 외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로 임명되었는데,[35] 이는 이완용 부자가 과거 주군이었던 흥선대원군과 완전히 결별하고 민씨 정권과 밀착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사였다. 해방영은 민영환이 설치를 주도했는데, 그의 아버지 민겸호는 임오군란 당시 별기군 창설 문제 등으로 흥선대원군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또한 민영환을 비롯한 수구파 내각은 개화파가 설치했던 병조 산하의 조련국을 폐지하고 그 대신 해방영을 설치했다.
3. 2. 미국 외교관 생활
1887년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요코하마, 하와이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대한제국주미공사관 설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88년 초, 박정양이 청나라와의 약속인 영약삼단(另約三端)[38]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책성 소환을 당할 때, 이완용도 병을 이유로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이들은 미국이 한반도 지배에 관심이 없으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국을 활용해야 한다는 조정 내 여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 문명의 중요한 성과인 노예제 폐지를 포함한 신분 차별 철폐, 헌법, 참정권 보장 등 입헌 민주주의나 의회 정치 도입에 대해서는 어떠한 노력이나 의견 표명도 하지 않았다. 이는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신분제 철폐, 양반 조세, 입헌군주정 도입 등을 주장하다 망명객 신세로 전락하여 고초를 겪는 것을 보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36] 당시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이완용은 양아버지 이호준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생존, 즉 보신(保身)에 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근대 국가 건설이나 국제 사회에서의 독립 확보 방안에 대한 깊은 고민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8년 음력 12월, 다시 주차미국참찬관에 임명되어 이하영 부부, 그리고 자신의 부인 양주 조씨와 함께 워싱턴 D.C.로 부임했다. 이듬해 12월에는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했으며, 총 2년간 미국에서 근무했다.[39] 이 기간 동안 그는 주미공사관 이전을 지휘하고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회담하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에 머물던 윤치호는 현지 신문 '워싱턴 이브닝 스타' 등에 실린 이완용과 공사관 관련 소식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다. 한편, 이 시기는 이완용의 문과 동기이자 갑신정변 실패 후 역적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인종 차별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던 때이기도 했다.
4. 1890년대 활동
1887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후 귀국하여 국제 정세에 밝은 관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교육 개혁 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정국이 혼란해지자, 친러파, 친미파 인사들과 함께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실패하고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범진 등과 함께 성공시키면서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리고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정계의 실력자로 다시 부상했다.
1897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당시 영향력이 강했던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버와의 정책적 갈등으로 인해 결국 지방직으로 좌천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4. 1. 귀국 및 교육 개혁
1890년 음력 10월 미국에서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 형조참판,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전환국총판, 우부승지, 내무참의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대한제국 내각에서 미국과의 외교 협상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특히 성균관 대사성(정3품)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근대적인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방식의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업 계획을 이끌었다. 또한,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교육 과정을 개편하여 지리, 산술, 과학과 같은 서양 학문 과목을 새로 만들고, 정기적인 시험 제도를 개선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교육 근대화 시도로 평가받는다.[31]
4. 2.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1893년 친어머니 신씨(辛氏)의 상을 이유로 사직한 이완용은 1년여간 모친상을 지켰다. 이듬해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청나라의 태평천국운동을 연상한 고종과 조정 대신들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곡창 지대인 삼남 지방이 큰 혼란에 빠지면서, 당시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을 단순한 대규모 농민 봉기, 나아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한 반역으로 간주했다[40]. 이는 후대의 근대사적 평가와는 거리가 먼 인식이었다. 용인에서 모친상을 지키던 이완용 역시 위기를 감지했으나, 양부 이호준의 결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894년 6월, 고부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수구파 중심의 조선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청일 양국 군대의 동시 철수를 규정한 톈진 조약이 파기되면서 일본 역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41]. 조정 대신들이 외세를 끌어들여 사태를 해결하려 한 결과, 조선의 국제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처음에는 경쟁적으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던 청일 양국 군대는 곧 직접 충돌하였고, 몇 차례의 육해전 끝에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청나라의 패배는 양무 운동으로 대표되는 근대화 시도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12년 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결탁해 온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다. 수구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완용과 이호준 부자 역시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과거 흥선대원군을 버렸던 것처럼 또다시 정치적 노선을 바꾸어 살아남을 것인지, 아니면 정권과 함께 몰락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4. 3.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한 이후, 같은 해 11월 28일 이완용은 친러파, 친미파 세력인 이범진, 이학균, 이윤용 등과 함께 대원군파 정권 타도를 위한 쿠데타를 모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완용은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이듬해인 1896년(고종 33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을 이범진 등과 함께 주도하여 성공시켰다.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정권이 무너지자, 이완용은 외부대신(외무대신)에 취임하며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1897년에는 학부대신(문부대신)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버(Karl Ivanovich Weber)와 정책적으로 대립하면서 결국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4. 4. 러시아와의 갈등과 좌절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성공시키고,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린 뒤 외부대신에 취임했다.이듬해인 1897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당시 러시아 공사였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버와 정책적으로 대립하면서 결국 지방 관리직으로 좌천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 있어 중요한 좌절 중 하나였다. 1901년 다시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초기에는 친미파 노선을 걸으며 친일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는 것을 계기로 점차 친일 노선으로 기울게 되었다.
5. 을사늑약 전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이완용은 초기에는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895년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위세가 꺾이고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그는 정동파에 합류하여 친러, 친미 노선으로 전환했다. 이후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하여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리고 외부대신에 오르는 등 한때 친러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01년 중앙 정계에 복귀한 이완용은 잠시 친미파적 입장을 보였으나,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점차 친일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1905년,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 체결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추진한 인물 중 하나였다.[5] 처음에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반대했으나, 일본 측의 압박 속에서 가장 먼저 입장을 바꿔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5] 이 조약은 고종 황제의 명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으며, 이완용은 이 일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지목되어 민족의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은 이완용은 1906년 내각총리대신으로 승진했다.[10]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하자, 이완용은 일본 측에 서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5] 또한 같은 해,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칠적에도 이름을 올렸다.[5][11]
이러한 친일 행각으로 인해 이완용은 매국노로 규탄받았으며, 1909년에는 이재명 의사의 암살 시도로 중상을 입는 등 지속적인 위협에 시달렸다.[5]
5. 1. 친일파로 전향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자, 박영효 등 망명 중이던 개화파들이 귀국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개화파는 이완용에게 내각 참여를 제안했으나, 그는 정세의 불안정성을 이유로 거절하고 관망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확고해지자,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學部大臣) 겸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으로 내각에 참여했다.[42]1895년 음력 7월,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위신이 떨어지면서 갑오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개화파는 다시 축출되었다. 조선 조정의 관심은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러시아와 미국으로 옮겨갔다. 고종의 의중을 파악한 이완용은 정동파에 가담하여 러시아 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주한미국서기관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1월에는 친러, 친미 세력과 함께 춘생문 사건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친일 내각을 앞세워 을미개혁을 추진했으나 러시아의 개입으로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1896년 2월 11일, 이완용은 고종과 카를 베베르 주한러시아공사와 함께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렸다. 아관파천 이후 친일 개화파들은 조정에서 모습을 감췄고, 이완용은 외부대신(外部大臣)에 임명되어 러시아와의 협상을 담당하며 한때 친러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등을 겸직하며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에 참여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이 되었으나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의 대립으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901년 중앙 정계에 복귀한 이완용은 친미파적 입장을 취하며 친일 세력을 견제하는 듯했으나, 1904년 러일 전쟁 발발을 계기로 점차 일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905년,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추진했다. 처음에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반대했으나, 일본 측의 사형 위협 속에서 가장 먼저 입장을 바꿔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5] 이 조약은 고종 황제의 명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완용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불리며 민족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 아래, 이완용은 1906년 내각총리대신으로 승진했다.[10]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하자, 이완용은 일본 측에 서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다. 또한 같은 해,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칠적에도 이름을 올렸다.[11] 조약 체결 이후 그의 집이 방화로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2]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추도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에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아 폐와 신장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졌다.[17]
1910년 8월, 일제는 한일 병합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은 8월 13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으로부터 병합안을 전달받고 이를 수락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 황제의 칭호를 '왕'으로 격하하고 국호를 '조선'이라는 옛 이름으로 변경할 것을 일본 측에 요구하여 관철시켰다.[13] 8월 21일 순종 황제로부터 전권위원으로 임명받은 그는 다음 날인 22일,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겼다. 이로써 그는 경술국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5. 2. 을사늑약 체결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 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을 통해 열강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조선 식민지화를 인정받았다. 이에 일본은 제1차, 제2차 한일 협약에 이어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추진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간섭을 본격화했다.당시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이 조약의 체결을 가장 열렬히 지지하고 추진한 핵심 인물이었다.[5] 처음에는 모든 대신들이 조약 체결에 반대했으나, 일본 측의 강압과 사형 위협 속에서 이완용을 포함한 다섯 명의 대신이 결국 조약에 서명했다. 이완용은 가장 먼저 입장을 바꿔 조약 체결에 찬성했다.[5]
이 조약은 고종 황제의 명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결되었으며, 이완용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조약 체결을 주도한 핵심 인물로 지목되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 역사에서 "을사오적"으로 불리며 민족의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이완용은 1906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10] 1907년(광무 11년)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하자, 이완용은 일본 측에 서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다. 이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압박하고, 나아가 한국 병합을 서두르려는 일본의 의도에 동조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완용은 정미칠적에도 포함되었다.
1909년에는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한 이재명 의사의 암살 시도로 인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완용에 대한 민중의 적개심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5. 3. 총리대신 임명과 정미7조약
일본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 휘하에서 이완용은 1906년부터 총리대신으로 활동했으며,[5] 1907년(고종 44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정식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10]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키자, 이완용은 일본 측 입장에 서서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퇴위 요구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지만,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은 고종에게 지속적으로 양위를 압박했다.[11]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뒤, 이완용 내각은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일본에 넘겼다.[11] 이 조약은 한국의 내정을 일본의 통제하에 두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배를 강화하는 조치였으며,[5] 이완용은 조약 체결을 지지한 7명의 대신 중 수장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정미칠적 중 한 명으로 지목된다.[5] 정미조약 체결 당시 정미칠적 명단에는 이완용의 사돈인 임선준(任善準)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 퇴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이를 탄압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당시 주한 일본군 사령관이자 통감 대리였던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긴밀히 협의했다.

5. 4. 영친왕 황태자 책봉과 기유각서
순종(純宗)이 황제로 즉위하자 이완용은 왕실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이완용의 추천에 따라 후사가 없던 순종의 황태자로 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결정했다.[57] 이는 당시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던 흥선대원군의 적장손(嫡長孫) 영선군[58]과 장성한 아들 의친왕을 견제하여 막후에서 실권을 유지하려던 고종의 의도와 이완용의 정치적 계산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58] 이 결정으로 인해 이전까지 잠재적 왕위 계승자로 주목받았던 영선군과 의친왕은 하루아침에 황태자의 신하로 지위가 격하되었다.[58]
한편,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며 권세를 부리는 이완용에 대해 조정 대신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양위를 함께 추진했던 인물들조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황실은 일제와 친일 내각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으며, 결국 한일 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일본인들에 의해 직접 통치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1909년 7월, 이완용은 독단적으로 일본과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5. 5. 암살 위협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이완용은 매국노, 역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전국 각지에서 반(反)이완용 시위와 이완용 화형식이 열렸다. 특히, 일본 정부 요인들과 매국 행위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암살단이 조직되었고, 이완용은 암살단의 최우선 표적이 되었다.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하자, 이완용은 11월 4일 서울 남산 장충단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에 참석했다. 그는 추도문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자신의 스승과 같은 존재로 칭송하고 그의 극동평화론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안중근 의사를 조선인의 이름으로 비난했다.[59]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은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추도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위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았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의 옆구리와 어깨 등을 칼로 세 차례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의 인력거꾼 박원문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이재명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이완용은 즉시 대한의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당시 왼쪽 폐가 칼에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일본인 외과 의사들의 수술과 당시의 최신 의료 기술 덕분에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목숨을 건졌다. 이재명 의사는 이듬해 9월,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 및 인력거꾼 박원문 살해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이완용은 폐 기능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이는 이후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하여 평생 겨울철마다 그를 괴롭혔고 결국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17] 이 외에도 이완용은 1909년 '을사오적 처단단'의 암살 시도로 중상을 입기도 했다.
6. 1910년대~1920년대 활동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고[14][15], 1920년에는 3·1 운동 진압에 협력한 공로 등으로 후작으로 승격되었다.[15] 이 시기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및 고문,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는 등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작위를 받아,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부자(父子)가 모두 일본 귀족이 되기도 했다[63]. 1926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17]
6. 1. 한일 병합 조약 체결
1905년 11월 17일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과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하고 서명했다. 많은 유생들이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이완용 자신이 1888년 1월 19일 직접 마련했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이 단돈 5USD에 일본에 강제 매각되었고[50], 영국, 일본 등 10여 개의 모든 재외 공관이 일본에 즉시 양도, 폐쇄되는 국가적 치욕을 겪었다.[51]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크게 침탈당하고 일제 강제 병합은 시간 문제로 다가왔다.
1905년 12월,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의정대신(議政大臣)을 겸하게 되었고, 1907년 초에는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인 의정부 참정대신(정1품)에 올랐다. 또한 조선 근대화 작업을 명분으로 겸하고 있던 농상공부 대신서리 및 광산사무국총재 직책도 유지했다.
1907년 6월, 일본과의 본격적인 강제 병합 준비를 위해 내각 체제가 개편되면서 이완용은 총리대신으로 추천되었다.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수락했다.[10] 같은 해,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키자 이완용은 일본 측 입장에 서서 고종의 퇴위를 적극 추진했다. 이를 주도한 7명의 대신은 훗날 정미칠적으로 불리게 된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신들의 퇴위 압박에 대한 의견을 물었으나, 이토는 자신은 신하로서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답하며 물러났고, 결국 고종은 퇴위했다. 이완용은 이후 정미 7조약 체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일제에 넘겨주었다.[11] 순종의 즉위식 참석 중 자택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이 정도 일은 각오하고 있었다. 낡은 집이 불타면 새 집을 지으면 되지만, 쓸데없는 소동으로 귀한 목숨을 잃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2]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일제에 넘겼다. 같은 해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추도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에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았다. 이 의사는 인력거에 뛰어들어 이완용의 어깨와 허리를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폐와 신장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으나, 병원 치료 끝에 목숨을 건졌다.[17]
한일 병합 논의가 본격화되자 이완용은 사직 후 휴양을 원했으나, 후임으로 거론된 박제순과 조중응이 거절하여 총리대신 직을 계속 유지했다. 1910년 8월 13일,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로부터 한국 병합 내용을 전달받은 이완용은 이를 수락하면서도, 대한제국 황제를 왕으로 칭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13]
1910년 8월, 이완용은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일본의 각본대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한일 병합 안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에서 황제 면전에서 이를 통과시켰다. 8월 21일, 순종 황제로부터 전권위원으로 임명받은[13](형식상 임명이나 사실상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8월 2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의 관사에서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이 조약에 대해 순종 황제는 서명을 거부했으나, 조약은 강행되었다. 이완용은 이 일로 인해 경술국적의 수괴로 지목되었다.

조약 체결 후 이완용은 곧바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약 제5조에 따라 일제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항목 | 내용 |
---|---|
작위 | 조선귀족 백작 (1910년 10월 7일 수여)[14][15][24], 후작 (1920년 승격)[15] |
수당 및 은사금 | 잔무처리수당 60여 원[60], 퇴직금 1,458원 33전, 조선총독부 은사공채금 15만 원 |
기타 서훈 | 대훈위 국화대수장 (1926년, 이왕가 제외 조선인 유일)[16], 대례기념장 (1915년)[16] |
이완용은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내며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하고 내선일체 정책에 동조했다.
6. 2. 경술국치(한일병합) 이후 친일 행적
한일병합 이후,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다.[14][15][24] 1912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어 일제의 '일선융화'(日鮮融化) 정책 추진에 앞장섰다. 그는 정기적으로 조선귀족 대표로서 일본 천황에게 문안 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를 하고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게 했다. 같은 해 7월 11일에는 농사장려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1915년 10월 13일 조선농회 회두(會頭), 1916년 7월 30일 이무회 회두, 1918년 5월 25일 조선귀족회 부회장 등 친일 성향 단체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1916년 8월 4일자 매일신보에는 이왕가의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족 마사코 여왕의 결혼을 '내선융화'의 상징으로 미화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19년 1월 15일 고종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시중에는 독살설이 퍼졌으며 고종의 양위를 강요했던 이완용 등이 배후로 지목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지도자들의 동참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3·1 운동의 탄압 필요성과 방법을 제안했다. 또한 총 3회에 걸쳐 경고문을 발표하며 3·1 운동을 '불순세력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하고,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하여 이완용을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격시켰다.[15] 이로써 일제 강점기 그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맡아 내선일체와 일본어 보급을 독려했다. 이외에도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 고문, 총독부 교육조사 및 산업조사위원,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 다수의 친일 단체에 관여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와 수탈 정책에 협력했다.
이완용은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영일시(詠日時-해를 찬양함)[62]를 인용하여 일본을 찬양하기도 했다.
>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
> 해[61]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
1922년 3월 14일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서예 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23년 1월 6일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후일 조선사 편수회) 고문이 되어 한국 역사를 일본의 시각에 맞춰 왜곡하는 이른바 '친일사관' 정립에 기여했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작위를 받아,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부자(父子)가 모두 일본 귀족이 되었다[63]. 이완용을 비롯한 소수의 핵심 친일파들은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대다수 조선귀족과 양반들은 일제의 수탈 정책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몰락해갔다.[31] 일부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창덕궁에 있는 순종에게 찾아가 용돈을 받아 생활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31]
연도 | 작위 및 서훈 |
---|---|
1910년 10월 7일 | 백작[24] |
1915년 11월 10일 | 대례기념장[16] |
1920년 | 후작[15] |
1925년 10월 1일 | 종이위[25] |
1926년 2월 12일 | 정이위[26] |
1926년 2월 12일 | 대훈위국화대수장[27] |
1926년 이완용은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는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습격으로 입은 폐 손상이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그의 후작 작위는 1924년 이미 남작위를 받고 분가했던 차남 이항구가 아닌 손자 이병길에게 습작(세습)되었다.[15][18]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해방 이후 '매국노'라는 비판 속에 묘지가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 결국 1979년 후손들에 의해 묘는 파헤쳐지고 유골은 화장되어 처리되었다. 유골의 최종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7. 최후
1909년 이재명의 암살 미수 사건 때 폐에 상처를 입은 뒤로,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咳嗽)와 천식, 폐렴과 흉통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일본에서 의사들을 불러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건강 악화와는 반대로 그의 재산은 계속 늘어나, 특히 땅 재산은 1억 3천만 평까지 불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폐렴과 해소 증상은 계속되었고, 죽을 때까지 흉통에 시달렸으며 나이가 들면서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1925년 가을까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물염적벽을 유람하고 11월 하순에는 순종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다시 해소가 심해져, 12월 5일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우봉 이씨 시조 이공정의 묘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31] 이완용은 오랫동안 유실되었던 시조 묘를 찾아 개축 공사를 마무리하고 직접 제사를 지내려 했으나, 지병인 기침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져 포기해야 했다.[31]
그 후 집에서 요양하며 어느 정도 호전되자,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하여 참석했다.[31] 당시 조선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새로 지은 청사로 이전한 상태였고, 중추원도 새 청사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리는 첫 회의이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도 참석한다는 점 때문에 무리하게 참석했는데, 이것이 그의 병세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31]
회의 참석 후 부축을 받고 귀가했으나, 밤이 되자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고 이내 졸도하여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결국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옥인동 자택에서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향년 69세였다. 장손 이병길은 당시 일본 유학 중이어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폐렴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이재명에게 습격당했을 때 한쪽 폐의 기능을 잃었던 것이 원인으로 여겨진다.[17]
사후 이완용의 시신은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에 매장되었으나, '매국노'라는 평가 속에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무덤은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유골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8. 사후
1926년 2월 12일, 이완용의 장례식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합쳐 50명의 장례위원이 주관하여 치러졌다. 장례 행렬은 일왕(日皇)이 하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후작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正二位大勳位候爵 牛峯李公之柩)라고 적힌 장례 깃발을 앞세우고 호화롭게 이어졌다. 일본 순사들의 호위 속에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진 장례 행렬은 그 규모가 고종 황제의 장례 행렬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같은 날, 그는 매국과 친일 행위의 대가로 일본 황실로부터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64]. 이 훈장은 일본 황실이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훈장으로, 역대 한국인 수훈자 중 영친왕 이은, 의친왕의 장남 이건, 차남 이우 등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당시 여론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의 겹겹 파수와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였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이 독배이다. (중략)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았지.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당시 중앙일보 역시 "이완용이 금일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 (이완용이 오늘 염라국(지옥)에 들어갔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 라고 보도하며 그의 죽음을 조롱했다.
이완용은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으나, 이후 그의 묘는 여러 차례 훼손되었고 결국 1979년 후손들에 의해 파묘되어 유골은 화장되었다. 묘터는 채석장으로 변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8. 1. 묘소 훼손과 이장
이완용은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매국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묘소가 훼손될 것을 두려워하여 1926년 당시 매우 외진 곳이었던 낭산리 임야를 일부러 묘지로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65]. 예상대로 해방 이전에도 묘를 훼손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여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으며,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훼묘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79년, 직계 후손들은 묘를 파헤쳐(파묘, 破墓) 유골을 수습한 뒤 화장했다. 그의 관 뚜껑은 한때 박물관에 전시되었으나, 역사학자 이병도가 ‘매국노의 관 뚜껑을 전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불태워버렸다[66]. 이완용의 묘터는 이후 채석장으로 바뀌어 옛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1935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이완용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67][68].
1945년 해방 이후, 이완용의 가족과 후손들은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거나 돌팔매를 맞는 일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장손자 이병길은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고, 둘째 손자 이병주는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큰증손자 이윤형은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이완용의 직계 후손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다[69].
이완용의 친일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공식적으로도 이루어졌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와 함께 이름이 올랐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된 장손자 이병길의 이름도 포함되었다. 2006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하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어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 이병길 명의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70].
한편, 1992년부터 이완용의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 간 증손자 이윤형을 중심으로 이른바 '조상 땅 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이들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경기도 고양시 소재 임야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그러나 1998년 7월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2372m2에 대한 반환 청구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후손들은 반환받은 토지를 즉시 제3자에게 매각하여 약 30억원의 차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완용이나 송병준 등 다른 친일파들의 후손들 역시 과거 친일 행위의 대가로 축적한 재산에 대한 반환 소송을 계속 진행하고 있어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71][72].
8. 2. 친일 재산 환수
한일 병합 당시 조선귀족 후작 작위를 받은 이완용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병합 공로자들에게 은사금을 지급했는데, 이완용은 15만원을 받아 10만원을 받은 박제순이나 28만원을 받은 박영효[56] 등 다른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비교해도 상당한 액수였다. (박영효의 경우, 초기에는 저항했으나 결국 변절하여 후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201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발표한 백서에 따르면, 이완용 후작은 여의도 면적의 7.7배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79] 그의 사저에는 수많은 하인과 호위무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실제 재산 규모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왕족, 귀족, 유력 정치가 및 기업가 등 소수 상류층만을 위해 제작되던 고가의 브레게 시계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희귀하고 값비싼 모델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소유했던 시계보다 한 단계 낮은 모델이 2016년 경매에서 약 325억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9. 평가
이완용의 이름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한다.[1] 그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유일한 인물이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하고 있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병합될 당시 일본과 협력했던 9명의 후손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이완용은 그 목록의 맨 앞에 있다.[7][8]
9. 1. 부정적 평가: 매국노의 대명사
한국과 북한 모두에서 이완용의 이름은 친일파이자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한다.[1] 그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명단에 모두 포함된 유일한 인물이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있다.이완용은 1907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에 올라 정미 7조약에 서명하여 행정권을 일제에 넘겼다.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사법권마저 넘겨주었으며, 마침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국권을 완전히 상실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그는 대한제국 황제를 왕으로 칭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바꿀 것을 일본 측에 요구하여 관철시키기도 했다.[13]
일제 강점기 동안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일제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또한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찬동하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정략결혼을 강제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에도 앞장섰다.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은 여러 측면에서 제기된다.
첫째, 그가 추구한 '독립'은 근대적 국민 국가 건설이 아닌 왕실의 보존과 안위에 국한된 것이었다. 미국의 힘을 빌리려 노력했지만, 정작 미국식 보통교육, 참정권, 공화정, 노비제 폐지 등 근대 국가의 핵심 요소는 외면했다. 근대적 의회 정치나 헌법 제정 등 국가의 기본 틀을 마련하는 데에도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 특히 그를 비롯한 수구파가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내놓은 대한국 국제는 왕권의 절대성만을 강조하여 국민적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낼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둘째, 정부 주도의 근대 개혁을 표방했음에도 국가 재정 확보에는 무능했다. 수백 년간 면세 혜택을 누린 양반 계층이나 왕실 종친에게 특혜를 주는 전근대적 구조를 개혁하지 않고, 오히려 국가의 각종 이권을 열강에 헐값으로 넘기는 데 급급했다. 이로 인해 얻은 미미한 수입은 왕실 재정이나 일부 관료에게 돌아갔을 뿐, 국부 유출은 심화되었고 국가 재정과 민생은 더욱 피폐해졌다. 나라를 판 대가로 축적한 그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수조 원에 달하고 소유했던 땅만 1억 3천만 평이 넘었지만[76], 을사늑약 체결 직전 "나라가 부강해지면 국권을 되찾으면 된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셋째, 그의 리더십은 내각 내에서조차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정적만 양산했다. 오랜 기간 그를 지켜본 윤치호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 윤치호 일기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가 1927년 발간한 《일당기사》에는 이완용 스스로 자신의 처세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이는 그의 기회주의적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매천야록에는 그가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고 입원 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75] 마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윤덕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승구는 을사조약 체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병으로 사망했으며, 며느리와의 불륜설 역시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넷째,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들의 타협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그들의 행위는 국가와 민족 전체의 이익이 아닌, 왕실과 소수 기득권층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일제에 착취당하고 강제징용과 위안부 등으로 고통받게 될 대다수 백성의 삶은 애초에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이완용은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에게 매국노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으며, 그 악명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정치인들이 일본과의 타협을 모색할 때 "이완용 소리를 들어도 좋다"는 식의 발언이 나올 정도로[19], 그는 민족 반역자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2005년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상속받은 재산은 국가에 환수되었다.[7][8][20]
그는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되다가 1979년 후손들에 의해 파묘되어 화장되었다. 그의 손자인 이병길 역시 조선귀족 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였다.[76]
9. 2. 긍정적 평가 (일부)
같은 친일파 박중양은 1945년 해방 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했다.[77]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주장했다.[77] 박중양은 '누구라도 이완용과 같은 처지였다면 그 이상의 선처를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며 이완용 등이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는 을사조약이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인사들과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에게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것에 대해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재필은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46] 비록 갑신정변으로 가족을 잃고 미국 망명 생활을 했던 서재필[78]이 수구파였던 이완용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 않았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평가였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이 독립협회를 공격하고 친일 행보를 보이면서 서재필은 그에게 강한 비판과 멸시를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에는 이완용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6][21]
이완용은 일본에 가까워지면서도 일본어를 배우거나 사용하지 않았고, 일본인과의 대화에서는 영어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21][17] 또한 당대부터 서예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들 이항구는 이완용이 후덕하여 찾아온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으며,[23] 국장(國葬)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장례 행렬이 수 킬로미터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어[22], 그에 대한 동정이나 다른 시각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저서로는 『일당기사』(일당기사출판소, 1927년)가 있다.
9. 3. 결론
- 윤치호 일기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가 1927년에 펴낸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도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고 입원했을 때 맏며느리와 간통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했고, 이후 며느리를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기록[75]이 있으나, 민족문제연구소 윤덕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승구는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병으로 사망했으며, 며느리와의 불륜설 역시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반영된 이야기일 뿐, 실제로는 술과 이성을 멀리하고 서예와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이완용 사후, 그의 손자이자 양자인 이병길 역시 조선귀족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지내며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이어갔다.[76]
넷째, 이완용의 행적에 대한 일부 긍정적 평가의 이면에는 '누구를 위한 타협이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국가와 민족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실과 소수 지배층의 안위만을 고려했을 뿐, 일제 강점기하에서 고통받게 될 대다수 백성의 삶은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완용은 오늘날 한국과 북한 모두에서 친일파와 매국노의 대명사로 통하며,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정치권에서는 일본과의 타협을 논할 때 "이완용이라 불려도 좋다"는 식의 발언[19]이 나올 정도로 부정적 상징성을 지닌다.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을 포함한 친일파 후손들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켰다.[20]
한편, 이완용이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했으며, 일본어를 배우거나 사용하지 않고[21] 일본인과 영어로 대화했다는 점[17], 《독립신문》에 그를 비판하는 기사가 없다는 점[21] 등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서예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저서로 《일당기사》(1927)가 있다. 그의 장례식 행렬이 수 킬로미터에 달했다는 기록[22]이나, 찾아온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아들 이항구의 회고[23] 등은 그에 대한 동정이나 다른 평가가 존재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그의 친일 행위와 매국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희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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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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