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
1. 개요
이병길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자이다. 그는 이완용의 손자이며, 1905년에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일본 유학 후 재산을 모았으며, 1937년 동요회 이사장을 지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국방헌금을 헌납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1950년에 사망했다.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었고, 2007년에는 재산 환수 결정이 내려졌다.
| 이름 | 이병길 |
|---|---|
| 한글 | 이병길 |
| 한자 | 李丙吉 |
| 가타카나 | 이 비ョン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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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작 -
이해창 (조선귀족)
이해창은 조선 후기 왕족이자 대한제국 관료, 조선귀족으로, 창산군에 봉해졌으며 한일 병합 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나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조선후작 -
이달용
이달용은 대한제국 시기 관료를 지내고 한일 병합 후 조선총독부 관료로 근무하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생명보험 부사장, 한성은행 대주주 등으로 재산을 축적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
우봉 이씨 -
이병린
이병린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며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6.3 사태 당시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구속되었으며,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와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주도하며 인권 운동에도 힘썼고, 법치주의 확립과 사법권 독립을 강조하며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다. -
우봉 이씨 -
이어령
이어령은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소설가, 언론인, 교수, 국어학자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공무원으로, 사회 비평, 교육 활동, 올림픽 기획, 저술 활동 등을 통해 한국과 일본, 디지털 시대 문명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고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
송영 (극작가)
송영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극작가로, 카프 계열 연극인으로 등단하여 노동 운동 풍자 작품을 발표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희곡으로 알려졌으나 한설야 숙청 시기에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보아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생애
이병길은 1905년 이항구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완용의 장손으로 입적되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재산 관리에도 능숙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하자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 촉탁을 거쳐, 1934년 궁내성 식부직 어용계에 임명되었다. 1939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 조선 연맹 참사를 겸임했고, 1941년 퇴관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1940년 조선생명보험 주식회사 이사, 동아합동목재 주식회사 이사에 취임했으며, 1941년에는 강원약업 주식회사 이사, 경성건물 주식회사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에 임명되었고, 북청철산 주식회사, 강원생약 주식회사, 강원임업 주식회사 이사를 겸임했다. 1945년 조선생명징병보험 주식회사 이사에 취임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이병길은 1905년 이항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의 장남이었으나,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가 젊어서 사망하자 이승구의 호적에 입적되어 이완용의 장손이 되었다. 이병길은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학습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7년 교토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1931년 대학교를 졸업했다.
2.2. 친일 활동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젊어서 사망한 백부 이승구의 호적에 입적되어 이완용의 장손이 되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일본에 유학했고, 재산 관리에도 밝아 많은 재산을 모았다. 1937년 조선귀족들로 구성된 동요회 이사장이 되었고, 같은 해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헌금을 모아 헌납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발기인이자 참사로 가담하였고, 배영동지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할아버지 이완용, 아버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병길과 이완용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2.3. 광복 이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 전라북도 소유 임야의 2분의 1을 몰수당하는 판결을 받았다.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으며, 1950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에 할아버지 이완용, 아버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었으며,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병길과 이완용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