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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구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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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헌구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언론인, 교육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보성고등학교 재학 중 동아일보 창간 기념 현상 모집에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와세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귀국 후 극예술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문예 활동을 펼쳤다. 조선일보 기자, 보성중학교 교장, 민중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중앙문화협회를 결성하고 대한민국 공보처 차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73년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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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구 (190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헌구
원어 이름李軒求
출생일1905년 5월 12일
출생지함경북도 명천군
사망일1983년 1월 4일
직업평론가, 언론인, 작가, 교육자
기타 정보
장르문학평론

2. 생애

이헌구는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보성고등학교 재학 중 동아일보 현상모집에 당선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했고, 귀국 후에는 극예술연구회를 설립했다. 카프에 반박하며 해외문학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평론을 발표했다. 보성보육학교 교사,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 보성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민중일보 사장 겸 편집국장, 중앙문화협회 결성, 공보처 차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 언론, 교육, 정치 분야에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절필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보성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동아일보』 창간 1,000호 기념 현상모집에서 「별」이 동요·동시 부문에 당선되었다.[1] 1925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 후 일본인 학생들 및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아동문학 및 농민문학 관련 활동을 했다.[1]

1926년에는 김진섭, 이하윤, 정인섭 등 도쿄 소재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외국문학도로서의 문예 운동을 시작한다.[1]

2. 2. 해외문학파 활동 및 문학적 성향

1926년 김진섭, 이하윤, 정인섭 등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여 외국문학도로서 문예 운동을 시작했다.

1931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문예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32년부터는 『조선일보』 등에서 카프 계열 문인들에게 반박하고 해외문학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평론을 발표했다.

2. 3. 언론 및 교육 활동

귀국 직후 3년간 보성보육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 1936년부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조선일보』 폐간과 함께 실직했다. 이후 보성중학교 교장에 취임했다.[1]

광복 후 『민중일보』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1948년 『민중일보』 사장 윤보선이 공직에 임명되면서 『민중일보』 사장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1]

2. 4. 광복 이후 정치 및 사회 활동

광복 후 해외문학파 중심의 중앙문화협회를 결성하여 좌익 문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옹호 평론을 발표했다.[1] 1949년부터 공보처 차장을 지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1]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73년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했다.[1] 1948년 윤보선이 공직에 임명되면서 『민중일보』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활동했다.[1]

2. 5. 일제 강점기 말기 활동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절필한 경력이 있다.[1]

참조

[1] 뉴스 예술원회원 이헌구씨 별세 조선일보 1983-01-05
[2]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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