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령-문경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화령-문경 전투는 6.25 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 제6보병사단이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이화령과 문경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6.25 전쟁 발발 후 국군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타격을 입혔으나 전황 악화로 충주로 이동했고, 육군본부는 제2군단에 죽령-문경 방어를 명령했다. 북한군은 7월 20일까지 전주-논산-대전-문경-울산 선까지 진출하려 했고, 국군은 이화령과 조령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7월 14일 이화령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7월 15일 조령 전투, 7월 16일 문경 방어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국군은 7월 17일 영강 하반으로 철수했으나, 낙동강 방어선 구축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괴산군의 역사 - 2022년 괴산 지진
2022년 괴산 지진은 2022년 10월 29일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발생한 규모 4.1의 지진으로, 2022년 한반도에서 발생한 지진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옥천 습곡대 내 조곡 단층의 활동으로 분석되었다. - 문경시의 역사 - 은성탄광 화재
- 문경시의 역사 - 함창 전투
1950년 7월 하순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제1사단은 함창군에서 북한군 제13사단과 제1사단을 맞아 싸워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낙동강 방어선 형성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지만, 전황 악화로 낙동강선으로 철수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인천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 중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으로,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나 지형적 어려움, 서울 진격 속도, 민간인 피해 등에 대한 논란도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무극리 전투
무극리 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6일,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 일대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을 상대로 벌여 국군이 육상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로, 북한군의 전략 수정에 영향을 주었다.
이화령-문경 전투 | |
---|---|
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전투명 | 이화령-문경 전투 |
날짜 | 1950년 7월 13일 ~ 7월 17일 |
장소 | 경상북도 이화령, 문경 일대 |
결과 | 적의 진군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켰으므로 전략적으로 성공적인 전투였으나 문경 전투의 승패만 놓고 보면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으므로 패배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대한민국 | 김백일 제2군단장 준장 김종오 제6사단장 대령 함병선 제2연대장 대령 박노규 제1대대장 중령 이종기 제2대대장 대위 이운산 제3대대장 소령 임부택 제7연대장 중령 김용배 제1대대장 중령 김종수 제2대대장 중령 이남호 제3대대장 중령 민병관 제19연대장 중령 최병묵 제1대대장 소령 김용기 제2대대장 소령 김한덕 제3대대장 소령 김성 제16포병대대장 소령 박정변 사단공병대대장 소령 서정학 사단교육대장 소령 박정일 제8사단장 대령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김무정 제2군단장 소장 최광 제1사단장 소장 황석 제1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현학봉 포병연대장 대좌 최용진 제13사단장 소장 이승준 제21연대장 대좌 |
병력 | |
사상자 |
2. 배경
6.25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국군 제6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전황이 급격히 악화됨에 따라 7월 초 충주로 이동했다. 육군본부는 소백산맥과 금강 하반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고, 제2군단에게 죽령-문경 방어를 명령하였다.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제42호를 통해 제2군단에게 제6, 8사단을 통합 지휘하여 죽령-문경을 고수하도록 지시했다. 제2군단장 김백일 준장은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고, 11일 01:00에 함창에 도착했다.
북한군은 『제1단계 제3차 작전』에서 『급속한 공격과 맹렬한 추격으로 한국군 및 UN군을 대전-소백산맥 선에서 격멸하는 동시에 단시일 내에 전주-논산-대전-문경-울산선까지 진출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7월 20일까지 작전을 완료하려 했다. 이는 국군에게 재편성 시간을 주지 않고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2. 1. 작전계획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제42호를 통해 제2군단에게 제6, 8사단을 통합 지휘하여 죽령-문경을 고수하도록 지시했다. 제2군단장 김백일 준장은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고, 11일 01:00에 함창에 도착했다.북한군은 『제1단계 제3차 작전』에서 『급속한 공격과 맹렬한 추격으로 한국군 및 UN군을 대전-소백산맥 선에서 격멸하는 동시에 단시일 내에 전주-논산-대전-문경-울산선까지 진출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7월 20일까지 작전을 완료하려 했다. 이는 국군에게 재편성 시간을 주지 않고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3. 전투 과정
3. 1. 7월 13일
이날은 흐린 날씨에 동남풍을 동반한 가랑비가 때때로 내렸다. 해발고도 1000m 내외인 주흘산(1106고지)-조령산(1107고지)-증봉(914고지: 속칭 시루봉)으로 잇닿는 소백산맥 준령에는 한기가 맴도는 가운데 국군 제6보병사단 제2, 제19 양 연대의 병사들이 이른 아침부터 진지를 구축하고 통신망을 구성하는 등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이는 사단장이 문경부근의 조령과 이화령에 방어진을 편성키로 결심하고, 7월 11일 신농국민학교(수안보 남쪽 7km)에 있던 임시 지휘소를 문경국민학교로 옮기면서, 7월 12일 밤에 야간 철수한 제2, 제19 양 연대가 병력을 조정배치하고 진지를 보강한 것이다.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제19연대는 우일선인 조령을, 제2연대는 좌일선인 이화령 지역을 담당하여 각각 책임지역내의 요선을 막아 거점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제7연대는 제1사단과 함께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 괴산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문경에서 기동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16포병대대는 각 포대단위로 분할하여 일선 양연대의 직후방에 진지를 마련했고, 공병대대도 문경-연풍간의 도로요소를 폭파하는 등, 지원부대들의 활동목표도 오직 이 방어전에 집중되었다.
국군 제6보병사단은 춘천에서 물러선 뒤 연대 단위로 분진하며 각각 다른 임무를 수행하다가 이화령-문경에서 비로소 서로 손잡게 되었고, 좌우 인접사단과 연대하면서 전선을 형성케 됨으로써 일전을 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북한군 제1사단 또한 수안보에서 침공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날은 양측 간의 수색과 정찰만으로 맞섰다.
3. 2. 7월 14일: 이화령 전투
이화령-문경 전투 이틀째인 이날, 북한군 제1사단은 3번 도로를 따라 이화령을 돌파하고자 주공격 방향으로 설정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국군 제2연대 정면에 공격을 집중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는 별다른 교전이 없었다.7월 중순, 짙은 안개가 산속을 뒤덮어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군의 122mm 유탄포와 82mm 박격포 포화가 집중되었다. 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각 대대에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어둠이 걷히면서 이화령 북쪽 계곡에서 수류탄 폭음과 총성이 울려 퍼졌다.
04:30분경, 북한군 제1사단은 연대 규모 병력으로 짙은 안개 속에서 국군 제2, 3대대 진지로 침투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제2대대에서는 국지 경계병 나일균 일병이 3번 도로 부근에서 수냉식 기관총 소리를 보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제1대대 3중대장 최희대 대위도 북한군 선봉의 침입을 확인했다.
이운산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는 20여 분간의 격돌 끝에 일부 병력이 분산되었고, 연대 관측소도 포격 피해를 입었다. 3시간 후, 농무가 걷히면서 국군 제2, 3대대 병사들이 이화령 쪽으로 후퇴하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직접 지휘하며 "일보도 물러설 수 없다. 즉각 돌아서서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제1대대장 박노규 중령에게는 633고지 탈환을 위한 역습을 지시했다.
제1대대 2중대장 김인문 중위와 3중대장 최희대 대위는 3번 도로 동쪽 능선을 따라 역습을 감행하여 계곡에 노출된 북한군을 공격했다. 안개가 걷히면서 후퇴하던 병사들도 반격에 가담했다.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도 병력을 수습하여 제9중대장 남백봉 대위와 제11중대장 채수용 대위에게 역공을 지시했다. 제16포병대대도 2개 포대로 연풍 일대에 포격을 가하여 북한군 증원을 차단, 전세를 역전시켰다.
3. 3. 7월 15일: 조령 전투
전날 밤 비상태세에 들어간 사단은 밤새 진지를 지켰으며, 아침에도 짙은 안개와 높은 습도로 인해 경계를 강화했다. 06:00경, 북한군이 산악기동으로 진지 앞까지 접근하여 조령관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주흘산(1106고지)과 조령산(1017고지)이 좌우측방에 높이 솟아 있고 안개가 짙게 낀 울창한 삼림 지역에서 국군 제19연대가 북한군과 격돌, 혼전이 벌어졌다. 반면, 전날 혈투가 벌어졌던 이화령에서는 소규모 교전만 발생했고, 서측 구왕봉 부근으로 남하한 북한군 제13사단은 측후방 위협에 그쳤다. 이날 전투는 제19연대와 제16포병대대의 협동작전으로 진행되었다.
3. 4. 7월 16일: 문경 방어전
전날 조령을 점령한 북한군 제1사단은 이날 06:00를 기하여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그 공격 양상을 보면, 조령을 점령한 부대로 문경 정면에 계속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동서 양 측방으로 우회, 침투시키고자 하였다.즉, 예비부대로 알려진 제14연대는 이창권의 지휘 하에 사단 동측의 갈평리 계곡으로 접근하고, 증원부대로 밝혀진 제13사단 예하 21연대는 이승준이 이끌고 서남쪽의 백화산으로 침투하였다. 또한 조령과 이화령에서도 정면 공격을 가하여 단숨에 문경을 점령하려는 듯하였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UN군이 가담하기 전에 소백산맥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제1사단장에게 제13사단 예하의 1개 연대를 증원시켜 조속히 문경을 탈취하도록 엄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북한군이 중부지역의 조기 진출을 서둘렀음을 보여준다. 국군 제6보병사단은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으나, 병력 및 화력 열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4. 결과 및 영향
7월 17일 국군 제6보병사단은 영강 하반으로 철수했다. 우측의 제8사단은 풍기-영주로, 좌측의 제1사단은 미원에서 방어선을 형성했다.
표면상으로는 풍기-적성리-마성-은성-미원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 남록의 진지를 유지한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서반부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각 사단이 담당 지역 방어에 집중하게 되자, 문경-미원 간 45km의 고산지대에 틈이 생겼다.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이 틈을 노려 2개 사단을 투입, 제13사단은 문경 서남쪽 은성으로, 제15사단은 당흥리(미원 동북쪽 10km)-화북-화서-상주 축선으로 진출시켰다. 이로써 북한군 제13, 15사단은 소백산맥을 넘어 국군 배치선 남쪽으로 진출했다.
문경 전투는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 지연전이었다. 하지만, 중부 전선에서 북한군의 위협이 커지면서, 국군은 새로운 전략적 판단을 해야 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