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백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백일은 일제강점기 만주군에서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하며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에 복무하며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그는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진압을 지휘했고, 옹진반도 전투와 경주·포항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흥남 철수 작전에서 피란민 수송에 기여했다. 하지만 간도특설대 복무와 여순 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의혹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는 195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으며, 사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옌지시 출신 - 전해종 (1919년)
    전해종은 한중관계사 연구에 기여하고 서강학파를 주도했으며 동양사 연구기금 기증과 학술원상 수상 등으로 학계에 공헌한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이다.
  • 옌지시 출신 - 황순희
    황순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조선혁명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하며 항일 무장 투쟁 참여 후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고위직을 역임한 중요 인물이다.
  • 수안 김씨 - 김상철 (1947년)
    김상철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언론인, 교육자, 사회운동가로서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월간 고시계 발행인, 대학교 겸임교수, 한미우호협회 회장,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총재 등으로 활동했다.
  • 수안 김씨 - 김동하 (1918년)
    김동하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이자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에 참여한 군인, 정치인으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나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었고,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김백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김백일
각국어 표기김백일
출생일1917년 1월 30일
아명김찬규
명연
일본식 이름가네자와 슌난(金澤俊南)
출생지지린성옌지 시
사망지강원도평창군대관령 부근
국립서울현충원
인물 사진
김백일 장군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의 김백일 음각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의 김백일 동상
병역 정보
소속 조직만주국군, 대한민국 육군
군 복무1937년 - 1945년(만주국군), 1946년 - 1951년(한국 육군)
최종 계급육군 상위(만주국군), 육군 중장(한국 육군, 추서)
참전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경력
만주국군1937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1946년 ~ 1951년
직책미군정청 국방경비대 통위부 제3연대장
지휘육군 제1군단장
임기1946년 3월 2일 ~ 1946년 10월 6일
근무육군 제1군단
가족 정보
부모김창근(부)
친인척김영학(조부)
기타 정보
서훈알 수 없음

2. 생애

김백일은 1917년 1월 30일, 북간도 옌지에서 태어나,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후 1921년부터 북간도 옌지에서 자랐다. 이후 만주국 펑톈에 있던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하고 1937년부터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며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고향인 명천으로 귀국했다가 소련군정을 피해 미군정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때 이름을 '''김백일'''(金白一)로 개명하였으며,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남조선국방경비대 중위로 임관하여 제3연대를 창설하고 연대장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 전라북도 이리에서 군 보급품을 처분하여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누명을 쓰고 연대장에서 해임되기도 했으나, 부대 경리에 문제가 없었고 결혼식 비용 출처도 밝혀져 혐의를 벗었다. 1948년 여순사건 때에는 국군 제5여단을 이끌고 현지 계엄사령관으로서 진압작전을 지휘하였다.

1949년 옹진반도 전투에서는 옹진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을 세웠다. 육군보병학교(제병협동본부의 전신) 교장과 제3사단장(1950년 1월~4월)을 거쳐 1950년 4월 22일에 대한민국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공석이던 작전참모부장을 겸임하며 퇴각 작전 지휘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51년 3월, 강원도 대관령 인근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무공훈장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요 인물이지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2. 1. 일제 강점기 및 만주군 복무 시절

1917년 1월 30일, 북간도 옌지에서 태어났으며,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921년 이후에는 북간도 옌지에서 성장하였다.[1] 이후 만주국 펑톈에 있는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하고, 1937년부터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며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15]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백일은 송석하 다음으로 간도특설대 창설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16]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와 만주 북서부에 남아있던 대한독립군단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의 부대였다. 김백일은 핵심 요원으로 활동하며 1945년 8월 20일까지 작전을 수행했고, 8월 26일에는 중국 진저우에서 열린 부대 해체식에 참석했다. 간도특설대는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 172명을 살해했으며, 강간, 약탈, 고문을 당한 이들도 많았다.[15] 김백일은 만주군 상위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서보장을 받았다.

2. 2.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군 복무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으로 귀국했다가 소련군정 지역을 벗어나 미군정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때 이름을 '''김백일'''(金白一)로 개명하였으며,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중위로 임관하여 제3연대를 창설하고 연대장이 되었다.[7][6]

1946년 10월 전라북도 이리에서 군 보급품을 처분하여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누명을 쓰고 연대장에서 해임되기도 했으나, 부대의 경리에 문제가 없었고 결혼식 비용 출처도 밝혀져 혐의를 벗었다. 1948년 여순사건 때에는 국군 제5여단을 이끌고 현지 계엄사령관으로서 진압작전을 지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10] 대한민국 국방부1948년 12월 15일, 김백일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 발령하였다.[17]

1949년 옹진반도 전투에서는 옹진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을 세웠고, 육군보병학교(육군보병학교의 전신) 교장과 제3사단장(1950년 1월~4월)을 거쳐 대한민국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임명(1950년 4월 22일)되었다.[18]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공석이던 작전참모부장을 겸임하며 퇴각 작전 지휘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1950년 9월 1일에 제1군단장을 맡아 경주 전투와 포항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 전공으로 10월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인천 상륙 작전 후 반격 작전기에는 제1군단 예하 제3사단이 삼십팔도선을 먼저 돌파하였으며, 이후 북진을 계속하여 제1군단은 압록강 상류 혜산진까지 도달했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에는 미군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통역을 맡고 있던 현봉학과 함께 피란민들을 수송선에 수용하도록 설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백일은 미군이 피란민을 태우지 않을 경우 한국군 제1군단도 수송선에 타지 않고 피란민을 엄호하며 육로로 퇴각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며, 현봉학에드워드 알몬드 군단장과 예하 참모장교들에게 피란민을 수용해줄 것을 간언했다. 이러한 공적 때문에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김백일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19][20][21][22]

1951년 3월, 강원도 대관령 인근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무공훈장 태극장을 수여받았다.[6]

2. 3. 한국전쟁 참전과 사망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유학 중이던 정일권의 대리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겸임하며 개전 초 육군본부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다.[6] 1950년 7월, 함창 지구 전투 사령관을 역임했고, 제1군단 재편성에 따라 부군단장을 거쳐 군단장이 되었다.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는 동쪽 전선의 방어를 담당했다. 1950년 10월 1일, 유엔군의 공세에 따라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국군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했다.[6]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이 남북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유엔군의 평양 포기가 확실해지자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대량의 난민이 발생했다. 1950년 12월, 김백일은 약 10만 명의 난민을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미국 해군의 수송선에 수용하여 동해안에서 거제도까지 해로로 피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 김백일은 승선을 꺼리는 미국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를 강력하게 설득했다.[6] 김백일은 미군이 피란민을 태우지 않을 경우 한국군 제1군단도 수송선에 타지 않고 피란민을 엄호하며 육로로 퇴각하겠다고 하였고, 현봉학도 알몬드 군단장과 예하 참모장교들에게 피란민 수용을 간언했다.[19][20][21][22]

1951년 3월 27일,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여주의 제8군 전진 지휘소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3월 28일 강릉으로 향하던 연락기가 태백산맥대관령 부근 산비탈에 추락하여 사망했다.[6] 악천후 속에서 연락기 조종사가 이륙을 꺼리자 김백일이 권총을 들이대며 강행하게 한 것이 원인이었다.[6] 유해는 약 2개월 후인 5월 9일에 기체와 함께 발견되었으며, 사후 중장으로 추서되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6]

3. 논란 및 평가

김백일은 뛰어난 지휘 능력과 결단력을 가진 지휘관으로, 특히 대게릴라전에 능숙하여 '대게릴라전의 명수'로 칭송받았다.[11] 백선엽은 김백일에 대해 "성격이 격렬하고 호쾌한 사람이었지만,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11] 그의 격렬한 성격 때문에 김석원 등과 사이가 좋지 않기도 했다. 김백일은 대게릴라전의 비결은 다리에 있다고 했으며, 그의 다리 힘은 대단했다고 한다.[11] 또한, 게릴라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소총 분대를 4~5명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11]

김백일은 사망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1966년 6월 10일에는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23] 2011년 5월 31일에는 흥남 철수 작전을 기념하여 거제포로수용소에 동상이 세워졌으나,[24] 만주국 군대에서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경력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시민단체들은 동상 철거 운동을 벌였고, 동상에 계란을 던지거나 검은 천을 덮고 체인을 감는 등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13] 2014년에는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백일초등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고,[26] 2016년 1월 1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도 단체 성진회의 이름을 따 성진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2019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남 거제시 시민 단체들이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공원에 세워진 김백일의 동상

3. 1. 친일 행적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군 부문에 김백일이 기재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23]

여순 사건의 학살 사건은 김백일이 과거 만주국에서 일본군 소속으로 공산주의 게릴라 토벌에 참여했던 경력과 결부시켜, 만주국에서 투항한 게릴라의 살해가 엄중 처벌이라는 명목으로 횡행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방식을 답습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10]

3. 2.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 의혹

여순 사건 당시 김백일이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는 김백일이 과거 만주국에서 일본군 휘하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토벌했던 경력과 관련이 있다. 당시 만주국에서는 투항한 사람들을 '엄중 처벌'이라는 명목으로 살해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김백일이 일본군의 이러한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10]

3. 3. 흥남 철수 작전에서의 역할

인천 상륙 작전 후 반격 작전 때 제1군단 예하 제3사단이 삼팔선을 먼저 돌파하였고, 이후 북진을 계속하여 제1군단은 압록강 상류 혜산진까지 도달했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에는 미군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통역을 맡고 있던 현봉학과 함께 피란민들을 수송선에 태우도록 설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백일은 미군이 피란민을 태우지 않을 경우 한국군 제1군단도 수송선에 타지 않고 피란민을 엄호하며 육로로 퇴각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며, 현봉학도 알몬드 군단장과 예하 참모장교들에게 피란민을 수용해줄 것을 간언했다.[19][20][21][22] 이러한 공적 때문에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김백일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13]

4. 사후

김백일의 유해는 사망 두 달 후에 발견되어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1묘역 중앙부에 있는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1966년 6월 10일 전라남도 장성군 육군보병학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23] 상무대 정문 입구의 길은 그의 이름을 따서 백일로로 명명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김백일을 포함시켰다.

2011년 5월 31일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와 함북6·25전적기념사업회는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흥남철수작전 유공자 추모제〉를 열고 흥남철수작전기념탑 옆에 김백일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이 동상은 2010년 강원도 속초에서 건립이 무산된 후 경상남도 거제에 세워졌다.[24]

2011년 6월 15일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서 "친일파 김백일의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동상에 계란을 던졌다. 거제시는 김백일 기념사업회에 동상 철거를 공식 요청하였다.[25]

2014년 11월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백일초등학교가 김백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육군보병학교 사격장에서 유래되었다고 밝혔다.[26]

2016년 1월 1일 백일초등학교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도 단체 성진회의 이름을 따 성진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2019년 3월 1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남 거제시 시민 단체들은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며 항일독립군 토벌에 참여한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38개 지역 시민 사회 단체가 참여한 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이날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 기념식을 열었다.

5. 학력

6. 서훈

참조

[1] 웹사이트 김백일(金白一) http://encykorea.aks[...] 2022-07-25
[2] 문서 함경북도
[3] 뉴스 【人物研究】6・25英雄金白一将軍の人生…彼らはなぜ金白一を悪質親日派と追い立てるのか?「金白一は金日成の天敵…満州での因縁が6・25まで続き」 http://monthly.chosu[...] 2018-04-14
[4] 웹사이트 金永学 - 함경북도명천 http://w3devlabs.net[...]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18-04-14
[5] 뉴스 문대통령은 육사 뿌리를 왜 신흥무관학교라 했나 http://www.mediatoda[...] 2019-03-23
[6]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上巻
[7] 서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8] 문서 1945년 12월 5일 미국군과의 연락 조정을 위해 개교
[9] 문서 광복군 소장. 1946년 10월에 임관, 직후 제3연대장. 후에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관.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협력, 포로가 된 한국군 병사로 구성된 부대의 사단장도 역임. 후에 북한에서 사망.
[10] 웹사이트 『満洲国軍朝鮮人の植民地解放前後史 ―日本植民地下の軍事経験と韓国軍への連続性―』 http://jak.main.jp/i[...] 日本韓国研究会 2023-11-07
[11] 서적 対ゲリラ戦
[12] 웹사이트 ハンナラ党が多数の市議会までが金白一銅像の撤去を決議 http://news.onekorea[...] 統一日報 2013-05-31
[13] 웹사이트 "김백일 동상 철거 말라" 항소심도 원고 승소(종합)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3-05-31
[14] 웹사이트 Kim Paik Il http://valor.militar[...] Military Times 2016-01-01
[15] 저널 일본군 장교 되어 독립군 토벌했는데, 독립유공자 묘역 옆에 잠들다니…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9-07-30
[16] 서적 내가 겪은 한국전쟁과 박정희정부 선인 2004-05-20
[17] 뉴스 陸軍八中領昇進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48-12-31
[18] 뉴스 參謀副長에 金大領就任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0-04-23
[19] 저널 [한국기독역사여행] 흥남의 크리스마스 기적 … 9만 2000명 살리다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8-12-28
[20] 저널 보훈처, 내년도 '이달의 6·25전쟁영웅' 17명 선정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3-12-26
[21] 저널 일본군 장교 되어 독립군 토벌했는데, 독립유공자 묘역 옆에 잠들다니…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9-07-30
[22] 저널 “피난민 10만을 軍艦(군함)으로 철수시킨 세계史 최초의 쾌거!” https://www.chogabje[...] 조갑제닷컴 2016-06-21
[23] 웹인용 김백일 동상 http://www.inftsch.m[...] 육군보병학교 2008-06-27
[24] 웹사이트 속초가 거부한 '친일파' 김백일 장군 동상, 거제에 건립 http://www.ohmynews.[...] 2011-05-30
[25] 웹사이트 거제시민단체 김백일 동상 계란투척 http://www.morningne[...]
[26] 웹사이트 광주 '백일로' 유래는 친일파 장교 김백일 http://www.ohmynew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