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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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무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1904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하여 3·1 운동 참여, 중국 망명 후 중국 공산당 활동, 조선의용군 및 조선독립동맹 활동을 거쳤다. 광복 후 북조선으로 귀국하여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 참전, 2군단장, 평양지구방위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0년 말 숙청되어 사망했으나, 사후 복권되어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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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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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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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무정 |
원어 이름 | 무정 (武亭) |
본명 | 김병희 (金炳熙) |
다른 이름 | 김무정 (金武亭) |
출생일 | 1904년 |
출생지 |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
사망일 | 1952년 10월 |
사망 장소 | 중국 베이징 |
매장지 | 애국열사릉 |
군사 복무 | |
소속 |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1945년–1952년 |
최종 계급 | 조선인민군 대장 |
지휘 | 제2군단 |
참전 전투 | 조선 독립운동 만주국 토벌 중국 국공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무극리 전투 동락리 전투 진천 전투 단양 전투 이화령-문경 전투 영덕-강구 전투 펀치볼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 천평 계곡 전투 경주 전투 북진 영천 전투 장진호 전투 초산 전투 흥남 철수 현리 전투 유엔군 9월 공세 |
경력 | |
소속 | 산시 군벌 홍군 팔로군 조선인민군 |
주요 보직 | 팔로군 총부 포병단 단장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조선인민군 평양 방위 사령관 |
기타 이력 | 민족보위성 차관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2월 사령관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김춘용 (金椿踊), 어머니 노록자 (虜菉蔗) |
형제 | 5남 3녀 중 차남 |
배우자 | 윤상조 (尹桑爪, 1905~1979) |
자녀 | 1남 2녀 |
기타 |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사인 | 심장 질환 |
훈장 | 국기훈장 1급 (1952.10.) |
2. 생애
1904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김기준(金基俊, 다른 이름은 김현극(金鉉極))과 종산(宗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근동리는 경성군 룡성면이었지만 후에 1940년 3월 청진부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후에 그의 고향은 경성군 설과 청진시 설이 대립되기도 했다. 일설에는 그의 생년이 1904년생 설과 1905년생 설, 1902년생 설 등이 있다. 처음 이름은 명석(明石)으로 성인이 된 뒤에는 이름을 병희(炳禧)로 고치고 자를 명석이라 하다가, 뒤에 이름을 무정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인물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음험한 편이었다 한다.
아버지 김기준은 양반가 출신 대지주로 성격이 순하면서도 급한 성격이었다. 무정의 급한 성격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인물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집안은 시가 1만 3천엔 정도의 대지가 있어, 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한다. 소작농을 둘 정도로 대지주였던 아버지는 그를 룡성면 근동리의 1910년 천마소학교에 보냈고 1916년 천마소학교를 졸업하고 나남공립보통학교(羅南公立普通學校)에 편입했다. 1917년 경성면(鏡城面)의 경성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경성부(京城府)에 있는 경신중학교에 편입학했다. 1920년 중학교 재학 중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집안의 중매로 조선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듬해 아들 정신(正新)이 태어났다. 그러나 중국 체류 중 헤어지고 중국인 여성 등기와 결혼하게 된다.
1919년에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그해 10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 3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퇴학당하고 막노동에 종사, 4월 경성기독청년회관 야간부에 입학하여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수강했다.[24] 1923년 2월 경성청년회에 가입, 청년회 간부 이영(李英) 등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24]1923년 3월 경성기독청년회관을 그만두고, 도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갔다. 그해 4월 허베이성 바오딩에 있는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포병과의 단기과정에 입학하였다.[24]
당시 그의 아버지 김기준 등은 그가 일본으로 유학한다고 알고 있었고, 일본 도쿄로 우편환을 송금했지만 반송되었다. 나중에 그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집안은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2. 1. 생애 초기
1904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김기준(金基俊, 다른 이름은 김현극(金鉉極))과 종산(宗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근동리는 경성군 룡성면이었지만 후에 1940년 3월 청진부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후에 그의 고향은 경성군 설과 청진시 설이 대립되기도 했다. 일설에는 그의 생년이 1904년생 설과 1905년생 설, 1902년생 설 등이 있다. 처음 이름은 명석(明石)으로 성인이 된 뒤에는 이름을 병희(炳禧)로 고치고 자를 명석이라 하다가, 뒤에 이름을 무정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인물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음험한 편이었다 한다.아버지 김기준은 양반가 출신 대지주로 성격이 순하면서도 급한 성격이었다. 무정의 급한 성격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인물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집안은 시가 1만 3천엔 정도의 대지가 있어, 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한다. 소작농을 둘 정도로 대지주였던 아버지는 그를 룡성면 근동리의 1910년 천마소학교에 보냈고 1916년 천마소학교를 졸업하고 나남공립보통학교(羅南公立普通學校)에 편입했다. 1917년 경성면(鏡城面)의 경성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경성부(京城府)에 있는 경신중학교에 편입학했다. 1920년 중학교 재학 중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집안의 중매로 조선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듬해 아들 정신(正新)이 태어났다. 그러나 중국 체류 중 헤어지고 중국인 여성 등기와 결혼하게 된다.
1919년에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그해 10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 3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퇴학당하고 막노동에 종사, 4월 경성기독청년회관 야간부에 입학하여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수강했다.[24] 1923년 2월 경성청년회에 가입, 청년회 간부 이영(李英) 등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24]1923년 3월 경성기독청년회관을 그만두고, 도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갔다. 그해 4월 허베이성 바오딩에 있는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포병과의 단기과정에 입학하였다.[24]
당시 그의 아버지 김기준 등은 그가 일본으로 유학한다고 알고 있었고, 일본 도쿄로 우편환을 송금했지만 반송되었다. 나중에 그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집안은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1904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김기준(金基俊, 다른 이름은 김현극(金鉉極))과 종산(宗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근동리는 경성군 룡성면이었지만 후에 1940년 3월 청진부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후에 그의 고향은 경성군 설과 청진시 설이 대립되기도 했다. 일설에는 그의 생년이 1904년생 설과 1905년생 설, 1902년생 설 등이 있다. 처음 이름은 명석(明石)으로 성인이 된 뒤에는 이름을 병희(炳禧)로 고치고 자를 명석이라 하다가, 뒤에 이름을 무정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인물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음험한 편이었다 한다.아버지 김기준은 양반가 출신 대지주로 성격이 순하면서도 급한 성격이었다. 무정의 급한 성격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인물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집안은 시가 1만 3천엔 정도의 대지가 있어, 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한다. 소작농을 둘 정도로 대지주였던 아버지는 그를 룡성면 근동리의 1910년 천마소학교에 보냈고 1916년 천마소학교를 졸업하고 나남공립보통학교(羅南公立普通學校)에 편입했다. 1917년 경성면(鏡城面)의 경성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경성부(京城府)에 있는 경신중학교에 편입학했다. 1920년 중학교 재학 중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집안의 중매로 조선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듬해 아들 정신(正新)이 태어났다. 그러나 중국 체류 중 헤어지고 중국인 여성 등기와 결혼하게 된다.
2. 1. 2. 수학과 중퇴
1919년에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그해 10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 3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퇴학당하고 막노동에 종사, 4월 경성기독청년회관 야간부에 입학하여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수강했다.[24] 1923년 2월 경성청년회에 가입, 청년회 간부 이영(李英) 등을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24]1923년 3월 경성기독청년회관을 그만두고, 도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갔다. 그해 4월 허베이성 바오딩에 있는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포병과의 단기과정에 입학하였다.[24]당시 그의 아버지 김기준 등은 그가 일본으로 유학한다고 알고 있었고, 일본 도쿄로 우편환을 송금했지만 반송되었다. 나중에 그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집안은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2. 2. 독립운동
2. 2. 1. 중국 망명 초기
1924년 3월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한 후, 중국 국민당군 포병중위로 임관되어 염석산 부대에 배속되었다.[25] 1925년 초 포병대위로 진급했다가 얼마 뒤 특별진급하여 포병중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베이징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25],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중국로농홍군에 입대하여 홍군 대위가 되었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해방구였던 루이진(瑞金)으로 가서 홍군 포병장교로 국민당군과 싸웠다.1927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지자 지하에서 비밀 공작활동을 하다가 우창(武昌)에서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중국인 학생들의 석방요구 시위와 동지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상하이로 갔다. 1929년 상하이에서 폭동을 배후 지휘하다 체포되어 징역 2개월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1931년 루이진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였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은 상하이에서 쏘베트지역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24] 당시 대회에는 홍군 제5군 정치위원 등대원(滕代远)이 참가하였고, 등대원과 무정은 친분이 있었다. 무정은 이후 등대원의 여동생 등기(腾绮)와 결혼하였다.[24]
1930년 6월 후베이성 양신(陽新)에 있던 펑더화이의 군대에 합류, 일본군과 교전 중 20여발의 포탄을 쏘아 10여발을 일본군 전차와 적함에 명중시켜 적함을 격퇴했다. 이때의 포격으로 무정은 홍군의 전설적인 포사격 영웅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0년 7월 홍군이 후난성 핑장(平江)에서 산포련대(山炮連隊)를 조직하였으나 혼란이 계속되어, 1930년말 무정은 산포련대의 제3대 련대장에 임명되었다.
2. 2. 2. 중국 공산당 활동과 홍군의 장정
1927년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민혁명군을 떠났으며, 같은 해 12월 광주 봉기에 참가했다.[27] 1929년에는 상하이 노동자 폭동을 지휘하여 영국 조계에서 체포되어 2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석방 후 홍콩으로 갔다.[27]1930년 6월 펑더화이(팽덕회)의 홍군 제5군에 입대했고, 7월에 홍군 최초의 산포연이 조직되었는데, 같은 해 말 3대 연장이 되었다.[5] 1931년 뤄진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5] 1931년 5월 쟝시 성 피두에서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포병사령부가 설치되었으나 초임 사령관의 실책으로 6월 무정이 제2대 홍군 중앙군사위 포병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고, 홍군 특과학교 포병과 교관이 되었다.
1934년 중국공산당이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군과의 교전에서 패하고 루이진에서 옌안으로 2만 5천리를 이동할 때, 무정도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중국 홍군의 장정에 참여하였다.[6] 장정 시작 당시 약 30명이 넘는 조선인이 있었지만, 산시성 북부에 도착한 것은 무정과 양림 두 사람뿐이었다.[27]
1936년 홍군의 군사훈련기관인 홍군육군대학 단기 간부과정을 수료하였다. 이후 홍군 특과학교 포병과 주임이 되었다가 포병과장, 특과학교 제2대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37년 홍군 산하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이 되고, 1937년의 중일 전쟁에 중화인민지원군 팔로군 포병사령관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37년 말 팔로군 포병연대 연대장으로 승진했다가 뒤에 팔로군 포병사령관이 되었다. 1938년 1월 팔로군 포병사령관이 되고, 1940년 봄 팔로군과 화북 주둔 일본군이 교전하는 백단대전(百團大戰)에 팔로군 포병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는 팔로군에 있으면서 펑더화이의 부관으로 근무하였다.[27]
2. 2. 3. 화북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활동
1941년 1월 10일 한인(韓人)들로 구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942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성격을 분명히 해 단체명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꾸게 된다.[26] 1941년 7월 연안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부를 창설하는데 참여했으며, 1941년 6월부터 1942년 4월 사이에 조선의용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에 반발한 일파가 조선독립동맹으로 오자 그는 이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확장하였다.1942년 7월 10일부터 7월 14일에 열린 조선청년연합회 제2차대회에 참가, 7월 10일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을 확대 개편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의 결성에 참여하고, 허정숙, 최창익 등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7월 14일에는 태항산에 있던 조선청년연합회 소속 병사들이 하북성에 도착하자, 당일 하북성 섭현에서 김두봉, 박효삼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발족시키고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1942년 11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2. 3.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의용군이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한 동안, 무정은 따로 북조선에 건너왔다. 김일성은 그의 명망과 쉽게 복종하지 않는 태도에 불편해하며 그를 강력한 정적으로 보았다. 무정은 연안에 있던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 단원들의 북조선 귀국 편의를 봐주었다. 경성부에 있던 조선공산당 재건파와 장안파를 모두 인정하지 않던 무정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촉진위원회를 따로 조직하였다. 1945년 11월 평양역에 직접 나가 귀국한 의용군들의 북조선 정착을 지원하였다. 그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비서가 되었다.[29]1945년 10월 21일 소련군 주도로 북조선 내의 군사단체들이 통합, 적위대가 조직되었다. 적위대 간부 연수에서 무정은 와이셔츠를 벗고 총상을 보이며 왜 자신에 대한 선전은 없고 어떤 사람만 선전하느냐고 불평했고, 이는 김일성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술을 폭음하였고, 술에 만취하면 김일성의 이름을 대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아 김일성과 사이가 틀어졌다.
1945년 12월말부터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29] 그러나 조선로동당이 찬탁으로 돌아서자 무정 역시 찬탁으로 돌아섰다.
무정은 의용군과 함께 북한으로 귀환하려 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주둔 북조선 소련군의 방침에 따라 병사들은 무장해제되었고, 그 자신 또한 개인의 입장에서 귀국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로 인해 김일성과 소련군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 무정은 각지에서 김일성과 소련을 비판하는 유세를 벌였다.[9]
2. 3. 1. 해방과 귀국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의용군이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한 동안, 무정은 따로 북조선에 건너왔다. 김일성은 그의 명망과 쉽게 복종하지 않는 태도에 불편해하며 그를 강력한 정적으로 보았다. 무정은 연안에 있던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 단원들의 북조선 귀국 편의를 봐주었다. 경성부에 있던 조선공산당 재건파와 장안파를 모두 인정하지 않던 무정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촉진위원회를 따로 조직하였다. 1945년 11월 평양역에 직접 나가 귀국한 의용군들의 북조선 정착을 지원하였다. 그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비서가 되었다.[29]1945년 10월 21일 소련군 주도로 북조선 내의 군사단체들이 통합, 적위대가 조직되었다. 적위대 간부 연수에서 무정은 와이셔츠를 벗고 총상을 보이며 왜 자신에 대한 선전은 없고 어떤 사람만 선전하느냐고 불평했고, 이는 김일성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술을 폭음하였고, 술에 만취하면 김일성의 이름을 대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아 김일성과 사이가 틀어졌다.
1945년 12월말부터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29] 그러나 조선로동당이 찬탁으로 돌아서자 무정 역시 찬탁으로 돌아섰다.
무정은 의용군과 함께 북한으로 귀환하려 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주둔 북조선 소련군의 방침에 따라 병사들은 무장해제되었고, 그 자신 또한 개인의 입장에서 귀국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로 인해 김일성과 소련군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 무정은 각지에서 김일성과 소련을 비판하는 유세를 벌였다.[9]
2. 3. 2. 인민군 창설에 참여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2월 평양 체류중 서울에서 조직된 민족주의민주전선의 대의원의 한사람으로 추대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그는 친중파로 분류되었으나 간도 문제를 두고 중국과 마찰을 빚었다.[30] 그는 북조선로동당 제2비서가 되었지만 1946년 김일성은 그를 보안간부훈련대대부(保安幹部訓練大隊部)의 포병사령관으로 강등시켰다.[11] 대대본부 총참모장 안길이 병사하자 임시 대리직을 맡게 되었다. 대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김일성과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인 지휘 방침을 세우거나 독단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등 김일성의 미움을 샀다.1947년 5월 10일 김무정은 최용건 그리고 다른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있는 곳에서 김무정은 “만주전쟁에서 조선인 군대가 피흘려 싸운 대가로 조선은 간도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0] 대한민국 통일원에서 발간한 자료에는 1948년부터 북한과 중국 간에 백두산 영유문제로 의견의 차이를 보였다고 적고 있다.[30]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다.[13] 같은 해 9월, 민족보위성 포병지휘국장이 되었다.
2. 3. 3. 북조선 정부수립과 한국전쟁 참전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 인민군 제2지휘소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민족보위성 부상이 되었다.[31] 1948년 4월의 제1차 남북협상에 참가하고, 8월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민족보위성 부상 겸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인민군 제2군단장 자격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32] 춘천 공략 실패로 참모장으로 강등되었다가, 1950년 7월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한국전쟁 때 김광협 소장이 한국군을 제대로 무찌르지 못하자 보직해임된 이후 그 후임으로 제2군단장으로 출전하였다. 제2군단은 한반도 남부까지 진격했으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이루어진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으로 패퇴했다. 1950년 9월 조선인민군이 패퇴하였을 때는 평양지구방위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평양 방어 명령을 어기고,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자에 대한 즉결처분을 행해 군 내부의 분위기를 악화시켜 지위에서 해임을 당하여 군직에 물러나 있다가, 곧 복직되어 전투에 참여했다.[32]
만포시에 있을 무렵, 아는 중국군 병사가 부상을 입자, 야전병원에서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위생부장 이청산에게 치료를 명령했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스스로 총살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제7군단장직에서도 해임되었다[15]. 1950년 12월 21일 북조선노동당 당대회에서 전황 분석과 책임자 추궁이 이루어지자,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지 못한 책임”과 “무법한 살인과 명령 불복종”을 강하게 비판받고 규탄되어 실각했다. 당시 북조선에는 많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무정의 영향력 배제는 김일성에게 중요한 일이었다[16].
2. 3. 4. 해임과 최후
1950년 11월, 낙동강 전투에서 미국 육군에게 패하고 후퇴한 뒤, 김무정은 2군단장에서 해임되고 7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자강도로 갔다. 그러나 자강도 만포를 순찰하던 중 김무정과 친하던 팔로군 출신 전사 한 명이 부상당한 것을 목격했다. 김무정은 즉시 야전병원에 팔로군 출신 전사를 데려가 군의관을 겸하던 평북도인민위원회 위생부장 리청산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그러나 리청산은 바쁘다며 거절했고, 김무정은 위협용으로 총을 쐈다가 리청산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사건으로 김무정은 즉시 보직해임되었다.[33] 1950년 12월 4일 만포군 별오리에서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특별 전원회의에서 패전 책임, 명령 불복종, 전투조직의 불성실, 퇴각 시의 불법 살인 등의 죄목으로 인민군 군사재판에 회부된 뒤 숙청되었다.[33]1951년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펑더화이의 도움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가 중국 인민군 병원에 입원했으나,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김일성에게 귀국을 요청하여 허락받고 귀국하였다.[33] 그해 10월, 조선인민군 39호군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위장병이었으며, 일설에는 숙청되었다는 설도 있다.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33]
3. 사후
김무정의 죽음은 곧 북조선 권력의 한 축이었던 연안파의 몰락을 의미했다. 김무정은 1952년에 병사하자, 그가 이끌던 연안파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숙청으로 궤멸되었다.[34] 이후 김일성의 1인 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화북 지방의 독립 운동에서 무정이 큰 역할을 한 사실과 중국공산당에서의 활약을 기술하여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34] 이에 따르면 무정은 조선 전쟁 이후 비판을 받고 군직에서 사임했으나, 병에 걸리자 특별히 중국에서 치료를 받았고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러졌다.[34] 조선인민군 육군 대장, 민족보위상에 추서되고 국기훈장 1급이 수여되었다. 윤공흠 사건과 8월 종파 사건으로 사후 격하되었다가, 1994년 다시 복권되어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4. 가족 관계
아버지 김기준(金基俊), 어머니 종산(宗山)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동생은 김인동(金仁東)이다. 중국 체류 중 본부인과 이혼하고 중국 여성 등기(腾绮)와 재혼하였으나 1945년 귀국 전 이혼하였다. 등기는 다시 중국인 남성과 재혼하였다. 귀국 후에는 조선인 여성 김영숙과 다시 재혼하였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김정신(金正新)을 얻었으나 1945년 이전에 사망했다. 등기와의 사이에서는 딸 등연려(1943년 ~ ), 아들 등연진(1944년 ~ 1970년)을 두었다. 등연려는 베이징에 거주한다. 둘째 부인 등기의 친정오빠는 등대원(滕代远)이다.
5. 평가
김무정의 사망은 북한 권력의 한 축이었던 연안파의 몰락을 의미한다. 1952년 김무정이 사망한 후, 그가 이끌던 연안파는 1956년 8월의 종파사건과 1958년 최창익 숙청으로 인해 와해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일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무정이 북한 독립운동과 중국 공산당의 업적에 있어 냉혹함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기술하며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11] 이에 따르면, 김무정은 한국 전쟁 후 비판을 받고 군복을 벗었지만, 병이 들자 중국에서 특별히 치료를 받았고 장례식도 거행되었다.[11] 그는 조선인민군 사령관이자 국가경비대 사령관으로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11] 윤공흠의 사망과 8월 종파사건 이후, 1994년에 복권되어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1]
팔로군 내에서는 포술 전문가로 높이 평가받았다.[22]
주영복은 무정에 대해 “강직하고 냉정하여 평소에도 부하들에게 거칠게 대했고, 누구에게나 ‘개새끼’, ‘쓸모없는 놈’, ‘하급 사병’이라고 불렀다. 팔로군에는 ‘상관은 병사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모토가 있지만, 무정은 중국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적고 있다. 또한 그의 고함소리는 옛 일본군의 전지 사령관과 똑같았다고 한다.
유성철은 무정에 대해 전형적인 무인 스타일로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종종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23]
1945년 11월, 조선의용군이 심양에 체류 중 중국 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무정은 측근만 데리고 트럭으로 심양을 피신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무정은 연안파 내에서 인망을 잃게 되었다.
연안에서 활동하던 시절, 방침 차이 등으로 최창익과 대립했고, 중경에서 온 김두봉은 깊이 신뢰하지 않았으며, 박일우와는 중국 공산당의 신임을 다투는 관계였다. 이러한 지도자 간의 관계로 인해 연안파는 결속력이 부족하여 만주파에 패배하고 숙청된 원인으로 여겨진다.
조선의용군 출신 인민군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군 고문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고, 더 나아가 그들 앞에서 자신의 포격술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문들이 보고 있는 현장에서 한쪽 눈을 감고 엄지손가락을 펴서 목표물을 조준한 후 대포를 발사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5. 1. 긍정적 평가
김무정은 항일 무장 투쟁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역임하는 등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무정이 북한 독립운동과 중국 공산당의 업적에 크게 기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무정은 조선인민군 사령관이자 국가경비대 사령관으로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1994년에는 복권되어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5. 2. 부정적 평가
김무정은 강직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부하들에게 거칠게 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3] 주영복은 김무정이 부하들에게 '개새끼', '쓸모없는 놈' 등으로 불렀으며, 이는 팔로군의 모토와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의 고함소리가 옛 일본군 전지 사령관과 같았다고 평가했다. 유성철은 김무정이 전형적인 무인 스타일로 호방했지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단점이 있었다고 말했다.[23]1945년 11월, 조선의용군이 심양에 체류 중 중국 공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김무정은 측근만 데리고 피신하여 연안파 내에서 인망을 잃었다. 연안에서 활동하던 시절, 최창익과 방침 차이로 대립했고, 김두봉을 깊이 신뢰하지 않았으며, 박일우와는 중국 공산당의 신임을 다투는 관계였다. 이러한 지도자 간의 관계는 연안파의 결속력 부족으로 이어져 만주파에 패배하고 숙청된 원인으로 여겨진다.
조선의용군 출신 인민군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무정은 소련군 고문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들 앞에서 자신의 포격술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5. 3. 종합적 평가
김무정은 독립운동과 군사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지만,[23] 권위주의적인 성격과 독단적인 행동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23] 그의 삶은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개인의 영웅적 면모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김무정은 팔로군 내에서 포술 전문가로 높이 평가받았다.[22] 조선의용군 출신 인민군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소련군 고문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고, 더 나아가 그들 앞에서 자신의 포격술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문들이 보는 앞에서 한쪽 눈을 감고 엄지손가락으로 목표물을 조준한 후 대포를 발사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유성철은 김무정이 전형적인 무인 스타일로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종종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한다.[23] 주영복은 김무정에 대해 "강직하고 냉정하여 평소에도 부하들에게 거칠게 대했고, 누구에게나 '개새끼', '쓸모없는 놈', '하급 사병'이라고 불렀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의 고함소리가 옛 일본군의 전지 사령관과 똑같았다고 한다.
1945년 11월, 조선의용군이 심양에 체류 중 중국 공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김무정은 측근만 데리고 트럭으로 심양을 피신하여 연안파 내에서 인망을 잃기도 했다. 연안에서 활동하던 시절, 최창익과 방침 차이로 대립했고, 김두봉은 깊이 신뢰하지 않았으며, 박일우와는 중국 공산당의 신임을 다투는 관계였다. 이러한 지도자 간의 관계로 인해 연안파는 결속력이 부족하여 만주파에 패배하고 숙청된 원인으로 여겨진다.
김무정의 사망은 북한 권력의 한 축이었던 연안파의 몰락을 의미한다. 1952년 김무정이 사망한 후, 그가 이끌던 연안파는 1956년 8월의 종파사건과 1958년 최창익 숙청으로 인해 와해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일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무정이 북한 독립운동과 중국 공산당의 업적에 있어 냉혹함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기술하며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김무정은 조선인민군 사령관이자 국가경비대 사령관으로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윤공흠의 사망과 8월 종파사건 이후, 1994년에 복권되어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6. 수상 경력
- 국기훈장 1급(1952.10.)
7. 무정을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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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77)—연안에 모인 조선혁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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